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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賤)의 대표 신선, 남채화
출판팀 한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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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 남채화, 「김홍도 필 파상군선도」 8폭 병풍 중 6폭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남채화(藍采和)는 누더기 적삼을 입고 꽃바구니 혹은 박판(拍板: 딱따기)을 들고 있는 떠돌이 예인(藝人)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이것은 특정한 계층에 관한 묘사가 아니라 당나라 말기, 혹은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 중국 어딘가에 있었던 득도한 예인의 모습이라 짐작된다. 「팔선도(八仙圖)」에서 석 자 길이의 긴 박판을 손에 들고 있는 인물이 남채화다. 박판은 옛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 박자를 맞추기 위해 두드리는 악기다. 그 성이 ‘남(藍)’인 것에 빗대어 ‘꽃바구니[藍]’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남채화는 그의 이름이 아니며 그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답답가(踏踏歌) 남채화(藍采和)’라고 외치며 후렴처럼 장단을 맞추었으므로 사람들이 남채화라고 불렀다. 그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헤져서 너덜너덜한 남색 긴 장삼을 걸치고 성안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 출몰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남색 장포를 입고 세 치나 되는 넓은 허리띠를 둘렀는데 그 허리띠는 다가가서 자세히 보면 나무를 먹으로 검게 물들인 것이었다. 한쪽 발에는 가죽신을 신었으나, 다른 쪽은 버선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작열하는 무더운 여름에는 남색 장포 안에 솜을 가득 넣어 두껍게 입고 다녔고, 삭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는 너덜너덜한 홑겹의 장삼을 입고 다녔다. 특이하게도 여름에는 땀을 흘리지 않았고, 겨울에는 도리어 온몸에서 열기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남채화에 관한 최초 기록은 오대십국 중 하나인 남당(南唐)의 심분(沈汾)이 저술한 『속선전(續仙傳)』에 보인다. 이 기록에서 남채화는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는 거지 행색의 떠돌이 예인으로 등장한다. 특히 더위와 추위를 느끼지 않고 기를 뿜어내며 몸속의 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비범한 신선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무명의 유랑 가인, 남채화
남채화가 박판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거리를 활보할 때마다 한 무리의 남녀노소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박수 치며 웃었고 한편으로 그와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남채화가 노래하지 않을 때는 농담 거는 자들에게 한마디씩 던지는 말이 풍자가 있고 재치가 있어 사람들을 포복절도하게 하였다. 그가 거리를 활보하며 불렀던 노래는 매우 다양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답답가 남채화’로 시작하는 노래다.
답답가남채화(踏踏歌藍采和) 신발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남채화야 세계능기하(世界能幾何) 세계에 몇 명이나 있을 수 있겠는가? 홍안일춘수(紅顔一春樹) 홍안의 젊은 얼굴은 봄 한철 나무이고, 유년일척사(流年一擲梭) 흐르는 세월은 베틀의 북처럼 빠르다네. 고인혼혼거불반(古人混混去不返) 옛사람들은 도도히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데, 금인분분래갱다(今人紛紛來更多) 지금 사람들은 어지러이 오는 이 더 많더라. 조기난봉도벽락(朝騎鸞鳳到碧落) 아침에는 난새와 봉황을 타고 하늘에 오르고, 모견창전생백파(暮見蒼田生白波) 저녁이면 푸른 밭에 흰 파도가 이는 것을 본다네. 장경명휘재공제(長景明暉在空際) 길게 뻗치는 햇빛은 하늘가에 빛나는데, 금은궁궐고차아(金銀宮闕高嵯峨) 금은 궁궐은 깎아지른 산처럼 높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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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부르며 성안을 다니다 보면 그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돈을 긴 끈에 꿰어 끌고 다녔는데 가끔 돈이 떨어졌으나 연연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가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줄에 꿴 돈을 모두 내어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어렸을 때 남채화를 자주 보았고 노인이 된 후에도 종종 보았지만, 그의 용모는 옛날과 같았고 조금도 노쇠한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남채화의 세 가지 보물
그가 인간 세상에 머물며 살았지만, 누구나 다 갖고 있는 성씨도 확실치 않았다. 그렇지만 남채화는 늘 자유로웠고 얽매인 데가 없었으며 한세상을 즐겁게 보낸 특이한 신선이었다. 그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었는데, 그 보물은 ‘검약과 자애와 겸양’이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허름한 옷 한 벌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검약(儉約)’이었다. 검소했기에 자기 뜻을 넓게 펼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자애(慈愛)’를 베풀었고, 그 때문에 용감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도 길을 양보할 수 있는 ‘겸양(謙讓)’이 있었기에 도에 통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남채화는 매일 시장을 돌며 구걸했고, 손에는 길이가 석 자쯤 되는 큰 나무판인 박판을 들고, 취하면 가끔 발로 박자를 맞추며 부르는 노래인 답가(踏歌)를 불렀다. 물론 그의 그런 모습은 노인과 어린아이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는 미친 사람 같았으나 결코 광인은 아니었다. 그의 노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흥얼거리는 것 같았으나 그 의미를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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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을 타고 등선하다
그는 훗날 철괴리(鐵拐李)를 만나 도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어느 하루, 그가 술에 취해 있는데, 하늘로부터 퉁소와 생황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백학 한 마리가 술집 창문을 통해 그의 옆으로 날아와 앉았다. 술을 마시던 남채화는 술잔을 놓고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웃으면서 “왔구나! 왔구나!”를 두어 번 반복하고는 홀연히 백학을 타고 승천했다. 그리고 곧 하늘에서 남채화의 헌 옷과 신발 한 짝 그리고 허리띠가 떨어졌다. 사람들이 그의 옷을 집어 들어보니, 그것은 헌 옷이 아닌 모두가 푸른 옥이었다. 그가 승천하면서 그의 노랫가락 또한 사라졌지만, 그 이후로도 남채화는 때로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남채화는 팔선 중 여동빈, 철괴리 등 유명한 신선들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천시와 차별을 받던 ‘예인 남채화’는 신선의 반열에 올라 당시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백성들의 슬픔과 서러움을 달랬다. 나아가 남채화는 소외자들의 신으로 백성에게 풍자와 재치를 통해 안위(安慰)를 주는 신선의 역할을 지니고 있어 명실상부한 ‘천(賤)의 대표 신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참고문헌】 •김관종ㆍ전윤주, 『팔선열전』, 인천: 리토피아, 2015. •구보 노리타다, 『도교의 신과 신선이야기』, 이정환 옮김, 서울: 뿌리와 이파리, 2004. •사가데 요시노부, 『도교백과』, 이봉호ㆍ최수빈ㆍ박용철 옮김, 서울: 파라북스, 2018. •쫑자오펑, 『도교사전』, 이봉호ㆍ최수빈ㆍ박용철 옮김, 서울: 파라북스, 2018. •진기환, 『중국의 신선이야기』, 파주: 이담북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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