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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3년(2023)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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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제15회 대순문예공모전 심사평 가을! 길[道]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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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대순문예공모전 심사평


가을! 길[道]을 잇다



문학 박사 신유식(대진대 교수)




심사과정
  9월 초 작품 80편을 받았다. 대진고등학교 김곤선 선생님, 대진여자고등학교 성진경 선생님과 같이 심사를 진행했다. 1차 모임은 교무부 담당자 안내로 9월 11일 심사에 유의점을 전달받았다. 2차 심사는 9월 18일 압축된 운문 13편, 산문 15편을 가지고 진행했다. 3차 심사는 9월 26일에 최종 시상 순위를 선정했다. 3년의 코로나를 겪고 난 작품들이라 작년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도 보였다.


▲ 시상식 행사에서 심사 소감을 발표 중인 김곤선 심사위원과 성진경 심사위원(좌), 신유식 심사위원장(우)



15회 ‘대순문예’의 특징
  심사하는 날은 공교롭게 모두 초가을 안개가 가득한 날들이었다. 안개는 보이는 세계를 모조리 감추는 특징을 지닌다. 게다가 담담해서 그윽한 향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자욱하게 이리저리 흘러가는데 그림자가 없다. 형태도 없는 아득한 분위기는 묘하게 그 경계를 나름대로 상상하게 만든다.
  15회 ‘대순문예’ 작품에는 운문과 산문의 경계가 모호한 안개 같은 작품들이 다른 해보다 유독 많은 점이 특징이다. 팬데믹 3년을 경험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전염병이 지나고 모든 것이 확연하고 맑고 밝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전염병 대신 기후 위기가 여전히 일상을 안개처럼 불안하게 위협하고 있다. 그뿐인가, 사회적으로 잔혹한 범죄가 공개된 도로에서 자행되고 마치 새로운 전염병처럼 ‘살인 예고’가 온라인으로 번지는 불안한 시기에 살고 있다. 결국 팬데믹 현상은 다른 형태로 지속되어 현실의 경계가 불명확하다. 이런 경계 없는 안개 같은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불안(Angst)’은 황폐한 삶에서 오는 공포나 절망이 아니라, 현존재의 실존적인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된다. 불안 시대에 감지되고 있는 공포와 붕괴한 내면, 사라진 사회적 신뢰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15회 ‘대순문예’는 이를 극복하려는 내적 고백을 통한 신앙적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았다.



○ 총평
  시의 언어는 어떠해야 할까? 시어는 리듬을 가져야 한다. 시를 쓰는 사람들의 공통된 가장 큰 고민이 리듬이다. 운과 율이 언어에 본질적으로 새겨져 있는 시어가 쉽게 드러나면 좋지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산문 아닌 언어여야 한다. 이게 가능할까? 그러니 결국 시인은 이 모순된 요구를 다양한 리듬으로 해결한다. 낱낱의 시어들이 현실과 언어 사이에서 상응 관계를 맺게 해야 한다. 그래서 시의 리듬은 작품마다 다르며 형식적인 반복이 아니라 내용적인 변주로 시를 짓는 경우가 많다. 내용적 변주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 모두 함께 웃어요! 활~짝



  그런 면에서 「알곡」은 내용적 변주에서 성공한 작품이다. 이에 비해 「그림자」는 ‘어둠’과 ‘밝음’이라는 대조를 사용한 점에서 특이했다. 다만, 다듬어지지 않은 시어가 거슬렸다. 「가을산」은 시인이 만들어 낸 고유명사다. 특유한 은유로 「가을산」을 표현했다. 누가 뭐래도 시는 비유를 통해서 말한다.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다. ‘실제’와 ‘이미지’의 만남이 위태롭게 처리되어 있다.


 
  산문(散文)은 문자적 그대로 해석하면 ‘흩어놓은 글’이다. 글자 수나 음악적 효과를 먼저 고려하지 않는다. 형식 요건을 규범화하지 않은 것은 생각과 감정을 정해진 틀에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에는 그 나름대로 글쓰기 규칙이나 산문체의 양식이 존재한다. 결코 ‘흩어놓는다’라는 것은 그냥 ‘풀어버린다’라는 뜻이 아니다. 산문은 확산성과 통합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는 문학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자. 시는 굳이 자신의 느낌, 감정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그 정서를 강렬하게 보여주면 된다. 그러나 산문인 경우는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증명해야 한다. 산문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당면한 현실과 치열한 대결이고, 엄정한 현실과 대화의 산물이다. 스스로가 겪은 경험이나 느낌을 부단한 자기성찰과 비판의식, 치밀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산문 문장은 정합성이 필수적이다. 더불어 글쓴이의 합리적 사고는 당연하게 요구된다. 그래야 독자들에게 정당성과 설득력이 있다. 이런 산문은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15회 ‘대순문예’에서 산문에 많은 응모작이 들어왔다. 그만큼 할 이야기들이 많은 시절이다. 코로나로 인해 자신의 은밀한 내면의 이야기를 담아내기도 하고, 많은 독서와 영화 등을 통해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피노키오 연필 한 자루」는 소재의 제재화에 성공한 작품이다. 작품이 전달하는 내용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응축시켰다. 「빨간 세상의 아이」는 공간을 통해 상상력을 충분히 뒷받침 한 점이 좋았다. 「중독에서 벗어나서 나를 찾다」에서는 자신이 체험한 일들을 진솔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좋았다.



○ 운문
  시의 언어가 변주를 통해 주제로 향한다는 점에서 「알곡」은 시어의 선택에서 특이한 면이 있다. 「알곡」은 텍스트다. 「알곡」에서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면적 읽기보다는 변주를 통한 해석하기가 가능한 시이다. 해석하기는 자극을 받는 일도 아니다. 시어와 상황이 대구를 이룬다. 일상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알곡」이 입체적으로 읽히며 주제의 변주로 리듬을 통해 주제에 다가가게 해서 쉽게 읽히게 한다.
  「알곡」을 읽으면 곧 가을이 온다. 읽다 보면 단 한 번의 사건인 사랑도 결국은 잘 ‘익은’ 알곡이다. ‘칠정’은 온전히 그들만의 이야기이다. 단숨에 그들을 사로잡았다가 불현듯 떠나간다. 그러다가 죽음과 맞닿는다. 삶의 모든 순간에 마주하는 죽음들을 영원히 존재할 이야기들로 응축시킨 ‘살 터의 궤적’은 다채로운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알곡」이 만들어지는 농토의 현장성이 살아있다. 그곳의 물질성이 시인의 사상과 만나 상징적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물질적 상상력의 시야말로 체험이 뒷받침되지 않은 진리 선포의 관념성이 왜 시가 되지 못하는가를 충실히 증언한다고 할 것이다. 다른 시의 귀감이 된 듯하여 당선작으로 뽑았다.



  「그림자」는 저녁 길의 어둠과 달의 밝음으로 시를 이루고 있다. 그림자 있는 존재와 그림자 없는 존재가 대조를 이룬다. 대조들이 모여 리듬을 만든다. 각 연 사이에 예상치 못한 관계가 맺어진다. 그러면 시는 입체적으로 해석된다. 사람도 그렇다. 노숙한 지혜와 천진한 심성이 호응할 때, 그냥 노숙한 사람이나 천진한 사람보다 입체적으로 보인다. ‘흔들리는’이라는 말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늘’이라는 말과 호응하기에 시는 순간 입체적으로 표현된다. ‘그림자’ 혹은 ‘흔들리는’이라는 말은 ‘우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달빛을 받고’ 있는 딸은 알지 못하지만, 시적 자아는 자신이 ‘달빛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인지하고 있다. 이 점이 다르다. 자신이 보이지 않는 달빛을 받고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달빛’은 순간, 자신의 ‘하늘’이 되고, 마침내 자신은 외로운 상태에서 벗어난다. 우리는 모두 삶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매 순간 살아간다. 그렇게 어둠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흔들리는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늘은 자신의 그림자를 가지지 않는다. ‘神’은 언어로 구축된 세계의 너머에 있다. 혹은 우주 전체를 지탱해 주는 이름이다. 그것은 지식의 깊은 바다이며, 알려져 있는지도 알 수도 없는 존재인 무지다. 그게 하늘이고 신이다. 우주조차 그 안에서 스러져 버리는 ‘하늘’ 아래,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춤추며 노래하며 딸과의 아름다운 한때를 보낸다. 즉, 누리며 살아간다. 하늘, 어느 진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보이지 않는가! 다만 다듬어지지 않은 시어들이 거슬린 면이 아쉽다. 시를 빚는 솜씨도 그럴듯하여 망설이지 않고 당선작으로 선하다.



  「가을산」의 은유는 특별하다. 시는 비유를 통해서 말한다.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라 시가 세상을 초대하는 방법이다. 서로 다른 대상들이 비유를 통해서 한자리에서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서 대상들은 대화적인 관계에 들어간다. 우리가 흔히 보조관념이라 부르는 것은 이런 ‘세계의 나타남’ 내지 ‘이미지로서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은유를 ‘metaphor(메타포)’라 말한다. ‘옮겨서 실어 나른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은유는 하나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옮겨 놓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은유는 다른 명사를 다른 명사로 옮기는 이삿짐 트럭이다. 결국 시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기술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는 간신히 존재하는 것, 기미나 징조만으로 살아가는 것의 친구이기도 하다. ‘가을산’이라는 은유를 통해 얼핏 인생의 고달픔을 스치듯 가볍게 은유로 처리하고 위태롭게 긴장을 불러온다. 생명의 태동과 살아감과 그리고 삶 이후까지 가을 산에 안겨 있는 모습을 믿음직스럽게 노래한 시를 만나 참으로 감사하고 반갑다.



  「길을 닦는다는 것」에서 ‘길’은 재현이나 묘사의 대상이 아니다. 시는 뒤섞이고 혼합된 시점들 속에서, 끊임없이 시점을 지워가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고정하기를 거부한다. ‘수도(修道)’를 ‘수도(水道)’에 비유하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유희로 재치 있는 표현을 하였다. 단지 말장난으로 그치지 않고 ‘수도(修道)’의 필수 불가결성과 그에 임하는 자세를 성찰하고 있다. 또한 ‘길’은 한 실체로서 고정되어 직접 드러나지도 지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하는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경험될 뿐이다. 다만 시적 형상화가 충분하지 못한 날것의 관념성이 드러난다.



○ 산문
  응모작 중 산문의 정합성과 확산성으로 성공한 작품이 보였다. 소재(素材)의 제재화(題材化)가 일어나고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수필은 「피노키오 연필 한 자루」 단 한 편이었다. 자연적 경험 속에 등장한 ‘피노키오 연필’에 주제적 의도를 싣는 솜씨는 일정한 수준에 들어섰다. ‘피노키오 연필’이라는 제재가 아버지의 존재론적ㆍ실존적 허기를 채우는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아버지의 잔소리를 꺼리기도 하는 서술자가 아버지를 진정으로 생각하면서 아버지와 동반(同伴)해 가는 과정이 제재 속에 결정(結晶)으로 응축되었다. 쓸데없이 늘어지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도 미덕으로 작용하였다. 수필의 맛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으로 망설임 없이 최우수상으로 민다.



  「빨간 세상의 아이」는 과거 회상과 현재를 적절하게 안배한 작품이다. 산문에서 시간을 표시할 때 주로 시제에 기댄다. 일련의 시간이 “∼했다”로 정돈되면 독자는 이야기가 ‘전개된다’라고 생각한다. ‘고향’이라는 공간을 통해 ‘장소의 기억’ 만들기를 절묘하게 서사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고향’은 현재의 삶을 과거의 시간과 연결하고 과거의 일들을 현재로 끌어와 회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공간을 통해 확대되어 자신의 정신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정합성을 가지고 서술되고 있다. 다채로운 기억들은 자기 삶에 내재하는 심오한 존재론적 의미와도 맞닿게 했다. 이와 같은 산문의 서사적 성취는 신앙적인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자기 상상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중독에서 벗어나서 나를 찾다」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처럼 ‘중독’은 사람을 수척하게 한다. 현대 인간을 ‘호모 아딕투스(Homo addictus)’라고 하여 ‘중독되는 인간’이라고 지칭한다. 현대인은 중독되어 가고 있다. 중독이 안 되면 현대인이 아닐 정도다. 그러니 중독되면 자신이 모순적인 사람이었던가? 하고 질문을 던질 만하다. 그러나 중독된 인간은 처참하고 수척하다. 울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지만 정작 눈물은 잘 흘리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엉뚱하고, 예기치 않게 변화는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중독된 그가 운명처럼 선택한 것은 기도였다.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중독된 마음이 무너지고 있음을 체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체험은 중독된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진솔하게 전달해 준다는 점에서 산문의 효용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미 중독 세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을 마치며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 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감추어져 있다. 사람에게도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는 마음에 있고 그것을 보려면 마음으로 느끼고 보아야 한다. 세상을 창조하고 보니 너무 아름답다고 했다. 인간의 삶은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그리워하며 되찾으려 하는 심미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심미적 역사는 문장을 다루는 일이다. 천하의 일 중에 빈천과 부귀를 가지고 그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가을이 시작되는 저녁에 아름다운 마음을 문장으로 전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드린다. 글이란 “눈이 있는 사람은 보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가려버릴 수도 없다”라는 구양수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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