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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의 만장(輓章)과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
교무부 최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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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민영환의 장례식, 출처: 위키미디어
상제께서 김 자현에게 이르사 그의 방이 후에 반드시 약방이 되리라고 일러 주시고 민 영환(閔泳煥)의 만장을 지어 그에게 주고 “쓸 데 있으리니 외우라”고 하셨도다. 대인보국 정지신(大人輔國正知身) 마세진천 운기신(磨洗塵天運氣新) 유한경심 종성의(遺恨警深終聖意) 일도분재 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 그리고 일도 분재 만방심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고 일러 주셨도다. (예시 37절)
상제님께서는 종도 김자현(金自賢, 1874~1927)에게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만장(輓章)을 지어주셨다. 만장은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을 말한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장사(葬事)를 지낼 때 만장을 천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들어서 상여 뒤를 따르게 하였다. 특히 학문이나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의 초상 행렬에는 수많은 만장이 뒤따르기도 하였다.01 상제님께서 김자현에게 민영환의 만장을 지어주신 이유는 명확한 사료가 부족하여 단정 짓기 어렵다. 다만, 상제님께서는 김자현의 방이 훗날 약방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김자현의 증손자에 따르면 실제로 그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약방을 운영했다고 한다.02 이 글에서는 민영환의 ‘만장(輓章)’과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민영환의 만장에 대한 해석과 그의 삶을 연관 지어 살펴보고,03 이어서 “일도 분재 만방심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라는 상제님의 말씀에 담긴 의미를 분석할 것이다.
만장(輓章)의 해석과 민영환의 행적
만장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는데, 이와 연관된 민영환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겠다.
대인은 나라를 돕기 위해 자신이 몸 둘 바를 바르게 알아 (大人輔國正知身) 혼탁한 세상을 갈고 씻어 운기를 새롭게 일으켰도다. (磨洗塵天運氣新) 한을 남기며 경계를 깊이 하여 죽음으로 성스러운 뜻을 마쳤으니 (遺恨警深終聖意) 한칼로 자결하여 그 뜻을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누었도다. (一刀分在萬方心)
대인보국정지신(大人輔國正知身)은 ‘대인은 나라를 돕기 위해 자신이 몸 둘 바를 바르게 알아’라고 해석할 수 있다. 보국(輔國)은 ‘나라가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충성을 다하여 돕는 것’을, 정지신(正知身)은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바르게 아는 것’을 의미한다.04 그래서 이 구절은 의역하면 ‘대인(大人)인 민영환은 나라를 돕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바르게 알아’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 민영환의 애국 활동은 주로 외교무대의 경험 이후에 이루어진다. 고종과 왕세자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직후, 민영환은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민영환 일행은 1896년 5월 26일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후, 여러 달 동안 러시아에 머무르며 군사 및 재정 운영에 관한 외교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러시아 교관단을 국내에 파견받아 약 800명의 경비병을 양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고종은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고 1897년 2월 20일 환궁할 수 있었다.05 이후에도 민영환은 유럽 파견 사절로 활동하는 등 외교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외교 경험은 그의 관직 생활에서 생각의 큰 변화를 불러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후 그는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여생을 바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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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민영환 (앞줄 정 중앙), 출처: PICRYL
마세진천운기신(磨洗塵天運氣新)은 ‘혼탁한 세상을 갈고 씻어 운기를 새롭게 일으켰도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마세(磨洗)는 ‘갈고 씻는다’라는 의미이다. 진천(塵天)의 진(塵)은 ‘티끌, 먼지, 오래되고, 더럽혀진다’라는 뜻이고, 천(天)은 여기서 하늘을 뜻하기보단 ‘하늘 아래 모든 세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천이란 ‘당시 혼란한 세상’을 말한다. 또한 운기(運氣)는 ‘나라의 위태로운 처지와 상황’으로 풀이된다. 이에 운기신(運氣新)은 ‘나라의 위태로운 처지와 상황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의역하면 ‘혼란한 시국을 걱정하여 나라의 처지와 상황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다’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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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관파천 당시 사진으로 잘못 알려진 덕수궁 돈덕전의 고종과 순종, 영친왕, 1907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이 구절에 담긴 의미는 외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돌아온 민영환이 국가의 낡은 제도를 개혁하고자 했던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06 민영환은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개혁 방안을 구상했는데, 이러한 내용은 그가 저술한 『천일책(千一策)』에 잘 나타나 있다.07 이 『천일책』에서 그는 러시아와 일제의 침략 야욕을 경계하며, 보다 더 부강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군사적 측면에 주목하여,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완공 후 부동항(不凍港: 얼지 않는 항구) 확보를 위해 한반도를 침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일제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것을 빌미로 조선을 강점하려 한다고 파악하였다.08 이처럼 국가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민영환의 노력은 곧 ‘운기를 새롭게’ 하려 했던, 즉 위기에 처한 민족의 부흥을 염원했던 그의 의지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유한경심종성의(遺恨警深終聖意)는 ‘한을 남기며 경계를 깊이 하여 죽음으로 성스러운 뜻을 마쳤으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유한(遺恨)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한을 남긴다’라는 뜻인데, 이는 국권 상실을 막지 못한 대인의 한으로 볼 수 있다. 경심(警深)은 ‘경계를 깊이하다’라는 의미이고 성의(聖意)는 ‘성스러운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의역하면 ‘국권 상실을 막지 못한 대인의 한을 민중들에게 경계를 깊이 하여 성스러운 뜻을 마쳤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민영환이 자결을 통해 국권 상실의 위기를 알리고자 했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영환은 국가의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광무개혁(光武改革, 1897)을 추진하였고 국익을 수호하려는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1898) 개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11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에 민영환은 여러 대신과 함께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고종의 윤허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해산 명령을 받았다.09 결국, 불평등 조약의 체결이 현실로 다가오자, 민영환은 1905년 11월 30일, 자택에서 칼로 자결하며 순국하였다.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은 ‘한칼로 자결하여 그 뜻을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누었도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만방(萬方)은 ‘모든 곳’, 즉 ‘온 세상’을 뜻하므로 만방심(萬方心)은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의미한다. 분재(分在)는 ‘나뉘어 존재한다’라는 뜻이기에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은 ‘한칼로 자결하여 민영환의 숭고한 뜻이 온 세상 사람(만방)의 마음속에 나뉘어 있다’라고 의역된다. 이는 나라와 백성을 향한 그의 충성스러운 뜻이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음을 의미한다. 상제님께서는 예시 37절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이 구절을 언급하시며 “일도 분재 만방심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라고 일러 주셨다. 앞서 살펴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민영환의 생애를 통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은 민영환의 생애만으로는 그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전경』의 해당 구절에는 이 말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민영환의 순국 이후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는 민영환의 순국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기에 그의 뜻이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뉘어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더 나아가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라는 말씀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과 세상의 일
이제 ‘일도분재만방심’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과정에 대해 살펴보자. 민영환이 자결한 뒤, 유품을 정리하던 가족들은 그가 입고 있던 옷의 주머니에서 우리나라의 민중들과 외국 공관에 보내는 유서를 발견하였다.
대한의 백성들에게 알립니다(告國民遺書) 아! 나라와 국민이 이와 같은 치욕을 당하고 있으니 우리 인민들은 곧 생존경쟁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하면 살게 되는 것이니 제공(諸公)들이 어찌 이것을 모르겠습니까? 나(영환)는 한 번의 죽음으로써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또 우리 2천만 동포형제(同胞兄弟)들에 사죄하고자 합니다. 나는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 기어이 구천지하(九泉之下)에서 제군(諸君)들을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동포들이 천만 배나 더 분발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갖고 학문에 힘을 쓰고, 서로 죽을힘을 다하기로 결심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당연히 지하에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조금도 실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것으로 우리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고별인사를 올립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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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환의 명함에 쓰여진 그의 유서 뒷면(좌)과 앞면(우),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위키미디어
여러 외국 공관에 보낸 글월(告各國公使遺書)
나(영환)는 나라를 잘 돕지 못하여 이런 지경이 되었으므로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또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옵니다. 죽은 사람은 그만입니다만 지금 우리 2천만 인민들도 곧 생존경쟁 속에서 멸하고야 말 것입니다. 귀공사(貴公使)들이 어찌 일본의 행위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귀공사 각하는 다행히 천하의 공의(公議)를 중하게 여기시고, 이 사실을 귀정부와 인민들에게 보고하여 우리 인민의 자유와 독립을 도와주신다면 이렇게 죽는 사람도 마땅히 지하에서 웃음을 지으며 축하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 각하는 우리 대한을 경시하거나 우리 인민의 혈심(血心)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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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환 국장, 1905년 12월 17일, 출처: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D.Straight) 미국외교관 촬영
민영환이 남긴 두 유서는 동포들에게는 국권 회복을, 주한 외국 공사들에게는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를 간절히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민영환은 유서를 통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국운을 되살리고자 자주독립의 정신을 힘을 다해 호소하였다. 이러한 그의 뜻은 당시뿐 아니라 이후 항일 의병 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민영환이 순국한 당일 저녁, 고종 황제는 조서(詔書)를 내려 그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12 그로부터 나흘 뒤인 12월 3일에는 민영환의 시호(諡號)를 ‘충정(忠正)’으로 내리고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보냈다.13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그의 순국이 단순히 개인의 죽음이 아닌, 국가적인 중대사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실제로 민영환의 발인일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각지에서 모여들었고, 각국의 공사 및 영사들 또한 깊은 슬픔을 표하며 그의 관을 어루만졌다. 당시 일제는 민영환의 순국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오히려 그에게 ‘충문(忠文)’이라는 시호를 줌으로써 민심(民心)을 수습하려 하였다.14 당시 대표적인 민족지였던 《대한매일신보》15는 민영환의 유서 전문을 공개하며, 그의 순국이 헛되지 않도록 나라의 자유 독립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특히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영환은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 기필코 여러분을 구천에서 도울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몸은 비록 죽었으나 그 마음은 죽지 않음이라 지극히 강하고 지극히 열렬한 충성된 분기가 맺혀서 2천만 동포의 생명을 지하에서 도우려 하는 것은 공의 결심이요 … 분격한 마음을 떨쳐 일으켜 다 함께 죽을 혈심으로 자유 독립을 회복할지어다.”16라고 하였다. 이 기사에서는 민영환의 마음이 죽지 않고 민중들을 돕고 있으니, 독립에 대한 투쟁의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후 민영환의 뜻은 ‘그의 피를 먹고 자란 대나무[血竹]’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만들면서 민중들에게 다시 전해졌다. 그가 순국한 지 약 8개월 후인 1906년 7월 4일, 그의 유품을 보관하던 방에서 대나무가 돋아나는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가족들은 민영환이 자결할 때 사용한 칼과 피 묻은 옷을 침구 뒤에 있는 마루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달 안에 민영환의 부인 박씨가 그 옷을 햇볕에 말리기 위해 가 보니 새 죽순이 그 하의에 돋아나 있었다. 그 죽순은 네 개의 떨기에 아홉 개의 줄기가 있었으며 가늘기는 벼 마디와 같고, 뿌리와 줄기는 실과 같이 가늘어 마루판과 기름을 먹인 종이 사이에 뿌리를 의지하고 있으면서 겨우 대나무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 달 동안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한다.17 이러한 내용은 1906년 7월 5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도 실리기도 하였다.
녹죽자생(綠竹自生) 어제 민충공(민영환) 집안사람이 본사에 와서 그 집에서 녹죽이 절로 자라난 사실을 알리니, 대체로 충정공 생시에 항상 의궤(衣几)를 두던 방돌(房突) 아래에 녹죽이 문득 자라나서 빼어나 곧장 올라온 것이었다. 예전에 정포은(鄭圃隱)이 목숨을 잃은 곳에 선죽이 절로 자라났기에 그 다리를 이름하여 선죽교라 하더니 지금 민충정공 집 안에서 녹죽이 또 자라니 대체로 이는 두 공의 정충대절이 백 세에 한 가지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 대가 자라난 것이 또한 그 종류가 같은 것이다. 아아! 참 기이하도다.18
민영환의 방에 대나무가 저절로 자랐다는 것은 민중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항일투쟁을 유도하고자 했던 당시 언론에 흥미로운 소재였다. ‘푸른 대나무가 스스로 자라났다’라는 기사가 발행된 뒤 1906년 7월부터 1907년 2월까지 7개월간 녹죽자생(綠竹自生)을 소재로 한 한시(漢詩)가 《대한매일신보》에 지속해서 실렸다. 아울러 이 일은 같은 시기에 간행된 《대한자강월보》(1906 창간)와 《대한학회월보》(1908 창간) 등의 잡지에도 간간이 수록되었는데, 신문과 잡지를 합치면 총 47 제(題)의 한시가 실렸다.19 또한 혈죽에 관한 기사와 작품은 일제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억압 속에서도 지속해서 게재되었으며, 1910년 《매일신보》로 전환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20 당시 신문과 잡지에서 민영환의 뜻과 혈죽에 관한 기사가 지속해서 강조되자 민중들은 나라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직접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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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년 7월 5일 《대한매일신보》 PDF,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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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죽도, 1906년 7월 17일 《대한매일신보》 PDF,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이상의 내용을 볼 때, ‘일도분재만방심(一刀分在萬方心)’이란 ‘민영환의 순국으로 민중들에게 나라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고,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민영환의 자결 이후 평소 을사늑약으로 인해 비분강개했던 인물인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이조참판 홍만식(洪萬植, 1842~1905), 학주부사 이상철(李相哲, 1876~1905), 평양진위대 상등병 김봉학(金奉學, 1871~1905) 등이 자결로 항일 의지를 드러냈고, 더욱이 의병 운동을 주도했던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은 민영환의 마음을 헤아리고 본받아 항일투쟁을 고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1 순국 이후에 벌어진 고위 관료들의 투쟁, 순국과 관련된 신문 매체의 기사들, 혈죽에 관한 이야기 등의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나라를 위했던 그의 큰 뜻이 여러 민중을 감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한때 독립협회 회장을 맡았던 윤치호(尹致昊, 1866~1945)는 민영환이 생시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것보다 순국 이후에 이루어 낸 것이 더 많았다고 평하기도 하였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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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환과 혈죽 사진, 1906년 7월 15일,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22 그렇다면 상제님께서는 왜 민영환에게 만장을 지어주신 것일까? 상제님께서 민영환에게 만장을 지어주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상제님께서 민영환의 충정 어린 마음을 높이 평가하시고 그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만장을 지어주셨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世無忠 世無孝 世無烈 是故天下皆病”(행록 5장 38절)이라고 하셨다. 이는 세상의 무도(無道)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충(忠)ㆍ효(孝)ㆍ열(烈)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영환의 자결은 일반적인 자살이나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24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상제님께서는 만장을 통해 민영환이 지녔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정’을 높이 기린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상제님께서 민영환에게 만장을 지어주신 것은 민영환이 국가를 위해 품었던 한을 위로하고 풀어주시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 존망의 기로 속에서 민영환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고위 관료 중에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 불리는 박제순(朴齊純,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내부대신), 이근택(李根澤, 군부대신), 이완용(李完用, 학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농상부대신) 등이 1905년 을사늑약에 찬성한 일도 있었다. 이외에도 당시 관료 중에는 자신의 안위와 출세에 급급한 인물도 많았다. 그들과 달리 민영환은 국가를 위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였고 자주와 독립에 대한 한을 품고 순국하였다. 그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고위 관료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해 을사늑약의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하고 자결을 택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민영환의 원은 개인적인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국가적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민영환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인정하시고, 만장을 통해 그의 한을 풀어주신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예시 37절에서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일’이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본 역사적 사료를 통해 본다면 ‘세상의 일’은 당시 조국의 주권을 잃고 억압받던 시대 상황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일도 분재 만방심으로써’라는 말은 ‘민영환 선생이 품었던 우국충정의 뜻이 여러 민중에게 전달됨으로써’라는 의미이므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이 필요한 현실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고 이해된다. 당시에는 근대적인 대중 매체인 신문과 잡지가 출현하여 서로의 생각이 글로 공유되기 시작하던 때였다.25 새로운 문화공간이었던 신문과 잡지라는 매체는 국가의 현실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신문과 잡지에서는 민영환의 순국과 더불어 주권을 잃은 나라의 현실을 한일합병조약에 따라 국권을 상실한 1910년 전까지 민중에게 지속해서 전달하였다. 여기서 고려할 점은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라는 구절의 주체가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민중들이라는 점이다. 당시 많은 사람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충신인 그가 순국한 사실은 민중에게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느끼게 하였고, 독립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언론인이었던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서울 사람 남녀들이 모여서 탄식하며 그 대나무 그림을 그리고 노래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아, 어찌 공의 정신과 기백이 족히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26라고 하였고, 위정척사운동을 한 최익현은 “진실로 우리 삼천리 인민들이 모두 이 두 분(민영환과 조병세)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아 꼭 죽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딴마음이 없다면 어찌 역적을 물리치지 못하겠으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겠는가.”27라고 하였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 독립 이 자유는 우리 민공 공(功)이로다. 공이로다 공이로다, 피 흘리신 공이로다.”28라는 내용을 싣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민영환 순국의 뜻이 문인이나 대신들의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국권을 잃어가고 있는 민족의 현실이 점차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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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는 민영환의 혈죽이 실제로 보관되어 있다, 출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일도 분재 만방심으로써 세상의 일을 알게 되리라”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은 한칼로 자결하여 민영환의 뜻이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나뉜(일도 분재 만방심) 일로써 민중들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세상의 일)을 알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민영환의 순국을 통해 조국의 위태로운 현실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강대국의 침탈 속에서 조선이 독립하기를 바란다는 민영환 선생의 뜻은 당시 민중들의 마음에 큰 울림과 반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순국은 이후 국권을 회복하는 하나의 추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을사늑약이라는 일제의 침략이 이뤄지던 역사적 상황에서 민영환의 순국은 온 민중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정신을 심어주었고, 민심을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의 순국은 일본의 강제적인 통치 때문에 국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주요 관료로서 책임을 지는 것과 동시에 일본에 대한 항거이기도 한 것이다. 민영환은 민족의 선구자로서 이후에 이어진 독립운동에 수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민영환의 순국은 조선의 현실을 국내와 국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세계의 많은 사람에게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제님께서는 조국을 위해 충성스러운 마음을 지녔던 그에게 만장을 지어주시고, 이 만장을 통해 민영환의 순국 이후 앞으로 일어날 세상의 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01 만장은 일반적으로 오언절구와 오언율시 또는 칠언절구와 칠언율시 등의 한시 형식으로 지어졌다. 때로는 장문의 글이나 고인의 일대기 중에서 뽑은 행장(行狀) 형식으로 짓기도 한다. 김경수, 「만장(輓章)」, 『한글한자문화』 153 (2012), p.44 참고. 02 김자현의 증손자 김용희씨 인터뷰(2012년 12월 27일)에 따르면 김자현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실제로 약방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03 교무부, 「전경속 역사인물: 민영환(閔泳煥)」, 《대순회보》 60호; 김성수, 「돋보기: 민영환의 만장」, 《대순회보》 270호 참고. 04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1905) 11월 30일. “졸(卒)한 육군 부장(陸軍副將) 민영환(閔泳煥)은 대광보국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府議政大臣)을 추증하고, 졸한 주영 서리 공사(駐英署理公使) 이한응(李漢膺)은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 협판(內部協辦)을 추증하였다.” 《대순회보》 60호의 위의 글과 《대순회보》 270호 「돋보기: 민영환의 만장」에는 보국(輔國)이 민영환 사후 고종이 나라에 공로가 있는 관리에게 품계를 높여 주는 일로 최고 관작인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나오는 단어라고 밝히고, 민영환을 지칭할 때 ‘민 보국(輔國)’과 같은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설명한다. 05 좌옹윤치호문화사업회,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서울: 을유문화사, 1998), pp.58-59 06 《독립신문》에는 러시아 기행을 다녀온 민영환과 면담한 내용이 등장한다. 그는 이 면담에서 “천 가지, 만 가지 일이 훌륭하고 엄청나서 학문 없는 사람은 당초에 꿈도 못 꿀 일을 보았노라.”라고 하며 다른 나라의 관리들과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니 조선도 앞으로 점차 개혁해야 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말하였다. (《독립신문》, 1896년 11월 10일 잡보) 07 1958년 간행된 『민충정공유고집(閔忠正公遺稿集)』에 실린 『천일책』의 서명은 “어리석은 자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을 것이 있다(愚者千慮, 必有一得)”라는 『사기』,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세사조(時勢四條)’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고, 국력을 키우며 백성을 안정시키기 위한 네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비어십책(備禦十策)’에서는 인재 등용, 탐관오리 숙청, 군사력 강화, 산업 장려, 교육 육성 등 나라를 안팎으로 개혁하기 위한 열 가지 방책을 논한다. 이에 관해서는 『민충정공유고』, 「천일책」, pp.50-68 참고. 08 『민충정공유고』, 「천일책」, pp.45-68 참고; 이민원, 「민영환의 모스코바 외교와 『천일책(天一策)』」, 『청계사학』 17 (2002), pp.894-899 참고. 09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1905) 11월 28일. 10 『매천야록』, 4권, 1905년, 「고국민유서(告國民遺書)」.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매천야록』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과 그에 대한 국역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를 참고하였다. 11 『매천야록』, 4권, 1905년, 「고각국공사유서(告各國公使遺書)」. 12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1905) 11월 30일. 또한 민영환에 대해 고종은 “의지와 기개가 전일하고 단정하여 왕실의 근친으로서 곁에 가까이 있으면서 보좌한 것이 많았고 공적도 컸고, 짐이 일찍부터 곁에 두고 의지하며 도움받던 사람”(『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1월 30일)이라고 하며 국가를 위해 충성했던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13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1905) 12월 3일. 14 《대한매일신보》, 「민공장의(閔公葬儀)」, 1905년 12월 19일. 이와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이성현, 「민영환의 ‘순국’ 담론에 대한 고찰」 『강원사학』 26 (2014), p.125 참조. 15 영국인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은 1904년 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와서 양기탁 등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이 신문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한 목소리를 높이며, 국민에게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당시 신문 중 가장 많은 부수(대략 1만 3천 부)를 발행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고, 조선 총독부에 의해 친일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바뀌었다. 16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3일, 「독계정민보국유서(讀桂庭閔輔國遺書)」. 17 『매천야록』 5권, 1906년, ‘민영환의 생죽(生竹)’ 참고. 18 《대한매일신보》 1906년 7월 5일. 19 이희목, 「민충정공혈죽시 연구」, 『한문학보』 7 (2002), p.273 참고. 20 권대광, 「혈죽 담론의 형성 과정과 공론장적 성격」, 『청람어문교육학회』 55 (2015), p.330 참고. 당시 가장 높은 판매 부수를 올렸던 《대한매일신보》는 1909년 7월 31일까지 87건(민영환 관련 32건, 혈죽 관련 55건)의 기사를 남겼다. 또한, 《황성신문》(1898 창간)에서도 1906년 혈죽과 관련된 광고와 기사를 34건 이상 게재하였다. 21 최익현은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상소를 올리고, 민영환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본받아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면암선생문집』 부록 3권, 을사년(1905, 광무9)에 기록된 글과 『면암선생문집』 16권, 잡저(雜著),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22 애국 계몽단체인 대한구락부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키쿠다 마코토(菊田眞) 사진관에 의뢰하여 혈죽 사진을 촬영하였다. 이 사진은 1906년 7월 15일에 찍은 혈죽 사진 위에 민영환의 초상사진을 메달과 같은 원형 모양 형식으로 붙이고 그 전체를 다시 복제 촬영한 것이다. 23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p.182 참고. 24 《대한매일신보》(1905년 12월 3일)는 민영환의 순국을 다음과 같이 애도하며 전했다.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의 한 몸이 대한제국 독립을 위하여 죽고, 2천만 동포 형제의 자유를 위하여 죽음이니 이 같은 충성을 다하고 사랑을 지극히 한 것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요.” 25 민영환에 관한 기사를 게재한 주요 신문으로는 《대한매일신보》(1904. 7. 18.∼1910. 8. 28), 《황성신문》(1898. 9. 5∼1910. 9. 15), 《제국신문》(1898. 8. 10∼1910. 8. 2) 등이 있으며, 주요 잡지로는 《서우》(1906. 12∼1908. 5), 《대한자강회월보》(1906. 7∼1907. 7), 《대한학회월보》(1908. 2∼1908. 11) 등이 있었다. 특히 영국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는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아 다른 신문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민족의 현실을 보도할 수 있었다. 26 장지연 지음, 노영수 옮김, 「민충정공 영환전」, 『나라사랑』 102 (2001), p.29. 27 『면암선생문집』 16권, 「잡저(雜著)」,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 28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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