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을가」의 내력과 대순사상에서의 의미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최치봉
1. 들어가는 말
『전경』에 언급되는 「궁을가(弓乙歌)」는 가사의 일종이다. 가사는 고려 말에 발생하여 조선시대를 관통하며 지속적으로 전해 내려온 문학의 한 갈래로 율문(律文)01이면서도 서정, 서사, 교술의 다양한 성격을 지닌 문학 장르이다. 형식상 4음보의 연속체인 율문이며, 내용상 수필적 산문인 가사는 산문과 율문의 중간적 형태로 조선조의 대표적인 문학 형식이라 할 수 있다.02 「궁을가」는 상제님께서 “입산 삼일 후에 천하사를 알았다.”03고 평가하신 정북창(鄭北窓, 1506~1549)의 저작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인 『용호비결(龍虎秘訣)』을 본떠 그를 ‘용호대사’나 ‘용호도사’라고도 칭하는데, 서명이 「용호도사궁을가」04로 되어 있는 「궁을가」도 존재하며, 일부 자료에서는 ‘용호대사소저(龍虎大師所著)’05라고 밝히고 있기도 하나, 그의 저작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상제께서 백지 한 장의 복판에 사명당(四明堂)이라 쓰시고 치복에게 가라사대 “궁을가에 있는 사명당 갱생이란 말은 중 사명당이 아니라 밝을 명 자를 쓴 사명당이니 조화는 불법(佛法)에 있으므로 호승예불혈(胡僧禮佛穴)이오.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선술(仙術)에 있으니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혈(群臣奉詔穴)이오. 선녀직금혈(仙女織錦穴)로 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히리니 ….” 하셨도다.(행록 5장 15절)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권지 1장 11절)
「궁을가」는 『전경』에 두 차례 언급되고 있다. 첫째는 사명당에 관한 내용으로 천지공사의 일환으로 보이며, 두 번째는 동학과 도통군자에 관한 내용으로 수운을 대신하는 선생이 상제님을 지칭하는 것이라 밝히고 있다. 한편으로 이 구절들에서 유추할 수 있는 점은, 민간에 특히 동학 신도들 간에 널리 펴져 있었던 「궁을가」가 상제님의 강세와 사명당 관련 공사가 언급된 신비하고 예언적 성격의 가사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본 글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바는 세 가지로, 첫째는 현존하는 자료 가운데 『전경』에 언급된 「궁을가」와 가장 유사한 가사집을 찾아내는 것이고, 둘째는 그 판본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보고, 셋째는 대순진리회에서 「궁을가」는 어떠한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궁을가」의 내력과 종류
현재 출간연대와 저자가 확인되고 또한 가장 널리 알려진 「궁을가」는 1932년 경상북도 상주 동학본부(東學本部)06의 『용담유사』 권36에 실려있는 것이다. 판본 중의 하나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되어 있으며, 수운의 『용담유사』와 제목이 같아 혼동하기 쉽지만, 이는 김주희(金周熙, 1860~1944)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흔히 「상주 동학가사」07라고 칭해진다. 상주 동학본부는 1922년 5월 29일 교당 설립 허가를 받기 이전부터 가사 간행사업을 진행하여 1919년부터 1932년까지 10여 년에 걸쳐 40책, 108편의 가사를 묶어 간행사업을 벌였다. 간행된 가사는 수운이 지은 『용담유사』 8편을 포함하여 김주희가 창작하였다는 가사와 그 외 다른 교당의 가사까지 합한 것으로 활판, 석판, 목판 등의 방법으로 간행하였다.08 상주 동학본부 내부에서는 권1의 「용담유사」와 권2의 「임하유서」를 제외한 나머지는 김주희가 창작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권36의 「궁을가」 역시 김주희의 저작물이 된다. 하지만 상주 동학본부가 설립되기도 전에 이미 상제님께서 「궁을가」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으로 볼 때, 「상주 궁을가」는 기존의 「궁을가」를 수집하여 수정이나 편집을 가했을 확률이 높다.09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는 2종류의 「궁을가」가 소장되어 있고, 한국가사문학 DB10에서 제공하고 있는 「궁을가」에 관한 자료는 총 21건으로 제작연대와 작자를 알 수 없고, 가사집의 구성이나 체계도 모두 제각각이다. 주요한 자료만 비교해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표1. 궁을가의 종류와 『전경』관련 구절 비교표>11
3. 『전경』에 언급된 「궁을가」 가사집은 무엇인가?
상제님께서 「궁을가」를 언급하신 시기는 천지공사(1901~1909) 시기로 추정되는데,12 이 당시에 이미 동학도들에 의해 「궁을가」가 널리 펴져 있었으므로, 필사되고 전해지는 과정 중에 많은 이본(異本)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현재 전해지는 「궁을가」는 형식과 내용에 각각의 차이를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 가운데 상제님께서 직접 접했거나 혹은 알고 계셨던 것과 가장 유사한 「궁을가」를 어떻게 추적할 수 있을까? 당시의 「궁을가」에 대해 유추하기 위해 첫째로 주목할 점은 당대의 기록이다. 매천 황현(黃玹, 1855~1910)13은 조선 후기의 우국지사(憂國之士)인데, 그의 저서인 『오하기문(梧下紀聞)』은 자신이 보고 들은 동학농민전쟁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야사(野史)이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의 양태를 살펴보면, 「궁을가」는 동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또한 「격검가」와 같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갑오년, 1894년 5월 12일 기록] 지난날 최시형은 개인적으로 글을 써 펴내서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포덕문布德文」ㆍ「격검가擊劍歌」ㆍ「궁을가弓乙歌」ㆍ「강신주降神呪」ㆍ「강령주降靈呪」라는 글이 있는데, 이것들을 묶어서 『동경대전(東經大全)』이라고 했다.14 [을미년, 1895년 6월 25일 기록] 5월 이후로 수령과 사대부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도적(수운을 칭함)을 추종했다. 어리석은 백성은 이를 본받아 바람에 먼지만 날려도 스스로 도적에게 가서 복종했고, 『동경대전』을 위대한 성인의 저작으로 간주했다. 마을에 강당을 설치하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동경대전』을 열심히 익혔다. 어린아이들은 모두 「격검궁을지가擊劍弓乙之歌」를 유창하게 불렀고,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도 ‘시천주’를 읊는 소리가 넘쳐났다.15
황현의 기록과는 다르게 「격검가」와 「궁을가」는 『동경대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16 이는 황현의 정보수집에서 정확성을 의심하게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역으로 당시 사람들이 오해할 만큼 이 두 가사는 동학신도들에게 많이 불렸다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점은 당대에 엮은 가사집은 이 두 가사가 같이 수록돼있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 「궁을가」(가17) 원본, 한국가사문학(http://www.gasa.go.kr/), 검색어 ‘궁을가’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전경』의 구절과 가장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당대의 「궁을가」였다고 여길 수 있다.17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에 대해서는 <표1>의 자료들에서 “조선강산 명산이라”와 “조선강산 명승지(明勝地)여”의 두 가지 패턴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 명승지에 관한 것을 후보에서 소거하기로 한다. “사명당(四明堂)”에 대해서는 국문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그 한자를 알 수 없기에 제외하고, 또한 국한문 혼용 가운데 “사명당(泗溟堂)”과 “사명당(寺明堂)”을 소거해 한자 표기가 맞는 것을 추정하면, ‘가11’, ‘가17’이 가장 유력해진다. 그중에서 특히 ‘가11’은 구성에서 「궁을가」에 이어 「격검가」를 소개하고 있어, 현존하는 자료들 가운데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언급한 「궁을가」 판본과 일치하거나 가장 유사하다고 사료된다.
<그림1. 「궁을가」(가11) 원본>18
자료 ‘가11’은 다른 자료와 마찬가지로 작자와 제작 시기가 미상이며 규격은 20.5*19.5cm이며 전소장자는 김경욱이고 현재 한국가사문학관에 보관 중이다. 국한문 혼용의 필사본이다. “大明天地日月下에 億兆蒼生겨실졔 三皇五帝㤙德19으로 너도나코나도나코”로 시작된다.20 4음보 1행으로 총 163행이며, 주요 내용을 간략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표2. 「궁을가」(가11)의 주요 내용 정리표>
전반적으로 「궁을가」를 통해 당대 불안했던 대내외적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정감록』 등의 예언서에 따라 길지를 찾아 떠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대신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수도하여 남에게 덕을 베풀 것을 언급하고 있다. 한편 도수나 별자리를 언급하며, 천지의 운세가 바뀜을 언급하고 지금의 위태로운 시절이 좋은 시절로 곧 바뀌리라는 소망을 노래 부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도통군자가 또 난다는 구절은 민중들의 고난을 덜어줄 구세주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고 하겠다.
4. 대순사상에서 궁을가의 의미 궁을(弓乙)은 궁궁(弓弓) 또는 궁궁을을(弓弓乙乙)로 쓰이는데 이 용어는 『정감록』에서 처음 보이고 있다.21 『정감록』에서 궁을은 상징 문자로서 구원처를 암시하고 있다.22 즉, 난세에 목숨을 부지할 장소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학을 거치면서 이 궁을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는 최시형의 주장으로 궁을을 ‘마음’으로 여긴다.23 둘째는 이돈화24의 주장으로 태극과 그 천심(天心)을 궁을로 여긴다.25 셋째는 태극을 원(圓)으로 보고 궁을을 방(方)으로 보아 원과 방은 천지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전체로 여긴다. 이외에도 운동 또는 변화의 원리, 원만무애의 상징, 이재전전(利在田田), 약(弱)의 파자, 활활(活活) 등으로 설명한다.26 추측건대 동학의 궁궁(궁을)과 관련한 여러 가지 설은 동학이 후대로 전수되는 과정 중에 확장되고 기존의 도참설에 내용들이 덧붙여진 해설이라고 볼 수 있다.27 궁을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대순사상의 관점에서 중요한 점은 수운이 상제님에게 천명과 신교를 받을 때 영부를 받았고, 상제님께서 직접 이 영부(靈符)가 선약(仙藥)이며, 그 형상은 태극이고 또 그 형상은 궁궁이라고 밝혀주셨다는 점이다.28 대순진리회의 경전이나 훈시에는 궁궁이나 궁을에 대한 해석이나 특별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태극도 당시에는 도인들 사이에 궁을과 관련한 비결서나, 이와 관련한 많은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인용문은 일제강점기나 6.25를 겪은 후 태극도에 입도한 수도인들의 경험담인데, 관련한 구절만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저는 이 비결서를 보면서 두 가지의 내용에 대하여 주목을 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당시 일본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세상이 바뀌어져 일본이 물러간다는 것과 그 후에 ‘弓弓乙乙(궁궁을을)’에 해당하는 도를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29
한번은 형이 저희 집에 왔을 때 도의 진리에 대해 물어봤더니 궁궁을을도하지(弓弓乙乙道下止)라고 하면서 궁궁을을은 태극의 모습이니 태극인 도 아래에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태극의 이치로 풀이를 했습니다.30
처조부께서는 김구(金九), 신익희(申翼熙) 선생 같은 분들과 독립운동하다 오셨습니다. 손주 사위인 저에게 『정감록』에 있는 비결을 들려주셨습니다. ‘도하지(道下知)31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고 하시면서 방공호를 파서 피난해야 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 도(道)를 잘 모르던 때였지만 전쟁을 치루고 난 다음이라서 그런지 누구에게든지 가서 ‘궁궁을을(弓弓乙乙) 도하지(道下知)’ 하면서 피난처를 찾아서 부산으로 가야 산다는 이야기만 했습니다.32
일제강점기에 이어서 6.25까지 겪은 당시의 사람들은 삶에 있어 무엇보다 보신(保身)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이에 비결서의 예언은 매혹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한편으로 동학을 거쳐 내려온 궁을에 대한 관념은 단순히 십승지(十勝地) 같은 피난처가 아니라, 수신하여 내 몸을 보존하고 나라를 살리는 종교적 상징체계로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당대 사람들에게 태극도(太極道)라는 이름의 종단은 궁을이라는 상징체계에 부응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겨졌다고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인세에 두 번의 계시를 내렸는데, 첫 번째는 1860년 미륵금불에 임하는 동안 수운에게 내린 것이고, 그다음은 화천 하신 뒤 1917년 도주님에게 내린 것이다. 수운에게의 계시는 인간을 통해 조선이 처한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신 것이고, 두 번째 계시는 천지공사를 이어받는 종교적 가르침을 펼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33 이러한 과정에서 상제님께서는 동학의 실패를 겪은 민중들에게 진정한 동학을 다시 실현하는 참동학을 주창하여 삶의 희망과 활로를 열어주고자 하셨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궁을’ 역시 참동학에 맞추어 새로운 개념으로 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경』에서 밝히듯이 대선생의 갱생은 수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운을 대신하여 직접 인간의 모습을 빌어 이 땅에 오신 상제님의 강세를 가리킨다. 구원자로 강세하신 상제님께서 하신 일은 민중들을 위해 단지 환난 속에서 임시로 피난할 길지를 알려준 것도 아니요, 수운에게 가르쳤던 영부로 질병을 고치는 것도 아니었다. 상제님께서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삼계대권으로 공사를 행하셨는데, 이를 통해 선천의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시고자 하였으니,34 이것이 천지공사이다. 곧, 대순사상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방도는 천지공사로 마련된 것으로, 피난하는 길과 보신할 수 있는 길이 새롭게 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궁을가」에 언급되고 『전경』에서 밝히고 있는 네 가지 명당을 통해 공사를 보는 것도 천지공사의 일환이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궁을가」는 상제님의 강세와 사명당 공사에 대해 예언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어 그 자체로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어 보인다.35 「궁을가」의 내용 가운데는 민중의 고난을 덜어줄 구원자가 나타난다는 내용, 피난을 가지 말며 각자의 자리에서 정심정기하여 마음을 고치라는 내용, 남에게 덕을 베풀고 선을 쌓으라는 내용, 수도하여 도통하라는 내용, 천지도수에 따라 요순시대가 돌아온다는 내용 등이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은 이미 종교적 함의를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시의 수도인들은 자연스럽게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이은 도주님의 태극도를 참동학이자 새로이 마련된 종교적 상징체계인 궁을이라 여겼을 것으로 생각된다. 도전님 역시 “수운가사는 우리 얘기지 다른 것이 아니다”36라고 하셨는데, 이러한 점들은 동학도들이 염원했던 새로운 세상인 후천, 새로운 구세주에 대한 갈망, 천지공사의 예언 등이 대순사상과 무관한 게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고자 하셨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추가되는 의문점은 어떻게 「궁을가」에 상제님과 관련한 예언이 들어가게 되었느냐는 점이다. 세간의 인식처럼 정말 정북창에 의해 지어진 것이고 그에 의해서 예언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천기자동(天機自動)37에 의해 세간에서 자연스럽게 퍼진 것은 아니었을까?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도수와 상제님의 천지공사는 오묘해서 우리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대순사상에 있어 궁을은 도참서의 피난처나, 영부를 통한 형태를 넘어서 태극의 도 아래에서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직접 이어받은 도주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행해라는 뜻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특히, 「궁을가」 33행에 “발동(發動)말고 수도(修道)ᄒᆞ면 도하지(道下止)가 이거시라”라는 것은 외부의 환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수도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상제님께서는 “수운(水雲) 가사에 ‘발동 말고 수도하소. 때 있으면 다시 오리라’ 하였으니 잘 알아 두라”38라고 하셨으니, 「궁을가」의 예언적 성격은 현재도 진행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01 율문(律文) : 언어의 배열에 일정한 규율 또는 운율이 있는 글. 02 한국가사문학(http://www.gasa.go.kr/), 가사문학의 정의. 03 교운 1장 35절. 0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청구기호 : 古1496-21. 05 이수진, 「자료집 『청림도사 지지가』에 수록된 가사작품 6편에 대한 검토」, 『溫知論叢』 51 (2017), p.167. 0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검색어 : 동학본부(東學本部), 검색일 : 23.7.15, “김시종은 천도교 제2세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등의 북접이 광제창생의 이념에 지나치게 철저한 것을 보고 수운사상(水雲思想)에 어긋난다고 생각, 최시형의 북접에 대하여 스스로 남접이라 하고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서 포교하고 있었다. 김주희는 1904년 할아버지의 뜻을 받아 김낙춘(金洛春) 등과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장암리에서 교당을 세우고 경천교(敬天敎)라 하였으나, 이 교단도 1908년부터 항일운동 조직으로 탈바꿈하고자 하여 김주희는 이에 결별을 선언하고 속리산으로 은둔해버렸다. 경천교는 1912년까지 존속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915년에는 경상북도 상주군 은척면 우기리 자기집에 동학본부라는 간판을 걸고 다시 포교를 시작하였다. 1922년 5월에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얻어 포교에 주력하여 교당을 신축하고 충청북도, 경상북도, 강원도 지역에 전도사를 파견하여, 1929년 통계에 따르면 신자가 1,500여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상주 동학본부는 흔히 상주 동학교당이나 상주 동학교라고도 하는데, 본 글에서는 상주 동학본부라고 칭하였다. 0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검색어 ‘궁을가’, “상주본 「궁을가」는 4·4조로 된 장편가사인데, 다른 「궁을가」와 비교할 때, 1행이 끝날 때마다 “궁궁을을(弓弓乙乙) 성도(成道)로다.”를 후렴구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며, 4음보 1행으로 총 341행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비판하고 그 극복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궁을가」는 궁을에 대한 평이한 설명보다는 “궁궁을을 성도로다.”의 반복을 통한 가사 자체의 신통력을 강조하고 있다.” 08 김기현, 「東學歌辭에 나타난 東學의 變貌 : 용담유사와 상주 동학가사를 중심으로」, 「문화와 융합」 16 (1995), p.5. 09 박병훈, 「궁을가 연구」, 『종교학연구』 37 (2019), pp.123-124 참조. 10 한국가사문학(http://www.gasa.go.kr/). 11 번호 항목에 ‘국’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고, ‘가’는 한국가사문학관 소장본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가사문학관 소장 외에도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궁을가」 필사본들이 있지만 직접 확인하지 못하여 제외했다. 12 “조선 강산 명산이라”를 말씀하신 시기는 1903년 음력 11~12월 혹은 1907년 음력 6월경으로 추정되며, “사명당 갱생”을 말씀하신 시기는 1909년 음력 4월경으로 추정된다. (교무부 내부 자료, 「타 경전 비교 상제님 연보 작업」 참조.) 13 국가보훈처(http://www.mpva.go.kr),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은 그가 저술한 대표적인 역사서로 19세기 후반 흥선대원군집권기부터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되기까지 47년간의 정치, 경제를 비롯한 전 분야에 걸친 내용을 자신의 주관적 입장에서 서술한 근대사 관련 중요 자료이다. 『매천야록』은 당시의 역사전반을 서술한 것이라면 『오하기문』은 특히 자신이 보고 들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중점을 두어 기술한 것이다.” 14 황현, 김종익 역,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고양: 역사비평사, 2016), p.215. 15 같은 책, p.383. 16 같은 책, p.215, 각주 218, “『동경대전』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스승인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을 집성한 경전이다.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 「축문」, 「주문」, 「입춘시」, 「절구」, 「강시」, 「좌잠」, 「화결시」, 「탄도유심급」, 「결」, 「우음1」, 「팔절」, 「제서」, 「영소」, 「필법」, 「유고음」, 「우음2」, 「통문」, 「통유」, 「포덕식 외」, 「무자판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격검가」와 「궁을가」는 『동경대전』에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강신주」와 「강령주」는 독립된 주문이 아니라 「주문」의 일부 내용이다.” 17 박병훈, 「한국 비결가사 연구 : 비결에서 비결가사로의 전환과 전개」, 『종교와 문화』 41 (2021), pp.14-15 참조, “동학농민혁명 당시와 천지공사시기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않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궁을가」와 「검결」을 비교해 볼 때 그 성격이 유사하여 같이 불릴 수 있다는 점에서 『오하기문』에 언급되는 「궁을가」가 지금 전해지는 「궁을가」와 같은 성격의 가사라고 여길 수 있다.” 18 한국가사문학(http://www.gasa.go.kr/), 검색어 ‘궁을가’. 19 한국가사문학 홈페이지 소개에는 三皇五帝㤙德이 三星五帝㤙德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오탈자로 보인다. 본 글은 원본에 따라 三皇五帝㤙德으로 표기하였다. 20 박병훈의 「궁을가 연구」에 따르면, 이 자료는 ‘용호도사 궁을가 유형’에 속한다. 21 황현, 앞의 책, p.223, “『감록』의 원본에는, 임진년 전란은 ‘이재송송(利在松松)’,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 난은 ‘이재가가(利在家家)’, 조선 말기의 국운은 ‘이재궁궁을을(利在弓弓乙乙)’이라고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풀이했다. “일본이 이여송을 만나 패하였으니 송송이라는 예언이 적중했다.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을 때 마침 날씨가 몹시 추워서 집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으니 가가도 적중했다. 다만 궁궁을을이 앞으로 무엇을 예언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2 『정감록』, 「도선비결」, “임진년에 섬 오랑캐가 나라를 좀먹으면 소나무와 잣나무에 의지할 것이요,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가 나라에 가득하니 산도 이롭지 못하고 물도 이롭지 못하고 궁궁이 이롭다.(壬辰島夷蠹國 可依松栢 丙子坎胡滿國 山不利 水不利 利於弓弓)” 23 『해월신사법설』, 8.영부주문 2절, “경에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이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라’하셨으니, 궁을의 그 모양은 곧 마음 심자이니라.(經曰 「吾有靈符 其名仙藥 其形太極 又形弓弓 受我此符 濟人疾病」 弓乙其形 卽心字也)” 2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이돈화(李敦化, 1884~1950) : 일제강점기 천도교 중앙종리원 상주선도사, 천도교청년회 지육부장, 천도교청년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천도교인. 25 이돈화, 「천도교경전석의(1)」, 『아세아연구』 6-2 (1963), p.242, “①영부는 한울님의 마음을 이름이다. ②영부의 이름을 선약이라 하시니 선약은 곧 장생불사를 이름이다. 천주의 영심(靈心)은 그 본질이 죽지 않고 기리 삶으로써 이름을 선약이라 한다. ③태극과 궁궁은 이름은 다르되 형상은 같다. 이는 한울님의 심령을 형용하여 나타낸 것이다. 태극은 우주의 본체로서 음양이 아직 갈라지지 않은 전체다. 태극에서 음과 양이 갈리고 음양에서 팔괘가 갈리어 천지 만물이 생겼다 하였은 즉 태극은 실로 만물의 어머니다. 그러므로 영부는 만물의 어머니인 한울님의 영심이다.” 26 조재훈, 『조재훈 문학선집 제3권 동학가요연구』 (서울: 솔출판사, 2018), pp.51-112 참조. 27 조선왕조실록에 『정감록』이 처음으로 언급된 시기는 정조 6년(1782년) 11월 20일의 기록이다. 당시는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받았기 때문에 정본은 존재하지 않고, 250여 년 동안 수많은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필사되며 내용이 재창조되었다. 28 『동경대전』, 「포덕문」, “吾有靈符 其名 仙藥 其形 太極 又形 弓弓 受我此符 濟人疾病 受我呪文 敎人爲我則 汝亦長生 布德天下矣” 29 교무부, 「도인탐방 : 대순진리회 감사원장 류기찬」, 《대순회보》 70호 (2007). 30 교무부, 「도인탐방 : 사정위원장(司正委員長) 이재근(李在根)」, 《대순회보》 78호 (2007). 31 ‘道下知’는 『격암유록』에 나오는 말인데, 『정감록』의 이본(異本) 가운데 ‘道下止’ 대신 ‘道下知’를 사용한 자료가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32 교무부, 「도인탐방 : 한성방면 조영철 선감」, 《대순회보》 80호 (2008). 33 고남식, 「대순사상에 나타난 동학의 위상과 증산의 참동학 전개」, 『대순사상논총』 16 (2003) 참조. 34 공사 1장 2절. 35 직접 상제님께서 이 두 구절의 내용을 언급하시고 그 뜻을 풀이해주셨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36 「도전님 훈시」(1989. 3. 15) 37 황현, 앞의 책, p.233, “동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난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너도나도 믿고 몰려들었다. 그러고 마침내 「궁을가」를 지어 서로 느낌을 공유하고, … 활시위를 그린 다음 그 아래 을자를 써넣어 궁을의 예언에 맞추고자 노력했다.” 38 행록 5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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