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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 조선에 온 관성제군

조선에 온 관성제군



교무부 조규제


▲ 서울 동관왕묘, 관성제군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상제께서 신 원일을 데리고 태인 관왕묘 제원(關王廟祭員) 신 경언(辛敬彦)의 집에 이르러 머물고 계실 때 그와 그의 가족에게 가라사대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 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 하시고 양지에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경언은 처음 보는 일이므로 괴이하게 생각하였도다. (권지 2장 21절)


  관운장(關雲長, ?~219)01은 유비(劉備, 175~223), 장비(張飛, ?~221)와 함께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영웅 중 한 명이다. 그는 생전에 후한 헌제로부터 ‘한수정후(漢壽亭候)’라는 봉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촉한 황제 유선(劉禪)이 관운장에게 내린 ‘장무후(壯繆侯)’02를 비롯하여 공[公: 충혜공(忠惠公)] → 왕[王: 무안왕(武安王), 영제왕(英濟王)] → 제[帝: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國忠義大帝)] 등으로 그의 지위는 격상되었다.03 1614년에 명나라 신종(神宗, 1563~1620)은 그에게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三界伏魔大帝神位遠鎭天尊關聖帝君)’이라는 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관운장을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부르게 되었다.04
  조선에서 관운장을 기리는 사당인 관왕묘(關王廟)가 세워진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1592년 4월 18만여 명의 왜병이 조선을 침략하자 선조(宣祖)는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게 되었고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왜병은 경상도 지역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왜병과 정전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협상이 결렬되며 전쟁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정유재란(1597~1598)이다. 이때 명나라 신종은 추가로 지원군을 4개 부대로 편성하였는데 동일원(董一元)을 중군, 마귀(麻貴)를 동군, 유정(劉綎)을 서군, 그리고 진린(陳璘)을 수군 사령관으로 삼아서 파병하였다. 진린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연합함대를 이루어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때 파병된 명나라 장수 진린이 1597년 남대문 밖에 최초로 관왕묘(남관왕묘)를 세우며 관운장에 대한 신앙이 조선에 퍼지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관운장이 조선에서 어떻게 극진한 공대를 받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왕실에서의 수용과 공대


  유학을 숭상하며 무(武)보다 문(文)을 중시하던 조선에서 유학과 접점이 없는 중국의 무장인 관운장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남대문 밖에 관왕묘를 세운 후 이를 기념하는 제례와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 선조가 참석하는 문제를 놓고 조선에서는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중국의 신하를 모신 관왕묘에 조선의 왕인 선조가 참석해야 하는지, 참석한다면 어떤 형식으로 참여할 것인가에 대하여 찬성파와 반대파 간의 격렬한 논의가 있었다.


▲ 서울 동관왕묘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황응양(黃應暘) 등의 찬성파는 임란 극복의 은인인 명나라 장수들이 세운 관운장의 사당이니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반대파는 참배 의식에 대하여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없기에 준거할 만한 예절이 없으니 경솔히 관왕묘에 갈 수 없다며 반대 의견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을 중심으로 한 절충파는 가기는 가되 명나라 장수들과 같은 예를 행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논쟁을 벌였다. 선조 자신도 왕의 신분으로서 중국의 장수였던 관운장에게 배례하는 데 대하여 반발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관왕묘에 나아가 분향한 다음 술 석 잔을 이어서 올리고 재배하였다.05 전쟁이 끝나고 추가로 동대문 밖에 관왕묘(동관왕묘)가 건립되었는데 이를 놓고도 선조와 명나라 장수들은 건립 위치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였다.06
  조선 왕실에서 관운장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긴 것은 광해군(光海君, 1575~1641) 때의 일이다. 광해군은 관왕묘를 명나라와의 외교적 의전 장소로 삼고 명나라 사신들이 올 때면 이곳을 의례적으로 방문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광해군은 남관왕묘와 동관왕묘의 관리 상황을 점검하여 파손된 곳을 수리하게 하였고 매년 봄과 가을 경칩과 상강일에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07 그리고 외국으로 가는 사신 행렬의 전별(잔치를 베풀어 작별하는)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그래서 동대문 밖과 남대문 밖에 지어진 관왕묘는 그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외국에 사신으로 갈 때는 무사히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장소가 되었고, 돌아와서는 임금을 만나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의관을 갖추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08
  숙종(肅宗, 1661~1720) 초기에는 선대의 관행대로 관왕묘에 헌관(獻官: 임시로 뽑은 제관)을 보내 치제(致祭: 윗사람이 제물과 제문을 내리어 죽은 아랫사람의 제사를 행하는 일)를 올리게 하였다. 숙종은 『삼국지(三國志)』를 읽다가 관운장의 충의에 감동해서 관왕묘를 찾을 때도 있었는데 1691년 2월에는 숙종이 동관왕묘에 들러 참례하고, 그다음 날 “관제의 충의(忠義)를 본받아 왕실을 지키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관운장의 충의를 강조하였다. 또한 숙종은 직접 관운장의 절의와 충성심을 찬양하는 시를 짓고 그것을 목판에 새겨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 걸게 하였고09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들이 세운 후 전쟁이 끝나고 방치되어 있던 안동, 성주 등 지방에 있던 관왕묘를 수리하게 하였다.10


▲ 경북 안동 관왕묘 관성제군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영조(英祖, 1694~1776)와 정조(正祖, 1752~1800) 대에도 관왕묘에 대한 치제는 계속되었다. 영조는 즉위하자 바로 동관왕묘에 들렀고, 즉위 원년인 1725년 4월에는 관원을 보내 관왕묘에 치제와 충의를 흠모하고 존주대의(尊周大義: 중국을 존중함)의 뜻을 보이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 시대 때 국가에서 지내는 제향(祭享)은 그 규모에 따라서 대사(大祀)ㆍ중사(中祀)ㆍ소사(小祀)로 구분하였는데, 영조와 정조는 이를 기록한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에 관왕묘의 치제를 공식적으로 포함시켰다. 영조는 1744년에 관왕묘의 제사를 소사에 포함시켰고, 정조는 1785년 이를 중사로 격상시켜 거의 매년 관왕묘에 참례하여 배례를 올렸다.11
  이렇게 우리나라와 무관한 중국의 무관인 관운장의 제사를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내는 제향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이다. 왕을 비롯한 신료들이 관운장에게 배향하기 위해 관왕묘의 제례에 참석하고 이 자리에서 왕이 직접 배례를 올리며 술잔을 올리는 의례를 행한 것이다. 이 제향은 관운장에게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제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의 공식적 제향은 당시 조선에서 관운장이 얼마나 공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이렇게 국가에서 관왕묘에 치제를 지낸다는 점은 백성들에게 관운장에 대한 신앙의 전파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운장을 공대하려는 노력은 고종(高宗, 1852~1919) 대에도 계속되었는데 그의 관운장에 대한 관심은 정치적인 차원을 넘어 신앙에 가까웠다. 고종의 재위 기간이 외세의 침탈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시기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그가 관운장의 위신력(威神力)에 나라의 안위를 의지하려 했던 태도는 일면에서는 이해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관운장과 관련된 서적들이 이 시기에 다수 출간된 것으로도 나타난다. 대표적으로는 1876년에 관운장의 사적을 그림과 함께 표현한 『관제성적도지전집(關帝聖蹟圖誌全集)』과 관운장 신앙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한 『해동성적지(海東聖蹟誌)』가 간행되었다. 또한 1880년에 관운장에 관한 신앙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과화존신(過化尊神)』과 『삼성훈경(三聖訓經)』이 발간되었다.
  한편 명성황후는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피해 충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녀는 무당인 진령군(眞靈君)을 만나게 된다.12 그 무당이 명성황후의 환궁 시기를 알려 주었는데 그것이 마침 들어맞자 이것이 연이 되어 명성황후는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가까이 두었다. 진령군은 스스로 관운장의 딸이라고 하였고 명성황후는 그녀를 위하여 관왕묘의 건립을 건의하였는데 고종은 1883년 가을에 북관왕묘[北廟]를 건립해 진령군을 그곳에 머물게 하였다. 다음 해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 고종은 북관왕묘에 피신하여 머무르기도 하였는데 고종과 명성황후는 관운장의 위신력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여 북관왕묘를 증축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북관왕묘에 친히 비문을 지어주었을 정도로 큰 관심을 보였고, 비문의 글씨는 민영환이 썼다. 관운장이 조선에 전래된 이후 300여 년 동안 왕실에서 직접 관왕묘를 건립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었다.13


▲ 북관왕묘 관성제군 (서울 동관왕묘 소재,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현령소덕의열무안성제묘 현판, 서울 동관왕묘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관운장에게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는 호를 내리고 “나는 일찍부터 관운장을 공경하고 감탄하였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관왕의 충성과 의로움이 여전히 남아 여러 차례 조선을 도왔으니 그를 더욱 경모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1902년에 고종은 유비, 관운장, 장비를 합사하자는 조병식(趙秉式, 1823~1907)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관왕묘[西廟]도 건립하였다. 14 이는 고종이 외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도 같이 위태롭던 나라를 관운장의 위신력에 의지하여 해결하려 했던 신앙심의 발로였다고 할 수 있다.


▲ 장비 유비 관우 합사, (서울 동관왕묘 소재,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민간에서의 신앙


  관운장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소설 『삼국지연의』의 전파로 그의 충의가 민간에 널리 알려지며 명성을 쌓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그의 혼령이 나타나 전쟁을 도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명군이 서울을 지키는데 일본군이 쳐들어와 쌍방이 동대문과 남대문 밖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관공(관운장)이 적토마를 타고 나타나 허공에서 청룡언월도를 한 번 휘둘러 산머리를 치자 동시에 광풍이 일어나 일본군 쪽으로 모래바람이 일고 돌덩이가 휘날렸다. 명나라 군사는 이 광경을 보고 사기 백 배 하여 쳐들어가 일본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15


일찍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왜란 때에 관우의 신령이 여러 번 나타나 신병(神兵)으로써 싸움을 도와주어 명의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길 평양의 싸움에서 이긴 것과 도산(울산)에서의 싸움과 삼도에서 왜병을 구축(驅逐)할 때 관우의 신령이 늘 나타나 음조하였다.16


  관운장이 신명으로서 나타나서 전쟁을 도왔다는 그러한 이야기는 관왕묘가 건립된 이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전설은 관운장의 신령함을 믿는 민중들의 바람이 담겨 있는 것으로서 왕실과 달리 민간에서는 관운장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관운장의 영험함을 믿는 사례는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지은 『연암집(燕巖集)』 「영처고서(嬰處稿序)」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衕)에 푸른 기와를 얹은 사당에는 얼굴이 윤기가 나고 붉으며 수염이 달린 장엄(莊嚴)하고 엄숙한 관운장 상이 있다. 사녀(士女)가 학질을 앓게 되면 그 좌상(坐床) 아래에 들여놓아서 (관운장 상을 보고 놀라서) 정신이 나가고 넋이 빼앗기도록 하여 한기를 몰아내는 빌미가 된다.17


  학질에 걸린 사람을 관왕묘에 들여보내 치료한다는 것은 관운장이 신령하고 영험하다는 믿음이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왕묘는 관운장의 영험함을 믿고 복을 비는 사람들이 항시 모여드는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민중들의 양상은 『승정원일기』에서 간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사대부들이 가서 기도하고 유생들도 드나들었다는 기록18이나 일반 백성들이 분향하는 것은 금지할 필요가 없으나 무녀(무당)들이 분향하고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19는 내용을 통해 관왕묘는 민중들이 복을 기원하는 신앙적 기도처였음을 알 수 있다.
  숙종 때에는 ‘잡인들이 관왕묘에 출입하여 관운장의 상징인 수염을 잘라갔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문에 숙종은 일반 백성들이 관왕묘에서 제사를 올리는 행위를 음사(淫事)로 규정하고 이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20 영조 때에도 동관왕묘와 남관왕묘에서 복을 비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금지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 때 발간된 『한경지략(漢京識略)』21에는 “도성 안의 선비집 부인들이 관제(관운장)에게 기도하면 영험이 나타난다고 하여 향화와 공양이 사철 끊이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22 이렇게 관왕묘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민간에서 관운장 신앙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민간에서 관운장 숭배의 열기가 급격하게 확산된 것은 19세기 후반 고종 때였다. 당시 민간에서 ‘복마성제(伏魔聖帝)’라는 글을 써서 문미(門楣: 문 위에 건너지른 나무)에 항상 붙여 놓았다23는 풍습은 관운장의 위신력으로 집안의 액운을 막으려는 믿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관운장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자 자신이 바로 관운장의 아들이나 딸이라고 주장하면서 혹세무민하여 돈이나 금품을 갈취하는 행위도 늘어났다. 1899년 2월에 화재로 남관왕묘를 중수할 때 관운장의 아들이나 딸로 자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국고의 지원 없이도 관왕묘의 중건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사도 있다.24
  《독립신문》 1899년 4월 10일 자에는 차소사라는 여인이 자기 집에 관왕(관운장)의 화상을 걸고 기도하였는데 경찰이 단속하여 화상을 남관왕묘로 옮기고, 책, 예단, 향 등은 남관왕묘의 창고지기에게 맡겼다는 기사도 나온다. 1904년 8월 23일 《대한매일신보》에는 경무청의 조사를 빌어 당시 무당, 잡술사 등 관운장을 모신 자가 서울에만 500명이라는 기사도 보인다.25 이처럼 민간에서 관운장 숭배의 열기가 높았던 것은 사람들이 관운장의 영험함을 믿었고, 그만큼 액을 피하고 복을 구하기 위하여 관운장 신명에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민중들에게 관운장은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영험한 신명으로서 지극히 공대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맺음말


  관운장은 중국 삼국시대 유비를 도와 전장을 누비다가 서주의 하비성 전투에서 유비의 가족과 함께 조조(曹操, 155~220)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때 조조는 관운장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극진히 대우하였는데 유비에 대한 충의의 마음에 변함없었던 그는 끝내 유비를 찾아갔다. 하지만 당시 조조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고 여겼던 관운장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도주하는 조조를 화용도에서 만났을 때 그 은혜를 생각하여 조조를 살려주기도 하였다. 그래서 관운장의 충과 의는 사후에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서 의리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관운장을 기리는 관왕묘가 우리나라에 전래될 때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당시의 상황이 말해주듯 불가피하게 유입된 감이 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의 정치적인 상황의 변화와 함께 그의 충의가 강조되며 왕실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관운장에 대한 왕실의 공대는 영조 대에 『국조속오례의서례』에 관왕묘의 의례가 기록되면서 제도화되었다. 특히 고종은 관운장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는데 외세의 침탈로 위태로웠던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관운장에 대한 신앙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관왕묘가 국가 의례에 포함되어 공대의 대상이 되고 관운장이 신명으로 나타나 이적을 보였다는 이야기의 전파와 함께 그의 영험함에 의지하려는 사대부들과 백성들은 관왕묘에서 기도를 올렸다. 민간에서는 관운장에 대하여 신앙적 태도를 보였는데 고종 대에는 이러한 신앙이 절정에 이른 시기로 관운장에 대한 향화와 공양이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끊이지 않는 향화와 공양을 받았기 때문에 상제님께서는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 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26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관운장이 공사에 어떻게 힘을 다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은 『전경』에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상제께서 관운장을 공사에 쓰셨음을 추측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1907~1908년경 어느 날 태인 백암리에 있는 김경학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기 위해 박공우와 함께 그곳으로 가시던 도중에 관운장의 형모로 변하여 “내 얼굴이 관운장과 같으냐고 물으신 구절이다.27 이는 김경학의 집에서 행하실 공사가 관운장과 관련이 있기에 상제님께서 그의 형모로 변모하신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송독하는 주문에서 ‘진법주’, ‘운장주’, ‘해마주’ 등으로 관운장이 세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점에서 상제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01 권지 2장 21절에 나오는 ‘관운장’과 관련하여서는 『상생의 길』 창간호, 김주우, 「조선에서 극진한 공대를 받은 관운장」에서 소개된 바 있으나 이 글은 관운장의 신앙 양상을 좀 더 다루었다.
02 전인초, 「관우의 인물조형과 關帝信仰의 朝鮮傳來」, 『동방학지』 (2005), p.295 참조.
03 배규범, 민관동, 「관우의 신격화와 종교적 활용 양상 고찰」, 『비교문화연구』 47 (2017), p.118 참조.
04 배규범, 「관우신앙의 형성과 한국 내 전파 양상 고찰」, 『강원문화연구』 36 (2017), p.70 참조.
05 『선조실록』 48권, 36년 3월 정묘일조.
06 배규범, 「관우신앙의 형성과 한국 내 전파 양상 고찰」, pp.79-80 참조.
07 김탁, 『한국의 관제 신앙』, (서울: 선학사, 2004).
08 국사편찬위원회, 「전쟁의 기원에서 상흔까지」, 『한국문화사』 7권, (서울: 두산동아, 2006), pp.161-163 참조.
09 김탁, 앞의 책, pp.62-64 참조.
10 한종수, 「조선후기 肅宗대 관왕묘 致祭의 성격」, (중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23), p.2 참조.
11 김탁, 앞의 책, pp.66-69 참조.
12 전인초, 앞의 글, p.329 참조.
13 손숙경, 「19세기 후반 식민지기 관우 숭배의 확산과 쇠퇴」, 『석당논총』 (2016), p.237 참조.
14 김탁, 앞의 책, p.86 참조.
15 전인초, 앞의 글, pp.325-326 재인용.
16 배규범, 앞의 글, p.78 재인용.
17 박지원, 『연암집』 「영처고서」, “雩祀壇之下 桃渚之衕 靑甍而廟 貌之
樂團而鬚 儼然關公也 士女患瘧 納其床下 神褫魂 遁寒祟也”.
18 『승정원일기』 1181책, 영조 36년 5월 임오(壬午) 참조.
19 『승정원일기』 412책, 숙종 29년 6월 계사(癸巳) 참조.
20 배규범, 앞의 글, p.86 참조.
21 조선후기 정조 때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지명 등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한 책.
22 김탁, 앞의 책, p.83 참조.
23 배규범, 앞의 글, p.87 참조.
24 김탁, 앞의 책, p.91 참조.
25 같은 책, pp.91-92 참조.
26 권지 2장 21절.
27 권지 1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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