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문예 : 산문 특별상
단청! 나의 수도
영덕1 방면 선감 황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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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여 년이 흐른, 오래전 단청작업에 참여했던 기억의 실타래를 조심스레 한 올씩 풀어보려 한다. 단청에 대해서는 《대순회보》 114호 「단청」에 설명이 잘 되어있다. 나는 단청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참여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젊었던 시절이라 기억의 오류가 적다고 믿고 글을 쓴다. 여리고 부족한 나이지만 도전님의 기운을 받아서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만도 감사해 글을 남기게 되었다.
1990년에 여주본부도장 단청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지금의 봉강전이 영대였다. 대순회관이 완공되고 나서 5층에 상급 임원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도전님께서 “우리가 새로 영대를 지었으니 단청을 해야 하는데, 중학교 졸업 이상 미술에 소질이 있는 사람은 왼편으로 나와봐요”라고 하셨다. 나는 학창 시절에 미술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수도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나갔다. 이때 기억으로 백여 명 정도가 나온 것 같았다. 도전님께서 보시고는 “다 들어가요”라고 하셨다. 다음에 “영대의 단청을 하기 위해서 알아보니 전국에 단청회사가 13군데(기억이 정확하지는 않다)가 있는데 전 기술자를 다 붙여도 5년이 걸린다. 우리가 5년이나 걸려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전 임원이 정성을 들여서 해야겠다”라고 말씀하셔서 전체 내수 임원은 단청을, 외수 임원들은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단청작업을 들어가기 전에 단청할 임원 중 각 방면에서 4명씩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내정 마당에 수십 명이 모였다. 스티로폼을 깔고 앉았는데 도전님께서 샘플에 색을 칠해보라고 하셨다. 떨리는 손으로 조금씩 조금씩 정성스럽게 칠을 했다. 그런데 도전님께서 우리가 하는 걸 보시더니 “그렇게 해서 언제 다 해?” 하고 웃으시면서 붓을 드셨다. 인자하신 아버지가 사랑스러운 자식에게 가르치듯 붓 쥐는 방법을 알려주시곤 붓 대롱을 살살 돌리시면서 큰 원 모양으로 뺑 돌리셨다. 단번에 골뱅이 하나가 완성됐다. 단청에는 하엽(진녹색) 골뱅이가 아주 많다. 한 바퀴를 돌리시니 한번 만에 되는 것을, 우리는 조심스럽게 떨면서 조금씩 칠을 하니 더딜 수밖에 없었다. 도전님께 배운 방법을 그대로 용기를 내서 단청을 시작했다. 단청할 때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주라고 이렇게 가르쳐 주신 것 같았다. 후에 상급 임원 전체가 단청을 시작하라고 명을 하셔서, 전체 임원들이 조를 편성해서 단청을 시작하게 되었다. 방면별로 조를 편성하고 조장을 뽑아서 조별로 필요한 물감과 대ㆍ중ㆍ소의 붓이며 나무막대, 붓 씻는 물통 등 자재를 받아와서 나눠 받았다. 각자는 앞치마를 두르고, 토시를 하고, 붓을 쥔 팔이 흔들릴까 봐 고정하는 나무막대를 하나씩 쥐고 단청작업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영대 외부 처마 밑 서까래와 그 아랫부분 벽에 머리초와 금초를 하는데 우리 방면은 영대 왼쪽 끝 기와가 올라가는 부분을 맡았다. 서까래가 둥글다 보니 높낮이도 다르고, 서까래와 서까래 사이도 밖으로 나갈수록 간격 폭이 벌어졌다. 그러다 보니 시선을 두기 애매한 부분이 많고 몸을 뒤틀어야 겨우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서까래에 금초가 있어 둥근 윗부분에 양쪽으로 먹선과 흰 선을 그어야 한다. 둥근 윗부분을 하다 보면 붓이 서까래 사이에 끼여서 주위 그림을 버려놓을 때가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색을 다시 칠해야 하는데, 이럴 때마다 죄송스러웠다. 이렇게 물감 컵을 실에 꿰어서 목에 걸고, 왼손은 자를 잡고, 오른손은 붓을 잡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온종일 선 채로 하는 작업이 너무나 힘이 들어서 자신감이 점점 없어졌다. 어릴 때부터 체질이 병약해서 모든 일을 남들처럼 잘하지 못했다. 단청작업이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해야 하는 작업이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마음은 가득한데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단청 3일째 되는 날 작업하러 올라가는데 도전님께서 청계탑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계셨다. 그 순간 심고를 드렸다. ‘도전님! 저는 너무 힘이 들어서 남들처럼 하지를 못하겠습니다! 더 많이 더 잘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조별로 하는데 제가 못하면 우리 조가 늦어지니까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니 남들만큼이라도 하게 해 주십시요!’ 간절히 간절히 심고 드리면서 올라가는데 몸이 약한 나에 대한 서러운 울음이 가슴속에서 북받쳐 올라왔다. 꾹꾹 누르면서 참고 있다가 작업 자리로 올라가는 발판에 오르자마자 터져버렸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울음을 죽여가며 작업 자리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새롭게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도전님께서 나의 간절한 심고를 들으시고 기운을 주셨다고 믿는다. 차차 조원들과 같이 보조를 맞출 수가 있어서 너무나 감사했다. 전체 임원 모두 단청이 처음이다 보니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모든 임원이 지극 정성으로 임했다. 붓을 쥔 손에 정성이 극한으로 담겨있었다. 한 사람이 한 가지 색을 칠하는데, 집중하다 보니 다른 색이 들어가는 자리에 넘어가기도 했다. 그러면 옆에서 한 소리 한다. “왜 여기에 칠해 놨어요?” “누가 그랬어요?” 일심으로 집중해서 칠을 하고 있는데 그 순간 누군가 지나가면서 툭 건드리면 “아! 좀 살살 다니세요!” 또 누가 지나가다가 물감이라도 건드리면 그대로 쏟아져 버린다. “어쩌나! 물감이 쏟아져 버렸네. 잘 좀 보고 다니세요!” 이렇게 원망 섞인 소리가 종종 들렸다. 그러던 중 도전님의 훈시 말씀이 있었다. “지금 이 시간부터는 절대 누구를 원망하지 말고 단청을 하세요.” 이후로는 일체 원망 섞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옆 사람이 잘못해 놔도 말없이 고치고, 누가 지나가는 소리가 나면 자동으로 붓을 떼고 기다렸다가 가고 나면 하고, 저절로 물감통을 치워주게 되고…. ‘이것이 해원상생이구나!’ 도전님께서 말없이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르쳐주셨다. 많은 임원이 단청하는데도 분위기가 조용했다. 작업이 끝나면 남은 물감을 다 버리고 물감 그릇을 깨끗하게 씻었다. 하루의 마무리도 정성스럽게 한다고 신경을 쓴 것인데, 나중에 쓰고 남은 물감을 재활용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더욱이 단청에 드는 물감 값을 알고 나서는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며칠간 버린 물감이 너무 아까웠다. 도인들의 정성금으로 마련한 것을…. 너무 죄송스러웠다. 단청 자재는 외수들이 관리했는데, 그 안에 물감도 포함되어 있다. 단청 자재 창고에서는 단청에 맞는 색을 내야 한다고 덩어리로 되어있는 물감을 막대기로 으깨고 있었는데, 납작한 나무막대에 색을 칠해보며 색을 맞췄다.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도전님의 지시대로만 하면 꼭 맞는 색깔이 나온다고 신기하다고 외수들이 말해줬다. 임원들의 정성은 대단했다. 정말로 신명께서 임원들에게 응하여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조별로 마무리하다 보니 색칠은 다 되는데 마무리하는 선이 걱정되어 도전님께 여쭈었더니 “선조(선만 긋는 조)를 만들어서 하면 돼”라고 하셨다. 그래서 선조를 뽑았는데, 선만 긋는 일은 혼자 다녀야 하고, 각 조에서처럼 앉아서 할 수도 없고, 또 선 그은 만큼 위치를 옮겨야 하고, 하루 종일 걸으니 힘이 들어서 누구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쁘게 칠해놓은 단청이 선으로 마무리되기에 선 긋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그러다 나를 보고 선조의 조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단청의 진행 상황도 살피고, 선조의 임원들도 챙기고, 자재도 챙기는 등의 부탁을 했다. 단청작업 처음부터 선 긋는 일을 해서 나를 조장으로 지목한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서 요청을 받아들였다. 책임감이 커지다 보니 작업의 순서나 상태가 눈에 더 잘 보이게 되었다. 막상 선조를 맡아보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색조가 일을 끝내고 이동하면 선조가 들어가 선을 긋고, 그중에 색이 빠진 곳을 발견하면 색도 채워 넣었다. 가끔 타분 종이가 짧아서 그림이 끊어지는 일도 있었는데, 빠진 부분을 연필로 그려서 그림을 채워 넣는 일도 했다. 그러다 보니 며칠에 한번씩 야간 작업을 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이렇게 해야 전체 작업속도를 맞춰갈 수 있었다. 선조를 하며 하나 깨달은 건 붓의 각도가 달라지면 선의 굵기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숨을 참고 그어야 선의 굵기가 일정하다. 수도하는 과정에서 일심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 같다. 지금은 영대에서 배례하고 감히 죄송스러워 고개 들어 쳐다보지도 못하지만, 영대 내부 작업을 할 때는 아시바(비계: 飛階)를 여러 층으로 설치해 가까이에서 작업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조심스러워서 일을 빨리할 수 없었다. 영대 내부에는 굵은 선을 그을 곳이 많았는데, 바닥에 붉은 다자 선을 그을 때 붓을 든 사람은 누워 있고, 옆 사람이 물감을 붓에 찍어줘야 하며, 곧게 그을 수 있게 두 사람이 자를 잡아줘야 했었다. 붓에 힘을 많이 주면 물감이 얼굴에 떨어지고, 너무 적게 주면 선의 굵기가 안 나온다. 이렇게 한 줄을 긋는 데 30분가량 걸렸으니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가고 조심스러웠겠는가. 이때 임원들의 지극한 정성은 하늘에 닿았다고 생각한다. 신명이 응해서 일을 이루게 해 주셨지, 어찌 우리가 했다고 감히 생각할 수가 있을까. ‘이 자리가 천지신명을 모시는 영대인데 감히 내가 영대에서 단청을 하다니. 꿈에도 상상도 못 할 일을 내가 지금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생각이 더 나는데, 영대 올라가는 양쪽 계단 벽에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소나무, 학 등이 그려질 때 너무 좋아서 일도 안 하고 정신 놓고 바라보다가 혼이 난 적 있다. 그리고 작업 때 하루에 참이 두 번 나왔다. 여러 방면에서 정성스럽게 올려주신 고급스럽고 맛있는 먹거리들이었는데, 조장들이 각자 챙겨 조원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선조들은 흩어져 작업을 해서 다른 조에 양해를 구하고 같이 참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정심원을 단청할 당시에는 건물의 이름이 정해지지 않아 정심원을 앞동이라 불렀고, 시학원을 우동, 시법원을 좌동이라 불렀다. 건물마다 작은 방이 한두 개씩 있어서 무슨 방인지 궁금했으나 아는 임원이 한 명도 없었다. 1991년 하지치성을 모신 후부터 시학공부가 돌아가니 단청할 당시 궁금했던 그 방들이 공부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도 공부에 들어가 천정을 보면 그때의 모습들이 생생하다. 참배객들이 와서 임원들이 단청하는 모습을 보고 탄복을 하던 때도 있었다. 연세가 드신 임원들이 높은 곳에서 붓을 들고 단청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수도의 힘이구나!’를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설마 금(金) 단청은 기술자들이 하겠지’라고 생각했으나 모두 임원이 하는 걸 알고는 입이 딱 벌어졌다. 정심원의 아시바가 제일 먼저 철거되고 아름다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당시 단청책임자가 나를 붙들고 “우리가 해냈어” 하면서 눈물을 훔쳤던 기억도 있다. 정성은 끊임없이 밤낮으로 이어졌다. “몇 시까지 아시바를 떼야 합니다”라는 외수들의 외침이 “도수에 맞춰야 합니다”로 들릴 정도로 신경을 쏟았다. 이렇게 6개월 정도를 하고 나니 도전님께서 임원들에게 지방에 잠시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도장에 남아 작업을 하는 임원이 많았다. 나도 남아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작업을 하러 자양당 앞을 지날 때 도전님을 뵙게 되어서 인사를 드리니 도전님께서 “안 나가도 돼?”라고 물으셨다. “네! 안 가도 됩니다”라고 말씀드리니 옆의 임원을 돌아보시며 “하하, 안 가도 된대”라고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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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본부도장 정심원 (2023년 5월 촬영)
단청이 어느 정도 되어가면 서까래 아래에 신장과 불(佛)을 그리는데, “신장(또는 불)을 모시러 오세요!”라고 외치면 각 조에서 하던 일을 중단하고 우르르 몰려갔다. 신장을 모실 때는 조와 상관없이 모셨다. 신장은 한 사람이 필요한 물감을 모두 챙겨 완성해야 한다. 발아래에 구름이 있는 신장은 날아다니는 분이고, 그냥 서서 계시면 걸어 다니는 신장이라고 들었다. 하루는 누가 서 계시는 신장께서 어지러워하신다고 빨리 땅을 만들어드려야 한다고 해서 얼른 가 신장 발밑에 굵은 먹선을 그은 적 있다. 신장 모습이 완성되면, 눈이 본인들 눈처럼 생겼다고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어느 날 갑자기 봉심이 있다고 씻지 말고 한복만 갈아입고 올라가라는 명이 있었다. 작업을 하다 보면 머리도 여기저기 비계에 걸려서 흩어지고, 물감 묻은 얼굴, 손 등등, 본능적으로 씻고 올라가고 싶었지만 이때 나는 겉모습보다는 마음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깊이 생각했다. 본전 외부 단청이 끝나고 아시바가 모두 철거됐다. 아~! 드디어 모든 임원의 정성으로 본전 영대의 모습이 지상에 드러났다! 이때의 감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며칠 뒤에 올라갔을 때 영대 가운데에 다시 아시바가 설치되어 있고, 2층 가운데 3m가량이 양록으로 지워진 모습이 보였다. 도전님께서 보시면서 뭔가를 지시하시고 계셨다. 타분이 다시 쳐지고 새로 단청했다. 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문양이나 색상이 전체의 조화로움에서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어 수정하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도 수도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도인들과 화합해야 함을 생각했다. 단청작업이 마무리될 무렵 단청책임자가 나보고 “서울서 부산까지 그었겠죠? 하하”라며 웃음 지었다. 정말 많고 많은 선을 그은 것 같다. 포천수도장에서도 단청을 했다. 부름이 계셔 도착하니 전체 건물에 아시바가 설치되어 있었다. 아시바 공사를 할 때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몇 군데 만들어 놓으면 다니기 좋은데, 그 계단이 없었다. 그래서 2층에서 3층을 가려면 바닥으로 내려와 다시 3층으로, 3층에서 4층을 갈려면 또 바닥으로 내려와 다시 4층으로, 선조들은 온종일 걸어 다녀야 하는데 이때 다리가 많은 공을 쌓았다. 포천수도장은 여주본부도장보다 빠르게 단청이 진행되었다. 아시바를 전체에 다 매어놓으니 동시에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중간 임원들도 많이 동원되었다. 급하게 투입되다 보니 여주본부도장에서 경험을 얻은 상급 임원들이 중간 임원들을 가르쳐가면서 작업했다. 선사, 교정들은 단청에 무지한 상태로 현장에 바로 들어오니 감을 잡지 못했다. 우리 선조에서도 중간 임원 열 몇 명이 배치돼서 가르쳐보니 차분히 잘 따라 하는 조원과 그렇지 못한 조원이 있었다. 감사히 생각하고 잘하려고 정성스러운 마음을 내고 노력을 하는 사람과 잘 모르니 헷갈려서 짜증 내고 일을 안 하는 사람이 표가 났다. 이런 사람은 다음날 인원 파악을 하면 집에 가고 없었다. 수도 과정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하늘이 주신 이 좋은 기회를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종각 난간을 단청할 때 손이 닿지 않았는지 선을 긋던 한 분이 빈 페인트통 두 개를 포개 그 위에서 선을 긋고 있었는데, 도전님께서 보시고는 외수 임원 두 명을 보내셨다. “빨리 내려오세요. 도전님께서 걱정하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그 후 외수가 튼튼한 나무 발판을 가져다주었다. 도전님께서는 혹시나 내수 임원들이 다니다가 아시바에 걸리거나 발이 빠질까 봐 엄청 신경을 써주셨다. 외수들에게 단단히 하라는 당부 말씀이 있었다고 들었다. 단청작업 중 지방에 다녀오라는 도전님의 말씀이 있어서 지방에 내려갔는데, 그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계단에서 굴러서 왼쪽 어깨 인대가 늘어나 버렸다. 왼팔을 보조대에 걸어 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내 마음을 시험하려고 척신이 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청하러 무조건 간다! 나에겐 아직 오른손이 있으니까! 왼팔을 못 쓰니 임원인 후각을 데리고 단청작업에 가게 됐다. 이때 나를 보조하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 물감을 타서 갖고 다니고, 자를 잡아주곤 했다. 그 덕에 오른손만으로 선을 그을 수 있었다. 오른손이라도 쓸 수 있어서 감사드렸다. 영대 작업을 할 때 아시바를 오르내리는데 영대 앞 넓은 정원에 외수들이 나무를 심을 구덩이를 파놓고도 심지 않고 그냥 서 있는 걸 봤다. 한참을 그냥 서 있길래 “왜 나무를 안 심고 그냥 계세요?”라고 물어보니 “웃전(도전님)에서 연락이 오면 동시에 심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때 도수는 연월일시분초가 맞아야 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됐다. 단청하면서 포천수도장에는 본전 1층에 화장실이 많은데 ‘왜 그럴까?’라는 의문이 있었다. 단청이 끝난 후 1992년 6월 24일 봉안치성을 모신 후, 4박 5일 특수수련이 시작되면서 수련반을 위해 본전에 화장실을 마련해 주셨다는 걸 알았다. 중곡도장 단청은 초여름 햇살이 따가울 때 시작했다. 원래 있던 단청이 세월이 흐르며 탈색되어서 그 위에 그대로 색을 입히는 작업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 한편에 죄송스러운 부분이 있다. 긴 자가 나무다 보니 약간 틀어져 있는 걸 확인하지 못했다. 줄을 긋고 나서 밑에서 위를 쳐다보니 잘 그어진 듯했는데 옆에서 보니 선이 고르지 않았다. 자가 휘어졌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수정할 시간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못해 그대로 마무리된 게 항상 마음에 걸린다. 중곡도장 단청은 이틀 만에 완료한다고 해서 놀랐지만 진짜 이틀 만에 다 된 걸 보니 임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열심히 했다는 걸 알았다. 중곡도장 옛 단청은 사회 사람들이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실력을 길러 정성으로 새 옷을 입혀드릴 수 있어 모든 임원이 뿌듯해했다.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은 1995년 가을, 겨울 즈음 단청에 들어간 것 같다. 이때는 임원들이 거의 기술자 수준이 되어 별다른 지시가 없어도 잘 진행됐다. 조장들도 알아서 각자 조에 필요한 자재를 챙겨가고, 타분도 보기만 하면 일의 순서가 저절로 나오고, 금조나 선조가 오면 자동으로 자리를 비켜주고, “잠시라도 앉았다 가세요”라며 의자를 내어 주는 분도 있었다. 때때로 “참은 드셨어요?” 하면서 참을 챙겨주기도 했다. ‘속초 바람에 여자들이 치마를 못 입는다’라는 말이 이해될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박카스 통에 물감 컵을 넣거나 돌을 넣어놔도 바람에 쓰러졌다. 바람을 타고 휙! 날아가서 벽 위를 때려 물감이 번지기도 했다. 벽에 묻은 물감은 말린 후 다시 바탕색을 바르고 새로 단청을 입혔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바람은 심해져 외수들이 바람막이 비닐을 쳐줬다. 난간은 바람막이를 칠 수 없어 바람과 싸워가며 씨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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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상산토성수련도장 명심당 (2018년 7월 촬영)
단청이 끝날 무렵 새벽 3시쯤에 “선조 좀 빨리 나오세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일어나서 나갔더니 종의원 지붕(배를 뒤집어 놓은 형상) 박공 부분(기와지붕 밑 양 모서리 부분)에 선이 안 그어졌다는 거였다. 바람과 싸우느라 포장이 여러 겹으로 처져 있다 보니 놓치고 못 본 거였다. 서둘러 자는 임원 몇을 깨워 작업했다. 영대 올라가는 계단 옆으로는 산수화 그림이 있는데 테두리 선이 많다. 양록으로 칠해야 하는데 물감이 모자랐다. 물감 창고가 너무 멀고 바쁘기도 해서 하엽과 흰색을 섞어 색을 만들어보았더니 색상이 똑같이 나와서 그대로 칠했다. 어느 임원이 그걸 보고는 “하하, 재주가 많이 늘었습니다”라고 했다. 지금도 토성수련도장에 가면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너무나 복이 많아 단청작업을 했다고 생각한다. 단청 경험을 통해 도전님 말씀이 생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눈에 보이는 양적인 수도도 중요하지만, 무자기가 근본이 된 질적인 수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말씀에 “경험해보지 않은 것도 이치만 알면 다 알 수가 있어”라고 하신 적 있다. 도전님께서 천장길방지를 찾아 도장을 다섯 곳에 세우신 것도, 단청할 때 많은 임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주신 것도 모두 몸소 보여 주신 것이라 생각한다.
제주수련도장 완공(1989년) 후 연수가 돌아가고, 여주본부도장(현 본전)이 완공(1990년)되고 시학공부가 돌아가고, 포천수도장이 완공(1992년)되고 시료공부가 돌아가고,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이 완공(1996년)되고 나니 연수가 돌아가고. 천장길방하야 이사진인 하시나니 물비소시하사 소원성취케 하옵소서.
이곳 여주본부도장에 성금을 모시고, 훈시 말씀에 맞춰 성ㆍ경ㆍ신을 다해 수도를 하면 반드시 결실이 있다고 믿는다. 육십 년 공들인 조상님께서 저를 뽑아 종자로 삼았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일심 수도하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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