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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상제님께서 부친의 빚을 해결하시다

상제님께서 부친의 빚을 해결하시다



교무부 조광희



상제께서 부친이 정읍의 박 부자로부터 수백 냥의 빚 독촉에 걱정으로 세월을 지내는 것을 아시고 부친에게 五十냥을 청하여 박 부자의 집으로 찾아가서 갚으시고 그의 사숙에 모인 학동들과 사귀셨도다. 이때 훈장이 학동에게 시를 짓게 하니 상제께서 청하셔서 낙운성시(落韻成詩)하시니 그 시격의 절묘에 훈장과 서동들이 크게 놀라니라. 박 부자도 심히 기이하게 여겨 집에 머물러 그 자질들과 함께 글 읽기를 청하는지라. 상제께서는 마지못해 며칠 머물다가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니 그는 이에 감동되어 증서를 불사르고 채권을 탕감하였도다.  (행록 1장 17절)


  행록 1장 17절은 상제님께서 부친이 박 부자로부터 지셨던 수백 냥에 이르는 빚을 해결하신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한 구절이다. 여기서는 부친께서 빚을 지게 된 배경과 박 부자라는 인물에 관해 살펴보고 상제님께서 박 부자로부터 부친의 빚을 해결하시는 과정에서 나타난 행적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상제님께서 정읍의 박 부자를 찾아가신 정확한 시기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그 대략적인 시기를 살펴보면, 이 일이 13세 되시던 해에 정읍장에서 도난당한 모시베를 고창장에서 되찾아 파신 일 이후로 보는 기록이 있다.01 그리고 당시 사회 풍속에서 15세가 되면 호패를 차고 성인으로 여겨지던 때였던 터라 부친과 함께 빛을 갚아야 할 책임이 있을 것이기에 그 나이보다 어리셨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상제님께서는 대략 13세에서 15세 사이(1883~1885년)에 박 부자를 찾아가신 것으로 추정된다.
  상제님의 부친께서는 박 부자로부터 수백 냥의 돈을 빌리고 그 빚 독촉에 대한 걱정으로 세월을 보내셨다. 얼마나 큰 빚인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현재 화폐가치로 수천만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며02, 19세기 후반 가옥의 가격을 기준으로 보면 한양에 기와집을 마련할 만큼의 큰 금액이었다.03
  상제님의 부친께서 빚을 진 사정은 전해진 기록이 없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9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백성의 조세부담이 심했다. 더욱이 상제님께서 6세 무렵인 1876년에는 가뭄이 발생했고 1879년에는 큰 홍수가 나는 등 기상변동이 심해서 흉년이 이어지고 전국적으로 기근이 발생하는 등 어려움이 더해지던 때였다.04 이 시기에는 많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부호들로부터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현실에서 부친께서도 생계를 잇고자 빚을 지신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회는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에게 엄하였는데, 채권자가 경무청에 고발하면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는 옥살이하거나 혹은 관아에 끌려가 수십 대의 태형(笞刑)05을 받아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연좌제로 인해 채무자가 사망하거나 빚을 갚지 못한 경우라도 부인이나 자손은 물론 친척과 동거인이 그 채무를 갚아야만 했다.06 이러한 엄혹한 현실에서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 중 상당수가 가족과 함께 야반도주하여 유랑과 구걸을 일삼는 거지 떼가 되거나 일부는 산속의 화적패에 가담하여 도적질을 일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부친의 염려는 식솔의 앞날과 생사를 심히 걱정하는 가장의 무게이자 고충 때문이었을 것이다.
  빚에 대한 걱정으로 여념이 없는 부친을 본 상제님께서는 오십 냥을 청하시고 박 부자의 집에 찾아가겠다고 하셨을 것이다. 이때 만일 성인도 감당하기 힘든 큰 빚을 아직 어리신 상제님께서 갚겠다고 하셨다면 부친께서 얼마나 놀라셨을까? 특히 홀로 박 부자의 집을 찾아가 빚을 해결해보겠다고 하셨다면 평범한 소년이라 여기기 힘든 모습을 상제님께서는 이미 유년 시절에 보여주신 것이다.
  상제님께서 찾아가신 박 부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박씨 성을 가진 자로서 시기, 지역 및 주변 정황 등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있다. 첫 번째로 시기를 고려하면, 고부군 정읍현의 태안 박씨(정읍파) 가문에는 유명한 부자 세 명이 전해져 온다. 먼저 사언 박민호(士彦 朴敏灝, 1821~1891)가 있고, 일제강점기의 전라북도 지역 유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박흥규(朴興奎, 1888~1957)07, 호남중ㆍ고등학교 설립자인 박명규(朴明奎, 1904∼1996)가 있다.08 이 외에도 같은 시기 유명한 부자로 구산 박씨 가문의 창암 박만환(倉巖 朴晩煥, 1849~1926)이 있다. 이 중 생몰연대로 보면 박흥규와 박명규는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1871년 이후 출생자들이기에 배제되므로 박민호와 박만환이 유력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지역 및 주변 정황을 살펴보면, 박민호는 상제님의 방문 시기(1883~1885)에 거주한 지역을 참작해 볼 때 정읍현 장명리(현재 정읍시 장명동)에서 출생하고 이후 그곳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계속 거주하였다. 그는 60대 초반의 나이로 손자를 자질(子姪: 아들과 조카 또는 자식과 손자)로서 둘 수 있는 연령이었다. 박만환의 경우 당시 지역을 대표했던 이름난 부자로 꼽힌다.09 상제님께서 찾아가셨을 때 그의 나이가 30대 중반으로 추정되므로 슬하에 자질들을 두고 있을 나이였다. 또한 그가 태어난 흑암마을은 현재 정읍시 농소동에 속해 있고 상제님 생가와도 그리 멀지 않다. 더군다나 3천석 지기의 이름난 지주 가문이었다.
  그러나 박만환은 1867년 나이 17세에 충남 아산의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 1811∼1876) 문하에서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 등과 동문수학했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1886년 의금부도사, 1890년 삼례 도찰방을 지냈고, 영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여 1903년에 두승산에 영주정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10 이를 보면 1867년부터 1890년대 초반까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아산에서 간재 전우와 공부하고 여러 지역에서 벼슬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제님께서 찾아가신 시기에 그는 다른 지역에서 활동했으므로 박만환은 박 부자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가장 유력한 인물로 보이는 박민호에 관해 살펴보면, 그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환에 단(壇)을 쌓고 산제(山祭)를 올려 효험을 얻으니 마을 사람들이 정읍 고암서원에 효자로 천거하였다. 1876년(상제님 6세 무렵) 호남 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식량을 나누어 주고 1,500냥을 내어 정읍의 호포(戶布)를 대납하는 등 두 해에 걸친 가뭄 동안 무려 8,000석(14,400~16,000 가마니)을 베풀었다. 그러자 1878년 창덕궁위장(昌德宮衛將)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제수(除授)받고 이듬해 8월 정읍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박민호 포덕혜중비(同知中樞府事朴敏灝布德惠衆碑)’가 연지원(蓮池院: 큰 못을 뜻하는 ‘연지’라는 옛 마을에 있던 교통의 요충지로 추정) 큰 길가에 세워졌다고 한다.11 이렇듯 박민호는 정읍 일대의 대부호이자 자선가로 명망이 높았다. 그러나 위 성구처럼 상제님의 부친께서 빚을 갚지 못해 고심하던 모습은 채무자로서 겪게 되는 일반적인 상황으로 짐작된다.
  상제님께서는 박 부자의 집에서 오십 냥으로 빚 일부를 갚으시고 그의 사숙(私塾)에 모인 학동들과 사귀셨다. 사숙은 개인이 세운 서당이나 글방을 뜻하는데, 대개 문벌가나 유력가가 그들의 자제교육을 위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교육경비를 부담하는 형태가 많았다.12 사숙에 학동들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박 부자는 부호답게 집안의 자식뿐만 아니라 고을의 아이들까지 교육하는 큰 규모의 서당을 운영했음을 알 수 있다.13 이곳에서 상제님께서는 훈장이 학동들에게 시를 짓게 할 때 따로 청하시어 낙운성시(落韻成詩: 운자를 받아 시를 짓는 것)하셨다. 운율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시를 지을 수 있으려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야 가능한데, 상제님의 시격이 너무나 절묘하여 훈장과 학동들은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지으신 상제님의 시가 무엇인지 전해지지는 않으나 7세 무렵 글방에 가신 어느 날 훈장(訓長)으로부터 놀랄 경(驚)의 운자(韻字)를 받고 “원보공지탁 대호공천경(遠步恐地坼 大呼恐天驚)”14이라는 시를 지으셔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던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또 부친께서 훈장을 초청하여 상제님께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게 하였을 때, ‘하늘 천(天)’과 ‘따 지(地)’를 읽으시고 “하늘 천에서 하늘의 현묘를 찾았고, 따 지에서 땅의 오묘한 이치를 간파하기에 그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훈장을 돌려보내 사이다”15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하늘과 땅을 놀라게 할만한 기개와 천지의 이치를 꿰뚫고 계신 상제님이셨으니 그 시격에 박 부자도 경탄을 넘어 기이함마저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박 부자는 그의 자질들과 함께 글을 읽으며 머물 것을 청하였고 상제님께서는 마지못해 며칠 지내셨다. 계시는 동안 부친의 빚을 심히 걱정하시니 이를 지켜본 박 부자는 상제님의 시격을 크게 기이하게 여기던 터에 지극한 효심까지 느끼게 되자 마침내 채권을 탕감해주게 된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수백 냥의 빚을 특별한 이유 없이 탕감해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과거제를 시행했던 조선에서 글을 잘 쓰는 것은 매우 중요한 능력이었으며 시격의 수준은 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유교 사회에서 효는 으뜸가는 덕목으로 여겨졌다. 박 부자 역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인물이었으므로 부친의 빚을 걱정하시는 상제님을 외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글공부와 효의 덕목을 중요시하던 조선 사회의 정서에서 박 부자의 인물됨을 보았을 때 상제님의 비범함과 효심은 그를 매료시키고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무상한 지혜와 권능의 소유주이신 상제님께서는 7세부터 이미 다른 서동에게 장원을 주려는 훈장의 속셈을 꿰뚫고 문체와 글자를 분별치 못하게 하시는 등 여러 차례 신이(神異)한 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셨다.16 그런데 이러한 권능을 쓰지 않으시고 인세의 일을 몸소 겪으시면서 부친의 빚을 해결하셨다. 이는 인간사의 통정(通情: 세상 일반의 사정이나 인정)을 고려하여 그 순리에 따라 일을 처리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훗날 인심과 속정을 살피고자 주유천하를 하시고 여러 종도의 말을 들으시며 세간의 실정을 살펴서 천지공사를 하셨다는 것과 연관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01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94), pp.37-39 참고.
02 김현진, 「전경 속 이야기: 상제님 유년 시절의 물가」, 《대순회보》 229 (2020), pp.32-33 참고.
03 조선 후기 1860년에서 1879년 한양의 기와집은 82냥이고 초가집은 24냥이었다. 1880년에서 1899년의 기와집 가격은 235냥, 초가집은 97냥이었다. 유현재, 「조선 후기 서울주택 가격 변동과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95 (2020), pp.326-327 참고.
04 전송호, 「18~19세기 조선의 기후, 작황, 가격의 변동에 관한 연구」, 『농촌경제』 제25권 제2호(2002), pp.4-5 참고.
05 형장(荊杖)으로 볼기를 치는 오형(五刑)의 하나인 형벌로서 심하게는 죄수가 사망에 이르는 일도 있었다. 
06 이재목, 「조선왕조의 채권법 제도에 관한 연구」, 『법사학 연구』 28 (2003), pp.172-173 참고.
07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index.aks 참고.
08 『호남고등학교』, https://school.jbedu.kr/honam-h/M01020101/ 참고.
09 임장훈, 「정읍시, 5월의 역사 인물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손화중·독립운동 지원 박만환 선정」, 《전북일보》 2021. 5. 6; 최행영,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정읍 ‘영주정사’, 담양 ‘영학숙’ 학술대회」, 《뉴스포털》 2021. 8. 23 참고.
10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천석꾼 아버지와 아들 - 정읍 영주정사와 영양사」, 『지역N문화』, https://ncms.nculture.org/legacy/story/787 참고.
11 최현식, 『신편 정읍 인물지』 (정읍: 정읍문화원, 2007), pp.337-338 참고.
12 「서당」,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3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앞의 책, p.37 참고.
14 행록 1장 12절.
15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앞의 책, pp.33-34.
16 행록 1장 13절 참고; 행록 1장 15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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