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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산문 장려
나는 오늘, 흙이 되기로 했다
문정2 방면 교감 김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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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을 잘 본다고 믿어 왔다.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와 눈빛만 보아도 누가 수도에 뜻을 두었는지, 누가 곧 등을 돌릴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말없이 떠나던 한 수반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그 오만한 믿음은 조용히 무너졌다.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끝까지 품어 안을 수 있는 마음의 깊이에 달린 일임을 그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그를 품을 부드러운 흙이 되지 못하여 소중한 인연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바람에 흩날려 간 것은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 나는 사람을 대하는 내 마음의 문법을 처음부터 다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실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능력이나 화려한 언변으로 그 가치를 가늠하려는 시도는 광활한 사구(砂丘)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것만큼이나 막막한 일이다. 세상의 눈은 화려하게 피어난 꽃과 탐스러운 열매를 먼저 좇지만, 하늘은 언제나 그 이면의 ‘속’을 살피신다. 보이지 않는 흙 속에 묻힌 씨앗은 때가 이르면 반드시 생명의 싹을 틔운다. 대순진리회의 수도인이라면 마땅히 그 보이지 않는 씨앗의 가능성을 볼 줄 알아야 하며, 그 씨앗이 스스로 껍질을 벗기까지 기꺼이 씨앗을 품는 흙이 되어 기다려 줄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기다림의 미학을 나는 중국의 춘추시대 인물인 포숙아와 관중의 이야기에서 다시금 발견한다. 젊은 시절, 관중은 함께 장사하며 늘 자신의 몫보다 많은 이익을 챙겼으나 포숙아는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이 어려우니 그럴 수밖에 없다”라며 허물을 덮어주었다. 전쟁터에서 관중이 세 번이나 달아났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비겁자라 손가락질했지만, 포숙아는 “그에게는 모셔야 할 노모가 있다”라며 그의 사정을 먼저 헤아렸다. 그는 눈앞의 행위보다 그 사람의 처지를 보았다. 훗날 제나라의 재상이 된 관중이 남긴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로다”라는 절절한 고백은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포숙아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관중이라는 씨앗이 안전하게 발아할 수 있도록 토양이 되어준 것이다. 포숙아의 이런 행위는 어쩌면 선각(先覺)이 갖춰야 할 모습이 아닐지 싶다. 토양은 스스로 빛나지 않으나 모든 생명은 그 어둡고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선각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그 꽃을 피워내는 흙이어야 한다. 교법 1장 11절에서 상제님께서는 김갑칠을 꾸짖는 김형렬에게 “그대의 언행이 아직 덜 풀려 독기가 있느니라” 하시며, “미워하여 제거하려 하면 풀 아닌 것이 없고, 좋게 보려 하면 모두가 꽃(惡將除去 無非草 好取看來 總是花)”이라 일러주셨다. 이 말씀은 오늘날 나의 인연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깊이 자문하게 한다. 내 곁의 수반은 ‘뽑아야 할 잡초’인가, 아니면 ‘피워야 할 꽃’인가. 그 차이는 상대의 결함이 아니라 바라보는 내 마음의 ‘결’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포덕의 현장에서 마주한 시련을 통해 비로소 내 살과 피가 되었다. 입도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며 도(道)를 외면하던 한 수반이 있었다. 밖으로만 도는 그를 보며 나의 마음은 조급함으로 타들어 갔다. 입술 끝까지 “이러려고 입도했느냐”라는 날카로운 훈계가 차올랐으나, 떨고 있는 그의 거친 손등과 불안한 눈빛을 본 순간 나는 그 말을 가까스로 삼켜내야 했다. 차갑게 돌아선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홀로 번민하던 긴 밤, 나는 비로소 내 안의 진짜 ‘독기’를 발견했다. 그를 향해 씩씩거리던 내 거친 숨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것은 자애로운 선각의 걱정이 아니라, 빨리 성과를 내어 나를 증명하고 싶어 했던 ‘장사꾼의 조급함’이었다. 씨앗이 껍질을 벗기도 전에 내가 먼저 흙을 파헤쳐 생채기를 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상제님께서 경계하신 독기가 바로 나의 이 조급한 마음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뜨거운 참회의 심고가 터져 나왔다. 그날 이후 내가 할 일은 명확해졌다. 그를 흔드는 비바람이 아니라, 그가 다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더 따뜻하고 깊은 흙이 되는 것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다시 찾아와 방황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던 날, 나는 알게 되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품고 함께 견디는 지극한 정성의 시간이었음을. 인내 끝에 스스로 돋아난 싹은 그 어떤 훈계보다 단단한 신념의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도운(道運)이라는 너른 밭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씨앗들이 뿌려져 있다. 어떤 이는 일찍 싹을 틔우고, 어떤 이는 오랜 침묵 끝에 고개를 내민다. 그러나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씨앗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다. 땅속에서 스스로 껍질을 벗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 힘을 다해 견디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과정을 조급히 파헤쳐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온기를 나누며 그가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일이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씨앗 하나에도 하늘의 명(命)이 깃들어 있음을 믿는다. 미숙한 인연을 품어내는 인내 속에서 나 또한 비로소 깊은 마음을 가진 수도자로 여물어 간다. 단순히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아픔까지 내 몸처럼 품어 안으며 그가 꽃피울 그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녹여내는 지극한 사랑으로 상생하려 한다.
토양이 깊고 따뜻하면 발아한 씨앗이 튼튼하게 뿌리 내린다. 지금은 상처받고 소외된 모습일지라도, 그 또한 아직 제때를 만나지 못한 귀한 생명일 뿐이다. 이제 나는 도장에서 수반을 마주할 때 나의 잣대로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그의 고단한 이야기를 먼저 듣고 지친 어깨를 가만히 다독이는 법부터 다시 배우고 있다. 나는 오늘 도장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다시 한번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상처를 주는 차가운 비바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생명을 품어 안는 낮은 흙이 될 것인가. 흙이 되기로 마음먹는 일은 말처럼 쉬운 선택은 아니다. 조급함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고, 내 안의 독기는 늘 나를 앞세우려 한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또 한 번 그 자리에 남아 보기로 한다. 하늘이 내어준 소중한 인연들을 위하여, 완전한 흙은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누군가의 뿌리를 상하게 하지 않는 흙으로 남아 있기를 스스로 조용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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