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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5년(2025)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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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공모전 : 나는 지금 새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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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산문 장려

 

나는 지금 새내기다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강형숙

 



  “저는 90-91-92학번 강형숙입니다.”
  35년 전 대학 신입생 때 나를 소개하는 첫 멘트였다. 학번이 말해주듯 사연이 많은 학생이었다. 우리집은 2남 2녀였으나 두 명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달리했다. 둘째 오빠는 얼굴도 사인도 모른다. 내가 7살일 때, 막내인 여동생은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숨졌다. 과속으로 돌진하던 승용차에 치여 동생과 신발 한 짝이 도로 위에 덩그러니 나뒹굴어 있던 모습이 선명하다. 동생과 같이 놀다가 벌어진 일이라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너무 컸다. 경찰들이 조사하러 나와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마치 내가 죄인인 양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는 스스로 명을 달리하신 아버지를 목격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알코올과 폭력으로 우리를 죽을 것 같은 공포 속에 몰아넣으셨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췌장암에 걸리셨다.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서 나는 휴학을 했다. 어머니께서는 곧 말조차 상실하고 한 달 후에 돌아가셨다. 중학생 때도 남의집살이를 수개월 했는데 고등학생 때도 남의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듬해 복학을 했고 대학을 자퇴한 오빠랑 단둘이 살게 되었다.
  나는 19년을 살았지만 내 영혼은 몇백 년 산 사람처럼 숨 쉬고 살아갈 힘이 거의 소진되어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감과 더불어 차가운 외로움과 우울, 무기력과 알 수 없는 슬픔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인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버거움이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버거웠다. 나에게 젊음은 희망이 아니었다. SF영화에 나오는 파괴된 도시에 버려진 고아 같았다. 나의 하늘은 태양이 가려진 잿빛 하늘이었다. 그 아래에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 외로움과 무기력과 슬픔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91년도에 대학에 합격했으나 오빠 뒷바라지를 위해 다시 휴학을 했다. 92년도에 오빠는 의대에 입학했고, 나는 복학을 했다. 대학 1학년은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으로 최루탄과 닭장차와 담배 연기 속에서 나를 잊고 세상에 마음을 쏟았던 시기이다. 2학년이 되고 조금은 평범한 학생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나의 우주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나는 학교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휴학을 했다. 우습게도 소외감 때문이었다. 그 소외감이 무엇이길래 내 우주는 파괴되고 나는 혼돈에 빠져버린 것일까? 나는 이 사건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놓을 수가 없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느낄 수 있는 소외감인데 나는 무엇이길래 학교생활마저 이어나갈 수 없었던 것일까?


 
  휴학을 하고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병들어 있는가라는 원초적 고민에 빠졌다. 철학과로 전과할지 아니면 절에 들어가 수도를 할지 고민했지만 둘 다 나의 고뇌를 해결해 줄 거 같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대순진리회를 만나서 수도를 하게 되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란 말처럼 운명적이었다. 이 길은 내가 숨을 쉬고 존재해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늘 불안해 보이고 어두웠던 나는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수도의 발전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면 심장이 뛰고 호흡이 곤란해지고 과민대장증후군처럼 설사를 반복하고 한기가 몰려와 벌벌 떨었다. 그러다 40분에서 1시간 정도 지나면 증상이 사라졌다. 막연하게나마 그것은 두려움으로 인한 반응임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수시로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며 살았지만, 일상에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2020년 여름부터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온몸의 세포가 진동을 했다. 몇 시간씩 지속되었다. 몇 개월 동안 이어졌다. 한기가 사라져도, 두려움이 없어도 온몸의 세포가 다 떠는 것이다. 더러는 팔과 다리가 녹아내리는 느낌까지 동반되었다. 너무 이상해서 선감께 말씀드렸다.
  “공황장애야.”
  “제가요? 에이, 그럴 리가요.”
  나는 믿기지 않았다. 선감과 상담 후 집에 돌아와 검색해 보았다. 4가지 이상 증세가 동시에 일어나면 공황발작이란다. 20년 이상 겪어온 건데 그 병명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계속 이어지던 가운데, 2021년 4월 나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수년간 누구보다 돈독하게 정을 나누고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아끼던 도반이 나에게 등을 돌렸다. 그 사건으로 나는 매일 매일 공황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반적인 공황장애가 아니었다. 보통은 1시간 안에 사라지는 데 이번 공황은 하루 7~8시간 이상 지속되었고 매일 반복되었다. 예전에 발작했던 양상과도 달랐다. 예전에는 몸의 증상이 주였고 마음은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크게 달랐다. 몸의 고통도 극심해졌고, 마음이 느끼는 공포감 또한 극에 달하였다. 7~8가지 발작 증세가 동시에 발생하는 가운데 가장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는 몇 개월 주기로 바뀌었다.
  처음엔 위장이 가장 심각했다. 위장을 물에 젖은 빨랫감을 쥐어짜듯 비틀어 버려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다음엔 호흡곤란으로 산소부족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면 종일 온몸의 기운이 방전되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회복되었다. 2022년 겨울에는 몸 곳곳이 펄떡펄떡 뛰었다. 마치 전기로 스파크를 일으켜 충격을 주는 것 같았다. 몸이 깜짝깜짝 놀라 화들짝 소스라치는데, 1~2초마다 내 몸에 전기를 넣었다 끊었다 하는 것 같았다. 이때의 고통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1, 2초 간격으로 정신을 넣었다 뺐다 하는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이때 가장 끔찍하고 무서웠다. 정신이 돌아버려서 정신병자가 될까 봐 너무너무 무서웠다. 끔찍한 겨울이 지났건만 2023년 봄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이번엔 심장이 펄떡펄떡 방망이질을 쳤다. 정도가 심하다 보니 등까지 아팠다. 심장이 과부하 상태로 쉴 새 없이 뛰는 데다가 등 쪽 심장 혈자리 부위의 통증이 심해서 밤새 끙끙 앓으며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다. 낮에는 심장이 산산조각이 나서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수개월째 지속되었다. 그 후에는 간헐적으로 심장이 뛰었으나 낮에는 불편함을 잘 모르다가 밤에 자려고 누우면 박동이 또렷해져 잠을 자지 못하였다. 또한 등과 어깨와 목이 아파서 깊은 잠을 자지 못하였다. 심장이 안정된 후에도 등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3년 동안 숙면을 취한 날이 며칠이나 될까? 석 달 정도 될까? 1~2시간마다 깨는 게 일이었다.
  2021년 4월부터 공황장애로 매일매일 사투를 벌이던 중 12월부터는 몸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간단한 집안일조차 할 수가 없었다. 건강검진을 해 보니 난소종양이 발견되었다. 오른쪽에는 9센티미터, 왼쪽에는 2센티미터, 담낭에 0.5센티미터 용종, 유방암과 갑상선결절, 지속적인 두통까지. 수술할 곳이 몇 군데나 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암과 종양을 이겨냈고 10개월 지나서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아는 언니는 “네가 정성을 들이더니 조상님이 도우셨나보다”라고 하였다.
  나는 주일날 공부반이다. 주일날 공부반은 24시간 동안 절을 백번 넘게 한다. 공부 시간 외에도 1시간씩 8번을 기도 모신다. 24시간 잠을 안 자고 8시간 기도하고 백번 넘게 절을 해도 몸이 가벼웠다. 그런데 이때는 절을 못했다. 발딱발딱 일어나던 내가 한쪽을 짚고 간신히 일어났다. 그리고 공부 끝나갈 때쯤 되면 몸살이 나서 일주일을 끙끙 앓았다. 10개월 사이에 2번의 공부가 있었다. 2번을 다 몸살로 앓아누웠다. 10개월째 되어 3번째 공부를 들어갔는데 절도 가볍게 하였고 무엇보다 몸살이 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집을 대청소하고 사회 활동을 하는 등 왕성하게 일을 하여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겪은 공황장애는 암보다 더 끔찍하고 가혹했다. 육체적 통증과 심리적 고통을 동반한 공황장애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이 깊었던 도반이 나를 외면하고 떠나면서 이 모든 것을 겪게 되었다. 왜일까? 어떤 타격을 입은 것일까? 대학교 때 느꼈던 소외감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답이 나왔다. 단편적으로 보면 단절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었다. 버림받음이 왜 그렇게 공포스러웠을까? 여태후로부터 처참하게 버림받은 척부인의 고통과 공포감은 어느 정도였을까? 독립운동을 하다가 동지로부터 배신당하고 고발당하여 죽음보다 더 무서운 고문을 받고 독방에서 쓸쓸히 죽어간 영혼은 어땠을까? 내 안에 알 수 없는 고통과 공포감에 휩싸여 있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소외감을 느꼈을 때도 남들과 다르게 절벽 아래로 끝간 데 없이 떨어져 버린 것도 그 친구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압도당하여 학교생활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아마도 전생에 내가 배신을 당했거나 버림을 받아 공포감에 치를 떨었던 것 같다. 전생에 나와 우리 집안이 남에게 그와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까? 얼마나 끔찍한 척을 지었는지 알아달라고 나에게 온 것이 아닐까? 이러한 사색의 결과 나는 이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용서를 구하며 오로지 반성과 참회,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2023년 9월쯤에는 한 달 내에 발작하는 날짜가 줄어 들었다. 한 달에 2주 정도는 그럭저럭 지낼만했다. 발작 증세 가짓수와 강도가 줄어 들었지만 언제 완치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순회보》에서 대순종학과 관련 글을 보았다. 비대면을 확대한다는 소식이었다. ‘아, 이거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 같았다.


 

 
  나는 대순종학과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대순진리에 관해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나 공부를 해 보고 싶었다. 그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건가! 그리하여 11월에 수시 접수를 했고 면접 준비를 하였다. 면접 시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 문항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면서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하는 가운데 많은 안정을 찾았다. 자연스럽게 집중이 되니까 공황이 비집고 들어오질 못하였다. 역시 지원하길 잘했어!
  12월에도 2주간 공황에 시달렸다. 그런데 2024년 1월부터 공황발작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아무 일이 없다. 여전히 예전과 비슷한 상황에 자주 노출이 되지만 공황증세는 올라오지 않는다. 어떤 임원이 자신도 몇 개월 동안 2~3가지 정도로 공황을 겪어봤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 괴로웠다고 한다. 자신은 명함을 못 내밀겠다, 정신과 약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생으로 버텼냐, 인간 승리다, 너무 존경스럽고 대단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최근에 어떤 수도인과 점심을 먹고 카페를 갔다. 말씀이 재미가 있었다. 나는 호탕하게 웃었고 빈번하게 웃었다.
  “강선사께서 이렇게 잘 웃는 분인 줄 몰랐어요!”
  “제가 공황에 시달릴 때는 억지로도 웃음이 안 나왔어요. 공황에서 탈출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밝아져서 자주 웃어요.”
  수도를 하면 팔자가 바뀐다고 한다. 나는 3년 전부터 바뀌기 시작한 거 같다. 죽을 고비를 맞으면서 훌륭한 분들을 만나 목숨을 구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질척한 늪에 빠져있던 나의 마음이 해방된 것이다.
  “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젖지 않는 연꽃같이
  저 광야에 외로이 걷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방황하던 대학생 때 이 글처럼 홀로 우뚝 서서 당당히 걷고 싶었고 마음이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지금 소원을 이루었다. 2024년부터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사는 게 즐겁다. 53년을 눈물로 살아왔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버겁기만 했던 사람이 바뀌었다. 인생이 즐겁다니, 하하하! 사람의 운명은 수상, 관상보다 심상이 으뜸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의 앞날이 창창할 거 같다. 나는 24학번 강형숙이다. 나의 젊은 날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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