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느낀 도의 소중함
잠실37 방면 교무 윤정욱
대학교 1학년 때 대학 선배를 만나 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인간관계로 많이 지쳐 있었고 마음도 피폐해져 있었기 때문에 선배가 도를 전해주었을 때 저에게 너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입도치성을 모셨습니다. 처음 도를 접했을 때는 즐겁고 신기했습니다. 교화를 듣고 기도를 모시면 마음이 편해졌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수도를 할수록 제 마음속에 있던 상처와 겁액이 드러나면서 선각과 사이가 안 좋아졌습니다. 포덕이 생각처럼 안 되고 후각이 안 나오자 괜히 선각을 원망하기도 하고, 힘들어지면 불평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놀고 싶은 생각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서 너무 답답했습니다. 종종 아무 말도 없이 포덕소에 가지 않기도 하고 선각의 연락을 받지 않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저의 마음은 편치 않았고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도 참지 못하는 제가 과연 수도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자책이 들며 점점 지쳐갔습니다. 그러다가 입대를 핑계로 도망치듯이 고향에 왔습니다. 선각은 저에게 입대 전까지 서울에 남아 수도를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하였지만, 이미 지치고 자존감이 떨어진 저는 더 이상의 마음고생을 하고 싶지 않아 내려가겠다고 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온 뒤로는 가끔 도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수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에 대한 믿음도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고향에 있으면서 그동안 뒤로 미루어 놨던 일들을 하고, 가고 싶었던 곳을 여행도 다니며 너무 좋았습니다. 또한 포덕소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역시 편했습니다. 저는 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어서 하루하루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집안에 크고 작은 일들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안 식구들이 친가에 모였을 때였습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사이에 작은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이때 할머니께서는 큰아버지만 두둔하셨습니다. 평소에도 집안일들이 큰아버지 위주로 돌아가고 불합리한 일들에 참고 지내셨던 아버지는 큰아버지 편만 드시는 할머니로 인해 그동안 참았던 감정이 폭발했습니다. 작은 말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로 아버지는 작은 일에도 심하게 화를 내며 굉장히 예민해지셨습니다. 또한, 술을 많이 드시고 실수하고도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 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와 싸우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단 하루 만에 감정적으로 바뀐 아버지를 어머니는 감당하기 힘들어하셨고 각방을 쓰실 정도로 부모님의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부모님의 계속되는 싸움에 지친 동생은 서둘러 입대했고, 집안의 불화는 오롯이 저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큰 소리가 오가고 부모님의 사이를 계속 중재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저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또 다른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외삼촌이 일하던 공장에 큰 화재가 일어났는데 외삼촌이 화재를 진압하다가 전신화상을 입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외삼촌이 걱정되셨던 어머니는 당장에라도 병원에 가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가게가 바빠 일을 빼기도 어렵고, 어머니도 몸이 좋지 않으셔서 서울에 올라가는 것이 무리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성을 모시러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던 제가 어머니 대신 면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중환자실에 계신 외삼촌 상황은 제가 생각했던 이상으로 너무나도 참혹했습니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화상이었습니다. 한때는 야구선수를 준비할 정도로 건장한 분이었는데 부축받아야만 겨우 걸음을 옮길 정도로 심하게 다친 모습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왠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집안에 계속해서 일이 생기니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내가 포덕소에 다니며 수도를 하고 있을 때는 이 정도로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많은 일들이 생기는 걸까?’ 그 순간 불현듯 선각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도인은 집안의 대표로 수도를 하고 있어서 도를 열심히 닦으면 집에 우환이 적게 생기거나 생기지 않는단다. 네가 힘든 이유 중의 하나도 집안의 겁액을 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야.” 당시에는 집안에 아무 일도 없었고 보이는 것만 믿는 저였기에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이 생기고 보니 집안의 겁액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말 집안의 겁액을 풀어나가고 있었구나. 만약 내가 지금 수도를 하고 있었다면 삼촌이 크게 다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반성이 되었습니다. 수도를 소홀히 했던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삼촌에게도 미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후에도 겁액이란 이렇게 풀어가는 것이구나 하고 실감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사회복무요원으로 장애아동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한 아이가 문제를 일으켜서 그 아이를 주의 깊게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또 한 번 심하게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평소에도 선생님들을 자주 때리곤 하는 아이였지만 그날은 유독 심하게 저를 때렸고 도저히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했지만, 외삼촌의 일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아이에게 맞으면서도 문득 박공우 종도의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상제께서 천원(川原)장에서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큰 돌에 맞아 가슴뼈가 상하여 수십일 동안 치료를 받으며 크게 고통하는 공우를 보시고 가라사대 “너도 전에 남의 가슴을 쳐서 사경에 이르게 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생각하여 뉘우치라. 또 네가 완쾌된 후에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생각하나 네가 전에 상해한 자가 이제 너에게 상해를 입힌 측에 붙어 갚는 것이니 오히려 그만하기 다행이라. 네 마음을 스스로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 그러면 곧 나으리라. ” (교법 3장 12절)
제가 그 순간 맞고 있는 것도 어떤 연고가 있어서 겪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억지로 제지하지 않고 진정될 때까지 꼭 안아주었습니다. 안고 있는 와중에도 아이는 저를 계속 때렸지만 그래도 신경 쓰지 않고 진정할 수 있도록 달랬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맞고 있던 순간에 치매가 있으셨던 외할아버지께서 콘센트에 연결된 전선을 가위로 자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칫하면 할아버지께서 감전을 당할뻔한 일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 아이에게 맞지 않고 혼을 냈다면 할아버지가 과연 무사하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두 사건이 벌어진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짜 내가 집안의 겁액을 풀고 있었구나. 내가 포덕소에 다니면서 수도를 하는 동안 집안에 큰일이 없었던 것도 내가 까닭 없이 힘들었던 것도 모두 집안의 겁액을 감당해서 풀고 있었기 때문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도에 대한 ‘감사함’이 제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고향에 내려가 여러 일들을 경험하면서 여태껏 수도를 소홀히 했던 저 자신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를 잘 믿지 못하고 방황했던 저였지만 이렇게 눈으로 집안의 겁액을 풀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 도가 정말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다시 서울에 올라와 도를 닦고 있습니다. 방황할 때 깨달았던 것들을 발판 삼아 열심히 수도를 하고 있습니다. 힘들 때도 있지만 고향에서 있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힘든 수도를 버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모든 일이 무위이화로 풀려나가는 것이 상제님의 덕화인 것을 느낍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하루하루 고생하면서 수도하는 것이 집안의 겁액을 풀어나가는 길이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묵묵히 이끌어 주신 선각과 매 순간 덕화를 베풀어 주시는 상제님께 감사함을 잊지 않고 앞으로도 열심히 수도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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