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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보의 섭리, 직보와 우회보
교무부 조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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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을 풀어 되풀이되는 일이 없어야 화합의 길입니다. 『전경』에 척을 맺으면 직보(直報)가 있기도 하고 우회보(迂廻報)가 있다 하셨으니 과보(果報)의 섭리를 깨닫는 임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01
도전님께서는 훈시를 통해 도인 간에 화합할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화합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위 훈시에서는 척(慼)을 풀고 이를 되풀이하지 않음으로써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또한 이 되풀이를 끊는 방법으로 과보의 섭리를 깨달을 것을 말씀하셨다. 남과 척이 맺혀 있어 화합하지 못한다면 수도에 많은 장애가 따르고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성취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척이 되풀이되는 이유를 알아보고, 어떻게 이 악순환을 끊고 화합을 이룰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도전님께서는 척을 “남이 나에게 갖는 서운한 마음”02이라고 하셨다. 『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나에 대한 남의 원한(怨恨)”이라 밝히고 있다. 이는 척이 나의 행위로 인해 타인의 마음에 맺힌 원한의 감정임을 의미한다. 반대로 타인의 행위가 나에게 서운함을 안긴다면 나 역시 그 사람과 척을 맺을 수 있다. 이처럼 척은 서로 간에 발생하는 원한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척이 발생하는 배경은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해 온 선천 상극(相克)의 질서에 있다. 과거에는 신분 차별, 남존여비(男尊女卑), 적서(嫡庶)차별 등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남긴 원한의 기운은 갈등의 불씨를 지피는 환경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학벌에 따른 차별, 고용 형태에서 나타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차별, 소득 불균형에 따른 경제적 양극화 등 구조적 불평등이 여전히 원한을 쌓는 토양이 되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극의 환경 속에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습성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즉, ‘내 경위만 옳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는 아집(我執)이나 ‘남을 비방하거나 시비를 말하는 것’, 혹은 ‘위압감으로 아랫사람을 꼼짝 못 하게 하는 오만한 태도’ 등이 우리의 몸에 배어 척을 짓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척은 인간의 감정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상제님께서 “남을 미워하지 말라. 사람은 몰라도 신명(神明)은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나니라.” (교법 2장 44절)라고 하셨다. 이는 나의 잘못된 습성으로 상대에게 맺힌 원한이 척으로 작용하며, 이 척신은 나에게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 하므로 수도 과정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척이 나타나는 형태가 훈시에서 언급된 ‘직보(直報)’와 ‘우회보(迂廻報)’이다. ‘직보’는 내가 지은 척에 대한 응보가 직접 온다는 의미이다. 이는 척을 짓는 원인(나의 행위)과 결과(상대의 반응)가 중간 과정 없이 바로 연결되어 나타나는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아집이나 오만한 태도 등이 원인이 되어 당사자가 나에게 직접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척의 발생과 과보의 작용이 모두 현재의 ‘드러난 관계’에서 이루어지므로 이해하기 쉽다. 반면 ‘우회보’에서 우회의 의미는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간다’라는 뜻이므로 과보가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는 “나에게 원한이 있는 신이 다른 사람에게 응해서 그 사람을 이용해 나를 때리게 만드는 것이다. 척신이 사람을 이용해서 보복하는 것이다.”03라는 훈시 말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는 내가 과거에 지은 척이 척신으로 작용하여, 현재 무관해 보이는 제삼자나 다른 상황(질병, 사고 등)에 개입하여 나에게 과보로 작용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척신의 작용 때문에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고통을 받는 것이다. 즉 우회보의 인과 관계는 직보보다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직보와 우회보의 작용이 바로 도전님께서 깨닫게 하신 과보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과보의 섭리가 시사하는 바는 고통의 해결책이 외부가 아닌 ‘나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척으로 인해 발생하는 과보일 수 있다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를 억울해하고 타인을 원망하게 된다. 바로 이 무지(無知)가 척을 끊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억울함은 원망을 낳고, 원망은 다시 새로운 척을 짓게 하여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척의 고리를 끊고 화합으로 나아가는 길은 “척을 맺는 것도 나요 푸는 것도 나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먼저 풂으로써 상대는 스스로 풀리게 되니”04라는 훈시 말씀처럼,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나’에게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진정한 상생은 남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마음으로 내가 먼저 맺힌 것을 풀어내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이는 『전경』의 박공우 종도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상제께서 천원(川原)장에서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가 큰 돌에 맞아 가슴뼈가 상하여 수십 일 동안 치료를 받으며 크게 고통하는 공우를 보시고 가라사대 “너도 전에 남의 가슴을 쳐서 사경에 이르게 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생각하여 뉘우치라. 또 네가 완쾌된 후에 가해자를 찾아가 죽이려고 생각하나 네가 전에 상해한 자가 이제 너에게 상해를 입힌 측에 붙어 갚는 것이니 오히려 그만하기 다행이라. 네 마음을 스스로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 그러면 곧 나으리라.” 공우가 크게 감복하여 가해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풀고 후일에 만나면 반드시 잘 대접할 것을 생각하니라. 수일 후에 천원 예수교회에 열두 고을 목사가 모여서 대전도회를 연다는 말이 들려 상제께서 가라사대 “네 상처를 낫게 하기 위하여 열두 고을 목사가 움직였노라” 하시니라. 그 후에 상처가 완전히 나았도다. (교법 3장 12절)
이 일화에서 박공우는 천원장에서 예수교 사람과 다투다 큰 돌에 맞아 가슴뼈가 상하는 심각한 고통을 겪는다. 이후 그는 완쾌된 후에 가해자를 찾아가 해하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척을 되풀이하여 지으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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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상제님께서는 가해자를 벌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인 박공우에게 그 원인을 돌리셨다. “너도 전에 남의 가슴을 쳐서 사경에 이르게 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생각하여 뉘우치라. … 네가 전에 상해한 자가 이제 너에게 상해를 입힌 측에 붙어 갚는 것이니 오히려 그만하기 다행이라.” 이 말씀은 현재의 고통이 과거의 척으로 인한 우회보임을 밝히신 것이다. 또한 상제님께서는 박공우에게 “네 마음을 스스로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라고 명하셨다. 이는 척의 악순환을 끊는 방법이 복수가 아니라, 상대를 은인으로 재인식하는 ‘깨달음’에 있음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이 섭리를 깨닫는 순간, 가해자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내가 과거에 지었던 척을 대신 갚아준 고마운 은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박공우의 태도이다. 그는 가해자를 은인으로 여기는 인식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후일에 만나면 반드시 잘 대접할 것을 생각”하는 구체적인 실천 의지를 보였다. 이는 상대방의 태도와 상관없이, ‘내가 먼저’ 악순환의 고리를 끊겠다는 주체적인 의지이다. 복수라는 악순환의 길 대신 대접이라는 선순환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악을 악으로 갚는’ 낡은 습성을 끊어내고 ‘악을 선으로 갚는’ 새로운 관계를 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원한을 푸는[解冤] 동시에 서로를 살리는[相生] 해원상생의 진정한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해원상생의 실천은 여러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 첫 시작은 고난이나 고통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 수도 중에 겪는 고통을 억울한 일이 아닌 내가 맺은 척을 푸는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원인을 남이 아닌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즉 도전님께서 말씀하신 ‘척을 받으면 풀린다’05라는 섭리를 믿고 과보를 수용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현재의 관계를 주도적으로 전환하는 노력이다. 박공우가 원수를 은인으로 여겼듯이, 원망을 고마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라, 나에게 고통을 주는 상대를 오히려 나의 척을 풀어주는 고마운 존재로 여기는 능동적인 마음의 자세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척을 짓지 않기 위해 ‘나의 습성’을 바꾸는 실천이 필요하다. 척을 짓는 근본 원인이 나의 잘못된 습성에 있음을 알기에, 이를 고쳐 나가는 것이다. 아집과 비방, 교만과 오만 같은 상극의 습성을 버리고, 겸손과 사양, 언덕(言德)을 잘 가지는 것, 그리고 “남을 잘되게 하라”는 상생의 실천을 통해 내가 먼저 변하는 것이다. 화합은 이러한 실천이 하나둘 모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척의 고리를 푸는 주체가 ‘나’임을 깨닫고 내가 먼저 원망을 풀고 상생을 실천함으로써 상대방의 맺힌 마음 또한 자연스럽게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가 먼저 풂으로써 상대는 스스로 풀리게 된다는 과보의 섭리를 깨닫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이는 지혜이며, 해원상생을 실천하기 위한 시작이다. 물론 이것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하지만 도전님께서 “척신이 그 사람한테 와서 갚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가! 고마워하면 풀린다.”06라고 하셨듯이, 화합은 원망이 아닌 고마움에서 시작된다. 원수를 은인으로 여기며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 있는 실천이 척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러한 실천이 수도의 목적인 도통으로 향하는 길임을 믿는다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나 감정적 대립도 화합의 기회로 삼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01 《대순회보》 272호, 「도전님 훈시」. 02 「도전님 훈시」(1986. 4. 14). 03 「도전님 훈시」(1990. 3. 4). 04 『대순지침』, p.27. 05 「도전님 훈시」 (1991. 5. 14), “척은 받아야 한다. 받으면 풀린다.” 06 「도전님 훈시」 (1991. 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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