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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이야기 : 도주님 부친께서 보황당원의 혐의를 받으시다

도주님 부친께서 보황당원의 혐의를 받으시다

 

 

교무부 손영배

 

▲ 도주님 가족이 머무셨던 봉천 유하현의 위치. 봉천성 동쪽(지금의 길림성 지역)에 있다. (Baidu 지도 캡처), 《대순회보》 176호 pp.23~24 참조


도주께서는 경술년에 어린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에서 일본 군병과 말다툼을 하셨으며 이듬해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 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구세 제민의 큰 뜻을 가슴에 품고 입산 공부에 진력하셨도다. (교운 2장 5절)

 

  위 구절의 시기는 도주님 가족분들이 1909년 4월에 만주 봉천(奉天) 지방으로 망명하신 이후 일제에 나라를 잃은 1910년과 청나라가 멸망해 가던 이듬해인 1911년 사이의 기간이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에 도주님 부친께서 뜻하지 않게 보황당원의 혐의를 받아 북경으로 압송되시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 부친께서는 혐의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무사히 석방되셨다. 그렇다면 보황당이 어떤 단체였으며, 도주님 부친께서는 어떠한 연유로 보황당원의 혐의를 받으시게 되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먼저 보황당이 어떠한 목적으로 활동하였는지를 알아보고, 도주님 부친의 보황당원 혐의가 타당한지를 검토해 보려 한다. 아울러 부친께서 무혐의로 풀려나신 상황도 함께 추정해 보고자 한다.

 

 

보황당은 어떤 단체인가


  보황당이 어떤 단체였기에 도주님 부친께서 보황당원의 혐의를 받으셨던 것일까? 보황당의 정식 명칭은 ‘보구대청황제회(保救大淸皇帝會)’로 청 황실을 보존하자는 뜻이며, 또한 ‘중국유신회(中國維新會)’라는 이름도 함께 사용했는데 이는 청나라를 새롭게 개혁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보황당은 청 황실을 지키면서도 중국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 단체였다. 이 단체는 강유위(康有爲, 1858~1927)를 중심으로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등이 조직하였다.
  강유위는 이 단체를 설립하기 전 광서제(光緖帝, 1871~1908)를 도와 청나라의 정치ㆍ교육ㆍ법률 등 사회 전반의 제도를 개혁하고자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01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서태후(西太后, 1835~1908)를 비롯한 보수적인 수구파(守舊派)의 강력한 반대로 개혁 운동은 결국 좌절되었다. 개혁을 실패한 후 강유위는 해외로 망명하였고 1899년 7월 20일 캐나다 빅토리아로 이동하여 보황당을 창설하였다.
  이 단체는 광서제를 보호하고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자는 이념 아래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내세웠다. 강유위는 캐나다의 한 화교 집회에서 “오늘날 국세가 위급하고 사회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동포들이 고통받는 것은 모두 서태후 한 사람이 변법(變法)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02라고 연설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연설을 통해 화교들에게 정치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과 지지 그리고 후원을 얻고자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이루지 못한 정치 개혁을 다시 이루기 위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 좌 서태후(흑백사진, 1902년), 우 광서제 어진, 출처: 위키미디어



  보황당은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는 핵심 수단으로 신문을 활용하였다. 중국의 마카오에서는 《지신보(知新報)》가, 상하이에서는 《만국공보(萬國公報)》와 《시무보(時務報)》가, 일본에서는 《신민총보(新民叢報)》와 《청의보(淸議報)》가 발행되었다. 이 밖에도 국내외에서 창간한 각종 간행물이 30여 종에 달했다. 이처럼 보황당은 신문을 통해 ‘청나라의 군주제 아래에서 헌법과 제도를 개혁하여 나라를 변화시키자’라는 ‘보황’ 사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03
  1905년에 보황당과 정치 노선을 놓고 경쟁하는 단체가 생겼는데 바로 손문(孫文, 1866~1925)을 중심으로 결성된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04였다. 이 단체는 청나라 정부를 혁명으로 무너뜨리고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반면 보황당은 청 황실을 보전하면서 정치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정치 노선이 달랐던 ‘보황당’과 ‘중국동맹회’는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발발 전까지 5년간 화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여론전을 벌이며 경쟁하였다.
  청나라 정부의 실정과 관리들의 계속된 부정부패 속에서 보황당이 주장한 청 황실의 보존은 화교 사회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으로 여겨졌다.05 그 결과 청 왕조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보황당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보황당은 화교 사회에서 외면받게 되었다. 반면 중국동맹회는 화교들로부터 지지받으며 1911년에 일으킨 신해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로써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격변기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힘쓰고 계시던 도주님의 부친께서 보황당원 혐의로 북경에 압송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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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 부친의 보황당원 혐의

  도주님 부친께서는 나라의 광복을 간절히 염원하며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구국운동에 헌신하셨다. 이에 대해 『대순진리회요람(大巡眞理會要覽)』에는 도주님 부친께서는 “조부의 유의를 승봉하여 그 아우(휘 용의ㆍ용서 二인)와 반일 운동에 활약하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09년에 만주 봉천 지방으로 망명하여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고 전해진다.06


▲ 1900년대 초 만주 지역 독립운동 현황, 참조: 우리역사넷 역사교과서에 실린 그림지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기지>



  부친의 독립운동에 관한 약간의 세밀한 내용은 『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咸安趙氏斗巖公派世譜)』(이후 『세보』로 표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에는 두 가지 간략한 사실이 나오는데 하나는 구국운동에 함께한 동지들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독립운동에서의 담당 역할이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함께한 동지들로는 독립 자금을 모금하였던 이승희(李承熙, 1847~1916)와 항일 의병 투쟁을 주도한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등이다. 국내에서는 배문창, 조정규, 조병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다. 그리고 맡은 역할은 군인을 양성하는 데 필요한 전반적인 업무를 둘째 아우인 조용의에게 맡겼다고 한데서 유추해 볼 수 있다.07 이를 바탕으로 볼 때 도주님 부친의 역할은 함께한 동지들과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관리ㆍ운영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 도주님 부친께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중 보황당원이라는 혐의를 받고 북경으로 압송되시는 사건이 있었다. 교운 2장 5절에 따르면 “이듬해(1911년) 청조(淸朝) 말기에 조직된 보황당원(保皇黨員)이란 혐의를 받고 북경(北京)에 압송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난…”이라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보』에는 “당시 청국의 국운이 다 되어 원세개가 총통이 되어 보황당을 제거하려는 때에 공 역시 북경에서 거사하려는 혐의를 당함에 구국 충정이 담긴 장서를 올리니 원씨가 인견하고 감탄하여 면케 해주었다.”08라고 전한다.
  두 기록을 묶어 유추해 볼 수 있는 점은 사건 발생 시기와 체포의 타당성 그리고 무혐의로 풀려나게 된 상황에 관한 내용이다. 우선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1년 신해혁명이 시작된 10월 10일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전경』은 사건을 1911년으로 기록했지만, 『세보』에서는 원세개(遠世凱, 1859~1916)가 총통으로 취임(1912년 3월)한09 이후로 기록하고 있어 두 기록 간에 차이가 보인다. 하지만 도주님 부친께서 보황당원이라는 혐의로 고초를 겪으신 시점은 ‘신해혁명의 성공’과 ‘청나라 멸망’이라는 중국의 역사적 격동기와 맞물려 발생한 사건으로 보인다. 이처럼 부친의 고초는 역사적 배경과 기록의 차이를 고려해 볼 때 당시 격변기 상황과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 1913년 10월, 원세개 중화민국 총통 취임식 후 중국 주재 외국 사절단과 단체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다음으로 도주님 부친께서 보황당원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셨는데 당시 이 체포가 과연 타당한 이유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을까?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보황당은 청 황실을 보전하며 청나라 정부를 개혁하려던 정치 단체로 신해혁명 이후 원세개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반면 도주님 부친께서는 조선인으로 ‘반일’ 사상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신 뒤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셨다. 여기서 부친의 독립운동과 보황당의 정치 활동 사이에는 접점을 찾기 어렵다. 구국운동을 목적으로 만주로 망명하신 부친께서 청 황실을 보위하려는 보황당에 가입해 활동하셨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상황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부친의 혐의는 비밀리에 추진하던 독립운동을 보황당원의 비밀 거사로 오인한 우발적인 사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마지막으로 부친께서 다행히 무혐의로 풀려나신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세보』에는 “…구국 충정이 담긴 장서를 올리니 원씨가 인견하고 감탄하여 면케 해 주었다.”10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장서’는 탄원서를 의미하며 ‘원씨’는 원세개를 가리킨다. 즉 원세개가 도주님 부친의 구국 충정이 담긴 탄원서를 읽고 무혐의로 풀려나도록 조치했다는 뜻이다. 또한 『전경』의 “무혐의로 풀려난 엄친의 파란 곡절의 생애에 가슴을 태우고”11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도주님께서는 부친의 고난에 깊은 애통함을 느끼셨던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도주님께서도 부친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교운 2장 5절에 기록된 도주님 부친께서 보황당원의 혐의로 체포되신 사건에 대해 그 혐의의 타당성과 무혐의로 풀려나신 상황을 살펴보았다. 보황당은 청 왕실을 보존하고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중국의 정치 단체였다. 이 단체는 신해혁명 이후 집권한 원세개 정부로부터 탄압받았다. 이러한 중국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신 부친께서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에 헌신하셨다. 그러나 부친께서 비밀리에 하신 독립운동이 원세개의 정부로부터 보황당의 비밀 거사 준비로 오인되어 체포되신 것으로 보인다. 부친의 우국충정을 담은 탄원서를 본 원세개는 그 내용에 깊이 감복하였고, 그 결과 부친께서 무혐의로 풀려나셨다.

 

 

 

 


 01 변법자강운동은 1898년 청나라에서 광서제 주도하에 일어난 개혁 운동으로 무술변법 또는 100일 유신으로도 불린다. 강유위 등은 사회ㆍ정치제도 전반의 개혁을 주장하며 헌법 제정, 국회 개설, 과거제 개혁, 서양식학교 도입, 산업 육성 등을 개혁 과제로 삼았었다. 그러나 서태후의 방해 공작으로 103일 만에 좌절했고, 이후 개혁 세력들은 숙청당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02 陳漢威, <淸末革命派與保皇派對海外華僑政治手段的異同〉, 《吉林省敎育學院學報》 31권 (2015), p.124.
03 “‘무술변법 운동’ 실패 후 강유위는 해외로 망명하여 16년간 4대륙 31개국을 누비며 해외 화교 사회에서 ‘보황당’을 조직하고 발전시켰다. 광서 황제를 구원한다는 구호 아래 해외 화교를 대상으로 정치 선전 활동을 펼쳤으며,….” 楊立, 〈康有爲在墨西哥經營保皇黨産慘遭“滑鐵盧”」, 《文史天地》 6호 (2021), p.87 참조.
04 중국동맹회는 일본 도쿄에서 여러 혁명 조직이 손문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이 단체는 《중흥일보(中興日報)》와 《성주신보(星洲晨報)》 등 여러 신문 매체를 통해 해외 화교에게 만주족이 세운 청 왕조에 저항하는 ‘반만(反滿)’ 사상을 선전하며 화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으려 했다.
05 “1905년 중국동맹회가 설립된 이후부터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보황파의 정치 구호는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그들의 행동은 민심을 얻지 못해 수많은 화교로부터 배척받았다.” 陳漢威, 앞의 글, 31권 (2015), p.125 참조.
06 『대순진리회요람』, pp.11-12 참조.
07 “이대계 승희 유의암 인석과 결탁하고 국내지사 배정산 문창 조서천 정규 조일헌 병택들과 엄격히 설계하여 광복을 도모코자 연병 제무를 둘째 아우에게 맡겼다.” 『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 1卷(부산: 아름기획, 1996), pp.180-181 참조.
08 같은 책, p.181.
09 당시 신해혁명의 성공을 이끈 손문의 혁명정부는 청나라의 실권자로서 1911년 11월부터 제2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있던 원세개에게 총통 자리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황제 퇴위와 ‘중화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 체제 건립을 약속받았다. 원세개는 1912년 3월 10일에 제2대 임시대총통으로 임명되었다.
10 『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 1卷(부산: 아름기획, 1996), p.181.
11 교운 2장 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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