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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1년(1991)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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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이야기 : 장손무기

장손무기(5) 

 

간신들의 음모로 마침내 「무기(無忌)」는 죽게되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울며 탄식하기를, 『짐의 가문은 불행하구나. 고양공주(高陽公主)는 짐과 동기간인데 이미 모반을 하였고 이제 외숙까지도 그러하니, 짐은 세상에 심히 부끄럽도다. 어찌 해야 좋단 말인가?』라고 하자.

  대답하여 아뢰기를, 『방유애(房遺愛)는 아직 입에서 젖내가 나는 주제에 여자와 더불어 모반을 꾀하였으니 어찌 일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무기는 간지(姦智)가 있는 인물로서 천하가 두려워 복종하는데, 일단 남몰래 모반을 일으켜 버리면 폐하께서는 누구로 하여금 막도록 하시겠습니까? 이제 사태가 절박하옵니다.

  무기가 소매를 걷어올리고 일어나 악한 무리를 불러모으면 종묘(宗廟)의 환난(患難)이 될 것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수(隨)나라 왕조를 보지 않았습니까? 우급화급(于及化及)의 경우에도 부친이 재상(宰相)이고 동생인 지급(智及)은 양제(煬帝)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그 자신은 이궁(離宮)을 경호하는 군대를 지휘하였던 까닭에, 양제(煬帝)는 함께 있어도 의심을 하지 못하였지만, 모반의 주모자가 되어 결국 수(隨)나라를 멸망시켰던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결단을 내리시옵소서』라고 하였으나, 고종은 그래도 의혹을 품고 다시 조서(詔書)를 내려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다.

  다음 날 허경종(許敬宗)은 무기의 모반에 대한 조짐은 확실하다고 하며 체포(逮捕)할 것을 요청하였다.

  고종이 울며 『외숙이 진정 그리하였다 하여도 짐은 결코 주살(誅殺)할 수가 없도다. 후세 사람들이 짐을 어떠하다고 평하겠는가』라고 하자, 허경종(許敬宗)은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외숙인 박소(薄昭)는 한(漢)나라 왕조에 종사하여 공적을 세웠으나 후에 사람을 죽여 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를 가련히 여기어 나라의 법을 굽히고는 신하들에게 상복을 입도록 하고서 통곡하였고, 이에 박소(薄昭)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실로 역사는 간과(看過)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옵니다. 

  지금 무기는 선제(先帝)의 은덕을 망각한 채로 폐하의 지극한 신임도 저버리고서 사직(社稷)을 옮기고 종묘(宗廟)를 무너뜨리고자 하니, 어찌 박소(薄昭)에 비할 뿐이겠습니까?

  법도를 살피어 오족(五族)을 멸(滅)하여야 하옵니다. 처단해야 할 자를 처단하지 않으면 도리어 난리를 당하게 된다고 신은 들었사옵니다. 기회를 잡았을 때 속히 처단하셔야지, 늦추게 되면 반드시 변고가 발생할 것이옵니다.

  무기는 선제(先帝)를 좇아 천하를 평정하였고 천하가 그의 지략(智略)에 복종하였으니, 왕망(王莽)이나 사마의(司馬儀)와도 유사한 인물이옵니다. 이제 반역의 무리도 스스로 시인(是認)하였는데, 무엇을 의심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시옵니까』라고 하였고, 고종도 결국 더 이상 의심하여 묻지는 않았다.

  마침내 고종은 조서를 내려 무기의 관직과 작위(爵位) 및 영지(領地)를 삭탈(削奪)하더니, 일품(一品)의 봉록(鳳祿)인 양주도독(陽州都督)을 검주(黔州)로 폄직(貶職)시켜 귀양보냄에 군대에 그의 거처에 파견하여 호송(護送)하도록 하였고, 그의 아들인 비서감(秘書監) 충(沖)은 영외(嶺外)로 유배(流配)시켰으며, 사촌동생인 투주자사(偸州刺史) 지인(智仁)은 익주사마(翼州司馬)로 폄직(貶職)시켜 귀양보냈다.

  수개월이 지난 후 고종은 사공(司空) 이적(李勣), 중서령(中書令) 허경종(許敬宗), 시중(侍中) 신무장(辛茂將)등에게 조서를 내려 모반사건을 다시금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허경종(許敬宗)은 대리정(大理正) 원공유(袁公有)와 어사(御使) 송지순(宋之順)등으로 하여금 검주(黔州)로 가서 강압적으로 심문하게하여 무기는 목을 메어 죽게 하였고, 아들 충(沖)은 죽음을 면하였으나 조카 상(祥)은 죽게 하였으며, 팔촌동생 사(思)는 단구(袒丘)로 유배 시켰으니, 대체로 친척 모두가 득죄(得罪)하여 멀리 유배되었다.

  고종 초기에 무기와 수량(遂良)이 마음을 다하여 군주를 받들며 천하의 안위(安危)를 스스로 떠맡아 다스렸기 때문에 영휘(永徽)의 치세(治世)에는 정관(貞觀)의 기풍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고종 또한 이들 노신(老臣)을 극진히 예우하여 자신은 팔짱만 낀 채로 청정(廳政)하였고, 나라의 기강(紀綱)을 세우고 베푸는 것은 이들 두 사람이 유지하여 나갔다.

  그러나 두 번째 황후의 폐립(廢立)계획이 일치되지 않자, 간신(姦臣)들은 음모를 꾸몄고 고종도 눈이 어두워져 그들의 말에 따르게 되니, 마침내는 무기 등을 죽게 하고 말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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