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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전경 속 등장인물들의 인연 Ⅶ 1908년

전경 속 등장인물들의 인연 Ⅶ
1908년

 

교무부 정나연

 

▲ 백암리는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마을을 말한다. 《대순회보》 127호 p.12 참조.



  지난 글에서는 1907(정미)년이 되어 『전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인연 관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1908(무신)년에도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중에 인연 관계를 알아볼 인물은 최창조, 최내경, 김명칠, 김준상, 이경문, 김낙범, 김준찬, 손병욱, 최덕겸, 김영학, 류찬명, 김송환, 차윤경, 차윤칠, 차공숙, 장성원 등이다. 이들을 모두 소개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어려워서 2회로 나누어 보았다. 먼저 최창조, 최내경, 김명칠, 김준상, 이경문, 김낙범, 김준찬의 인연 관계와 상제님의 공사에 참여했던 일화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고부화액을 겪으시던 상제님께서는 1908년 2월 4일 무혐의로 풀려나셨다. 이날은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벌레들이 깨어나 얼었던 몸을 움직인다고 하는 경칩(驚蟄)일이었다. 상제님께서는 객망리 본댁으로 가셔서 가족들을 만나신01 후 태인을 시작으로 고부 와룡리, 동곡, 전주, 정읍 대흥리 등을 왕래하시며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행록 4장 6절에 따르면 상제님께서는 태인에 자주 가셨는데 그곳에 신경원, 최내경, 최창조, 김경학 등의 종도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신경원을 비롯한 세 인물이 모두 태인이라는 지역적 인연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인물들이 『전경』에 등장한 시기를 보면 신경원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데, 1907년 4월에 상제님을 따르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 알아볼 최창조와 최내경은 1908년 초(봄)가 되어 등장한다. 이것을 볼 때 최창조와 최내경은 신경원과의 지역적 인연 관계로 이어져 있으면서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최창조의 경우 김경학과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김경학과의 인연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최창조를 살펴보면 그는 태인에 있는 새울이라는 마을에 살았던 인물이다. 새울은 태인읍 남쪽을 흐르는 동진강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최창조는 상제님께서 1908년 봄에 그의 집에서 김광찬 양모의 성복제와 매화(埋火) 공사를 보실 때 참여하였다. 이 공사는 최창조의 집과 태인 백암리 김경학의 집을 오가며 행해졌는데 두 집은 직선거리로 1.6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는 상제님의 명에 따라 저육전을 부치고 상제님의 의복 한 벌을 지어 두었다. 시간이 지나 부쳐두었던 저육전이 다 썩어서 동곡에 계신 상제님께 이를 전하니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에게 공사할 내용을 지시하시며 최내경과 신경원을 데리고 최창조의 집에 가서 공사를 보고 돌아오라고 하셨다. 그대로 시행한 김형렬이 집에 도착하자 폭우가 쏟아지고 뇌전이 크게 쳤다. 상제님께서는 “뒷날 변산 같은 큰 불덩이로 이 세계가 타 버릴까 하여 그 불을 묻었노라”라고 말씀하셨다. 매화 공사는 장차 있을 화난으로부터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불을 묻는 공사였다.02
  상제님께서 최창조의 집에서 공사를 보실 때 여러 가지 뒷받침을 했던 최창조의 아내는 상제님께서 오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제님께서 식사 시간이 지나 집에 오시자 그녀는 밥상을 차리기 싫어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최창조에게 “도가에서는 반드시 아내의 마음을 잘 돌려 모든 일에 어긋남이 없게 하고 순종하여야 복되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문밖에서 엿듣고 있었던 최창조의 아내는 자신의 속마음을 마치 보신 듯이 살피시는 상제님의 권능에 놀라 마음을 바로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 최창조가 참여한 공사로는 상제님께서 물에 축인 짚으로 상투 모양을 매셨다가 푸시면서 “머리를 깎으려니 가위를 가져오라”라고 하시며 보신 공사,03 천자국(天子國)에만 오는 대신명인 시두손님이 오는 공사,04 벽력표(霹靂票)를 땅에 묻는 공사05 등이 있다.
  최내경은 태인의 어느 마을에 살았는지 『전경』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가 참여한 공사는 2구절 찾아볼 수 있다. 최내경이 등장한 시기는 1908년 봄으로 상제님께서 태인 새울에 살았던 최창조의 집과 태인 백암리에 살았던 김경학의 집을 왕래하시며 보셨던 김광찬 양모의 성복제와 매화공사 때였다. 그는 상제님의 명을 받고 찾아온 김형렬을 따라 신경원과 함께 최창조의 집으로 갔다. 밤이 되어 인적이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문 밖에 구덩이를 파고 최창조가 준비해 둔 상제님의 옷 중 하나를 입었다. 다음으로 구덩이 앞에 청수 한 그릇과 화로를 놓고 그 앞에 호주(胡酒: 고량주), 문어, 전복, 두부를 각각 놓았다. 그리고 세 사람 중 첫 번째 사람이 저육전을 한 점씩 청수와 화로 위로 넘겨주면 두 번째 사람은 그것을 받아서 세 번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세 번째 사람은 넘겨받은 저육전을 구덩이 속에 넣고 흙으로 덮었다. 이렇게 최내경이 다른 이들과 함께 최창조의 집에서 행해야 하는 공사의 모든 과정을 마치자 김형렬은 동곡으로 출발했다.06 


 
  최창조와 최내경 이외에도 태인에 살았던 인물로 김명칠이 등장한다. 그는 태인의 백암리에 거주했다. 백암리에는 1907년 『전경』에 등장한 김경학도 살고 있어서 두 사람은 연고지가 같은 인연 관계를 보인다. 김명칠은 산비탈을 개간해 만든 밭에 담배 농사만 짓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가 평지에는 농사지을 땅 한 평도 없고 살림 또한 넉넉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하루는 번개가 치고 세찬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비탈진 밭에 거름을 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거름은 물론 밭두둑까지 사태가 나서 쓸려 내릴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김명칠은 이런 암담한 현실에 가슴을 치며 “내 농사는 이것뿐인데 이 억수로 버리게 되었으니 어찌 살랴”라며 울었다. 이를 긍휼이 여긴 상제님께서 “내가 수재를 면케 하리니 근심 걱정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시자 비가 그쳤다. 그가 밭에 올라가서 보니 자신의 밭만 조금의 피해도 없었다. 이후 김명칠은 상제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더욱 게을리하지 않았다.07



  1908년 등장하는 인물 중에 동곡 약방 설치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인물로는 김준상과 이경문이 있다. 약방은 4월부터 6월 사이에 김준상의 집에 마련되었다. 김준상은 동곡에 살았던 인물로 김형렬의 사촌 동생이며 김갑칠의 친형이다. 『안동김씨대동보』에 따르면 김준상은 1878(무인)년에 태어난 인물로 김형렬보다 16살 어리고, 김갑칠 보다 3살이 많다.08 이것을 볼 때 김준상은 사촌 형인 김형렬과의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을 것 같다. 이런 그는 자신의 집 방 한 칸이 약방으로 사용되면서 상제님의 천지공사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준상의 집에 약방이 설치된 시기는 상제님께서 그의 처를 치유해 주신 이후이다. 당시 김준상의 처는 발바닥의 종창으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그 환부가 용천혈(龍泉穴)이니 살기 어려우리라.”라고 하시며 김준상과 김갑칠이 밤새 번갈아 가며 환자가 잠들지 못하도록 지키게 하셨다. 그리고 “명부사자와 나의 사자 중 누가 강한지 보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날이 밝자 상제님께서는 쌀뜨물을 환부에 바르시고는 돈 백 냥이 있어야겠다고 하셨다. 돈을 마련할 수 없었던 김준상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팔아야겠다며 난색을 표하자 상제님께서는 그의 집을 상제님께 팔게 하셨다. 가옥 매도 문서를 받으신 상제님께서는 잠시 그것을 가지고 계시다가 불사르셨다. 그리고 김준상의 가족을 그 집에서 살게 하고 방 한 칸만을 빌려 수리한 후 약방으로 쓰셨다.09
위 일화 중에 상제님께서 환자인 김준상의 처가 잠들지 못 하게 하신 것은 그날 밤 찾아 올 명부사자로부터 그녀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김준상에게 백 냥이 있어야겠다고 하신 것은 김준상의 처를 치료하고 명부사자로부터 구하기 위한 공사에 필요한 금액이 백 냥이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일화의 시기는 1907년 겨울부터 1908년 봄 사이에 있었던 사건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동곡 약방 설치와 직접 관련된 일화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김준상을 약방이 설치된 1908년에 등장하는 인물로 배치하였다.
  이경문은 목수였던 인물로 약방 설치와 관련된 일화에 등장한다. 상제님께서는 약재를 보관하는 약장에서부터 여러 기구와 도구들을 구비하기 위해 그를 부르셨다. 그리고 약방에 설치할 기구들 크기의 치수와 만드는 법을 세세히 가르치셨으며 기한 또한 정해주시면서 끝마치게 하셨다.10 하지만 이경문은 약속한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했다.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목재를 한곳에 모아 놓게 하고 그 앞에 꿇어앉게 한 후 크게 꾸짖으시며 봉서 하나를 주어 불사르게 하시자 갑자기 번개가 번쩍였다. 깜짝 놀란 이경문이 두려워서 땀을 흘리자, 상제님께서는 “속히 마치라”라고 하시며 독려하셨다. 그는 수전증이 나서 한 달이 넘은 후에 겨우 일을 마칠 수 있었다.11 상제님께서 이경문에게 공사의 기한을 정해주신 것은 약방 설치가 천지공사에서 정해진 일이기 때문에 그 기한 또한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일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상제님께서 정해주신 기한은 이경문이 순조롭게 일을 마칠 수 있는 기간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지켜지지 않은 것은 그가 나태한 마음으로 충실히 이행하지 않아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꾸짖으신 것으로 보인다.



  상제님께서 동곡에 약방을 설치하실 때 전주에 다녀오시는 행적이 있는데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김낙범과 김준찬이다. 이들이 상제님을 따르게 된 데는 김덕찬과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주에 살고 있었던 김덕찬은 김준찬의 사촌 형으로 1904년부터 『전경』에 등장한 것을 볼 때 그의 추천으로 김낙범과 김준찬이 상제님을 따랐을 것 같다.
  김낙범은 전주의 용머리 고개에 집이 있었다. 그는 1908년 4월 상제님께서 극심한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보리농사를 구하기 위해 큰비를 내리시는 공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상제님께서는 보리 흉년으로 굶을 것을 걱정하는 종도들에게 “전일에 너희들이 보리를 없애버림이 옳다 하고 이제 다시 보리 흉년을 걱정하느냐. 내가 하는 일은 농담 한 마디라도 도수에 박혀 천지에 울려 퍼지니 이후부터 범사에 실없이 말하지 말라”라고 꾸짖으셨다. 그리고 김낙범의 집에서 거친 보리밥과 된장국 한 그릇이 올라간 밥상을 받으시고는 “빈민의 음식이 이러하니라”라고 말씀하신 후 모두 드셨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면서 큰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말라 죽어가던 보리가 생기를 얻었다.12 이 구절에서 전일이라 함은 이해 2월의 어느 날을 말한다. 그때 종도들은 이 세상에 빈부의 차별이 있는데 보리를 없애야 먹는 데 차별이 없어져 모든 사람의 먹는 것이 같아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있었다.13
  김낙범은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우직하고 정성을 다해 상제님을 모셨던 것 같다. 그는 피부에 큰 물집이 생기고 심한 통증을 동반하는 천포창으로 몹시 고통을 당하는 중에도 전주 용두리에 계시는 상제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상제님께서 “네가 어찌 그렇게 태만하느뇨.”라고 꾸짖으시니 김낙범이 영문을 몰라서 대답하지 못하고 물러나려 하니 “네가 어른이 꾸짖는데 어디로 가려 하느뇨.”라며 더욱 꾸짖으셨다. 그는 더 어찌할지를 몰라 다시 쪼그리고 앉아서 땀만 뻘뻘 흘리며 꾸중을 듣고 있었다. 한참 뒤 허락이 있어 집에 돌아온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허물을 깨달을 수 없어서 송구스럽게만 여겼다. 그 후 천포창이 치유되자 비로소 상제님의 진노하심과 견책하심이 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14 원인을 알 수 없는 꾸지람에도 억울해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여 자신을 반성하는 모습은 상제님을 믿는 그의 마음과 성품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김낙범은 상제님의 덕화로 자신의 아들이 폐병15과 안질16에서 재생되는 은혜를 입었다.
  이 외에도 김낙범은 이해 10월에 상제님의 명으로 쌀 스무 말을 찧어 약방에 저장하였고,17 1909년에는 불가지에서 상제님께서 일본인들이 백호의 기운으로 조선에 온 것을 알려주실 때,18 전주에 오신 상제님께서 관운장 신명이 서양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려주실 때19에도 함께 하며 상제님을 모셨다.
  김준찬은 상제님께서 전주 용머리 고개에 오셔서 공사를 보실 때 주로 등장한다. 김준찬의 집은 그가 등장하는 구절을 통해 유추해 보면 김낙범처럼 용머리 고개이거나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주로 상제님께서 용머리 고개에서 천지공사를 보실 때 김낙범, 김덕찬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김준찬과 김덕찬을 비롯하여 몇 종도들과 전주 용두리에서 공사를 보셨는데 그곳에서 노름꾼들이 80냥을 가지고 윷판을 벌였다. 이는 노름꾼들이 상제님과 종도들의 돈을 빼앗고자 벌인 일이었다. 그들의 속심을 꿰뚫은 상제님께서는 50냥을 놓고 윷을 치셨는데 순식간에 80냥을 모두 따셨다. 품삯으로 5푼만 남기고 모두 돌려주시면서 “이것은 모두 방탕한 자의 일이니 속히 집으로 돌아가서 직업에 힘쓰라.”라고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윷이 나오는 법을 궁금해하는 것을 아시고 “던지는 법을 일정하게 하면 그렇게 되나니 이것도 또한 일심이라”라고 일러주셨다.20 
  또 어느 날은 김준찬이 그의 집에서 김낙범, 김덕찬과 함께 상제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상제님께서 “근자에 관묘(關廟)에 치성이 있느냐”라고 물으셨다. 김낙범이 있다고 대답하자 상제님께서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西洋)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전주 지방에서 모시고 있는 관성제군 신명이 서양에서 발생한 대란의 원인임을 알려주신 것으로 신명은 동서양을 넘나들며 일을 하는 존재임을 가르쳐주신 일화이기도 하다. 이 일 외에도 김준찬은 상제님께서 김낙범의 천포창을 고쳐주실 때,21 백지 일곱 장에다 ‘병 자기이발(病自己而發)과 장사병쇠왕관대욕생양태포(葬死病衰旺冠帶浴生養胎胞)’라는 글을 써서 봉하신 후에 김형렬에게 전주에 사는 일곱 사람에게 전해주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라고 하신 공사에서 그 글을 받은 인물 중 1인이다.22
  지금까지 1908년 『전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 중에 최창조, 최내경, 김명칠, 김준상, 이경문, 김낙범, 김준찬의 인연 관계와 일화를 살펴보았다. 최창조와 최내경은 태인 지역에 살면서 1904년부터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한 신경원과 지역적 인연 관계로 이어져 있는데, 최창조의 경우에는 김경학과의 인연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김명칠은 마을 이웃인 김경학과 인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곡 약방 설치와 관련된 인물에 김준상과 이경문이 있는데 김준상은 사촌 형인 김형렬과의 인연으로 상제님을 따랐을 것이고 이경문은 목수로 동곡 약방의 가구를 제작하였다. 상제님의 전주 행적 중에 등장한 김낙범과 김준찬은 김준찬의 사촌 형인 김덕찬을 통해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했을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이번 글에 이어 1908년 『전경』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인연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01 행록 3장 64절 참고.
02 공사 3장 1절 참고.
03 예시 35절 참고.
04 행록 4장 8절 참고.
05 권지 2장 25절 참고.
06 공사 3장 1절 참고.
07 권지 2장 15절 참고.
08 1979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대동보』 권4 참고.
09 제생 21절 참고.
10 공사 2장 7절 참고.
11 공사 2장 8절 참고.
12 행록 4장 15절 참고.
13 행록 4장 10절 참고.
14 제생 33절 참고.
15 제생 22절 참고.
16 제생 34절 참고.
17 권지 2장 31절 참고.
18 예시 57절 참고.
19 행록 4장 11절 참고.
20 권지 1장 18절 참고.
21 제생 33절 참고.
22 예시 36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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