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순문예 : 산문 장려
덕화로 다시 걷게 된 감사
신암9 방면 선감 이순자
.jpg)
서울에서 안과 진료를 마치고 여주로 오려던 순간,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며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급히 찾은 정형외과 두 곳에서 같은 진단을 받았다. “연골이 다 닳아 뼈와 뼈가 맞닿아 있습니다. 수술하지 않으면 곧 걷지 못하게 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앞이 캄캄해지는 느낌이었다. ‘할 일은 많은데…, 목표는 남아 있는데…. 이러다 모든 계획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큰일이 났다는 불안감이 가득했고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오직 하나, 무릎만이라도 낫게 해 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안고 도장으로 향했다. 걷지도 못할 만큼 힘든 상태였지만, 수호자 교대 일정에 맞춰 참여했다. 평소라면 숙소에서 숭도문까지 5~1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데 그날은 30분이 넘게 걸려서야 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너무 버거웠고, 발을 디딜 때조차 뼈와 뼈가 맞부딪히는 듯한 느낌과 통증이 이어졌다. 그 고통은 말로 다 전하기 어려웠다. 도장에서는 안전을 위해 혹시 모를 사고를 우려해 몸이 불편한 도인들의 출입을 자제시키고 있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지팡이나 보조기구를 사용하고 싶으면서도 혹여 다른 도인들께 걱정을 끼치지는 않을까, 작은 사고라도 나면 주변 분들께 심려를 안겨 드리는 건 아닐지 하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끝까지 스스로 걸어 보려 애썼다. 몇 발짝 옮기고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주변 풍경을 한 번 바라보며 숨을 고른 뒤, 다시 아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혼자 숭도문을 지나 수호 초소로 오르는 계단에 이르러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도장은 여느 때처럼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 나만이 멈춰 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혼자 심고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붙잡을 수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도전님, 살려주십시오. 수술 없이 낫게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몰려왔다. 그래도 계속 심고와 기도를 이어갔다. 그러는 동안 오래전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그때도 도장 수호를 맡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일하고 있던 동생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심고를 드리는 것뿐이었다. 당장이라도 동생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자리를 지켰다. 수호 일정을 끝까지 마치지 않는 것은 나의 책무를 저버리는 일이라 여겼다. 나는 눈물로 매달리며 간절히 기도를 이어갔다. 그 기도가 닿았던 것일까. 식물인간 상태로 왔던 동생이 스스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는 믿기 어려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때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몸이었기에 그 변화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 반가운 소식을 들었을 때 밀려왔던 놀라움과 깊은 감사의 마음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또렷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 이후로 동생은 점차 안정을 되찾아 정상적인 생활을 이어갔고, 그렇게 15~16년이라는 세월을 더 살았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희망을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한번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릴 뿐이었다. 사흘 동안 심고와 기도를 이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 고통 속에서도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누군가가 조심스레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수술하더라도 줄기세포를 먼저 넣고 진행하면 통증이 훨씬 덜합니다. 잘하면 수술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환히 길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도전님께서 나를 이끌어 주시는 것만 같았다. “줄기세포를 넣으면 혹시 수술을 안 해도 됩니까?” 기대와 떨림이 섞인 마음으로 반가워 되물었다. “보통은 줄기세포를 넣고 나면 수술까지 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한마디는 나에게 큰 희망이 되었고 ‘아직 길이 남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주었다. 그때 문득 예전에 들었던 “신명이 알음 귀를 열어주는 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곧바로 실천하라”는 교화가 떠올랐다. 그 말씀이 바로 지금의 나를 향한 가르침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미루지 않기로 했다. 심고를 드리고 그다음 날 바로 줄기세포 시술 날짜를 잡았다. 요즘 병원 사정상 몇 달이 걸려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곧바로 입원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덕화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깊이 감사가 차올랐다. 시술은 끝났고, 병상에 누워 조용히 회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처럼 움직일 때마다 몰려오던 날카로운 통증은 한결 가라앉았지만, 아직은 조심스러워 작은 움직임에도 숨을 고르게 되곤 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누워 있노라면 다시 걸어 다닐 내 모습을 자꾸 그려 보게 되었다. 지팡이 없이 천천히 마당을 거닐고 도장 길을 오르내리며 예전처럼 일상을 이어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만 더 버티면 좋아지겠지.’ 그런 기대를 품으며 완쾌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몸이 잘 회복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고, 덕화 속에서 이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용히 심고를 드렸다. 병실에 누워 조용한 시간, 자연스럽게 지난날의 기억이 하나둘 떠올랐다.
내가 마흔을 막 넘겼을 무렵, 반야월회관이 지어졌다. 당시 건축 현장은 각목과 철근 등의 자재가 즐비했다. 우리는 기둥마다 철근을 촘촘히 엮어 세우고, 그 주위를 합판 거푸집으로 감쌌다. 콘크리트가 굳고 나면 다시 그 무거운 목재들을 하나하나 해체하는 작업이 연속되었다. 현장은 늘 일손이 부족했고 외수보다 내수가 많아서 외수가 해야 할 일을 내수들이 맡아 해냈다. 하루 일을 마치면 어깨가 내려앉은 듯 무겁고, 팔을 들어올리기조차 힘들었다. 온몸에 쌓인 피로는 쉽게 가시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지칠 줄을 몰랐다.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겠다는 마음으로 짧은 휴식을 뒤로한 채 다음 날을 맞이하곤 했다. 그만큼 모두가 한마음으로 회관을 세워 간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힘을 보태며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고 맡은 일을 감당해 냈다. 힘겨운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이뤄 가는 과정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 가운데 정겨운 장소가 있었다. 공사 현장에 천막으로 지어진 임시 식당, 허름한 그곳에서 따뜻한 밥과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을 마주하는 시간은 큰 위로가 되었다. 몸이 지쳐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국물을 들이켜며 다시 힘을 내곤 했다. 여유롭게 앉아 식사할 틈도 없이 서서 몇 숟갈을 넘기고는 곧장 현장에 돌아갔다. 한 사람이 나가면 다음 사람이 들어오고, 그렇게 돌아가며 식사를 이어갔다. 제대로 씹을 시간도 없이 국물로 입을 적시고 다시 망치를 잡으러 나가던 날들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뜨끈한 국물 한 그릇이 지친 몸과 마음을 지탱해 주던 소중한 힘 중 하나였음을 깨닫게 된다. 잊지 못할 장면 하나가 또 있다. 공사 중 어느 날, 먼지와 땀으로 가득한 현장 위에 무지개가 뜬 것을 보았다. 거친 공사장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감동이 밀려왔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 한쪽이 뜨거워진다. ‘그때 도통이 났다면 틀림없이 받았을 것이다’ 싶을 만큼 도심이 깊어지고 정신이 맑아지던 순간이었다. 회관 공사는 봄부터 겨울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건물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고,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위험과 고단함이 함께했다. 한번은 건물이 막 3층으로 올라가던 때였다. 지하 벽면 해체 작업을 하던 중, 계단 옆면의 합판 구조물을 여러 명이 함께 떼어 내다가 순간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발밑은 단단한 시멘트 바닥이었고, 주변에는 철근이 튀어나와 있어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넘어지는 찰나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긴장이 스쳤고, 곧 닥칠 충격을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고 혹이 나는 정도로 상황은 끝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이 한 걸음 비켜 세워준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잠시 앉아 가쁜 숨을 고르며 아무 일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때의 놀람과 안도감은 지금까지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5층 봉심전 바닥 철근 작업에서 긴장의 순간들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 건물 바깥에 보조 계단은 좁은 작업 통로로 여러 사람이 큰 각목을 들고 오르내리는 곳이었다. 겨울이 막 다가오던 무렵, 각목 네다섯 개를 메고 외부 계단의 코너를 돌던 중 길게 뻗은 각목 하나가 계단 모퉁이에 걸리면서 균형을 잃고 말았다. 무게중심이 아래로 쏠리며 떨어지는 순간, ‘머리를 다치면 끝이다’라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어깨에 메고 있던 각목을 사람이 없는 쪽으로 내던졌다. 머리만은 부딪히지 않으려는 마음에 몸을 틀어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그 찰나에 그런 움직임이 가능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지만, 다행히 무사했고 큰 골절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왼쪽 다리에는 충격이 있었던지 퉁퉁 부어올랐다. 병원에 갈 형편도, 시간을 낼 여유도 없어 얼음찜질로 통증을 견뎠다. 큰 대야에 얼음물을 만들어 다리를 담그면 살을 에는 듯 차가웠지만, 그때는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무렵부터 눈에도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앞이 흐릿해지고 시야가 분명하지 않아 실명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이후 그런 상태가 약 7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던 중 안경원을 운영하던 친구가 내 눈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 같아. 빨리 병원에 가서 진료받아 봐”라고 했다. 곧바로 병원을 찾았고, 검진 끝에 렌즈 삽입 수술을 받았다. 덕분에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삽입했던 렌즈가 시간이 흘러 교체 시기가 되었고, 작년에 다시 렌즈를 삽입했다. 그 모든 위험과 고단함에도, 마음 한편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늘 있었다. 사람의 힘이 아닌 듯한 보살핌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손이 위험에서 나를 지켜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아찔했던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레 ‘덕화’라는 말이 떠오르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아무리 힘들었어도 결국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었고, 다시 앞을 볼 수 있었으며, 다시 맡은 길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큰 덕화였다. 그때의 시간은 바쁜 일정의 공사 기록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보호받으며 지나온 삶의 여정이었다. 몸은 상처를 입고 약해지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마음은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졌다. 봉심전을 바라볼 때마다, 그 안에는 철근과 콘크리트뿐 아니라, 그 시절 흘린 땀과 기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덕화가 함께 쌓여 있음을 느낀다. 신기하게도 그 큰 부상 이후로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은 다리에 큰 통증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픔도 함께 옅어진 듯했고, 그저 무사히 지나온 날들에 감사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 예순을 넘기면서부터 다리에 불편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이가 들어서 그렇겠지’ 하며 가볍게 여기고 침을 맞으며 참고 넘겼다.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그렇게 또 5~6년이 흘러갔다. 이후 60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좀 잘한다는 아로마 치료로 굳은 근육을 풀어 가며 겨우 버텨 냈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치료를 받는 날이면 제대로 걷지 못할 만큼 통증이 심했고, 아픔에 눈물을 삼킨 날도 적지 않았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하루하루를 견뎌 냈다. 그 시간을 버텨 내게 한 힘은 이 고통을 ‘복마의 발동’으로 여기며 받아들이고 참아 낸 마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통증이 가시지 않자, 몸이 고생하면 마음과 기운까지 함께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육체의 아픔이 곧 삶 전체를 흔들 수 있음을 몸소 느끼게 된 시간이었다. 그러다 이번처럼 걷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병원을 찾게 되었고, 그제야 ‘관절 상태가 상당히 나쁘다’라는 진단을 듣게 되었다. 예전 무릎 부상의 후유증까지 겹쳐 나타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참고 버텨 온 시간이 한꺼번에 몸으로 드러난 듯했다. 다행히 줄기세포 시술을 받고 난 뒤에는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날아갈 것처럼 온몸이 풀리는 듯했고, 뛰어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지만 스스로 다잡으며 조심했다. 무엇보다 통증이 줄어든 것이 가장 큰 감사였다. 아프지 않은 것이 이렇게나 소중한 일인지, 그제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겠다’라는 희망도 마음속에 조심스레 싹트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길은 덕화가 아니었다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을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이 있어도 내게 닿지 않았을 텐데, 이렇게 줄기세포 시술이라는 인연이 열리고, 그 결과가 좋게 이어진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나는 다시 천천히 걷는다. 아직 예전 같지는 않지만, 수술 없이 회복의 길을 걷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이 도를 위한 마음 하나로 버텨 낸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무릎 통증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픔이 찾아왔을 때는 겁이 나고 앞이 캄캄했지만, 심고를 드리고 나니 다시 길이 열렸다. 결국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내 힘만이 아니라, 덕화임을 이번에 또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남은 걸음은 비록 느릴지라도, 감사로 걸어가겠다고 말이다. 요즘은 회관 앞을 천천히 걸으며 건물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든든해진다. 젊은 날 모두 힘을 합쳐 온 힘을 다해 올렸던 회관이 굳건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세월의 무게 속에서도 모든 분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정성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안을 오가며 밝은 얼굴로 수도하는 도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참으로 고맙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과 기도가 흐르는 그 풍경이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조용히 위로해 주는 것만 같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도 나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딘다. 희망을 품고 감사한 마음으로 또 하루를 전진해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