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56년(2026) 9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종단 역사 울타리 전경 속 이야기 기획 연재 대순광장 생각이 있는 풍경 대순캠프 대순문예 알립니다

종단 역사 : 독립기념관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語錄碑)

독립기념관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語錄碑)

 

 

교무부 임정화

 

▲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 독립기념관 백련못 좌측 산책길 (2026년 8월 7일 촬영)



  《대순회보》 8호(1988년 3월 27일)에는 ‘「독립군선언문」 탑 기증’이라는 짤막한 소식이 흐릿한 사진 1장과 함께 실려 있다. 대순진리회에서 독립기념관 건립 성금을 기증하고, 기념관 경내에 탑도 기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사진 속 탑은 반듯한 모양을 지녔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인데, 문득 이 탑이 구체적으로 어떤 탑인지, 여전히 독립기념관에 세워져 있는지, 당시 종단에서 이 탑을 기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등이 궁금하였다. 호기심을 안고서 도전님 재세 시에 종단에서 독립기념관 경내에 ‘대한독립군 선언문’ 탑을 세우게 된 자취를 더듬어 살펴보았다.

 

 

독립기념관 건립 모금


  독립기념관 건립은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직후부터 제기되었다. 19세기 말부터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개했던 투쟁이 일제 치하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졌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1945년 8월 15일에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애국선열들이 일제에 맞서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항쟁한 대가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얻은 것이기에 그들의 민족혼과 자주독립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독립기념관 건립이 계획된 것이다.01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고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며 곧장 추진되지 못하였고, 1974년에 건립 논의가 재개되었다. 이후 1982년에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이 일어나자, 건립을 독촉하며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1982년 8월에 독립기념관 건립 발기대회를 갖고, 건립에 드는 경비 500억 원을 국민 성금으로 조달키로 하며 범국민적인 성금 모금 운동이 진행되었다.02
  우리 종단에서도 성금 모금에 참여하였다. 도전님께서 “도주님의 구국운동의 깊은 뜻에 따라 금번의 독립기념관 건립 모금 운동에 도인들도 성의를 다하기를 바란다.”03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당시 종단 중앙종의회 의원들은 전국 도인들에게 독립기념관 건립 기금을 모으는 운동을 전개하였고,04 1982년 9월 20일부터 모금하여 총 1억 3천81만 6천 1백 35원을 기증하였다.05 독립기념관은 전 국민의 성금으로 1987년 8월 15일에 역사적인 개관을 맞이하였다.

 

 

어록비 제작과 설치에 동참


  독립기념관은 건립 과정에서 관내 전시실뿐만 아니라 옥외 전시물도 기획하였는데, 이에 따라 독립운동가들의 시ㆍ어록비와 야외 조각 등이 설치되었다. 이 중 시ㆍ어록비는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적 내용을 담은 시와 어록을 비에 새겨 선열들을 추모ㆍ기념하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고취케 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2025년 현재 독립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시ㆍ어록비는 108개인데, 1985년에 비에 새기기 위해 처음 엄선한 시ㆍ어록은 총 36편이었다. 선정의 기준으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품의 경우 발표 시기 및 출처가 확실한 것, 동일인의 작품이라도 내용에 따라 여러 편 전시할 것 등이 있었다. 그에 따라 시 11편, 어록 25편이 선정되었다06
  시ㆍ어록비의 제작과 설치도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기증ㆍ헌납의 방법으로 하였다. ‘애국 시ㆍ어록비 관리 내규’에 의하면 비 제작ㆍ설치 신청서를 받아서 심의위원회 심의를 진행하였다. 이후 신청자에게 비의 제작ㆍ설치와 주변 조경에 대한 일체 비용을 기증하도록 절차를 밟았다. 설치 완료 후 관리는 독립기념관에서 관장하고 있다.07
  종단에서 기증한 탑도 이러한 절차를 밟아서 독립기념관 경내에 세워진 어록비다. 종단에서 발표한 3대 중요사업의 지출 내용을 보면, 이 탑에 대해 ‘독립기념관 기념비’의 항목으로 사회복지사업비가 책정되었고, 1986년에는 6백만 원,08 1987년에는 5백만 원이 지출되었다.09 독립기념관이 1988년 12월 1일에 발표한 ‘애국 시비ㆍ선현 어록비 건립 현황’에 의하면, 대순진리회의 어록비 설치는 1987년 4월에 완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0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


  우리 종단이 기증한 비를 확인하기 위해 충청남도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정문에 들어서면 독립기념관의 상징물로서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듯한 겨레의 탑이 서 있다. 탑을 통과하면 연못이 있고, 못을 건너는 다리가 나온다. 다리 초입에서 좌우로 연못을 따라 가로수 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서 100m쯤 걸어가면 길 오른쪽에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가 위풍당당한 모습을 뽐내고 있다.


▲ [사진 2]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 (2026년 8월 7일 촬영)



  어록비를 언뜻 봐도 기단석에 ‘대순진리회 증’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어서 종단에서 기증한 비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비의 전체 크기는 가로×세로 각각 3.2m×2m, 높이 3.1m로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한다. 비의 재료는 전체적으로 화강석이고, 글이 새겨진 제일 앞면만 검은 오석이다. 기단은 직사각형 모양의 두 개의 단이 층을 이루었는데, 두 번째 기단의 앞면과 뒷면에 각각 ‘대순진리회 증’이라는 글씨가 깊이 새겨져 있다. 널찍한 기단 위에는 네 개의 두툼한 화강석 판이 겹을 이루어 세워져 있는데, 제일 앞면 가운데에 높이 2m 가로 0.9m의 얇은 오석이 덧대어져 있다. 오석에는 마치 큰 흑색 칠판에 하얀 분필로 꾹꾹 눌러쓴 듯 글귀가 힘 있게 새겨져 있다. 글은 ‘대한독립군 선언문’이라는 제목 아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쓰기 형태로 되어 있다.


▲ [사진 3]  ‘대순진리회 증’, 2층 기단 앞면 (2026년 8월 7일 촬영)



  ‘대한독립군 선언문’은 어떤 어록일까? 1985년에 시ㆍ어록비 제작을 위해 처음 엄선한 시ㆍ어록의 36편 중 어록은 25편이었다. 어록 선정 대상에는 전봉준, 안중근, 김구, 신채호, 민영환, 안창호 등의 인물 외에 단체도 4곳이 포함되었다. 단체로는 독립군, 임시정부, 광복군, 의열단 등이다.11 이 중에서 독립기념관이 독립군의 어록으로 선정해 놓은 것이 ‘대한독립군 선언문’이다.
  현장에서 어록비를 확인한 후, 비에 새겨진 어록의 출처를 찾아서 독립기념관 전시관과 자료실을 방문했다. 40여 년 전 일이라서 당시 근거로 삼았던 원본 자료를 찾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직접 자료를 찾아보던 중, 1973년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출판한 『독립운동사』에서 어록 내용과 가장 유사한 전문을 발견했다.

 

 

특고 순사 보조원(기타 밀정 등 함께 보라)12

 

  경술년 이후, 작년 3월 이후로 동포 간에 질시(嫉視) 배척되는 자 있으니 이것이 곧 일본의 창귀(倀鬼)와 응견(鷹犬)13인 자이다. 누구나 모두 기회 있을 때마다 이들 도배를 섬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충분의노(忠憤義怒)에서 나오는 것이다. 혹 아무리 허물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것인가.
  사실, 자기의 조국, 자기의 동족을 잔해(殘害: 사람에게 가혹하게 굴고 물건을 해침)하여 이종(異種)에 헌충(獻忠: 상대에게 자기의 충성을 드러내 보임)하는 자는 천인(千人)의 공노(共怒)를 초래함은 물론이요, 자신 역시 깊은 밤 잠자리에 들 때나 많은 새벽녘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상당히 생각되는 바 있고 죄책을 깨달을 것이다. 아아, 천하에 어찌 이족(異族)을 위하여 동포를 잔해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고 사명일 것이냐. 사람은 구복(口腹)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먹는 것 외에 다시 할 일이 있다. 의리가 있고 염치가 있고 예의가 있고 충성과 사랑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자기 생각으로는 잘했다고 하더라도 타인은 자기를 천종(賤種)으로 삼고 공리(公理: 세상의 이치)는 자기를 죄인으로 삼는다.
  지금 저들 일인이 군 등을 선인(善人)이라 한다 하여 믿고 또 가장 친선하는 것 같지만, 그 내심으로는 천종으로 보고 매국노라고 인정하는 것을 모르는가. 군 등의 자손까지도 군 등을 원망하게 될 것을 모르는가. 눈이 바로 박힌 사람은 군 등을 사람이라고 할 자 없다.
  우리들은 지금 도수(島讎)14를 몰아내고, 조국을 광복하려고 의군(義軍)을 일으켰다. 이때를 당하여 군 등이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역시 적과 동일시 할 것이다. 우리 어찌 동포를 해하는 일을 좋아서 할 것인가. 독립을 위하여 부득이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의와 인도에 의하는 것이니만큼, 군 등이 전에 아무리 악독하였다 하더라도, 회개만 한다면 해할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임은 물론 도리어 환영할 것이요, 또 원한다면 독립군에 편입하는 것도 허할 것이다. 다만 적청(敵廳)에서 나오기 전이나 또는 나온 후에나 회개하였다고 인정할만한 증표(證表)가 없으면 안 될 것이다.
  군 등은 이 시기에 속히 각성하여 화를 면할 것을 도모하라. 독립 후에는 후회 막급(莫及)이다. 제군, 우리들의 동포여! 우주 간 인류로서 모두 사모하고, 모두 받드는 조국을 생각하라. 그리하여 사망의 구렁에서 나와, 구속의 우리에서 떠나, 압박의 그물에서 벗어나서, 극락세계의 활약 무대의 자유 천지에서 함께 노는 것이 이 얼마나 쾌사(快事)가 될 것인가!


대한민국 2년 3월
대한독립군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독립기념관 어록비에 새겨진 내용이다. 이 발표문은 일제 비밀문서로 남아있다고 하는데, 원문은 확인할 수 없었다. 국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저자마다 해석의 차이가 조금씩 있으나, 이 책에 실린 전문이 어록비 글귀와 가장 흡사하고, 한문이 표기되어 있어 용어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전문은 순사 보조원이나 밀정 등에게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발표된 시기인 ‘대한민국 2년’은 1920년이고, 경고문을 공포한 곳은 대한독립군이다.
  대한독립군이 순사 보조원에게 경고문을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독립군(1919~1921)은 홍범도(1868~1943) 장군이 백두산 근처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고 항일 무장 활동을 펼쳤던 독립군 부대다.15 규모는 약 300명이었고, 간부는 사령관 홍범도, 부사령관 주건 등이 있었다. 대한독립군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잠정 승인하며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고 활동했다. 국내를 드나들며 잇따라 일본 군경을 습격하고 괴롭혔는데, 1919년 8월에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의 일본 군영을 섬멸했던 일은 “3ㆍ1운동 이후 독립군 단체들의 독립전쟁 중에서 최초의 국내 진입 작전”으로 평가받는다.16
  독립군 단체들의 활동에 공포를 느낀 일본군은 국경 지역의 병력을 늘리는 한편 한국인을 밀정으로 고용하는 첩보활동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민족운동과 독립 의식을 억압하고자 친일 세력인 보민회와 조선인민회를 만주 지역에 설치하였다. 보민회는 당시 강력한 친일 조직의 하나이자 밀정 조직으로서 한인 사회의 동향을 파악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자 하였다.17 이에 대한독립군은 대한민국 2(1920)년 3월에 대한독립군의 이름으로 순사 보조원 및 기타 밀정에게 경고문을 발송하고, 밀정 소탕 작전을 벌이면서 대규모 국내 진입 작전에 대비하였다.18 그리고 그해 6월에는 봉오동 전투, 10월에는 청산리 대첩으로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대한독립군은 1921년 4월에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되었다.
  대한독립군은 짧은 기간 활동했으나 뛰어난 무장투쟁 전략으로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독립군이다. 독립기념관에서는 수많은 독립군과 여러 발표문 중 바로 대한독립군이 친일 활동을 벌인 이들에게 보낸 발표 자료를 독립군의 어록으로 선정한 것이었다. 그 발표문은 일제에 고용되어 동족인 독립운동가를 잡아 바치는 순사 보조원의 앞잡이 노릇을 배신행위로 비난하고, 반성하지 않으면 일제와 같은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불멸의 영화 《아리랑》(1926)을 만든 나운규가 대한독립군에도 속해 있었다는데, 극 중 주인공이 순사 보조원을 처단하는 장면은 독립군과 순사 보조원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한다.19
  온갖 저지와 방해에도 굴하지 않았던 대한독립군의 독립 의지는 그들의 발표문에 오롯이 담겼다. 우리 종단에서는 시ㆍ어록비 기증에 참여하며 바로 이 발표문의 일부를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로 기증하게 되었다. 종단에서는 1987년 4월에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의 제작ㆍ설치의 기증을 완료하였고, 독립기념관의 개관(1987년 8월 15일)을 맞아 전 국민에게 대한독립군의 애국정신과 종단의 이름을 펼치는 데 이바지하였다.
  도주님으로부터 종통을 계승하시고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신 도전님께서는 “도주님의 창도정신인 구국제민의 마음으로 국민운동에 참여하라.”20 하셨고, 이에 우리 종단은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성금 모금 운동과 ‘대한독립군 선언문’ 어록비 기증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도주님의 구국운동의 뜻에 따라 국민 운동에 참여하여 애국 애족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념할 수 있었다.

 

 

 

 


 01 독립기념관건립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건립사』 (천원군: 독립기념관, 1988), pp.69-82 참고.
02 같은 책, pp.97-104 참고.
03 『대순지침』, p.25.
04 「대순진리회의 상생운동」, 《대순회보》 1호 (1983), p.8 참고. 1982년에 이루어졌던 종단의 활동과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 및 헌금 집계를 1983년도 《대순회보》 1호에서 전하고 있다.
05 「종단소식」, 《대순회보》 8호 (1988), p.4 참고.
06 독립기념관건립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424-426 참고.
07 같은 책, pp.435-436 참고.
08 「해원상생 운동전개」, 《대순회보》 6호 (1987), p.8 참고. 1986년도에 이루어졌던 종단의 3대 중요사업 활동과 집행된 사업비를 1987년도 《대순회보》 6호에서 전하고 있다.
09 「종단소식」, 《대순회보》 8호 (1988), p.5 참고. 1987년도에 이루어졌던 종단의 3대 중요사업 활동과 집행된 사업비를 1988년도 《대순회보》 8호에서 전하고 있다.
10 독립기념관건립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pp.620-621 참고. 우리 종단에서는 1986~1987년에 ‘독립기념관 기념비’로 사회복지사업비를 지출하였고, 1987년 4월에 어록비를 설치 완료하였다. 이에 관한 소식을 1988년도 《대순회보》 8호에서 「독립군선언문」 탑을 기증하였음을 사진과 함께 전하고 있다.
11 같은 책, p.426 참고.
1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권. 독립군전투사(상)』 (서울: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p.354-355 참고, “1920년 6월 10일자 일제 비밀 문서 고경(高警) 제16266호”; 이동순, 『(민족의 장군)홍범도』 (파주: 한길사, 2023), pp.511-513 참고.
13 창귀(먹을 것이 있는 곳으로 범을 인도한다는 나쁜 귀신)와 응견(사냥꾼의 매와 개)은 일본의 앞잡이를 의미한다.
14 도수는 섬나라 원수라는 말로 일제를 일컫는다.
15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 애국 시ㆍ어록비』 (천안: 독립기념관, 2001), p.59 참고.
16 김상웅, 『홍범도 평전』 (서울: 레드우드, 2020), pp.114-120 참고.
17 황민호ㆍ홍선표, 『3ㆍ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천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pp.18-19 참고.
18 장세윤, 『봉오동ㆍ청산리 전투의 영웅』 (서울: 역사공간, 2007), p.141 참고.
19 이동순, 앞의 책, pp.508-510 참고.
20 『대순지침』, p.25.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