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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전경』 속 등장인물들의 인연 2

『전경』 속 등장인물들의 인연 2
1900년~1902년

 

 

교무부 정나연

 

▲ 전라북도 전주의 세천과 모악산 (2015년 12월 촬영)


  지난 회차에서는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1871(신미)년부터 3년간의 주유를 떠나셨던 1897(정유)년까지 『전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상제님께서 주유의 길에서 돌아오신 1900(경자)년부터 1902(임인)년까지 살펴보고자 한다. 상제님의 천지공사 초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전경』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인물 중에서 각자의 인연 관계나 상제님과의 인연이 잘 나타나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900년은 상제님께서 3년 동안의 주유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오신 때이다. 이해 『전경』에 등장한 인물로는 이치안(李治安)과 류서구(柳瑞九)가 있다. 상제님께서 고향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전주에 들르셨는데 이때 이치안을 만나셨다. 이치안은 전주 이동면 전룡리(全州 伊東面 田龍里)에 살고 있었는데 당시 그는 어딘가를 향해 황급히 가는 중이었다. 상제님께서는 이치안에게 “그대가 지금 혼사로 중매인을 찾아가나 그가 그대의 집에서 기다리고 있느니라. 그리고 오늘 중매인을 만나서 결정하지 않으면 그 일은 허사가 되리라”라고 하시며 그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셨다. 그는 상제님의 말씀을 따른 덕분에 중매인을 만나서 아들의 혼사를 치를 수 있었다. 01
  집안사람들만 공유하며 비밀스럽게 진행되던 혼사를 상제님께서 아시고 혼인 성사의 핵심 인물인 중매인을 만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02 족보에 따르면 이치안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시기적으로 볼 때 이 혼사의 대상은 그의 차남 혹은 삼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03 이 일로 인해서 상제님의 신이한 능력에 감복한 이치안은 장남인 이직부(李直夫)와 함께 상제님을 좇기 시작하였으며 혼사를 잘 치르고 나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상제님을 초빙하기도 하였다.04 훗날 상제님께서는 이치안의 집에 「고견 원려 왈지(高見遠慮曰智)」의 글을 써 놓으셨다.05
  이직부는 이치안의 장남으로 부친과 상제님의 인연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전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구절은 권지 1장 14절이다. 이 구절에 따르면 이치안의 초빙으로 상제님께서 방문하셨을 때 그의 집 훈장이 상제님을 시험하고자 하였다. 훈장의 마음을 미리 아신 상제님께서는 그 동네 호구와 남녀 인구의 수를 말씀하시며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줄어질 것이라”라고 하셨는데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죽어 말씀하신 그대로가 되었다. 1904(갑진)년 1월에는 장효순이 손자의 죽음을 상제님의 탓이라며 난을 일으켰는데 상제님께서는 이를 피해 이직부의 집에서 한 달여를 머물기도 하셨다.06 이때 이직부가 상제님께 부친의 당년 신수를 논평하시기를 청하였다. 상제님께서는 부득이 백지 한 장에 글을 써서 불사르신 후 다른 종이에 글을 써서 “급한 일이 있거든 뜯어보아라”라고 말씀하시며 봉해 주셨다. 연말에 이치안이 병들어 매우 위독해졌을 때 이직부가 봉서를 열어보니 “소시호탕(小柴胡湯) 두 첩”이라 쓰여 있었다. 그 약으로 이치안은 바로 쾌유하였다.07
  고향에 오신 상제님께서는 시루산에 모셔진 조모님의 묘를 옮기셨다. 상제님의 부친과 친분이 있는 류서구가 묏자리를 보는 지사(地師)로서 상제님을 보좌하였다.08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상제님을 그저 지인의 아들로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류서구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상제님의 부친을 종종 만나러 왔는데 그때마다 상제님께서는 이를 미리 아시고 항상 술과 안주를 준비해 주셨다. 상제님의 부친께서는 류서구에게 그러한 상황을 전했으나 그는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2년 1월 7일이 되어 류서구가 상제님의 부친을 찾아왔다가 마당에서 상제님을 만났다. 상제님께서는 아우 영학에게 책력의 틈에 끼워 둔 종이쪽지를 가져오게 하셨다. 그 쪽지에는 “인일(1월 7일)에 인간방에서 사람이 오는데 마당에서 만나게 되니 그는 꼭 류 서구였도다(寅日人來寅艮方 逢場必是柳瑞九)”라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이것을 본 류서구는 상제님의 예지에 놀라 이후부터 상제님을 경송하게 되었다.09
  1901(신축)년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박금곡(朴錦谷)이 있다. 이해 5월 중순에 상제님께서는 당시 대원사의 주지였던 박금곡에게 조용한 방 한 간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못하게 하신 후 불음불식의 공부에 들어가셨다. 그는 한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록 불음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시는 상제님의 몸이 상하실까 걱정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49일째인 7월 5일이 되어 상제님께서 공부를 마치고 박금곡을 불러 미음 한 잔만 가지고 오라 하시니 그가 반가운 마음에 곧 미음을 올렸다. 박금곡은 상제님께서 입으신 옷이 보기 민망스러울 정도로 남루하여 본댁에 사람을 보내 의복을 가져오게 하였다.10 그는 이때 상제님을 처음 뵈었지만 49일 공부를 시종하며 형성된 굳건한 믿음으로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 이후 박금곡이 자신의 일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청원하자 상제님께서는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90세가 넘어서 입적하리라”라고 하셨다.11
  박금곡과의 인연은 이경오(李京五)가 상제님을 따르게 되는 일화로 이어진다. 박금곡은 전주 화정동(花亭洞)에 사는 이경오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그가 다리가 부어 걷지를 못하는 신병(身病)이 있음을 상제님께 아뢰고 치료를 간청했다. 이때가 1902년경으로 상제님께서 처음으로 의법(醫法)을 베푸셨던 공사이다. 상제님께서는 이경오를 진맥하시고 “내가 이 병으로 표준을 삼고 천하의 병을 다스리는 시험을 하리라.”라고 하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셨다.12 그의 집은 1904년 1월 장효순의 난이 일어났을 때 상제님의 가족이 피신하여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13 이경오는 1904년 7월 일진회와 아전을 화해시키는 공사와도 관련이 있다. 이때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70냥을 청구하셨으나 이경오는 돈이 없다며 거절하였다. 공사를 마친 후 상제님께서 이경오에게 돈이 있으면서 왜 그렇게 속였느냐고 말씀하셨으나 그는 정색하여 “참으로 없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이경오의 집에 화적이 들어 그 70냥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님께서는 “그 돈에 척신이 범함을 알고 창생을 건지려고 청한 것이었거늘 그가 듣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다.14
  1902년 4월 상제님께서는 강세 경위와 장차 행하실 삼계대순 개벽공사에 대해 처음으로 밝히시고 명부공사를 행하셨다. 이때 공사에 수종을 든 사람이 김형렬이다. 이후 김형렬과의 인연으로 『전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로는 김자현(金自賢), 김갑칠(金甲七), 김보경(金甫京), 한공숙(韓公淑),15 김형렬의 여동생과 이환구 등이 있다. 이들 중 김자현, 김갑칠, 김보경은 김형렬과 같은 안동 김씨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사람으로 서로 친척 관계이다. 족보에 따르면 김형렬과 김자현은 10촌, 김갑칠은 4촌 간으로 두 사람 모두 하운동에서 가까운 동곡에 살았다. 당시 동곡은 안동 김씨 집성촌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반면에 김보경은 함열에 살고 있어서 김형렬이 살았던 하운동이나 동곡과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재실에서 시제를 모시거나 여러 문중 대소사를 처리하는 중에 김형렬을 비롯해 동곡에 살고 있던 이들과도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자현은 동곡에 사는 대사성공파 자손 중에서도 김형렬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상제님에 대한 믿음도 남달랐던 것 같다. 증손자의 말에 따르면 김자현은 몸이 좋지 않았을 때 김형렬의 소개로 상제님을 뵌 후 상제님께서 일러주신 방법대로 하여 병이 완쾌되었고 이를 계기로 상제님을 따랐다고 한다.16 제생 편에는 상제님께서 김자현의 불편한 마음을 풀어주신 일화가 나온다. 같은 동리 사람 박순여가 왼쪽 다리에 부종이 생겨 움직이지 못하자 상제님께 치료를 간청하였다. 박순여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항상 김자현을 무례하게 대하였는데 김자현은 이를 속으로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상제님께서 죽을 병에 걸린 박순여의 간청을 김자현의 의사에 따르겠다고 하시며 뜻을 물으셨다. 김자현이 조금 주저하다가 “살려주심이 옳을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자 “박 순여는 불량한 사람이니라. 너에게 매우 무례하였으니 너와 함께 가서 치료하리라”라고 하시며 김자현을 앞세우고 박순여의 집에 가셔서 병을 고쳐주셨다.17
  고부화액은 상제님에 대한 김자현의 신심을 보여준다. 당시 김형렬ㆍ김자현은 친한 간수의 도움으로 상제님과 함께 조용한 감방으로 옮기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의 공사를 처결하나니 우리 셋이면 무슨 일이든지 결정하리라”라고 하신 후 김자현에게 “비록 몇십만 인이 이러한 화액을 당하였을지라도 일호의 상처가 없이 다 풀리게 할지니 조금도 염려 말라”라고 말씀하셨다.18 화액을 겪으며 종도들 중에는 상제님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후 모든 종도는 무사히 석방된 후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김자현은 김형렬과 함께 상제님께서 풀려나오실 때까지 끝까지 기다렸던 인물이다.19
  김형렬과 4촌 간이었던 김갑칠은 수륙병진 관련 공사에 참여하여 군항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상제님의 명에 따라 종이에 싼 안경을 북쪽으로 던졌던 인물이다.20 김갑칠은 항상 상제님께 응석으로 고집을 부렸으나 상제님께서는 그를 보고 웃으며 달래실 뿐이고 꾸짖지 않으셨다. 점점 정도가 심해지자 이를 본 김형렬이 하루는 참지 못해 “저런 못된 놈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으니, 상제님께서 “악장제거 무비초 호취간래 총시화(惡將除去無非草 好取看來總是花)라.”라고 하시며 그를 타이르셨던 일이 있었다.21 또 모내기 철인 어느 날 김갑칠이 상제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상제님께서 김갑칠에게 농사 형편을 물으니, 그가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하다고 말씀드렸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네가 비를 빌러 왔도다. 우사(雨師)를 너에게 붙여 보내리니 곧 돌아가되 도중에서 비가 내려도 몸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가 동곡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평에 이르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니 행인들은 모두 단비라 일컬으면서 기뻐하였고 흡족한 비에 모두 단숨에 모를 심었다.22
  김보경은 김형렬과 같은 종친(宗親)으로 김형렬이 살았던 금구군 청도리 하운동과 멀리 떨어진 함열(익산) 회선동(會仙洞)에 살고 있었다. 그는 1902년 4월 상제님께서 금구군 수류면 원평에 있는 김성보(金聖甫)의 집에서 지내실 때 김형렬과 함께 찾아오며 『전경』에 등장한다.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유 불 선(儒佛仙) 세 글자를 쓰게 한 후 눈을 감고 글자 하나를 짚게 하셨다. 그가 불(佛) 자를 짚자, 상제님께서는 기쁜 빛을 보이셨고 유(儒) 자를 짚은 종도에게 유는 부유(腐儒)라고 일러주며 공사를 보셨다.23 김보경과 관련된 일화 중에는 명부사자와 관련된 공사도 있다. 1904년 겨울 상제님께서 김보경의 집 외당에 계실 때 그는 모친의 위독함을 아뢰었다.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오늘 밤은 명부사자(冥府使者)가 병실에 침입하여 나의 사자의 빈틈을 타서 환자를 해할 것이니 병실을 비우지 말고 꼭 한 사람이 방을 지키면서 밤을 새우라”라고 말씀하셨다. 김보경과 그의 가족들이 상제님의 말씀을 따랐으나 여러 날이 계속되자 졸음을 못 이겨 상제님의 말씀을 잊어 갔다. 김보경이 방을 지키던 중 깜박 잠에 빠져 있다가 상제님의 외침에 놀라 깨어 보니 모친은 운명하여 있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사자란 바로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을 가리키신 것이었다.24 이 외에도 김보경은 1906(병오)년 1월 3일부터 동곡에서 있었던 호소신 공사라든가25 수륙병진 관련 공사 등 여러 공사에 참여하였다.
  동곡이 안동 김씨 집성촌이었지만 다른 성씨였던 한공숙도 이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동곡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과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형렬과도 인연이 되어 김자현, 김갑칠, 김보경과 같은 시기에 상제님을 따르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한공숙이 공사에 참여한 『전경』 구절이 많지 않은데 그 중 태을주가 태인 화호리(禾湖里) 부근의 숫구지에 전파되자 상제님께서 때가 이르다 하시며 그 기운을 거두시는 공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26 한공숙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전경』에 나온다. 그가 동곡에 계시는 상제님을 배알하러 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상제님께서 그와 술을 나누시다가 “일을 많이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친히 술을 따라주셨다. 한공숙은 “제가 무슨 일을 하였다고 하시나이까. 하여 드린 바가 없사옵니다”라고 여쭈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지난 밤 꿈을 꾸었나이다”라고 말씀드렸다. 상제님께서 “일을 많이 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뜻하노라”라고 가르쳐 주셨다. 옆에 있던 종도들이 한공숙의 꿈을 궁금하게 여기자 그가 “상제께서 저희 집에 오셔서 천하 호구(戶口)를 성책(成冊)하여 오라 명하시기에 오방신장을 불러서 성책하여 상제께 올렸나이다”라고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27
  당시(1902년) 김형렬이 살았던 청도리 하운동에는 김형렬의 막내 여동생(김성녀)과 그녀의 남편인 부안 출신 이환구(李桓九)가 살고 있었다. 행록 1장 29절을 보면 상제님께서는 이환구에게 “그대의 아내가 49일 동안 정성을 들일 수 있느냐를 잘 상의하라”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의 아내, 즉 김형렬의 막내 여동생과 상의하였고 그녀도 상제님의 신성하심을 들은 바가 있어 굳게 결심하고 이를 허락하였다. 날마다 머리를 빗고 목욕재계한 뒤에 떡 한 시루씩 쪄서 공사 일의 준비를 하였다. 여러 날 하다 보니 그녀는 괴로움에 불평을 품었는데 이로 인한 신명들의 노여움으로 떡이 익지 않는 당황스러운 일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성으로 49일을 마치자, 상제님께서는 친히 부엌에 들어가셔서 그녀의 정성을 치하하셨다. 이후 김형렬의 여동생과 그녀의 남편인 이환구는 이환구의 고향인 부안으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1905(을사)년 상제님께서 김형렬과 함께 부안에 있는 이환구의 집에 가셨을 때 이환구는 부안 사람 신원일(辛元一)을 천거하였다.28
  지금까지 1900년부터 1902년까지 『전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인연 관계가 잘 드러나 보이는 이들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1903(계묘)년부터 1904(갑진)년 사이에 『전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서로의 인연 관계가 비교적 잘 드러나는 이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01 교운 1장 11절 참고.
02 김현진, 「전경 속 이야기: 이치안 종도의 혼사」, 《대순회보》 269호 (2023), p.37 참고.
03 같은 글, p.33 참고.
04 권지 1장 14절 참고.
05 제생 43절 참고.
06 행록 3장 9절 참고.
07 제생 42절 참고.
08 행록 2장 7절 참고.
09 권지 1장 1절 참고.
10 행록 2장 12절 참고.
11 행록 2장 13절 참고.
12 제생 2절 참고.
13 행록 3장 4절 참고. 이경오의 집으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장효순을 피해 상제님의 가족들은 태인 굴치로 가셨다.(행록 3장 6절)
14 행록 3장 16절 참고.
15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p.82 참고.
16 김자현의 증손자인 김용희 씨 인터뷰(2012. 12. 27).
17 제생 26절 참고.
18 행록 3장 61절 참고.
19 행록 3장 66절 참고.
20 공사 1장 18절 참고.
21 교법 1장 11절 참고.
22 행록 4장 31절 참고.
23 교운 1장 6절 참고.
24 행록 1장 34절 참고.
25 공사 1장 16절 참고.
26 공사 3장 28절 참고.
27 행록 4장 39절 참고.
28 제생 16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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