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수도
교무부 김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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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지침』에 수도의 목적은 도통(道通)이라고 명시하였다.01 우리의 수도가 도통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수도는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종교적 실천과 행위로 이루어진다. 도전님께서는 “내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아서 진실하고 정직한 인간의 본질을 회복했을 때 도통에 이른다.”02라는 수도의 지침을 말씀하셨다. 이 가르침에서 수도의 목적인 도통은 자신의 일신을 주관하는 마음을 닦아서 청정한 인간의 본질로 환원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는다’라는 수도의 실천적 내용이다. 나의 마음은 거울과 같이 닦아야 할 실재의 대상, 즉 마음은 사물인 거울에 비유된다. 그렇다면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는다’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물음은 인간의 내면인 마음과 그 마음에 비유한 거울의 은유와 상징을 이해할 때 더욱 명확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거울은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형상을 비추어 보는 도구로서, 표면이 평평한 유리판 뒷면에 수은을 바르고 그 위에 습기를 막기 위하여 연단(鉛丹)을 칠한 것이다. 이것이 현대적 거울의 모습이다. 우리는 자신의 용모를 비춰보거나 꾸미기 위해 자주 거울을 본다. 거울은 그만큼 우리의 일상과 떨어질 수 없는 생활의 필수품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유리제 거울은 16세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개발되었고03, 18세기에 중국과 일본을 통해 수입하면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04 거울의 역사를 압축하면 유리거울 이전에는 금속거울[청동, 철, 은 등]이 있었고, 금속거울 이전에는 수면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는 물거울[수경(水鏡)]이 사용되었다. 물거울은 최초의 거울이다. 물거울인 수경은 ‘물이 물체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비추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거울은 사물을 비추는 물건이지만, 어떤 사물을 거짓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는 비유와 함께 사물을 냉철하게 판단하여 남의 모범이나 교훈이 된다는 비유로 표현되기도 한다.05 우리의 눈은 외부의 세계를 바라보지만 정작 자기의 모습을 직접 볼 수가 없다. 이러한 운명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거울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자기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환히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경험은 누구에게나 놀랍고 당황스러울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는 그대로 타자[남]에게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거울은 곧 타자이다. 거울은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시선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도구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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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의 내면세계, 즉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그것은 문학뿐만 아니라 종교나 철학의 사상에도 주요한 은유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거울의 비유는 종교사상에 따라 그 거울의 상징적 의미나 맥락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 전통은 각자의 세계관과 구제론에 따라 거울에 다양한 가치를 부여하였으며, 역사 속에서 그 의미가 중층을 이루어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06 특히 동아시아의 사상사에서는 유불도(儒佛道)를 막론하고 거울의 은유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는 것은 『장자(莊子)』에서 보이고 불교에서는 여러 경전에 등장하였다. 송대(宋代)의 성리학자들은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거울 비유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유가(儒家)의 마음 이론을 심화하였다. 도가에서 거울은 초탈한 경지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를 비춘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모범’을 은유하였다. 불가의 선종(禪宗)에서 거울은 ‘마음’ 혹은 ‘마음의 텅 빔(空)’을 은유하고, 유가의 성리학(性理學)에서 거울은 ‘인간의 덕성’ 혹은 ‘반성과 성찰의 모범’을 은유하고 있다.07 이처럼 동아시아의 사유에서는 거울의 은유와 상징을 통해 마음과 수도(수양 또는 수행)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거울의 비유는 결국 세계와 인간 삶에 대한 궁극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 우리의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여 성찰하는 지적인 작업은 동아시아의 종교적 전통과 사유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어 내려오고 있다. 우리의 수도에서도 마음을 닦는 실천적 행위는 거울의 비유를 통해 설명된다. 대순사상에서 거울과 같이 닦아야 할 대상인 마음은 다음과 같다. 『대순진리회요람』에 따르면 마음은 일신(一身)을 주재하고 사람의 모든 언어와 행동이 이 마음의 표현이라고 한다. 마음에는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인 양심(良心)과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인 사심(私心)이 있다.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모든 죄악의 근원은 내가 내 양심인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08 양심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품부(稟賦)하여 받은 도덕적 마음이다. 이러한 천성의 도덕적인 양심을 회복한다는 것은 곧 정직하고 진실한 인간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는다’라는 행위는 물욕인 사심을 버리고 천성 그대로의 본심인 양심을 회복한다는 수도의 실천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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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님께서 말씀하신 도통은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아서 진실하고 정직한 인간의 본질인 양심을 회복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울의 중요한 기능은 사물의 상을 비춰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왜곡 없이 가장 잘 보여줄 때 제 역할을 다한다. 거울처럼 마음도 그러하다. 사람은 태어날 때 선천적으로 순선(純善)한 마음인 양심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후천적인 욕심과 사심의 발동으로 인해 선천적인 마음인 양심이 가려져서 어두워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두워진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아서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하는 것이 바로 수도의 과제가 된다. 수도는 곧 사심을 버리고 양심을 되찾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은 양심을 회복할 때 거울과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수도로 양심을 회복한 마음은 사물을 선명하게 비추는 밝은 거울과 같이 모든 사물의 이치를 온전하게 비출 수가 있는 것이다. 수도에서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는다는 행위는 밝고 깨끗한 거울처럼 우리의 마음도 밝고 깨끗하게 한다는 실천적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마음은 우리의 몸을 주재한다. 주지하다시피 모든 죄악은 사심에 의해 내 마음의 본질인 양심을 스스로 속이는 데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거울과 같이 닦는다는 수도는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無自欺)가 실천의 방법으로 요청된다. 마음은 거울과 같다. 거울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지와 얼룩이 낀 유리를 닦는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거울은 맑고 깨끗할 때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비출 수 있다. 우리의 본래 마음 또한 욕심에 의해 쉽게 오염되거나 가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수도의 목적인 도통은 자신의 수도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한다.09 우리의 수도는 자신의 마음을 거울과 같이 깨끗하게 닦아서 양심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로 정직한 인간의 완성을 실현하는 데 목적이 있다.
01 『대순지침』, p.37, “수도의 목적은 도통이니 수도를 바르게 하지 못했을 때는 도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2 『대순지침』, p.38. 03 조선일보(www.chosun.com), 〔뚝딱뚝딱 발명품〕-거울. 04 전통문화포털(www.kculture.or.kr),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청동거울에 비친 옛사람들의 일상」. 05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stdict.korean.go.kr). 06 임부연, 「거울의 종교적 상징체계」, 『종교와 문화』 25 (2013), p.69. 07 최재목, 「퇴계사상과 ‘거울’의 은유」, 『양명학』 24 (2009), p.283. 08 『대순진리회요람』, 「훈회, 1. 마음을 속이지 말라」, pp.18~19. 09 『대순지침』, p.37, “도통은 도인들 자신의 수도 여하에 달려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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