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과 마음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차선근 교수
▲ 공자와 공문십철, 송나라, 대만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위키미디어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과 그 사람을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속사정과 그 일의 전후를 모르는 상태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접하게 되면, 그 사람과 그 일의 진의를 모르고 비방만 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 이런 일은 ‘뒷담화’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가 가려우면, 일본에서는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면, 미국에서는 귀가 불타는(burning) 느낌이 들면 누가 내 뒷담화한다고 여긴다니, 이런 일은 동서양이 마찬가진가 봅니다. 그래서 뒤에서 남 또는 어떤 일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는 뒷담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평가할 때는 항시 신중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의 말만 듣는다거나, 어느 한쪽의 측면만 바라보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천만합니다. 양쪽의 이야기를 같이 들어보고, 여러 관점에서 여러 처지에서 다 각도로 바라볼 수 있어야 어느 정도의 평가나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명분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가 대상을 마주할 때, 그 대상이 정당한 명분을 갖추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글은 명분의 개념을 살펴볼 것입니다. 나아가 그것조차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짚어보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정명론과 명분
옛날 춘추전국시대의 일입니다. 공문십철(孔門十哲)01 가운데 한 명인 자로(子路)가 스승 공자에게 “위나라의 군주가 선생님을 등용해 정치를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을 먼저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공자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할 것[正名]이다!”02 그리고 설명을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따르지 못하고, 말이 따르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일어나지 않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알맞지 않으며, 형벌이 알맞지 않으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03 자기보고 정치를 하라고 하면, 각자 주어진 이름에 따라 바르게 행동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공자의 말입니다.
▲ <경대부장>, 송나라, 대만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위키미디어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의 도리를 물었을 때도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라고 답했습니다.04 임금이라면 임금답게, 신하라면 신하답게, 아비라면 아비답게, 어미라면 어미답게, 자식이라면 자식답게 각자의 이름에 따른 역할에 충실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죠. 이것을 정명론(正名論)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명분입니다. 그러니까 각자에게 주어진 이름[名]에 따라서, 그 역할에 따라 구분되는[分] 도리를 다해야 옳다는 것이 명분(名分)입니다. 임금은 임금이니까 임금으로서 임금의 역할에 충실하고, 신하는 신하니까 신하로서 신하의 역할에 충실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니까 아버지로서 아버지의 역할에 충실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니까 어머니로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명분론은 꽤 합리적이고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공자는 정치 영역을 넘어 역사관에도 이 명분론을 사용했습니다.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春秋)』가 그 대상이 되었죠. 공자는 전해 내려오던 『춘추』를 다시 편집하고 수정하면서, 정명론에 입각한 명분 그리고 선악과 시비를 따지는 포폄(褒貶: 칭찬하고 꾸짖음)의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대개 『춘추』의 명분은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로써 『춘추』는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공자가 생각한 관점 즉 명분과 포폄이라고 하는 주관적 견해로 가공된 서적이라는 비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고 하는 역사 기록 방식이 이런 것입니다. 명분은 공자의 유가(儒家) 집단만이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 집단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장자(莊子)』는 물론이요, 『상자(商子)』, 『관자(管子)』, 『시자(尸子)』, 『여씨춘추(呂氏春秋)』 등에도 명분에 대한 강조가 발견됩니다.05 각자에게 주어진 분수와 자리를 제대로 잘 지키라는 명분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필수적인 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대를 이끌었던 이런 사상가들에 의해 명분은 공자가 말한 정치 방법과 역사관을 넘어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필수 개념으로 그 의미를 확장해 갔습니다. 당면한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을 반영한 명분은 인간과 공동체 집단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열쇠로서 강력한 기능을 행사해 왔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그 일을 해야 할 합당한 이유와 필요성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명분이라고 부르게 된 배경이 이러합니다.
명분의 한계
명분을 갖추지 못한 일은 추진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명분부터 내세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명분이 항상 옳고 정의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 한나라의 동중서(董仲舒, BCE.179~BCE.104)는 유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구축하면서 경직된 계급 신분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핵심 논리가 명분이었습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지만, 이 논리가 계급 신분제와 잘못 결합하면 아랫사람들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노비는 노비로서 노비다워야 하고, 노비 자식은 노비 자식으로서 노비 자식다워야 하니, 노비는 대를 이어 영원히 노비 신분으로만 살아야 한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조선 후기의 개혁가로 알려진 정조(正祖, 조선 21대 임금, 재위 1776∼1800)의 발언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존재가 노비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 식구와 나이를 헤아려서 사고팔고 하니 짐승이나 다를 바 없고, 아들 손자로 전해 가면서 이리 갈라지고 저리 갈라지니 토지나 매한가지며, … 양반과는 혼인도 할 수가 없고 이웃에서도 사람 축에 끼워 주지 않으니, 높고 두꺼운 하늘과 땅 사이에 갈 곳 없는 자와 같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그렇게 만들 이치가 있을 것인가.06
정조는 물건처럼 사고 팔리므로 가족 해체의 비극을 겪어야 하는 노비의 비참한 삶에 대해 연민의 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노비 규정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대신 고용(雇傭)의 법을 만들어서 대물림은 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한하도록 조치코자 …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오로지 명분만을 숭상하는 편인데, 만약 양민과 천민을 한데 섞어서 양반의 신분[班閥]이 분명하지 못한다면, 상대를 무시하고 덤빌 자가 틀림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07
정조는 유교 국가의 뼈대를 이루는 양반-중인-양인-천민이라는 세습 계급 질서가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명분’을 지킬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노비를 불쌍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노비 제도를 혁파할 수 없었습니다. 정조 시대에는 병사로 복무하거나 재산을 축적하여 곡식을 대거 내면 노비 신분에서 면천될 수 있어 노비 제도 자체가 헐거워진 데다가, 노비 도주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국가 노동력 징발[貢役]에 심각한 차질이 생김으로 해서 이들을 양민(良民)으로 신분 변경하여 도주를 막아야 할 현실적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생명력을 잃어가는 노비제를 폐지하기 위한 논의도 여러 차례 열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노비제가 폐지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시대의 통치 이데올로기, 즉 양반이 평민 위에, 그리고 노비 위에 군림하는 것이 정당한 인륜 질서라는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노비제는 정조 사후 약 100년 가까이 흐른 1894년 갑오개혁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폐지됩니다.08 비참한 인간의 삶도, 명분이라는 것에 가로막히면 개선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자인 소국은 강자인 대국을 섬겨야 마땅하다는 사대(事大) 역시 명분의 폐해를 보여줍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조선에 병력을 파견한 일에 대한 평가는 여럿입니다. 이여송 연합군이 평양성 탈환의 전공도 세운 적이 있으나, 6년 동안 이어진 전쟁 전체를 보면 과연 명나라 지원군이 조선군에 도움이 되기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일본군이 조선 침략의 이유를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두보 확보라고 하였던 사실을 감안하면, 명나라의 전쟁 참전은 엄밀히 말해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소위 나라를 구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다고 하여, 임진왜란 종전 후 망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명분(事大名分)을 지키려다 결국 청나라의 공격을 받아 삼전도의 굴욕을 겪어야 했음은 주지된 사실입니다. 비록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 불과하지만, 후금(청나라)과 명나라의 전쟁에 파병을 보내는 문제로 신하들과 논쟁하던 광해군이 사대명분의 허울을 지적하며 던졌던 다음 대사는 정곡을 정확히 찌른 것입니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뭐요? 도대체 뭐길래, 20,000의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라는 것이오. 임금이라면, 백성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소중하오.
오직 마음을 볼 뿐이로다
명분이 있어야만 정당성이 갖추어집니다. 그러나 앞에서 간단하게 들었던 두 사례에서 보듯이, 명분만으로 모든 일이 정의롭게 구축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명분과 더불어 또 한 가지의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명분의 공허함을 지적하는 개념으로 실리(實利), 실질이 잘 떠올려지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갖추어졌을 때라야 명분도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다음 일화를 볼까요?
공우는 종도들이 모두 상투를 틀고 있는데 자신이 삭발하였기에 그들과 싸이기 어려우므로 불안하게 생각한 나머지 머리를 길러 솔잎상투에 갓 망건을 쓰고 다니다가 금구(金溝)를 지나던 어느 날 일진회의 전 동지 十여 명을 만나 그들의 조소를 받고 머리를 깎여 두어 달 동안 바깥출입을 금하고 다시 머리를 기르는 중이었도다. 돌연히 상제께서 찾아오셔서 한동안 출입하지 않는 까닭을 물으시니 공우가 사실 그대로 아뢰니라. 상제께서 이르시기를 “나는 오직 마음을 볼 뿐이로다. 머리와 무슨 상관하리오.” 이 말씀을 하시고 공우를 데리시고 구릿골로 떠나셨도다.09
상제님의 종도가 되기 전에 동학을 신봉했던 박공우는 1904년 손병희가 주도한 갑진개혁운동(甲辰改革運動)에 따라 개화의 일환으로 상투를 잘라 단발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종도들은 여전히 상투를 틀고 있었습니다. 박공우는 다른 종도들과 어울리기 어렵다고 여겨 짧은 머리나마 대충 묶어서 솔잎상투를 하고 다니다가, 옛날 동료들을 만나 머리카락을 잘리는 봉변을 당했습니다. 여기에서 백여 년 전 상투를 자르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유교 이념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에 남성들이 상투를 트는 일은 효라고 하는 명분 때문에 정당화되었습니다. 신체ㆍ머리털ㆍ살갗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10이라는 『효경(孝經)』의 가르침이 그 근거였죠. 머리를 길러 상투를 트는 일은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이었으므로, 이것을 자르는 일은 효의 명분을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1895년 11월 을미개혁 때 위생적이고 일하는 데 편리하다는 이유를 들어, 상투를 자르라고 하는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었을 때, 전국적인 저항이 일어났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단발했었다가 겨우 상투를 조금 틀었는데 다시 단발을 당한 박공우로서는, 다른 종도들에게 효라고 하는 명분을 어긴 자로 비추어질 수 있었기에, 상투를 다시 틀 정도가 되도록 머리가 자라기까지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상제님께서는 상투가 있고 없음은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마음만 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회 통념상 상투를 보존함은 효의 명분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는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하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명분보다는 마음
명분이 없으면 일을 추진할 동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일을 하려면 명분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명분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분, 대의, 대의명분 이런 것을 내세우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명분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진 그 사람의 진심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옛날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주동자급 인물은 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녹두장군 전봉준, 또 손화중과 김개남이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중심이 되어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비천한 사람들을 면천시켜 주며, 외세를 몰아내자고 뜻을 모아 봉기한 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속마음은 제각각 다 달랐습니다.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 세우고 외세를 몰아내고 신분이 낮은 사람을 면천시키자는 명분은 분명 다 옳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속마음까지도 과연 그랬을까요?
손화중을 보면, 그는 전북 선운사 도솔암의 마애석불에 비장되어 있던 비결서를 꺼내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흘렸던 인물입니다. 탐관오리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김개남은 더 노골적으로 왕이 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김개남은 본명이 김영주였다가 후에 김기범으로 바꾼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남조선의 왕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이름을 김개남, 즉 남조선을 연다는 뜻으로 또다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자기의 손바닥에 남조선을 열 것이라고 열 개(開) 남쪽 남(南), 개남(開南) 두 글자를 써주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 결과 손화중과 김개남 주변에는 잘못된 사회 질서를 바로 하려는 뜻을 품은 자들보다는, 손화중 또는 김개남이 왕이 되면 벼슬자리 하나라도 얻어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이와 달리 전봉준은 상제님께서도 인정해 주셨듯이, 정말 남을 잘되게 해주려는 마음으로 보국안민의 명분을 가슴 깊숙이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명분은 옳은 것이었으나, 모두가 다 마음속에 같은 뜻을 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는 각자 자기의 야망으로 움직였던 사람이 많았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상제님께서는 전봉준이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왕이 되기를 꿈꾸었던 손화중과 김개남, 그리고 그들을 따랐던 무리는 전봉준과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상제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원한까지도 풀어주시는 공사를 보셨으나, 그들의 끝은 공허하기만 했습니다.11 이 지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을 계획할 때 명분을 먼저 생각하곤 합니다. 명분이 없으면 일의 추진력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품은 마음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속이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뜻을 갖추었을 때라야, 소위 명분이라는 것도 ‘정직한 명분’으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사람과 일에 대한 평가를 언급했었는데, 이때 평가의 기준도 역시 ‘마음’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일의 맥락과 선후ㆍ본말을 파악할 수 있어야 그 일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지만, 그 이전에 그 일이 가진 명분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자의 마음가짐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수도를 하는 우리는 도통을 하고 운수를 받음으로써 가족과 조상을 구제하고, 나아가 개벽 시대를 맞아 중생을 건지고 지상에 천국을 건설한다는 명분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분만 내세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명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강조하려는 사실은 그 명분이 그 수도인의 진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만 볼 뿐이라는 상제님 말씀에서 우리는 명분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명의 눈은 번개와 같으니 어두운 방에서도 마음을 속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혹여 자기의 권위와 위세를 명분 삼아 이용하여 도의 체계조직을 사당화(私黨化)하고 있지는 않은지 항시 경계하면서, 남 잘되게 하는 해원상생ㆍ보은상생의 기본원리를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실천하면서 나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매사 진심(眞心)을 다할 때, 비로소 일심(一心)의 경지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01 공자 문하에는 3천 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고, 그 가운데 72명의 뛰어난 제자를 ‘72현(賢)’, 또 그 가운데 더 뛰어난 10명의 제자를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공문십철은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游), 자하(子夏)이다. 공문십철 가운데서도 최고의 수제자로는 안회를 꼽는다. 02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論語』, 「子路」. 03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論語』, 「子路」. 04 『論語』, 「顔回」. 05 이연승, 「명분(名分)이라는 말에 대한 잡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뉴스레터≫ 742 (2022. 8. 30). 06 『弘齋全書』 第十二卷, 「翼靖公奏藁財賦類叙)」, ‘奴婢引’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접근일 2023. 6. 19). 07 같은 글. 08 이연승, 앞의 글. 09 교법 2장 10절. 10 『孝經』 「開宗明義章第一」. 11 공사 2장 19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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