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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5년(2025)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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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공모전 : 내가 만든 지옥에서 벗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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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산문 우수

 

내가 만든 지옥에서 벗어나다

 

 

금사1 방면 선무 정재연

 


  “오랜만이야, 잘 지내?”
  오랜만에 걸려 온 친한 언니의 전화. 나는 반가움에 일단 살아있다며 밝게 답했다.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해질 무렵, 언니가 조금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정말 미안한데,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내가 학원을 차리려고 하는데, 자금이 좀 부족해서… 네가 혹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언니가 말한 금액은 내 형편에선 쉽게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너에게 부담 주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너라면 믿고 부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저히 돈을 빌릴 곳이 없어서 그래. 내 성격 알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매달 꼭 상환할게.”
  당혹스러워서 머리가 새하얘졌다. 당장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서,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노라고 했다.

 

 

  언니를 처음 만난 건 10년 전쯤이었다. 당시 나는 무일푼으로 집에서 나왔고, 월세는 점점 밀리고 있었다. 학교 선배였던 언니에게, 기댈 곳도 없던 나는 힘든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언니는 내게 과학 과외를 권했다. 당시 과외는 영어, 수학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누가 과학 과외를 하냐 했지만, 언니는 과학 과외도 수요가 있다며 여러 과외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그렇게 나는 과외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과외만으로는 수입이 불안정했다. 학생이 과외를 그만두면 그만큼 월급이 깎였고, 고정 지출이 있는 나로서는 버거웠다. 언니는 이번엔 학원 강사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나는 학원 과학 강사가 되어 과외를 병행했다. 언니는 사교육 업계에 먼저 발을 들인 선배로, 내가 업계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피도 안 섞인 남을 어떻게, 이리 도울 수 있을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나에게 언니는 피를 나눈 가족보다도 더 가까운 사람이었고, 내 20대의 구원자였다.
  그런 언니가, 이젠 내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도리상으로는 마땅히 도와주는 게 맞는데, 너무나 큰 금액 때문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아둔 돈이 없어, 언니에게 돈을 빌려주려면 대출을 해야 했다.
  언니 성격상 상환을 안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천만분의 일이라도 언니 상황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내 명의로 한 대출이기에 내가 책임지고 상환해야 할 것이다. 3천만 원에 대한 원금과 이자일 테니 한 달 상환 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하리라. 게다가 내 나이도 곧 청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한에 다다라, 기한이 끝나기 전에 대출을 해서 내 집을 마련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언니를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상황과 처지가 도저히 받쳐주질 않았다. 고심 끝에, 나는 언니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언니, 정말 미안한데 내가 지금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그 금액은 힘들 것 같아.”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언니는 작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래, 네 사정이 힘든데 내가 너무 큰 부탁을 했지. 사실 나도 네가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근데 너 말고는 정말 마땅히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도 좀 서운하네. 너 어려울 때 내가 참 많이 도와줬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힘들었을 때 언니는 나를 가장 많이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런 언니가 도와달라는 것을 내 사정으로 인해 거절하려니, 내가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나도 언니가 고마워서 매년 생일과 명절 선물을 챙겨줬었는데…. 전화는 그렇게 어색한 여운을 남긴 채 끝이 났다. 언니와 나는 이후 예전처럼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여파는 크지 않았다. 돈 문제야 워낙에 민감해서, 가족 사이에도 꺼내면 안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사회의 암묵적 불문율을 먼저 깬 것도, 그리하여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도 언니라고 생각했다. 관계가 끝나기 전까지 나는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은 없었고, 이 일은 차츰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기억은 엉뚱한 때, 엉뚱한 방법으로 다시 돌아왔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유튜브로 보며 엄마에 대해,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생각하던 때였다.
   어릴 적, 내 유일한 양육자는 엄마였다. 아빠는 다른 지역에서 일하느라 명절에만 집에 들어왔다. 조부모는커녕 친척도 없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는 말들이 꽤 있었다.
  “너 키운다고 노후 대비를 못 했으니, 네가 어른이 되면 나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
  “네가 돈을 벌게 되면 달마다 내게 용돈을 줘야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대학을 가려면 국립대뿐이다. 사립대면 대학은 포기해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으니 네가 효도해야 한다.”



  엄마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선 ‘효도’를 해야 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집 청소를 아침, 저녁으로 매일같이 했다. 고등학교 때는 급식당번을 하면서 식비를 면제받았다.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문제집을 구걸해 교재비용도 아꼈고, 장학제도를 알아보고선 장학생이 되어 장학금도 받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국립대에 장학금을 받으며 진학했다. 순간마다 들었던 대답은 자동응답기 같은 “잘했다”라는 말뿐이었다. 그 말로는 성에 차지 않아 계속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답은 늘 이런 식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네가 당연히 그랬어야지.”
  “그만 좀 이야기해라. 지긋지긋하다.”
  “돈 벌면 한 달에 용돈 30만 원은 줘야 한다.”
  피를 나눈 가족이자, 유일한 양육자인 나의 엄마, 그런 엄마가 내게 효도를 바랐다. 효도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엄마와의 관계가 끊어질 것 같았다. 관계가 끊어지면 나는 끝이라는 불안감에 끊임없이 엄마에게 조건부 효도를 다 하려 노력했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니까.’
  ‘엄마는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으니까 당연히 그에 대해 보답을 해드려야지.’
  엄마와 살던 그 당시에는 이렇게만 생각했다. 그러다 입도를 하게 되고, 집을 나와 선각의 챙김을 받으며 도에 관해 알아가면서, 우물 속의 개구리 같던 내 세상은 무너졌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요구하는 효도를 거절하기 시작했다. 아직 대학생임에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하자, 입버릇처럼 말했던 ‘용돈’ 문제가 나왔다. 형편이 어려워 거절하니 엄마는 매우 분노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 때문에 노후 대비도 못 했는데! 너는 혼자 큰 줄 아냐?”
  “엄마는 그럼 지금까지 돈 회수하려고 나를 키웠어? 그러고도 엄마야?”
  “○○이 아들은 부모님 해외여행을 보내줬다더라! △△이 딸은 엄마한테 명품 가방도 사줬다더라! 그런데 너는 내 환갑 기념으로 해외여행도 못 보내주냐?”
  “왜 다른 집이랑 비교를 해! 비교해서 얻는 게 뭔데! 엄마는 나한테 지금까지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내가 지금까지 다른 친구들 어떤 부모 만나 어떻게 사는지 한 번이라도 말한 적 있어? 말한 적 없어! 말해봤자 서로한테 상처만 되니까! 가난한 현실은 바뀌지 않으니까!”
  “긴말할 필요 없고, 인연 끊자. 난 오늘부로 딸 없다고 생각하고 살 거다.”
  다툼 끝에 결국 엄마와의 인연은 끝이 났다.
  ‘언니와의 사이도 엄마와 비슷했구나…’
  누구를 만나든 반복되는 이런 게 ‘카르마’인 걸까? 인간관계는 피가 섞이든, 안 섞이든 관계가 지속되려면 항상 이렇게 ‘조건’이 따라붙는 걸까? 가슴을 가득 채운 공허함과 허망함에, 나는 선각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선각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엄마와 그 언니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과연 네 책임은 없을까?”
  내 잘못이라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네가 일련의 일들을 겪었을 때, 네 감정은 어땠어?”
  순간,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을 겪으며 부딪히고, 끝내 이별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내 감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어떤 부분에서 많이 닮아 있었다. 윗사람이자 가족 또는 그에 가까운 관계였고, 내게 도움을 줬으나 그만큼 바라는 게 있었다. 윗사람이기에 종종 무의식적으로 아랫사람인 나를 편하게 생각하여 함부로 대할 때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들이 내게 바라는 것을 버거워했고, 함부로 대할 때는 분노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이런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기쁨이었다. 나를 인정해 주는 것만 같았으니까. 이렇게 바라는 대로 해주면, 나에 대한 고마움으로 우리의 관계는 돈독해지리라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정말 좋아했나?’
  그동안의 기억을 뒤흔드는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내 내면의 대답은 ‘NO’였다. 처음에는 좋아했을지 몰라도, 관계가 지속될수록 마음의 문은 닫혀갔던 것 같다. 엄마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른이 되어 해외에 나가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돈이 아까워서 통화도 많이 안 할 테고, 찾아오지도 않을 테니까. 명절에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딱 그런 거리감을 원했다. 언니와는 만날 때마다 좋기는 하면서도, 먹는 것부터 어디를 가는 것까지 전부 언니에게 맞춰줬기에 내심 불편하고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즉, 나는 내 감정에 접근할 수 있었던 감정적 힌트들을 애써 무시했던 것이다. 내 감정을 직시하면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엄마를/언니를 좋아하니까.’
  ‘엄마/언니가 나를 도와줬으니, 마땅히 은혜를 갚아야지.’
  해서 감정을 덮고, 스스로 세뇌했다. 좋아하니까, 은혜를 입었으니까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네 감정을 알아주지 않고, 엄마나 언니한테 맞춰주니 그 사람들이 그러지. 사람이 보통 부탁할 때는 부탁을 들어줄 만한 사람한테 해. 너는 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맞춰줬잖아. 인정받으려고,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결국 네 욕심을 위해 그 사람들에게 부탁을 들어줄 거라는 기대를 심어줬잖아.”
  기분이 나빴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관계가 소원하게 된 것은 엄마와 언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수평이 아니면 기울 수밖에 없는 저울처럼, 나는 그들의 무게와 수평을 맞추지 못했다. 친척도, 친구도 전무한 나에게 있어 엄마와 언니는 하나의 커다란 세상이었다. 내가 정말 어렵고 힘들 때, 이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관계가 틀어지면, 나는 정말 세상에서 혼자가 될 거로 생각했다.
  선각과 대화하면서, 내면 깊숙이 자리한 또 다른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내면의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워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주변 사람에게 맞춰주고, 인정받는 것에서 비로소 내 존재 가치를 확인했다.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하는 말도 하지 못했다. 미움받을까 봐, 버려질까 봐 두려워 나를 억압하고 몰아붙였다. 상처받고, 지치고, 화나고, 힘든 나는 모른척했다.



  그러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끝났을 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떠올리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차피 끝난 일에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미명에 덮어버렸다. 모든 원인은 타인의 것으로 돌린 채….
  나는 내 마음을 몰랐다. 내게도 허물이 있음을 간과했다. 최선을 다한 나는 피해자, 그렇지 못한 상대는 가해자라고만 생각했다. 관계가 틀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이로부터 전혀 배우질 못한 것이다. 내가 나를 억압하고, 몰아붙이며 소중하게 대하지 않았기에, 타인이 나를 소중히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나를 돌보지 않고 타인에게만 맞춘, 상극인 인간관계의 결말이 좋을 리 없었다. 나는 관계가 틀어지게 된 사람들에게 서운함과 원망을 품으며, 내가 척이 되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인간 불신이라는 보호막을 쳐서, 더욱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는 성향이 강해졌다. 지옥은 내가 만들고 있었다.
  나는 왜 엄마와 언니 같은 사람들을 만났을까? 생각해 보면, 이들이 다른 사람한테도 나를 대하듯 하진 않았다. 같은 배에서 난 동생은 엄마와 그럭저럭 지내는 편이었다. 그 언니의 경우 능력이 뛰어나 나 말고도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했을까?
  수도를 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모든 것에 인과가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엄마 때문에 입도하게 된 것도 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기에. 그 언니를 만나게 된 이유도 이러한 연장선상의 일인 것 같다. 언니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들여다볼 수 없었을 것이다. 언니는 나를 반성하게 하는 촉매 역할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바뀌지 않는 한 이 굴레는 반복될 것이다. 엄마를 겪고도 바뀌지 않았기에 언니를 만났듯이. 언니를 만나고도 바뀌지 않는다면 또 비슷한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 그래서일까. 직장을 다니면서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계속해서 만났다. 전 직장에서도, 현 직장에서도, 윗사람들은 계속해서 내 상황을 살피지 않은 채 본인들 기준에서 여러 가지 요구를 했고, 나는 화를 참으면서 그때마다 들어주었다. 그러다 폭발하고, 관계가 틀어지길 반복했다. 남은 것은 그런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뿐이었다. 그걸 계속해서 곱씹고, 곱씹으며 나는 피해자요, 그 사람들은 가해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의 반복되는 굴레를 직시할 수 있었다. 나를 위해서,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를 이해하고, 이로 말미암아 내게 펼쳐진 주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이러지?’하는 피해의식으로부터, ‘저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 중, 나로 인해 이런 모습이 드러나는구나’라는 책임의식으로 조금씩 바꾸기 시작했다. 책임을 타인에게서 나로 돌림으로써, 나는 비로소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윗사람을 대할 때 피해받지 않으려 항상 긴장하고, 거리를 두려 했던 나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직장에서 윗사람들이 내 상황을 살피지 않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빈도가 확연히 줄었고, 한 번 폭발해서 사이가 틀어졌던 윗사람을 대하는 것도 전만큼 불편하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관계도 회복될 조짐이 보였다. 모든 것은 내가 하기 나름이었다.
  내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척이 된다면 도통과는 자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다. <나루토>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나루토에게는 마을을 습격한 구미호가 몸에 봉인되어 있다. 이 때문에 구미호로 인해 가족과 친구를 잃은 마을 사람들은 나루토를 원수 취급, 혹은 잠재적 위협 취급을 하며 경멸하고 따돌린다. 나루토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 증오가 내면에 있었지만, 마을을 이끄는 리더가 되겠다는 일심으로 내면의 어둠을 극복하고 마을 사람들을 용서한다. 최후엔 구미호와의 악연도 풀어내어 그 힘으로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공적을 인정받아 마을의 리더가 된다. 만약 나루토가 내면의 어둠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과연 리더가 될 수 있었을까? 관점을 바꿔서, 리더가 되는 결말이 있기에 인과의 원리로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수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도통을 하겠다는 일심으로 내면의 어둠을 극복하고, 엄마와 언니를 이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때가 온 게 아닐까 싶다. 한편으론 도통이라는 결말이 있기에 인과의 원리로 내게 이런 시련과 사건이 주어진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이제는 나를 위해서 마음을 바꿔보려 한다. 아직은 이해의 단계에 머물러 있고, 용서가 쉽게 되지는 않는 상태다. 그만큼 내 안에 맺힌 척이 깊고, 상처가 많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국을 넓혀 엄마와 언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품고 싶다. 이를 위해 무수한 시련과 사건이 생긴다 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통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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