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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방을 설치하시다
교무부 곽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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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무신)년은 상제님의 천지공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공사가 있었던 때였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음력 1월01의 고부화액이 있고 이후 4월의 동곡 약방 설치를 들 수 있다. 특히 동곡 약방은 보통 1908년 4월에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4월에 시작하여 6월에 완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곡 약방은 천지공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의 중요성 만큼 설치 과정이 자세히 소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서는 동곡 약방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설치 되었는지를 알아보려고 한다. 더불어 1908년 4월에서 6월 당시 상제님의 행적을 이해해 보려고 한다.
약방에 약장과 궤를 비치하시다
1908년 4월 어느 날 약방이 설치되었을까? 4월의 상제님 행적 중에는 날짜가 특정된 공사가 있다. 상제님께서 고부 와룡리에 사는 문공신02의 집 벽에 ‘정의도(情誼圖)’라는 그림을 붙이는 공사를 행하셨다.(공사 2장 26절) 이 그림을 보면 아래쪽에 ‘戊申四月十一日’(무신 사월 십일일)이라 쓰셨는데 이 글은 공사를 행하신 날이 음력으로 ‘무신(1908)년 4월 11일’이라는 뜻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이날의 공사는 동곡 약방을 설치한 이전이었을까 아니면 이후였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상제님의 행적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보면 ‘정의도’를 붙이는 공사가 약방 설치보다 먼저 나와 있다.03 동곡 약방을 마련하는데 자금을 댄 사람은 백남신이었다. 상제님께서는 1908년 4월 중순경에 돈 천 냥을 전주에 사는 백남신으로부터 가져오셨다. 이 돈을 약방 설치에 쓰셨다. 약방의 위치는 동곡에 있던 김준상의 집 방 한 칸으로 정하셨다.04 약방 설치를 위해 상제님께서는 먼저 약방에서 쓸 약장과 궤를 만드셨다. 이를 제작할 사람으로 목수 이경문을 부르시고 약장 한 개05와 궤 두 개의 제작06을 맡기셨다. 이때 그에게 그 크기의 치수와 만드는 법을 일일이 가르치시며 기한을 정해주시고 반드시 마치도록 하셨다.07 상제님의 행적을 통해 추정해 보면 대략 그 기한은 한 달이 조금 안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5월 초순경에 상제님께서 동곡에 오셨을 때 목수가 기한 내에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목재를 한 곳에 모아 놓게 하고 그 앞에 꿇어앉힌 후 크게 꾸짖고 봉서 하나를 주어 불사르게 하시며 “속히 마치라”고 독려하셨다. 목수 이경문은 수전증이 나서 고생하며 한 달을 넘겨서야 겨우 약장과 궤의 제작을 끝낼 수 있었다.08 5월 하순경 상제님께서는 제작된 약장과 궤를 약방에 들여놓으신 후 박공우에게 “천지의 약기운은 평양에 내렸으니 네가 평양에 가서 당제약을 구하여 오라”고 명하신 후 그날 밤 글을 써서 불사르는 공사를 행하셨다.09 이후 상제님께서는 동곡을 떠나 고부 와룡리 문공신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하시고 태인 살포정에 들렀다가10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으로 가셨다. 6월 초 상제님께서는 정읍 대흥리에서 종도들과 함께 공사를 행하셨다. 박공우에게 각처의 종도들을 찾아가서 11일 동안 잠을 자지 말고 새벽에 한 시간씩만 자라고 전하게 하셨다. 차경석도 상제님의 명을 좇아 여러 날 동안 자지 않았는데 하루는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문 앞 모시밭 옆에 이르러 잠에 취해 혼미에 빠져 있었다. 상제님께서 이를 보시고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11 상제님께서는 이 공사를 마치신 후 동곡으로 돌아오셨다. 상제님께서 동곡으로 돌아오신 시기는 6월 보름경으로 추정된다. 6월 초에 정읍 대흥리에 머무시며 11일 동안 공사를 보신 후 약 40km(100리) 떨어져 있는 동곡으로 이동하는데 2~3일의 시간이 걸렸다고 보면12 시기는 대략 6월 보름이 된다. 이렇게 상제님께서는 약장과 궤의 제작이 완료된 5월 하순경에 동곡을 출발하여 고부 와룡리와 태인 살포정 그리고 정읍 대흥리를 거쳐 다시 동곡으로 돌아오시는 행적을 보이셨다. 이 행적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5월 하순경 약장과 궤가 완비되자 이를 약방에 비치하신 상제님께서는 김갑칠에게 삼칠일(21일) 동안 약방을 깨끗하게 쓸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21일이 지난 후에 약방을 사용하셨다고 한다.13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상제님께서 동곡을 출발하여 고부 와룡리, 태인 살포정, 정읍 대흥리를 거쳐 6월 중순쯤에 동곡으로 돌아오시는 행적은 21일이라는 기간과 상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만국의원’을 여시다
상제님께서 동곡으로 돌아오셨을 때 가뭄이 심하여 논밭의 곡식들이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전주에 사는 김병욱이 김윤근을 상제님께 보내어 이런 사정을 전하게 하였다. 이를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전주 용머리고개 부근에 살던 김덕찬의 집으로 가셔서 기르던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종도들과 함께 그것을 잡수셨다. 이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김윤근은 “선생이 곧 만인을 살리는 상제시니라”고 고백하였다.14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에게 삼백 냥을 주시며 약재를 사오게 하셨다. 약방을 설치하기 위해 백남신에게서 가져오신 천 냥 중에서 삼백 냥을 약재 값으로 지출하신 것이다. 김병욱에게 이런 명을 하실 때 내리는 비를 보시며 상제님께서는 ‘이 비는 곧 약탕수(藥湯水)’라고 이르셨다.15
동곡으로 돌아오신 상제님께서는 밤나무로 약패(藥牌)를 직접 만드셨다. 패면(牌面)에 ‘만국의원(萬國醫院)’이라고 글자를 새기시고 그 글자 획에다 경면주사(鏡面朱砂)를 바르셨다. 그리고 박공우에게 “이 약패를 원평(院坪) 길거리에 갖다 세우라”고 명하셨다. 박공우가 약패를 갖고 원평으로 가려고 하니 상제님께서 “이 약패를 세울 때에 경관이 물으면 대답을 어떻게 하려 하느뇨”라고 물으시니 그가 “만국의원을 설치하고 죽은 자를 재생케 하며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도 걷게 하며 그 밖에 모든 질병을 다 낫게 하리라고 하겠나이다”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으신 상제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 그대로 시행하라” 하시고 그 약패를 불사르셨다.16 이 공사에 등장하는 박공우는 원래 동학 신도로서 일진회 활동을 하다가 이 일이 있기 약 1년 전인 1907년 6월 초에 상제님을 만나 뵙고 종도가 된 사람이다. 이후 그는 여러 공사에 참여하며 상제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얻게 되었는데 ‘만국의원’을 소개하는 대답 속에서도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약방 설치와 관련한 박공우의 공사 참여는 설치할 당시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 약방을 수리할 때로도 이어진다.17 6월 20일은 상제님께서 동곡 약방에서 특별한 공사를 행하신 날이다. 먼저 상제님께서는 ‘원형이정 봉천지 도술약국 재전주동곡 생사판단(元亨利貞奉天地道術藥局 在全州銅谷生死判斷)’이란 글귀를 써서 불사르셨다. 그리고 비치해 놓았던 약장과 궤를 놓고 공사를 행하셨다. 약장은 크게 삼 단으로 만들어졌는데 맨 아래 단은 한 칸이고 그 윗 단은 두칸이며 마지막 단은 약재의 수납을 위해 열다섯 칸(가로 다섯 칸에 세로 세 칸)으로 제작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약장 열다섯 칸의 가운데 칸에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쓰시고 그 속에 목단피를 넣으셨다. 그리고 그 칸 아래에 가로로 “열풍 뇌우 불미(烈風雷雨不迷)”라는 글자를 쓰셨다. 또 칠성경을 세로로 길게 적은 종이의 끝에 “우보 상최 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란 글을 덧붙여 쓰시고 이 종이를 약장 위로부터 뒤편으로 밑판까지 내려붙이셨다. 이렇게 하신 후 그 종이 위에 “양정 유월 이십일 음정 유월 이십일(陽丁六月卄日陰丁六月卄日)”이라 쓰셨는데 6월 20일은 이 공사를 행하신 날짜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궤에도 공사를 보셨는데 궤 안에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는 글자를 쓰시고 그 글자 위에 “설문(舌門)” 두 자를 낙인하신 후 그 글자 주위에는 스물네 점을 홍색으로 찍어 놓으셨다. 이렇게 약장과 궤에 대한 공사를 마치신 후 약방에 통감(通鑑)ㆍ서전(書傳)을 각 한 질씩 비치하셨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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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상제님께서는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物目: 물건의 목록)을 기록하시고 이를 박공우와 김광찬에게 주셨다. 이 물목에는 보통 한약방에서 사용하는 약연기(藥碾器: 한약재를 잘게 썰거나 빻을 때 사용하는 기구), 작두(한약재를 일정한 크기로 절단하는 도구), 유발과 유봉(고운 가루로 약재를 갈거나 섞을 때 사용하는 사발과 막자), 약체(藥篩: 약재를 굵기별로 분류하는 크기가 다른 체 또는 빻은 약재의 고운 가루만 걸러내는 도구), 약저울(약재의 용량과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 등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제님께서는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그 불상을 업어다 마당 서쪽에 옮겨 세우리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서 불사르라”고 말씀하셨고 두 사람은 금산사에 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 이 공사가 있고 몇 해가 지난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 석가불전이 마당 서쪽으로 옮겨 세워지며 미륵전 앞이 넓어지게 되었다. 이 불전이 오늘날의 대장전이다.19
약방으로 쓸 곳을 마련하시다
‘만국의원’은 동곡에 살던 김갑칠의 형인 김준상의 집 방 한 칸에 설치되었다. 이곳에 약방을 설치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전경』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김 갑칠의 형수가 발바닥의 종창으로 죽을 고생을 당하고 있는지라. 상제께서 소식을 들으시고 “그 환부가 용천혈(龍泉穴)이니 살기 어려우리라. 준상(俊相)과 갑칠은 오늘 밤 서로 번갈아 환자를 잠에 들지 못하게 하면서 밤을 새우라. 명부사자와 나의 사자 중 누가 강한가 보리라”고 말씀하셨도다. … 쌀뜨물을 환부에 바르고 百냥이 있어야 되겠다고 하시면서 돈을 청하셨도다. 준상이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가옥을 방매하여야 되겠나이다”고 여쭈어 난색을 보이므로 상제께서 그의 집을 상제께 팔게 하시니 … 그로부터 가옥 매도 문서를 받아 가지고 계시다가 잠시 후에 그것을 불사르고 준상을 그 집에서 눌러 살게 하고 방 한 간을 빌려서 수리하여 약방으로 쓰셨도다.20
이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제님께서 김준상 처가 겪고 있는 병을 치유하신 일이 약방 설치의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곡 약방이 마련된 상황이 이 일화에 자세히 나와 있어서 이해하는데 어렵지는 않다. 이 일은 상제님께서 1908년 4월 약방 설치가 결정되기 이전 동곡에 머무셨던 날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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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께서 약방으로 쓸 방 한 칸을 마련하는 일화와 관련하여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이 일이 언제 있었던 것일까 하는 것이다. 가능성이 있는 시기를 찾아 보면 1907년 5월과 11월 그리고 1908년 2월 무렵의 세 시기이다. 이 시기 중에서 먼저 1907년 5월은 상제님께서 3월 초에 말점도에 들어가셔서 공사를 보고 나오신 후 태인을 거쳐 동곡으로 오신 시기이다. 단오절(5월 5일)에는 동곡마을 사람들과 학선암으로 소풍을 가신 행적21이 있고 5월 중순에는 차경석을 만나 그를 종도로 받아들이시는 행적이 있었다.22 동곡에 한 달 가까이 머무셨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 김준상 부인을 제생케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1907년 11월초에 상제님께서는 동곡에 머무시며 사기를 옮기는 공사23와 금강산 공사24를 행하시고 박공우와 함께 전주로 떠나셨다.25 당시 동곡에 머무신 기간은 하루나 이틀 정도로 짧았던 것 같다. 상제님께서는 전주를 거쳐 고부 와룡리에서 공사를 행하신 후 고부화액을 준비하셨다.26 마지막으로 1908년 2월은 고부화액을 마치신 후 고부 와룡리에서 문공신을 만나 독조사 도수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 동곡으로 오신 때이다.27 이때 동곡에 머무시며 김준상의 아내를 치유하셨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3월경에는 태인 백암리로 가셔서 성복제와 매화 공사를 행하신 것으로 행적이 있고28 4월에 들어 동곡 약방의 설치를 시작하신다. 이처럼 상제님께서 동곡에 머무셨던 세 시기를 간략히 살펴보면 약방으로 쓸 방 한 칸을 마련하신 시기는 이중의 한 시기로 보인다.
지금까지 상제님의 행적을 바탕으로 『전경』에 나오는 동곡 약방의 설치 과정을 살펴보았다. 1908년 4월에 준비를 시작하여 6월에 완비된 약방은 ‘만국의원’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제창생(救濟蒼生)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동곡 약방을 여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여러 공사들 속에서도 이러한 뜻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여기서는 여러 공사를 나열하는데 그쳐서 그 공사들의 연관성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약방의 설치 경과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상제님의 뜻을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제님께서는 화천하시기 직전에 이곳에서 “이제 온 누리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모두 구출하기 어려우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행록 5장 24절)라 하시며 애통해 하셨다. 그리고 개벽의 시기에 병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참상을 입게 될 것을 걱정하시며 “기이한 법과 진귀한 약품을 중히 여기지 말고 의통을 잘 알아 두라”(공사 1장 36절)고 하시며 상제님의 유지를 잘 받드는 수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하셨다.
01 『전경』 표기에 따라 음력을 기준으로 하였다. 02 교운 1장 21절을 보면 1907년 6월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상제님께서 머무실 때 새로운 종도들을 만나시는데 이때 문공신도 문하에 들어와 추종한 종도로 기록하고 있다. 03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pp.186-202 참고. 04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동곡에 약방을 설치하심」, 《대순회보》 128 (2014), p.21 참고. 05 공사 2장 9절: 약장은 종삼 횡오 도합 十五간으로 하고 가운데에 큰 간이 둘 아래로 큰 간이 하나이니라. 06 공사 3장 10절: 상제께서 궤 두 개를 만들어 큰 것을 조화궤라 이름하고 동곡 약방에 두고 작은 것을 둔(遁)궤라 이름하고 공부하실 때에 七十二현(賢)의 七十二둔궤로 쓰시다가 신 경수의 집에 두셨도다. 07 공사 2장 7절. 08 공사 2장 8절. 09 공사 2장 8절. 10 권지 2장 29절. 11 교운 1장 51절. 12 정읍에서 동곡까지는 약 40km(100리)이기 때문에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권지 1장 11절)는 말씀을 참고로 하여 행적지를 옮기실 때의 이동 시간을 대략 2~3일로 추정하였다. 13 “… 약장과 궤를 약방에 들여놓은 뒤에 갑칠을 명하사 날마다 이른 아침에 방을 깨끗이 쓸게 하시며 문을 닫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시고 스므하루를 지낸 뒤에 비로소 방을 쓰실새 …”, 이상호, 『대순전경』 6판(전북: 동도교증산교회본부, 1965), p.237. 14 행록 4장 27절. 15 공사 2장 10절. 16 공사 3장 35절. 17 공사 3장 3절: 상제께서 어느 날 공우에게 “고부에 가서 돈을 주선하여 오라” 하시더니 마련된 돈으로써 약방의 수리를 끝마치시고 갑칠로 하여금 활 한 개와 화살 아홉 개를 만들게 하시고 그것으로써 공우로 하여금 지천(紙天)을 쏘아 맞추게 하시고 가라사대 “이제 구천을 맞췄노라” 하시고 또 말씀을 잇기를 “고부 돈으로 약방을 수리한 것은 선인포전(仙人布氈)의 기운을 쓴 것이니라” 하셨도다. 18 공사 2장 9절. 19 공사 2장 11절. 20 제생 21절. 21 권지 2장 7절. 22 행록 3장 37~38절. 23 공사 2장 14절: 상제께서 十一월에 사기를 옮기는 공사를 보시고자 동곡에 돌아오셔서 전일에 주었던 양을 잡게 하고 그 양 피를 손가락 끝에 묻혀 일만 이천 시(侍)란 글자에 바르시니 양 피가 다한지라. 상제께서 “사기(沙器)를 김제(金堤)로 옮겨야 하리라” 하시니라. 이때 김제 수각(水閣) 임 상옥(林相玉)이 왔기에 상제께서 청수를 담던 사기그릇을 개장국에 씻어 그에게 주시니라. 그는 영문을 모르고 주시는 대로 그 그릇을 받았도다. 그는 며칠 후에 그 사기그릇의 용처를 여쭈었더니 “인부를 많이 모아 일할 때 쓰라” 하셨도다. 24 공사 2장 15절: 상제께서 十一월에 동곡에 머무시면서 금강산 공사를 보시고 형렬에게 “내가 삭발하리니 너도 나를 따라 삭발하라”고 분부하시니 형렬이 속으로 달갑게 생각하지 아니하였으나 부득이 응낙하니라. 또 갑칠을 불러 “내가 삭발하리니 내일 대원사에 가서 중 금곡을 불러오라” 하시므로 형렬은 크게 근심하였으되 이튿날 다시 그것에 대한 말씀이 없었도다. 25 공사 2장 21절: 한번은 상제께서 임 상옥에게 사기그릇을 주신 뒤에 공우를 대동하고 전주로 가시는 도중에 세천에 이르시니 점심때가 되니라. … 26 행록 3장 54절: 상제께서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에 따라 화난이 닥칠 것을 종도들에게 알리셨도다. … 27 제생 35절. 28 공사 3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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