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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원평에 모인 동학당

원평에 모인 동학당

 

 

교무부 조규제

 


이해 七월에 동학당원들이 원평에 모였도다. 김 형렬이 상제를 뵈옵고자 이곳을 지나다가 동학당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상제를 찾아뵈옵고 그 사실을 아뢰니 상제께서 그 모임의 취지와 행동을 알아 오도록 그를 원평으로 보내시니라. 그는 원평에서 그것이 일진회의 모임이고 보국안민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대회 장소가 충남(忠南) 강경(江景)임을 탐지하고 상제께 되돌아가서 사실을 아뢰었도다. 이 사실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네들로 하여금 앞으로 갑오(甲午)와 같은 약탈의 민폐를 없애고 저희들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쓰게 하리라. 내가 먼저 모범을 지어야 하리라” 말씀하시고 본댁의 살림살이와 약간의 전답을 팔아 그 돈으로 전주부중에 가셔서 지나가는 걸인에게 나누어 주시니라. 이로부터 일진회원들은 약탈하지 않고 자기 재산으로 행동하니라. 이 일로써 전주부민들은 상제께서 하시는 일에 감복하면서 공경심을 높였도다.


(교운 1장 15절)

 

  위인용문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이후 동학이 합법적인 포교 활동을 위해 민회(民會: 이는 이후 일진회와 합병하게 됨)를 만들려 했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1904년 당시의 상황을 보면 김형렬이 원평을 지나다가 일진회원(동학당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상제님에게 보고를 하자 상제님께서 김형렬에게 상황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셨다.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의 보고를 받으신 후 동학당원들이 갑오(1894)년과 같은 폐해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공사를 보시는 상황이다. 이 글에서는 위에 나오는 상제님의 공사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동학당원들이 원평에 모이게 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 영화 <화평의 길> 극 중, 일진회 보고를 받으신 후 공사를 보신 연출 장면 캡처


 

동학의 민회 설립


  윗글에 나오는 동학교도들이 원평에 모인 이유는 민회를 설립하라는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당시 동학 재건의 움직임과 관련이 깊다. 동학은 동학농민혁명(1894)이 실패한 후에도 반국가세력으로 지목되어 정부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고 1898년에는 최시형이 체포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후 손병희는 1900년 7월 교단의 핵심 지도자 40여 명이 참석한 설법식에서 손천민(孫天民, ?~1900)을 성도주(誠道主)로, 박인호(朴寅浩, 1855~1940)를 경도주(敬道主)에, 그리고 김연국(金演局, 1857~1944)을 신도주(信道主)로 선임하고 자신은 법대도주(法大道主) 01가 되어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하고 1901년 3월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손병희는 2번에 걸쳐 포교 활동이 가능하도록 합법적인 동학 재건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03년에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손병희는 당시 일본 육군참모장이었던 다무라 이요조〔田村怡與造, ?~1903〕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을 동원하여 동학을 중심으로 한 조정의 정권 장악을 꾀했으나 그가 갑자기 죽으면서 이러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02 1904년에는 방향을 바꾸어 독립협회와 같은 민회 설립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1904년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때였다. 2월에 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에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손병희는 일본의 승리를 확신하며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독립협회와 같은 공개된 민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민회를 설립하고 일본의 승리를 돕는다면 동학이 정부의 탄압을 받지 않고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전쟁 직후 손병희는 이용구(李容九, 1868~1912)에게 민회의 설립을 지시하였다.
  이에 이용구는 2월에 각 지역의 동학 교두(敎頭)를 경성으로 호출하여 공개적인 민회인 대동회(大同會)의 설립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하지만 전쟁 상황으로 인해 일본군의 경계가 삼엄하다는 교두(敎頭)들의 의견에 따라 이용구는 공개적인 민회의 설립을 중지하였다.03 하지만 그는 대동회라는 명칭의 민회 설립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전경』을 바탕으로 1904년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면 이용구는 전국 동학교도들에게 민회를 9월 초순경에 설립할 계획을 8월(음력 7월경) 중순경에 통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의 동학교도들은 9월 초순의 민회 설립을 위한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간 지점에서 결집하여 집회 장소로 이동하였을 것인데 그러한 상황 중 하나가 위의 성구에 나오는 원평 집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형렬이 이들의 대회 장소가 충남(忠南) 강경(江景)이라고 상제님께 보고한 내용으로 보아도 원평이 중간 결집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여주는 내용이 행록 3장 14절에 나온다. 1904년 8월(음력 7월)에 전주에서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이 있었는데 최창권(崔昌權)04이란 사람이 부내의 아전을 모아 일진회 타도의 의병을 일으키고자 각 군 각 면으로 통문을 보낸 것이다.
  이때 전주에 모인 일진회는 원평에 모인 동학교도들과 같이 민회 설립을 위해 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원평에서 있었던 일진회와 관련된 사건으로는 상제님의 처남 정남기가 상제님께 일진회 가입을 강권하고 군중과 합세하여 상제님의 상투를 가위로 자르려 해도 잘리지 않았는데 상제님께서 친히 한 줌을 베어 주시며 “이것으로 여러 사람의 뜻을 풀어주노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05


▲ 영화 <화평의 길> 극 중, 상제님께서 친히 머리카락 한 줌을 베어 주신 연출 장면 캡처



  반국가단체로 지목된 동학이 민회를 개최하며 공개적인 집회를 여는 것은 정부의 직접적인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민회 설립을 주도하고 있던 이용구는 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8월 18일에 등장하였다. 이 날 송병준(宋秉畯, 1857~1925)을 중심으로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친일파들이 경성에서 일진회06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이를 본 이용구는 친일 정부와 협력 관계였던 이들 친일파를 민회의 지원 세력으로 삼으면 정부의 탄압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용구는 손병희와 민회 설립의 문제를 논의하여 일진회와의 연대를 승인받았고 송병준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이용구는 동학은 일본을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나 송병준은 동학혁명운동 당시 일본군과 전쟁을 벌였던 점을 들어 이를 의심하였다. 그러면서 송병준은 믿음의 증거로 동학교도들에게 단발과 흑의를 요구하였는데 단발과 흑의는 손병희가 근대적인 개혁을 위해 앞서 추진한 것이기도 했으므로07 이용구는 송병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용구의 주선으로 송병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를 만나 동학과 일진회의 연대를 협약하였다.


▲ [이용구와 일진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용구와 송병준 그리고 손병희가 이러한 협의를 한 시기는 9월 초순이었다. 이 시기는 동학교도들이 민회 설립 집회를 위해 원평에 모였던 때였다. 하지만 그러한 협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민회 설립은 자연스럽게 연기되었다. 협의가 모두 마무리된 후인 9월 14일에 이용구는 민회의 설립을 선언하고 10월 8일에 집회를 열도록 전국에 ‘진보회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이는 당초 9월 초순 개회보다 한 달 연기된 것이다.
  민회의 명칭에도 변화가 있었다. 당초 9월 초순경에 개최할 예정이었던 민회(중립회)는 송병준과 협의를 거친 후 진보회로 바꾸어 개회하도록 통지하였다. 원평에 모였던 동학교도들은 9월에 개회하려 했던 민회가 10월로 연기되자 그 일정에 맞추어서 움직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원평에 모였던 동학당들이 강경으로 가려 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동학당의 움직임을 탐문한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10월 10일 산외면에 300∼400명의 동학당이 모였는데 이들은 “이번 경성 일진회로부터 상경하라는 통달을 접하고 북상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금구군 원평으로 가서 단발을 하고 함열군 황등리로 간다는 것이다.08
  이들이 원평에 모여 단발을 하며 결의를 다지는 것은 함열군 황등리로 가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목적지가 경성인 것처럼 보고되었는데 실제 이들의 목적지는 충남 강경이었다. 이들은 함열군 황등에서 여산과 익산 방면에서 오는 회원들과 합세하여 충남 강경에서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위 성구에서 김형렬이 상제님께 보고한 대로 당시 원평에 모였던 동학당 또한 황등리를 거쳐 강경으로 가려 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제님의 공사


  김형렬로부터 동학교도들의 움직임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이들이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와 같은 약탈과 민폐를 저지른다면 민심의 이반과 정부의 탄압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라 예견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갑오와 같은 약탈을 없애고자 공사를 행하셔서 그들의 앞날을 열어주셨다. 상제님께서는 “그네들로 하여금 앞으로 갑오(甲午)와 같은 약탈의 민폐를 없애고 저희들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쓰게 하리라. 내가 먼저 모범을 지어야 하리라”라고 하시며 부친의 전답을 팔아 전주부중으로 가서 지나가는 걸인들에게 그 돈을 나눠주셨다. 이 공사를 행하셨던 때는 8월(음력 7월)경으로 동학교도들이 원평에 모인 직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만약 이렇게 공사가 행해지지 않았다면 갑오와 같은 약탈의 민폐를 상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정부의 가혹한 탄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공사를 행하신 후 9월 14일에 진보회 개회를 선언한 이후 동학교도들의 움직임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우리 회원이 되면 경성을 왕복할만한 여비를 휴대하고 가입하는 규약이 있으며, 그 입회자는 어떠한 작은 일이라도 國法을 범하는 것 같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09

 

  위 인용문은 함열군 황등의 진보회장이었던 이병춘이 10월 10일 충남 강경 집회 때의 상황을 진술한 것이다. 상제님께서 먼저 모범을 지어 진보회원(일진회원)들이 각자가 자기의 재산을 쓰게 하신 공사와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이다. 이들의 규약에는 회원들이 각자가 자신이 쓸 경비를 휴대하고 입회한다는 내용과 약탈을 금하고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게 하는 등 국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절 금한다는 내용이 있다.
  한편 고종과 대한제국 정부는 진보회 설립의 움직임이 있을 때부터 진보회원을 동학잔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0 9월 14일 전국 각 지역에서 진보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고종은 1904년 9월 20일과 22일 연이어 각도 관찰사들에게 동학도를 체포하도록 지시하였다.11 이는 동학교도들이 전국적으로 민회를 조직하여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이들을 체포토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탄압을 벗어나고 우호적인 민심을 얻어 조직의 안전을 위해 이들은 자신들의 규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10월 10일 충남 강경의 진보회 설립 집회가 정부와 충돌 없이 마무리된 것 역시 포탄을 앞세운 여산군수의 위협에 자진 해산하였다11고는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회원들의 안전과 민심을 얻기 위한 대응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동학교도들이 강경의 집회에서 충돌 없이 해산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제님께서 김형렬에게 원평에 모인 동학당의 취지와 행동을 들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갑오(1894)년과 같은 약탈의 민폐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공사를 행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1904년 당시 전주에 모였던 동학교도들과 아전의 교쟁을 화해시키기 위해 돈 여섯 냥으로 공사를 보시며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겠으니 그들을 내가 제생 하리라”(행록 3장 14절)는 말씀의 취지와도 같은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01 이용창, 「동학농민운동 이후 손병희의 단일지도체제 확립과정과 동향」,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p.108 참조.
02 이용창, 「동학ㆍ천도교단의 민회설립과 정치세력화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5), p.75 참조.
03 같은 글, p.81 참조.
04 김현진,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 《대순회보》 226호 최창권 참조. 「일진회와 아전의 교쟁」에서 최창권에 대하여 당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전주 아전이었던 정창권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05 행록 3장 9절 참조.
06 일진회는 1904년 8월 18일에 구 독립협회 인물인 송병준ㆍ윤시병ㆍ유학주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할 때 명칭은 유신회(維新會)였으나 2일 후에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로 바꾸었다.
07 조응태, 「동학 천도교 예복 제정의 역사와 의의」 『신종교 연구』 36집(2017), p.13 참조.
08 이용창, 「동학ㆍ천도교단의 민회설립과 정치세력화 연구」, p.129.
09 경기도경찰부장, 「進步會員ト稱スル韓民集會ノ件ニ關スル具報」 (1920), pp.373-374. 이용창, 「동학ㆍ천도교단의 민회설립과 정치세력화 연구」, p.127 재인용.
10 김종준, 「일진회ㆍ일진지회의 활동과 향촌사회의 동향」, 『한국사론』 48 (서울: 경인문화사, 2002), p.177 참조.
11 『高宗實錄』 권44, 光武 8年, 9月 20日, 22日.
12 이용창, 앞의 글, p.12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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