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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수반원(逆修返源)의 신선,
장과로
출판팀 한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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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 장과로, 「김홍도 필 파상군선도」 8폭 병풍 중 2폭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팔선도」에서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노인을 본 적이 있는가? 그는 팔선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장과로(張果老)다. 그는 당대(唐代)의 도사로 원래 이름은 장과(張果)다. 늙을 노(老)자는 후세 사람들이 존칭으로 붙여 주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항주(恒州)의 중조산(中條山)에 은거하며 산서(山西)성 일대에서 수도하였다. 그의 모습은 나귀를 거꾸로 탔거나 혹은 어고간자(魚鼓簡子: 죽통)를 든 늙은 도사로 묘사된다. 장과로는 늘 흰 나귀를 타고 다녔는데, 하루에 만 리를 간다고 한다. 나귀를 타지 않을 때는 접어서 보관했는데 나귀는 순식간에 얇은 종이로 변했다. 접어서 조그마한 종이 한 꾸러미가 되면 두건 상자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었다. 나귀를 탈 때면 종이에 물을 뿌려 살아 있는 나귀로 만들었다. 그는 나귀를 거꾸로 타고 천하를 주유하며 다녔다. 당시 사람들은 어렸을 때 장과로를 자주 보았고, 노인이 된 후에도 종종 보았기에 그가 장생불로의 비술을 몸에 지녔다고 생각했다. 호흡 수련에 능한 도사였던 장과로는 내단을 위주로 하여 내단법의 요체를 밝혔으며, 그의 호흡법과 내단 사상은 송원(宋元) 내단학의 선구로 여겨진다. 훗날 그는 팔선 중 한 신선으로 추앙받으며 ‘노(老)’를 대표하는 신선으로 자리매김했다. 장과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당대 정처회(鄭處誨)가 저술한 『명황잡록(明皇雜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당 현종과의 일화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각종 변화무쌍한 이적을 행하는 도사로 등장한다. 또 다른 기록인 『신당서(新唐書)』에는 도교를 불신했던 당 현종이 장과로를 만나면서 바뀌는 심리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송대에 이르러 민간에 전설과 민담들이 발전하면서 그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다채로워졌다.
거짓 죽음으로 황제의 부름을 거절하다
당 태종(太宗)과 고종(高宗)이 황제로 있을 때 장과로가 장생불로의 비술을 터득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불렀으나 장과로는 사양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즉위한 후 장과로를 불러오도록 명령했다. 황제의 사자들이 말을 갈아타며 서둘러 항주에 도착하였으나 장과로는 사자들이 도착하기 전날 중조산 투녀묘(妬女廟)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때가 마침 무더운 여름이었기에 시체는 이미 부패하여 냄새가 코를 찔렀고 구더기가 시체를 타고 오르내리고 있었다. 사자들이 장안으로 돌아와 측천무후에게 전말을 보고하자 장과로가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얼마 후 사람들은 항주의 산속에서 장과로를 다시 보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제야 장과로가 도술을 써서 황제의 부름을 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 현종의 부름에 응하다
당 현종 23년 사자를 항주에 파견해 낙양으로 초빙했으나 장과로는 극구 사양했다. 어찌할 수 없어 홀로 돌아온 사자로부터 현종은 상세한 전후 사정을 듣고, 잠시 깊이 생각하다가 다시 황제의 정식 조서를 가지고 항주에 가서 장과로를 모셔 오도록 하였다. 이렇게까지 하자 장과로는 마침내 그 성의에 감동하여 사자를 따라 황제를 만났다. 현종은 장과로를 보며 “선인께선 득도하셨을 텐데. 어찌하여 머리털과 치아가 이리도 쇠약해졌습니까?”라고 물었다. 장과로는 웃으며 “저는 치아가 빠지고 머리카락도 얼마 없을 때 득도하여 여태껏 그때 모습 그대로입니다. 지금 폐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치아와 머리털이 없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약간의 머리털과 몇 개 남지 않은 치아를 다 뽑아버리자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현종은 깜짝 놀라 “도사께서 너무 심한 거 아니오. 가서 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장과로는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돌아서는 순간 그는 어느새 젊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현종은 그 모습에 놀라 술을 하사했다. 장과로가 술을 몇 잔 마신 뒤 “소신의 주량이 작아 두서너 잔이면 족합니다. 다만 저의 제자 하나가 능히 한 말을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종이 그 제자를 불러오라고 하자 장과로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멀리에 있지 않고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말을 끝내며 전각 밖을 향해 손을 들자 한 명의 도사가 계단 아래에서 나타났다. 나이는 열여섯이나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매우 준수한 모습이었다. 현종은 장과로의 어린 제자가 술을 흔쾌히 마시자, 부단히 그에게 마시기를 권하였다. 도사가 부지불식간에 술 한 말을 마시자 장과로는 “더 주지 마십시오, 도가 넘어 폐하 앞에서 우스운 짓이라도 저지를까 걱정 되옵니다”라며 사양했다. 그러나 현종은 술을 더 마시라고 명령했다. 도사가 술을 더 마시자 도사의 정수리에서 술이 솟구쳐 오르고, 머리 위에 쓰고 있던 관이 벗겨져 땅에 떨어지면서 도사는 황금 술독으로 변했다. 주위에 있던 현종과 비빈들이 모두 놀랐다. 술독을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니 그 안에는 조금 전에 하사한 술이 가득 차 있었고, 술그릇의 용량은 정확히 한 말이었다. 술독 위에는 ‘집현전(集賢殿)’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황금 술독은 집현전에 있던 것으로 꼭 술 한 말이 들어가는 그릇이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장과로가 도술을 부려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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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 장과로에게 ‘은청광록대부’라는 관직을 내리다
어느 날, 태상시(太常寺)와 비서감(祕書監)이 장과로를 찾았다. 그들과 한담하고 있는데 돌연 장과로가 크게 웃으면서 뚱딴지같이 한마디 던졌다. “공주를 처로 둔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이야” 두 사람은 서로 놀라면서 장과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때 태감(太監)이 찾아왔다. 장과로에게 “황제께서 옥진(玉眞)공주가 어려서부터 도교를 독실하게 믿으니 공주를 선생님께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선생님의 뜻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장과로는 큰소리로 웃고는 “나는 이미 나이가 많고, 권세에 의지하고 싶지 않으며, 공주의 청춘을 그르칠 수 없다”라며 사양하였다. 태감은 궁으로 돌아가 현종에게 그대로 아뢰었다. 그 당시 현종은 공주를 장과로에게 시집보내기로 생각했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태상시와 비서감은 그제야 비로소 장과로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현종은 “보아하니 장과로 선생은 신선임이 분명하구나!”라고 생각하며 조서를 내렸다. “항주에 사는 장과로 선생은 방외지사이다. 행위는 고상하고 지식은 깊고도 현묘하다. 세상을 피해 은거한 지 오래인데 조정에서 불러 장안에 왔다. 그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고, 단지 오랜 세월을 누렸음을 추측할 뿐이다. 황제가 도를 물으면 그 지극한 이치까지 대답하였다. 장과로 선생에게 은청광록대부(銀青光祿大夫)라는 관직과 통현선생(通玄先生)이라는 호를 내린다”라고 명했다.
당 현종, 도관 ‘서하관’을 세워 장과로를 기리다
궁궐에 머물던 장과로는 스스로 나이가 많다며 병을 핑계 대면서 여러 차례 항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였다. 현종이 말려도 어쩔 수 없자 현종은 비단 백 필을 하사하고 가마와 시종 두 명을 딸려 보냈다. 일행이 항산에 이르렀을 때 장과로는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제자들이 모여 장과로의 장례를 중조산에서 치르고, 현종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현종은 믿을 수 없어 사람을 시켜 장과로의 무덤을 파헤치자 관은 비어있었다. 현종은 장과로의 무덤 자리에 ‘서하관(棲霞觀)’이란 도관을 세우고 그에게 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장과로가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그림 위에 다음과 같이 시를 썼다.
거출다소인(擧出多少人) 많은 사람을 들어보아도 무여저노한(無如這老漢) 이 노인 같은 이 없네 불시도기려(不是倒騎驢) 나귀를 거꾸로 탄 게 아니라 만사회두간(萬事回頭看) 모든 일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네
장과로의 상징인 나귀를 거꾸로 탄 형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그중 하나는 만사를 뒤돌아보며 점검하는 ‘연장자’가 갖는 신중함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무위자연의 도에 맡겨 앞을 보지 않고 가더라도 길에 어긋나지 않으며, 의도되지 않은 자유로운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내단가 장과로는 중국문화에서 장수를 상징하는 신선으로 여겨진다. 내단사상은 본래 근원처로 회복하는 ‘거스름의 과정’으로 ‘거슬러 수련하여 근원으로 돌아간다(逆修返源)’라는 의미다. 따라서 ‘거꾸로’와 ‘거스르다’라는 두 단어는 도교의 본질을 이해하는 중요키워드에 해당된다.01 즉 내단학의 본질인 ‘거스르다’란 키워드가 내단가 장과에게 나귀를 거꾸로 탄 형상으로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김관종ㆍ전윤주, 『팔선열전』, 인천: 리토피아, 2015. •구보 노리타다, 『도교의 신과 신선이야기』, 이정환 옮김, 서울: 뿌리와 이파리, 2004. •사가데 요시노부, 『도교백과』, 이봉호·최수빈·박용철 옮김, 서울: 파라북스, 2018. •쫑자오펑, 『도교사전』, 이봉호·신진식·박용철 옮김, 서울: 파라북스, 2018. •진기환, 『중국의 신선이야기』, 파주: 이담북스, 2011. •김도영, 「내단가 張果와 韓中 〈張果圖〉와의 관계-張果 역사인물에서 회화형상으로」, 『중국소설논총』 58, 2019.
01 김도영, 「내단가 張果와 韓中 〈張果圖〉와의 관계-張果 역사인물에서 회화형상으로」, 『중국소설논총』 58, p.15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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