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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전경』 속 등장인물들의 인연 5 1907년

『전경』 속 등장인물들의 인연 5
           1907년

 

 

교무부 정나연

 

▲ 태인 관왕묘의 모습,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삼리마을 읍원정 뒤편에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 소실 되었다. 규모는 정면 3간, 측면 2간이었다.



  지난 글에서는 1905(을사)년부터 1906(병오)년 사이에 『전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에 상제님과의 인연이나 천지공사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인연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는 1907(정미)년부터 『전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상제님과의 인연이나 종도들 간의 인연 관계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1907년 『전경』에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인연 관계가 잘 드러나는 사람은 신경원과 차경석이다. 신경원의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르게 된 것으로 보이는 인물로는 김경학, 최내경(崔乃敬), 최창조(崔昌祚)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도창현이 있는 태인에 거주하였는데01 그들 중 1907년부터 『전경』에서 그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은 신경원과 김경학이다. 차경석처럼 일진회원02이었던 인물로는 박공우, 안내성, 박장근, 문공신, 황응종, 신경수 등이 있는데 이 중에서 박공우와 박장근은 차경석과의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 안내성과 문공신은 이인을 찾던 중에 상제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전한다. 황응종과 신경수는 문공신과의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이화춘, 임상옥, 고부인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신경원, 김경학, 차경석, 박공우를 먼저 살펴보겠다.
  신경원[辛京元, 1863∼1924, 자(字)는 경언(敬彦)]03은 1907년 4월 『전경』에 등장한다. 당시 상제님께서는 신원일(辛元一, 1867∼1916: 부안 사람으로 1905년부터 상제님을 따름)과 함께 신경원의 집에 머물고 계셨다. 상제님께서 이곳에 계신 이유는 신경원과 신원일의 인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족보에 따르면 신경원과 신원일은 영월 신씨 부원군파로 종친이었을 뿐만 아니라 4살 차이의 비슷한 연령대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시제나 각종 문중 행사를 통해 자주 만나면서 서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인연으로 상제님께서 신경원의 집에 계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경원은 태인에 거주하며 도창현에 있는 관왕묘의 관운장(關雲長)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원(祭員)이었다. 상제님께서는 그와 그의 가족에게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 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 후 양지에 글을 써서 불사르셨다. 상제님께서 이렇게 공사를 행하시는 것을 처음 본 신경원은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그가 다른 제원들과  관왕묘에 봉심할 때 보니 관운장의 삼각수 한 갈래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제원들은 모두 괴상하게 여겼으나 오직 신경원만은 상제님께서 하신 일이라 생각하고 관운장이 초상으로라도 공사에 진력했음을 나타낸 것이라 깨달았다.04


▲  태인 관왕묘 내부의 모습, 1980년대 후반 소실 되었다.



  이후 신경원은 상제님을 따르며 1907년 12월에 행해졌던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05 1908년 봄 태인 백암리 최창조의 집에서 있었던 김광찬 양모(養母)의 성복제와 매화(埋火) 공사,06 1908년 7월 그의 집을 복록소(福祿所)로 정하는 공사07 등 여러 공사에 참여하였다. 또 1909년 6월 10일경에는 청도원 김송환의 집에 유숙하시는 상제님을 찾아뵙고 공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 신경원이 올 것을 알고 계셨던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양지 한 장에 유(儒)ㆍ불(佛)ㆍ선(仙) 세 글자를 쓰게 하신 후에 유 자 곁에는 이구(尼丘)라고 쓰시고, 불 자 곁에는 서역(西域), 마지막으로 선 자 곁에는 고현(苦縣)이라고 쓰시고는 그 양지를 불사르셨다.08 신경원이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직전까지 공사에 참여하는 모습은 상제님에 대한 그의 신심을 보여준다.
  김경학(金京學)은 태인 백암리 사람으로 신경원과 같은 태인에 살았다. 백암리는 태인에서 10여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산이 없이 평지로만 길이 이어져 있어서 도보로 생활했던 옛 사람들에게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을 것이다. 이것을 볼 때 두 사람은 태인이라는 같은 지역에 사는 것이 인연이 되어 친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경학이 동학을 했었기 때문에 차경석과의 인연도 배제할 수 없다. 김경학은 신경원으로부터 관운장 초상의 삼각수가 떨어진 사건의 경위를 들은 이후에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것 같다. 한 번은 상제님께서 김경학의 집에서 공사를 보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시는 중에 관운장의 모습으로 변용하신 일이 있다. 상제님께서는 박공우에게 “내 얼굴이 관운장과 같으냐”라고 물으셨다. 놀란 박공우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상제님께서 세 번을 거듭 물으셨다. 박공우가 겨우 정신을 차려 “관운장과 흡사하나이다”라고 대답하자 곧 본 얼굴로 회복하시고 김경학의 집으로 가셨다.
  김경학은 매우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인물로 상제님께서는 그에 대해 “위인이 직장(直腸)이라 돌이키기 어려우나 돌이키기만 하면 선인이 되리라”라고 평하기도 하셨다.09 이런 그는 상제님과 관련된 꿈을 꾸기도 하였다. 상제님을 따르기 전에는 동학에 가입하여 3개월 동안 시천주를 수련하였는데 천상에 올라서 상제님을 뵌 꿈을 꾸었다. 그런데 꿈에 뵌 상제님이 누구인 줄 모르고 있다가 상제님을 따르는 중에 상제님께서 “네 평생에 제일 좋은 꿈을 꾼 것을 기억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따르는 분의 형모가 바로 그때 꿈에서 뵈었던 상제님과 같은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10 또 한 번은 우물에 빠진 개를 구하고자 달려갔는데 개가 우물에서 뛰어나와 다른 곳으로 가버린 꿈을 꾸었다. 상제님께서는 그의 꿈 이야기를 들으시고 “속담에 강성(姜姓)을 강아지라 하니라. 네가 꿈을 옳게 꾸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11 이는 그가 상제님을 만나기 전부터 상제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음을 보여준다.


▲ 1900년 초의 무녀들,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그는 성복제와 매화 공사,12 “선천에서 삼상(三相)의 탓으로 음양이 고르지 못하다”라고 하시며 진행하는 공사,13 이씨의 기운은 돋우고 정씨의 기운은 꺾는 공사14 등에 참여하였다. 1908년 7월에는 그의 집을 대학교로 정하는 공사가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학교는 이 학교가 크니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였으니 천한 사람에게 먼저 교를 전하리라”라고 하신 후 김경학에게 무당 여섯 명을 불러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자 앞에 떠 놓은 청수를 향해 사배하게 하고 시천주 세 번을 따라 읽게 하신 후 이름을 물으시고 청수를 마시게 하셨다. 이 공사는 해원 시대에 접어들어 가장 먼저 천한 사람들에게 교를 전하신 것이었다.15 김경학은 공사 참여 이외에도 자신과 아들의 병 치유,16 집에 일어난 불을 꺼주시는17 등 상제님의 여러 덕화를 입었다.
  차경석(車京石)은 정읍 대흥리 사람으로 원래 동학 신도였으며 1904년부터 일진회에서 전라남북도 순회관(巡廻官)을 지냈다. 1905년 이후 일진회가 이완용(李完用, 1858∼1926)과 결탁해서 일제의 조선 침략에 앞잡이 노릇을 하자, 그는 이들과 헤어져 천도교(天道敎)를 창시한 손병희(孫秉熙, 1861∼1922)를 좇았다. 그러나 손병희와도 뜻이 맞지 않아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중에 상제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18
  그는 1907년 5월 17일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전주로 가다가 용암리(龍岩里) 주막에 들렀을 때 상제님을 처음 뵈었다.19 상제님의 의표와 언어 동작에서 비범하신 분임을 알아본 그는 서류를 보이면서 답을 청하였다. 상제님께서 “일의 곡직은 여하간에 원래 대인의 일이 아니라. 남자가 마땅히 활인지기를 찾을지언정 어찌 살기를 띠리오”라고 말씀하시니 경복하여 소송 서류를 불사르고 사사하고자 하였다. 당시 상제님께서는 동곡의 아랫마을인 용암리 김사유(金士有)의 물방앗집에 머물고 계셨는데20 차경석은 이곳까지 따라와 10일 동안 머물며 그의 집으로 가시기를 청하였다. 몇 번의 시험 후 상제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받아들여 6월 3일에 차경석과 함께 정읍 대흥리에 있는 그의 집으로 향하셨다.21
다음날인 6월 4일 차경석의 집에 도착하신 후 상제님께서는 글을 써서 벽에 붙이시고 “내가 머무는 곳을 천지가 다 알아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상제님께서는 두어 달 동안 차경석의 집에 머무셨다. 당시 차경석과의 인연으로 박공우를 비롯한 일진회원인 안내성, 박장근, 문공신, 황응종, 신경수 등이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했다.22


▲ 차경석 / 《동아일보》 1929년 7월 24일 기사



  차경석은 술 취한 사촌 형의 패설과 횡포에도 맞서지 않고 덕으로 처사하였는데 이를 보시고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성(聖)과 웅(雄)을 겸하라는 말씀을 하셨다.23 상제님께서는 1907년 12월에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서 그를 해원 두목으로 삼으셨다. 왕후장상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수만 명의 동학 신명들의 원한을 그대로 두게 되면 후천에는 역도에 걸려서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이를 해원하기 위한 공사였다.24 차경석은 상제님의 여러 공사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그중에는 서양 사람이 발명한 문명이기가 창생의 편의가 되게 하는 공사,25 진시황(秦始皇)의 해원도수를 보는 공사26 등이 있다. 또 1909년 1월 1일에 상제님께서는 현무경(玄武經) 세 벌을 쓰셨는데 그중 한 벌을 차경석의 집에 맡기기도 하셨다.27
  박공우(朴公又)는 1907년 6월 3일 고부 송월리 최씨 재실에서 상제님을 처음 뵈었다. 당시 그는 재실에서 49일 동안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28 그런데 일진회 활동으로 인연이 된 차경석이 상제님을 모시고 정읍 대흥리로 가는 중에 하룻밤 유숙하기 위해 들른 것이었다. 상제님께서는 박공우와 차경석에게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29 다음 날 그는 차경석과 함께 상제님을 모시고 대흥리로 향했다.30 그는 다른 동학신도들과 달리 “하느님 뵈어지소서”라는 식고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 “이제부터 네가 때마다 하는 그 식고(食告)를 나에게 돌리라”라며 자신의 심경을 통찰하신 말씀을 하시니 “평생의 소원이라 깨달았나이다.”라고 대답하며 상제님을 지성으로 받들기로 결심하였다.31 그는 상제님을 자주 시종하였는데 밤에는 달무리, 낮에는 햇무리가 뜨는 징험이 보이면 상제님께서 출타하실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32


▲ 박공우가 상제님을 처음 배알한 고부 송월리 재실, 현 전북 정읍시 장순리 송내마을 소재, 



  박공우는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여서 장치기꾼을 했다고 한다.33 평소 그는 성질이 너그럽지 못하고 사나워서 남과 자주 다투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 “너는 표단이 있으니 인단으로 갈음하라”라고 말씀하신 이후 성질이 누그러지고 이기려고 하지 않아 남과 다투지 않게 되었다.34 또 항상 과음하여 주정이 심했는데 상제님께서 술을 많이 권하시다가 “너는 한 잔 술밖에 못된다”라고 말씀하신 뒤로는 술을 한 잔만 마셔도 바로 취해서 더 이상 마시지 못했다.35 상제님께서 그의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신 것이다.36
  박공우는 1907년 12월에 후천 5만 년 첫 공사로 후천의 음양 도수를 조정하는 공사에 참여하였다. 상제님께서 그에게 물으시니 지식이 없다며 사양하다가 문득 “선천에는 청춘과부가 수절한다 하여 공방에서 쓸쓸히 늙어 일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 불가하오니 후천에서는 이 폐단을 고쳐 젊은 과부는 젊은 홀아비를, 늙은 과부는 늙은 홀아비를 각각 가려서 친족과 친구들을 청하고 공식으로 예를 갖추어 개가케 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아나이다”라고 여쭈었다. 상제님께서는 “네가 아니면 이 공사를 처결하지 못할 것이므로 너에게 맡겼더니 잘 처결하였노라”라고 하시며 “이 결정의 공사가 5만 년을 가리라”라고 말씀하셨다.37 이 외에도 박공우는 선인포전(仙人布氈)의 기운을 쓰는 공사,38 태인 살포정 뒤에 호승예불(胡僧禮佛)을 쓰는 공사39 등 많은 공사에 참여하였다.
  지금까지 1907년에 『전경』에 등장하기 시작한 인물 중에서 신경원, 김경학, 차경석, 박공우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경원과의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한 인물은 김경학이다. 그리고 차경석의 일진회 활동으로 형성된 인연 관계로 인해 상제님을 따르게 된 인물로는 박공우가 있다. 다음 글에서는 1907년부터 『전경』에 등장했으나 이번 글에서 다루지 못한 인물들의 인연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01 행록 4장 6절.
02 『전경』에 등장하는 일진회는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개화운동을 전개했던 단체[진보회 등]를 지칭할 때도 있고 이 단체가 1904년 12월에 친일 단체인 일진회와 통합된 조직을 지칭할 때도 있다. 조직을 통합하게 된 계기는 정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두 원고를 참고할 수 있다.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37) : 진보회(進步會)와 일진회(一進會) Ⅰ」, 《대순회보》 101호 (2009), pp.10-15;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38) : 진보회(進步會)와 일진회(一進會) Ⅱ」, 《대순회보》 102호 (2009), pp.10-15.
03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52) : 관운장 공사」, 《대순회보》 116호 (2011), p.18 참고.
04 권지 2장 21절 참고.
05 공사 2장 19절 참고.
06 공사 3장 1절 참고.
07 예시 46절 참고.
08 행록 5장 20절 참고.
09 행록 5장 3절 참고.
10 권지 2장 8절 참고.
11 예시 49절.
12 공사 3장 1절 참고.
13 공사 2장 20절 참고.
14 권지 2장 29절 참고.
15 교운 1장 32절.
16 제생 28절 참고.
17 권지 2장 15절 참고.
18 차경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상생의 길 : 차경석의 행적으로 본 성경신의 의미 고찰」, 《대순회보》 163호 (2014) 참고.
19 李英浩, 『敎祖略史』 (정읍: 중앙 총정원, 1935), p.4 참고.
20 제생 24절 참고.
21 행록 3장 37-38절 참고.
22 교운 1장 21절 참고.
23 교운 1장 49절 참고.
24 공사 2장 19절 참고.
25 공사 1장 35절 참고.
26 공사 3장 17절 참고.
27 교운 1장 66절 참고.
28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p.168 참고.
29 권지 1장 11절 참고.
30 교운 1장 21절 참고.
31 교운 1장 25절 참고.
32 권지 2장 4절 참고.
33 이은희, 「대순광장 :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리니」, 《대순회보》 282호 (2024), p.42 참고.
34 교법 2장 31절 참고.
35 행록 4장 50절.
36 교법 3장 4절 참고.
37 공사 2장 17절.
38 공사 3장 3절 참고.
39 공사 3장 20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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