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지정과 해원상생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차선근 교수
해원상생 벽화
‘해원상생’ 벽화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어머니가 새참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면서 아이를 업고 있거나, 또는 아이 손을 잡은 모습입니다. 불편하게 짐을 이고 길을 가야 하지만 아이까지 더 챙겨야 하는 고단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고,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봅니다. 이 모습은 흔히 ‘모자지정(母子之情)’이라 하여 도인들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자세로 이해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왜 ‘해원상생’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일까요? 해원상생은 상생을 목표로, 상생하는 방법으로써, 원한을 풀거나, 원한을 풀어준다는 뜻이니, 어쨌든 원한이란 게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 그림 속 어디에 원한이 숨어있나요? 자상한 어머니는 힘든 상황에도 불평하지 않고 따스하게 아이를 보살피고 있을 뿐인데, 도대체 여기에 무슨 원통한 원한이 있다는 걸까요? 이 그림을 ‘모자지정’으로 해설하는 것은 쉽게 수긍이 가지만, ‘해원상생’이라는 제목이 왜 붙었는지는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그림에 원한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전생의 원수가 자식으로 태어나는 법이므로, 그림 속 어머니와 자식은 원수 사이고, 그래서 원한이 숨어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원수가 자기의 원한을 갚기 위해 자식으로 태어나는 인연을 ‘보원(報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전생의 원수인 자식이 갖가지 말썽을 일으킬 것이 뻔합니다. 어머니는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식을 향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해원상생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불교 교리를 빌린 이 해설은 우리의 ‘해원상생’ 벽화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벽화에는 자식을 원수로 인식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 원망도 괴로움도 없는 것이 해원상생
어머니가 무거운 짐을 이고 아이를 데려가면서도 자애로운 얼굴로 아이를 쳐다보는 이 그림은 1982년 음력으로 9월 5일 무렵에 처음 그려졌습니다.01 이 그림이 완성된 후, 도전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가면서 아이를 (무거운 줄도 모르고) 돌아본다. 부모 자식 간에는 서로 어떤 일이 있어도 원망이 없다. 모자지정(母子之情)으로 하라. 한(恨)이란 원망(怨望)에서 오는 것이다. 척이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원망함이 없이 하라.” 「도전님 훈시」 (1982. 9. 17)
몇 년 뒤 도전님께서는 이와 비슷한 훈시를 다시 해주셨습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자애심보다 더한 것이 도인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우리 도의 해원상생이며, 진리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몸에, 정신에 배여야 우리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도가 좋고 옳다는 것을 알면, 이렇게 해야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가 좋은 것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운수가 있다는 것을 알면 저절로 됩니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아기를 업었을 때도 괴로움을 모르는 것이 해원상생입니다.” 「도전님 훈시」 (1987. 6. 2)
도전님 훈시에 의하면, 어머니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만 하는데 아이까지 또 챙겨가며 데리고 가야 하니 괴로움이 배가되는 상황이지만,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도 않고 괴로움을 느끼지도 않는 것이 해원상생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 안에는 원한이란 게 아예 없는 겁니다. 아이가 전생의 원수라는 사실을 어머니가 삭히며 참고 인내한다는 것이 아니고, 아이를 업고 걸리는 게 힘들어도 그 자체에 대해 아무런 힘듦이나 원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도전님께서는 이것이 바로 해원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원상생에 대한 설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해원상생 개념의 확장
우리의 실천 수도 현장에서 해원상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큽니다. ‘해원’은 원한[冤]을 푼다[解]는 뜻이고, ‘상생’은 서로[相] 살린다[生]는 뜻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합친 해원상생은 ‘상생을 목표로, 상생하는 방법으로써, 원한을 풀거나, 원한을 풀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02 하지만 도전님께서 그림으로써 알려주신 가르침을 떠올려보면, 해원상생에는 이런 글자 풀이를 떠나 감추어진 의미가 더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애초에 내가 남을 미워하는 원한을 갖지 않도록, 또한 남이 나에게 원한을 갖지 않도록(내가 남에게 척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원한을 풀거나 풀어준다는 것은 문제가 되는 원한이 이미 있음을 인정한 뒤에 해야 하는 일을 말합니다. 만약 원한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면, 원한을 풀거나 풀어주어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원한을 풀어야만 하는 상황을 애초부터 만들지 않음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지러워지면 시간과 비용을 쓰면서 땀 흘려 치워야 하지만, 애초에 어지럽히는 일 자체가 없다면 이런 수고로움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하는 것이 해원상생이지만, 그보다 더 효과적이고 좋은 해원상생은 원한을 없애려고 노심초사할 상황이 아예 만들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원망함이 없어야 해원상생이 된다는 도전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이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이 없어야 하듯이, 누군가가 나를 원망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척을 짓지 말라는 상제님의 가르침으로 이해합니다. 척은 남이 나에게 갖는 원한이니, 척을 만들지 않는 것은 남이 나에게 갖는 원한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해원상생입니다. 이러한 해원상생을 <그림 1>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말로 풀어보자면, 이런 순서가 됩니다. 첫째, 미움을 버림으로써 애초에 원한을 만들지도 않고, 남이 나에게 원한을 갖도록 만들지도(척을 짓지도) 않는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싼 원한이 존재한다면 그 원한은 왜 생겼는지 그 원인을 따져본다. 셋째, 나 때문에 남이 원한을 가졌다면 내가 척을 지었다는 뜻이니, 즉시 상대를 찾아가 원한을 풀어주어야(척을 풀어야) 한다. 내가 남으로 인해 억울하거나 나의 허욕으로 인해 원한이 생겼다면, 나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돌아보며 허욕을 버리고 상생의 마음과 방법을 동원하여 즉시 원한의 매듭을 풀어 날려 버려야 한다.
■ 도통과 운수를 받으려면
다시 해원상생 벽화로 돌아와 봅시다. 이 벽화의 핵심은 아이에 대한 원망과 괴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관점에서 이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야만 하는 길을 무조건 가야만 하는 처지라면, 주변이 자기를 도와주든가 아니면 차라리 간섭 말고 내버려 두든가 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거추장스러울 수도 있는 짐을 더 감당하라고 하다니요! 괴롭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결코 짐이 아니죠. 어머니에게 있어 자식은 아무 조건 없이 무한한 사랑을 무조건 베풀어주어야 할 대상인 것뿐입니다. 모자지정은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힘들어도 밉고 원망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해원상생 벽화의 가르침입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해원상생으로 수도하는 일이 어렵나 봅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상생의 길을 걸어가는 게 수도인의 숙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죠. 남들은 이고 진 짐이 무거운 어머니가 힘들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머니는 아무런 괴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맙고 감사하기만 합니다. 더 좋은 수도의 환경을 만들어 준 것에 대해서요. 보답도 명예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가야 할 길이니 가는 것뿐입니다. 미움과 원망을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해원상생입니다. 만약 미움과 원망이 생긴다면, 이제 그것을 해결해야만 하는 더 고단하고 거친 길이 갑자기 다가와 나의 앞을 막을 뿐입니다. 미워하면 안 됩니다. 원망하면 안 됩니다. 도전님께서는 그것을 해원상생 벽화를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미워할 일에도 미워하지 않고, 원망할 일에도 원망하지 않으면, 그때 묵묵히 곁에서 지켜보던 신명이 응해 도와주십니다. 그래야 신명과 인간이 서로 합해지고, 신인조화(神人調化)가 되어 도통을 받고 운수를 받습니다.
■ 바퀴벌레로 변한다고?
옆에서 뒹굴거리는 자식을 보면 억하심정(抑何心情)이 끓어오른다고요? 솔직히 저도 그랬던 적이 있습니다. 하도 미운 마음이 들길래 이 마음을 어떻게 끊을까 고민하다가,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사진들 가운데 1년씩을 대표하는 사진 한 장씩 골라서 죽 펼쳐보았습니다. 1살, 2살, 3살 …. 갓 태어나서 눈도 제대로 못 뜨든 아기가 기고 앉고 걷더니, 갑자기 쑥쑥 커서 곁에 있더군요. 아이가 커 온 사진들을 보니, 모든 것이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죠. 이 모든 건 시간이 만드는 일종의 역사 같은 겁니다. 아이가 만들어가는 삶의 역사 한 부분에 제가 끼어들어 있는 것이죠. 아이 처지에서는 그러합니다. 시간이 더 흐르면, 아이의 삶의 역사에서 제가 사랑을 적게 주고 미움만 많이 준 것에 대해 아이에게는 상처가, 저에게는 후회가 새겨질 게 뻔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겐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 겁니다. 그 아깝고 모자란 시간을, 미워하는 일로 낭비해버릴 수는 없지요. 생각해보면 아이 역시 하늘에서 맺어준 귀한 인연입니다. 귀찮은 짐도 아니고, 미움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 후로는 아이에 대한 미움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이도 커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사회에 나가 직장에도 다니죠. 그래도 저에겐 여전히 아이일 뿐입니다. 얼마 전, 아이가 와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아빠,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 웬 뜬금없는 질문이네요. 아무 생각 없이 불쑥 튀어나온 답변이 “아이고, 그래도 어떡하냐, 자식인데!”였습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이 질문이 2023년도 봄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꽤 유행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이 질문을 던져놓고 부모의 반응이 어떤지 살피는 거죠. 대개는 바퀴벌레로 변하는 일 따위란 없다고 타박하기도 하고, 바퀴벌레이니 때려잡는다거나, 유리병에 가두어 먹이 정도는 준다거나 하는 등, 반응이 각양각색이라고 합니다. 이때 아이에 대한 부모의 본래 감정이 숨김없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미움이 있거나 사랑이 부족했던 부모라면 이 질문에서 그 속마음이 바로 간파당하게 됩니다. 평소 미움이 없는 부모라면, 바퀴벌레로 변하더라도 끝까지 챙기고 사랑할 거라고 대답하게 되어 있어서, 아이가 내놓은 이 시험의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질문을 받았을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그 사실들을 다 알고 난 뒤에는 소심한 반격도 해보았습니다. “아빠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너는 어떻게 할 거니?” 무심코 튀어나오는 아이의 대답에서 아이의 마음이 드러나겠지요. 아이의 대답은 이 글에서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미움이 없어야 합니다.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해원상생이 됩니다. 사랑할 시간도 모자란 판인데, 미워할 시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이 도전님의 가르침입니다. 미운 마음이 든다고요? 원망하는 마음이 든다고요? 다음 노래를 찾아서 듣고 마음을 잘 달래보기를 권합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 심수봉, <백만송이 장미> 가사 중에서
01 대순진리회 기획부, 『도장 연혁(1969.5∼1988.7)』 (필사본, 1988) 참조. 02 차선근, 「가해자와 피해자의 콜라보, 해원상생」, 《대순회보》 246호 (2021),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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