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자신(改過自新)
교무부 조광희
“허물이 있다면 본심적으로 밝히고 개과자신(改過自新)하여 청정한 마음으로 속히 환원하여야 할 것이다.”01
위 훈시는 허물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여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신 말씀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은 존재로서 누구나 실수와 잘못을 하며 살아간다. 이와 관련해서 도주님께서도 “인숙무죄(人孰無罪)요 개과하면 족하니라.”02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면 누구나 살면서 죄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에만 얽매여 앞으로의 바른 삶을 사는 데 집중하지 못하면 안 된다.’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는 늘 성찰하는 마음으로 잘못을 발견하여 고쳐 나가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기 잘못을 바로잡지 못해 새롭게 변화하지 못한다면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도통하려는 수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도전님께서 말씀하신 개과자신에 대해 살펴보고 수도의 지침을 삼고자 한다. 개과자신은 『사기』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에 명의 태창공 순우의(淳于意)의 막내딸이 황제에게 올린 글에서 유래한 사자성어이다. 여기서 순우의는 의술을 좋아했다. 어느 날 유능한 의술을 지닌 양경을 만나 지금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의술을 버리고 그에게 새롭게 의술을 익혀 많은 사람을 치료하였으나 사람에 따라 차별하여 치료해 주지 않아 많은 환자가 그를 원망하였다. 한(漢)나라 문제(文帝) 4년에는 어떤 사람에게 고발당해 ‘육형(肉刑: 몸을 불구로 만드는 형벌)’에 처했다. 이때 막내딸이 자신이 관청의 노비가 되어 속죄하겠으니 아버지를 용서해 줄 것을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소첩이 매우 비통한 것은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죄를 받은 자는 다시 전처럼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고자 하나 그렇게 할 방법이 없으니 끝내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妾切痛死者不可復生而刑者不可復續, 雖欲改過自新, 其道莫由, 終不可得.) 이 글을 읽은 황제는 이를 측은하게 여겨 그해 안에 육형을 폐지했다.03 이 고사에서 유래된 개과자신에서 ‘개과(改過)’란 ‘허물을 고친다’라는 것이며, 허물이란 ‘저지른 잘못’을 뜻한다. 그리고 ‘자신(自新)’은 ‘스스로 새롭게 한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개과자신은 ‘자신이 지은 허물을 고쳐 새롭게 거듭난다’라는 의미가 되었다. 이와 유사한 고사성어로는 ‘지난날의 허물을 고쳐 올바르고 착하게 된다’라는 의미의 개과천선(改過遷善)이 있다. 개과자신의 첫걸음은 무엇보다 자기 잘못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무지하다면 그 허물을 고칠 수 없게 되므로 새로워지는 길은 더욱 요원해지기 때문이다. 대개 사람들은 스스로 잘 안다고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현실적으로 내면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감정에 치우쳐 생각하기 쉬우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려면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된 하나의 방법으로 메타인지(meta-cognition)가 있다. 메타는 ‘더 높은’ 혹은 ‘초월의’라는 의미로, 메타인지는 ‘더 높은 인지’ 혹은 ‘초월적 인지’를 뜻한다. 자신의 인지 과정에 대하여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ㆍ발견ㆍ통제하는 정신 작용을 뜻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인지에 대한 인지’ 또는 ‘생각에 대한 생각’이라 한다. 즉 메타인지는 자신의 인지와 관련된 사고능력을 한 발 뒤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생각의 기술’로 이해할 수 있다.04 이러한 메타인지에서 목적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깨닫는 데 있다. 그래서 그 핵심은 자신이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인가 나아가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들이 과연 모두 맞는가에 대해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따라서 메타인지에서 주요한 방법은 제삼자의 시각에서 자신에게 질문을 반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05 이는 자신에게 의문을 품고 숙고하는 시간을 요구한다. 이러한 메타인지적 사고를 통해 나를 돌이켜본다면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옳다고 믿었던 나의 언행이 틀릴 수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 기존의 앎과 믿음에 대해서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달아야 한다는 취지로 강조한 “너 자신을 알라”와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06라는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지할 것을 강조한 명언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07 이처럼 ‘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메타인지적 사고는 나의 허물을 인식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전님께서 말씀하신 개과자신을 위해서는 현재 자기 모습에서 어떠한 허물이 있는지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 허물을 도전님께서는 본심적으로 밝혀야 한다고 언급하셨다. 여기서 ‘본심’이란 무엇이며 ‘본심적으로 밝힌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이에 대해 훈회의 첫 번째 항목인 ‘마음을 속이지 말라’에 관한 다음의 설명을 통해 살펴보자.
마음은 일신의 주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 사심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요,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다. 원래 인성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 (『대순진리회요람』)
윗글에서 ‘양심은 천성 그대로의 본심’이라 하였으므로 ‘본심’은 곧 ‘양심’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심은 인성의 본질이지만 마음이 사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도리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되고 이는 곧 자신의 허물이 된다. 모든 죄악의 근원은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며, 이는 허물을 짓게 하는 원인이 되므로 정직과 진실로써 근절할 때 본심인 양심을 되찾는 것이며 허물을 만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심적으로 밝힌다는 것’의 의미를 알아보면 ‘본심적으로’는 ‘양심적으로’라는 뜻으로서 ‘양심에 비추어서’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밝힌다’는 ‘드러낸다’라는 뜻으로 자신의 허물을 남들에게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밝힌다’라는 말 앞에 ‘본심적으로’라는 단서가 붙은 것을 보았을 때, 이는 맥락상 자신의 허물을 내면의 양심으로 밝혀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다시 말해 나의 생각과 언행에 나타난 허물을 양심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메타인지적 사고를 포함하는 것이다. 양심은 진실하고 순결한 본연의 마음으로서 자신의 허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를 찾게 되면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허물을 알 수 있다. 도전님께서는 양심을 근본으로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허물이 있고,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허물이 생기기 마련이다. 수도 과정에서 허물을 뉘우쳐 고치는 일은 한 번으로 끝날 수 없기에 지속해서 자신을 살펴야 한다. 따라서 개과자신을 강조한 도전님의 말씀은 지난날의 잘못을 고친다는 일상적 교훈에 더해 수도인에게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처방으로서 본심인 양심의 회복을 강조하신 것이다.
01 「도전님 훈시」(1986. 4. 25). 02 교운 2장 15절. 03 사마천, 『사기 열전 2』, 김원중 옮김(서울: 민음사, 2007), pp.215-217 참고. 04 홍종열, 여영현, 「상호문화역량으로서의 자기효능감 강화를 위한 메타인지 연구」, 『국제문화연구』 13 (2020), p.56 참고. 05 같은 글, p.57 참고. 06 『논어』 「위정편(爲政篇)」,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07 현대 메타인지의 개념은 동서양의 고대 사상가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고대의 사유가 현대에 이르러 더욱 세분화 전문화되었고, 그중 하나가 심리학 및 교육학 등에서 개발된 메타인지에 관한 개념이다. 임영익, 『메타생각』 (서울: 리콘미디어, 2014), pp.259-260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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