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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3년(2023)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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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지명 답사기 : 불가지(佛可止)와 신령(神嶺)

불가지(佛可止)와 신령(神嶺)



교무부 신상미



상제께서 이해 여름에 김 덕찬을 데리고 불가지(佛可止)에서 신령(神嶺)을 넘다가 고사리를 캐던 노구를 만났도다. 상제께서 그 여인에게 중이 양식을 비노라고 청하시니 그 여인이 없다고 하더니 재차 청하시니 두 되 중에서 한 홉을 허락하니라. 상제께서 양식을 받아 들고서 덕찬에게 “중은 걸식하나니 이 땅이 불가지라 이름하는 것이 옳도다”고 이르셨도다. (예시 56절)



신령(神嶺)!


  신(神)의 고개? 아니면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라는 뜻인가? ‘신령’이란 지명을 문헌에서 찾을 수 없어 그곳이 더욱 궁금하였다. ‘령(嶺)’은 고개 또는 산봉우리를 의미하므로 불가지(佛可止) 마을의 산을 조사하여 신령의 위치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현 전북 완주군(完州郡) 이서면(伊西面) 이성리(伊城里)에서 전주 서문 쪽에 있는 ‘불가절’01이란 마을이 불가지이다. 상제님 재세 시에는 전북 전주군(全州郡) 이남면(伊南面) 이성리 불가지였다. 불가지 마을의 지명을 살펴보면, 불가지 외에 세 개의 이름이 더 있다. 김제시(金堤市) 금구면(金溝面) 대화리(大化里)에 사는 주민들은 ‘불가질’이라고 불렀다.02 완주군의 구전설화에 따르면 원이성 마을에 사는 송남용이라는 분의 삼종숙(三從叔)03이 “불가지에 밭이 있었는데, 그때 강증산이란 분이 이곳에서 은거하며 축지법도 쓰고 도술도 부리셨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불가지를 대부분 ‘불가절’이라고 불렀으며, 한자로 부처 불(佛), 옳을 가(可), 절 사(寺)로 ‘불가사’라고도 불렀다고 하였다.04 지도는 조선총독부에서 1917년도에 발행한 것으로 여기에는 ‘불가절(佛可節)’이라 기록되어 있다. ‘불가절’의 ‘절’이 한글인데 일본인들이 음이 같은 ‘마디 절(節)’을 써서 기록한 듯하다.


▲ 불가절(불가지) 지도[조선총독부 박물관 문서 지도-전주14(1917년 측도,  1918년 재판)]



  우리 일행은 신령을 찾기 위해 마른 잡풀이 거의 쓰러지고, 쌓인 눈도 녹았을 무렵인 2월 중순에 답사하였다. 낮은 야산으로 둘러싸인 불가지는 가옥이 없고 논과 밭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주변이 조용했다. 그래서인지 마을 입구에 있는 아담한 재각(齋閣)이 마치 묘뿐만 아니라 마을을 지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전에 조사된 불가지에 있었다는 절터05에 가서 사진을 찍고 묘가 있는 곳을 지나 돌아 나오니 ‘불자절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보였다. 또한 근처에 절골이라는 지명도 있다.
  ‘절골’이라는 옛 지명은 ‘절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과 골짜기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절골’은 각 지역에서 흔히 있는 지명이지만 ‘불자절골’은 불가지에만 있다. ‘절골’이 절이 있는 마을 골짜기를 의미하므로 ‘불자’는 아마도 불교 신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불자절골’은 ‘불교 신자와 절이 있는 마을의 골짜기’란 의미로 짐작할 수 있다. 절의 이름 또한 ‘불가절’이라서 지명을 ‘불가절’이라 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 마을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곳임은 분명한 듯하다.


▲ 불가지 일대와 신령 위치(다음 지도)



  이곳에 도착한 지 몇 분이 지났으나 신령에 관해 물어보고 싶어도 사람이 없어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바람이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산에서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분을 보는 순간 ‘저분께 물어보면 불가지 신령을 찾을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내려온 분은 여산 송씨 사람이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온 조카인줄 알고 일하다 말고 한걸음에 내려오셨다고 한다. 송○○ 씨는 이 주변이 거의 여산 송씨 집안 땅이며, 현재 있는 묘와 재각(齋閣)은 1939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하였다.06
  그에게 신령(神嶺)에 대해 질문하자 이름 없는 뒷산의 두 고개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한 고개로 가면 이서면 금평리(金坪里) 어전(於田) 마을이 나오는데, 지도를 보면 어전 마을의 위치상 ‘불자절골’로 넘어가서 ‘절골’을 지나야 한다. 다른 고개는 예부터 마을 사람들이 전주로 가기 위해 주로 다녔던 고개로 ‘당재’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송○○ 씨의 밭을 지나 ‘당재’를 넘어 전주 남문(남부)시장07으로 열무, 배추, 고추, 나무, 소, 돼지 등을 팔러 갔었다. 빠른 걸음으로 가면 40~50분 정도 걸리는 거리로 오가던 사람들이 돌을 하나씩 쌓고 지나가서 돌무더기가 있다고 하였다.08
  ‘당재’로 가는 길이 전주 남문시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고 마을 사람들이 주로 다니던 길이었기 때문에 위치상으로 ‘당재’가 상제님께서 불가지에서 전주로 오가실 때 다니셨던 ‘신령’일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당재’의 한자어인 ‘당치(堂峙)’는 흔히 토지나 수호신이 있는 곳이란 의미인 당(堂)과 고개를 의미하는 치(峙)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당재’는 의미적으로도 수호신을 뜻하는 신(神) 자와 고개를 뜻하는 영(嶺) 자가 결합한 ‘신령(神嶺)’이라는 명칭과 상통한다. 송○○ 씨가 ‘신령’이란 지명을 몰랐던 것일 뿐이지 ‘당재’의 위치를 가르쳐 줬으니 ‘신령’의 위치를 가르쳐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령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마을 사람들이 전주로 오가며 돌을 쌓아뒀다던 곳을 찾아야 했다. 잎이 떨어져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이 푹신하여 피곤한지 모르고 올라갔다. 다행히 고개를 넘기 전에 돌이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엔 길을 잃을까 걱정했는데 산길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돌무더기는 신령을 넘어가기 바로 직전 왼편 나무 밑동 주변에 있었다. 돌무더기에서 열 걸음 정도 더 올라가니 갑자기 경사진 내리막길이 나왔다.




  이곳이 신령이구나! 신령은 능선이 가파르게 내려오다가 주변보다 낮아진 곳으로 마치 말안장과도 같았다. 아래쪽에 보이는 돌무더기는 전주로 오가던 마을 사람들이 쌓은 것으로 이곳이 ‘당재’이자 ‘신령’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우리에겐 돌무더기라는 단서가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신령을 확인하고 나니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길을 알려준 송○○ 씨가 정말 고마웠다. 답사하는 매 순간 신명께서 도와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이전에 답사한 곳은 산봉우리 즉, 신령에 가기 전에 우측의 원만한 산길로 둘러서 내려갔기에 ‘당골’쪽으로 간 것임을 알 수 있다.09 높이 40여 미터인 뒷산치고는 신령을 넘어 내려가는 길이 생각보다 가파르고 쓰러진 잡목들이 많아 험하다고 느껴졌다. 새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쓰레기 소각장에서 나는 기계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거의 다 내려온 듯했다. 능선이 잘 보여 신령을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고사리가 나는 계절이 아니라서 『전경』에 등장하는 고사리를 확인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웠다.


▲ 불가지 전경(뒤에 보이는 산이 신령) / 《대순회보》 161호, p50



  예시 56절은 상제님께서 여름에 불가지에서 신령을 넘다가 고사리를 캐던 노인에게 ‘중이 양식을 비노라’고 하신 내용이다. 재차 양식을 청하셔서 두 되 중에서 한 홉을 받으셨는데 한 홉은 한 되의 10분의 1로 대략 한 끼 정도의 양이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중은 걸식하나니 이 땅이 불가지라 이름하는 것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걸식하며 수행하는 이유는 첫째, 음식을 청하여 공양해주는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고[복리군생(福利群生)], 둘째는 교만하지 않으며 타인을 무시하는 마음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며[절복아만(折伏我慢)], 셋째는 몸에 고통이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고[지신유고(知身有苦)], 넷째는 탐욕과 집착을 제거하기 위함[제거식욕(除去食慾)]이라고 한다.10 그러나 상제님께서는 수행이 아니라 천지공사를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노인에게 양식을 청하신 행위의 의미는 스님의 걸식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걸식하는 중’에 대해 상제님께서 “… 이 땅이 불가지라 이름하는 것이 옳도다”라고 하신 것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불(佛)’의 기운이 불가지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로 짐작된다. 만물을 살릴 공부를 하시며 천지공사를 행하신 상제님께서 많은 사람을 살릴 가활만인(可活萬人)11의 기운을 걷어 천하 창생을 건질 공사를 행하신 곳이 ‘불가지’였던 것이다.
  태백산 천제단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를 ‘신에게 나아가는 고개’라는 의미로 ‘곰넘이재’ 또는 ‘신령(神嶺)’이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신령’이라는 의미가 참으로 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가지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신령’이 생각보다 나지막한 곳임을 알게 되었을 때 의아함을 가졌다. 그러나 상제님께서 창생을 살리고자 공사를 행하신 곳이 ‘불가지’이므로 그 의미를 되짚어본다면 불가지를 통해 전주로 오가던 고개가 ‘신령’이라는 큰 의미의 지명으로 불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01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2 (서울: 한글학회, 2003), p.59, p.121, p.126 참고.
02 김제시 금구면 대화리 주민 김성견 인터뷰(2011. 7. 1, 대화리 41-1번지).
03 아버지의 팔촌 형제.
04 황인덕, 『완주의 구전설화』 (전주: 신아출판사, 2001), pp.37-38.
05 2011년 답사 때 불가지에 절터가 있었다고 증언한 인터뷰이다. 전북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555번지에 살았던 최학진씨의 사위 장대홍 인터뷰(2011. 7. 1, 현 불가절 근처); 곽춘근, 「피노리(避老里), 불가지(佛可止), 신령(神嶺)」, 《대순회보》 161 (2014), p.53 참고.
06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산 28번지 임야대장 기록(1939년 1월 18일 소유권 이전, 여산 송씨 참봉공파 종중);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불가지 근처 땅 주인 송○○ 인터뷰(2022. 9. 15, 이성리 산 29 쉼터).
07 일본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동ㆍ북ㆍ서문 밖 시장이 쇠퇴하여 1923년에 전주 남문시장으로 통합되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서문이 가까웠지만, 남문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6년 시장이 대폭 개축되면서 명칭을 남부시장이라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08 완주군 이서면 이성리 불가지 근처 땅 주인 송○○ 인터뷰(2022. 9. 15, 이성리 산 29 쉼터).
09 곽춘근, 「피노리(避老里), 불가지(佛可止), 신령(神嶺)」, 《대순회보》 161 (2014), pp.50-53 참고.
10 지명, 『발우』 (서울: 생각의 나무, 2002), p.109.
11 “불가지(佛可止)는 불이 가히 그칠 곳이라는 말이오. 그곳에서 가활 만인(可活萬人)이라고 일러왔으니 그 기운을 걷어 창생을 건지리라”, 예시 5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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