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호 인물 돋보기 : 안중근의 생애와 의거 |
안중근의 생애와 의거
연구위원 김 성 호
그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개항기에 애국 독립운동과 무장 독립운동을 조화시키고 이를 몸소 실천하여 혼돈의 시대에 지표 잃은 우리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며 한국인의 자긍심을 드높였다. 이 사실은 그의 생애 전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국권 수호라는 목적을 위해 교육운동과 더불어 국채 보상운동과 같은 애국 계몽운동에 투신한 것이고, 두 번째는 무장 역량을 키워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한 사실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빛나는 부분은 그가 조선의 국권이 위태롭게 된 원인이 이토에게 있다고 확신하여 1909년 10월 26일 그에게 열다섯 가지 죄목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일이다.
1. 시대상황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침략야욕이 실행에 옮겨짐에 따라 약소국이었던 우리나라는 점차적으로 국가의 자주성과 정체성이 소멸되었고, 이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대내적으로는 민족 스스로 근대화를 추구해야 했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여 국가의 독립을 보전해야만 했다. 한편 이 시기에 민중들은 제국주의 물결이 동반한 자본주의의 충격으로 생존권이 극도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는 의식 있는 민중들로부터 개화(開化)와 부국강병, 그리고 애국계몽과 자주독립 등의 발전가치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극도로 분란해진 국정(國政)에 쇄신의 희망이 보이지 않자 나라를 등지고 만주로 떠나가는 유민이 1891년 한 해에 1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반외세와 반봉건의 문제가 다른 무엇보다 국권수호를 위해 조속히 해결되어야 할 역사적 과제로서 대두되었다.
2. 가계(家系)
안중근의 집안은 살림이 넉넉하였을 뿐더러 그의 조부(祖父) 안인수(安仁壽)는 인덕과 재덕을 겸비한 인물로 실제 관직이 아닌 명예직이긴 하였지만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지냈다.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셋째가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이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신동(神童)으로 널리 알려졌고, 중년에는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게다가 안태훈은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서 젊은 시절 과거를 보기 위해 개화파의 일원이었던 김종한(金宗漢)의 집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며, 개화파의 지도자 박영효가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청년 70명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려고 했을 때 그 일원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말미암아 유학길이 좌절되고 이들까지 탄압의 대상이 되자 안태훈은 수구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가족들을 포함한 일가권속 80명을 이끌고 세거지 해주를 떠나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청계동[淸溪洞: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산중으로 이사, 은거하였다. 이로 인해 안중근은 어린 시절을 안씨촌(安氏村)이라 불리우는 청계동(淸溪洞) 산중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3. 성장기 안중근은 6, 7세가 되면서부터 조부(祖父)가 청계동에 개설한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안중근은 8, 9년 동안 서당에서 보통학문만을 익혔을 뿐 정규학교에서는 공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학문적 수준이 결코 낮은 것은 아니었다. 후일 그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소년시절 『四書三經』과 『通鑑』 등의 유교경전을 비롯하여, 『만국역사(萬國略史)』01와 『조선역사』02를 읽었다고 진술하였던 점이나 그가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프랑스어를 공부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묵들의 서체(書體)와 내용을 눈여겨본다면 그의 학문적 수준이 그리 낮지 않았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소년시절 안중근은 청계동(淸溪洞)으로 이사한 후부터 학문보다는 사냥에 더 관심을 가지고 열성적이었다.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안중근은 스스로 초패왕(楚覇王) 항우(項羽)를 언급하면서,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지 나는 학문으로 이름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저도 장부요, 나도 장부다.”라고 했는데, 그 말대로 민족의 의기를 크게 떨친 대장부로서의 영예가 천추에 남아 전한다. 또한 안중근은 17,18세가 되었을 때에는 친우결의와 음주가무, 그리고 총포수렵(銃砲狩獵)과 기치준마(騎馳駿馬:준마를 타고 달리는 것)등의 네 가지를 좋아하였다고 전하여지는데,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안중근은 어린 시절부터 전반적으로 문인(文人)으로서보다는 무인적(武人的)인 성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이 소년시절부터 학문에 큰 뜻을 두지 않았던 점과 그가 유독 사냥을 좋아하여 무인적인 성향이 강하였던 데에는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다. 그것은 16세 때 그가 남긴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1864년에 안중근은 재령군 신한포에 사는 김홍량(金鴻亮)의 딸 김아려(金亞麗)와 혼인하였는데, 혼인 후 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장가도 들었으니 의젓하게 글공부도 하라.’는 질책의 말을 듣게 된다. 이에 안중근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철부지라서 사냥에 몰두하는 줄 아십니까? 한 나라가 문무를 다 갖추고 있어야 남의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습니다. 사나이에게 그 양면이 다 있어야 하는 것도 똑같은 이치입니다.” 아마도 안중근의 이 말은 어린 시절부터 대내적으로 혼란한 시대적 환경에서 성장해온 그가 언젠가는 자신이 시대적 당면과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투철한 애국심의 발로에 기인한 발언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안중근은 무인적인 기질이 강하여 학문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 정규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문을 애당초 등한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틈틈이 세계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세계역사서를 다독(多讀)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시절 『태서신사(泰西新史)』03라는 서양사 교과서의 탐독은 후에 그가 국제적인 정세 하에서 민족문제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안목을 키우고, 나아가 배일사상(排日思想)으로부터 민족주의적 애국사상을 갖게 하는 등 그의 일생에서 사상전환을 경험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1864년 그는 16세에 이르러 동학당[東學黨:훗날 일제의 앞잡이인 일진회(一進會)의 전신(前身)]에 맞서 부친 안태훈이 의병을 일으킬 때, 부친을 따라 출전하여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승리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4. 신교육사업과 구국(救國)운동 안중근이 국권수호를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시점은, 대체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04이 체결된 전후로 그의 나이 26~27세에 접어들면서이다. 이 무렵 안중근은 중국의 산동(山東)과 상해(上海)로 가서 해외지역을 기점으로 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자 안중근은 자국(自國)의 실정을 외국에 호소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움직이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해야 했고, 이와 더불어 고국에 계신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발길을 다시 고국으로 돌리게 했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여서도 중국에의 관심을 버릴 수 없었기에 지리적으로 상해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진남포(鎭南浦)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안중근이 진남포에 거처를 마련한 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교육사업이었다. 그의 이 같은 결정은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전교활동 중 수 차례의 대중연설을 하면서 일반대중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대학교(大學校) 설립을 조선교구장에게 건의 하였던 바 있었듯, 이는 자신의 교육에 대한 관심을 실천에 옮긴 당연한 결과였다. 안중근이 사재(私財)를 들여 설립한 학교는 모두 두 곳으로 그 하나가 삼흥학교〔三興學敎:후에 오성학교(五星學敎)로 개칭됨〕이고, 다른 하나는 돈의학교(敦義學敎)이다. 그는 학교 설립 후 교장으로 있으면서 교사(校舍)와 교원(敎員)을 확장하여 교육에 열의를 쏟았으며, 설립 후에도 일체의 경비를 부담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그는 교육사업과 더불어 평양에서 ‘삼합의(三合義)’라는 채탄회사를 설립하여 대동강 지역의 석탄을 채굴, 수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 다시 연해주로 북행할 것을 결심한 안중근은 자금마련을 위하여 ‘삼합의’를 처분하여 한번 좌절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다진다. 1907년 드디어 안중근은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그 후 이듬해에는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5. 자신의 의거를 숙명으로 여긴 안중근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안중근을 천고에 빛날 자객으로 보는 관점이 그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어에서 자객은 “사람을 몰래 암살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중국어에서는 “옛날 무기로 암살하는 사람”이라고 해석된다. 자객은 2천여 전에 이미 역사에 등장하여 민간에서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이런 자객들은 일반적으로 무예가 뛰어나고 의협심이 특별히 강하여 정의와 의리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영웅호걸들이다.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객을 비운(悲運)의 영웅호걸들이라고 형용하기도 한다. 중국 근대혁명가의 한 사람인 한염(韓炎)은 “옛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저술할 때 「자객열전(刺客列傳)」을 하나의 장절(章節)로 따로 썼다. 비록 그것이 한낱 개인의 사적들이기는 하지만 건곤(乾坤)의 운행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천지에 동란이 생긴 지로 남의 나라를 제멋대로 합병하고 신하가 분분히 권간(權奸)의 기를 꺾을 수 없었을 것이었으니 그들의 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고 하면서 자객은 국가 존망의 위급한 시기에 간신을 처단하여 나라를 구한 영웅인데, 안중근은 세도인심(世道人心)에 감응하여 수천 년 후에 하늘이 한국에 내린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그의 아명(兒名)인 응칠(應七)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씨는 이 같은 꿈을 꾼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믿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갓 태어난 아들의 몸에 꿈속에서 본 북두칠성과 똑같은 모양을 한 일곱 개의 점이 박혀 있는 것이다. 이에 조씨는 안중근을 하늘이 내려주신 아이라 생각하고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게 될 인물임을 예견하였다고 한다. 안중근의 어머니인 조씨가 중근을 낳기 전 꾸었던 태몽과 중근이 태어나자마자 그의 몸에 박혀있던 일곱 개의 점은 모두 북두칠성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나라 민간신앙에 따르면 북두칠성은 하늘을 상징하고 더불어 인간의 운명과 숙명을 상징하는 별로 인식되고 있다. 북두칠성의 의미에서 하늘과 숙명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듯 안중근의 의거는 태어날 때부터 하늘로 부여받은 운명이자 숙명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춘추외전(春秋外傳)』의 “천여불수 반수기구(天與不受 反受其咎)”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생전에 썼던 “천여불수 반수기앙이(天與不受 反受其殃耳)”라는 유묵(遺墨)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안중근은 당시 자신의 행위가 하늘의 뜻임을 강조하고 있다.
6. 하얼빈 의거
합방을 위한 일본의 기초 작업이 추진되고 있을 때, 이토는 하얼빈에 가게 되었다. 그는 여행에 앞서 국제신문협회 모임에 참석하여 “이번 만주 여행에 특별한 사명은 없고 개인적 여행이다.”라고 연설했다. 겉으로는 이토의 만주 방문이 개인적인 여행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 정부의 또 다른 야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토는 러시아의 재무상 코코프체프(V. N. Kokovtzev)가 미국과 손을 잡으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러시아와 미국이 제휴하기 전에 이 흐름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토가 죽은 후 세계에 넓게 전해진 바에 의하면 하얼빈을 방문한 그의 또 다른 목적은 관동도독(關東都督)을 철거하고 한국통감의 권력을 만주까지 확장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이번 여행에서 러시아 대신과 각국 밀사들과 만주문제를 담판한 후 자신이 중국재정통감에 임명되고자 했다.05 한국통감도 부족해서 중국통감 자리까지 탐했을 정도로 이토는 마치 전세계를 집어 삼킬 기세였다. 이 같은 탐욕을 뒤로 숨긴 채 이토는 1909년 10월 하얼빈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정부의 속내를 감춘 채 하얼빈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뜻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한 안중근은 우연히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선다.
7. 자서전에 기록된 거사 관련내용
지금으로부터 근 100년 전 일제의 식민통치로 기울어가는 이 땅의 암울한 현실에서 불꽃처럼 자신의 삶을 대의를 위해 던졌던 안중근. 그는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지만 안중근(安重根)이라는 그의 이름은 지금도 역사 속의 위인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이러한 그의 이름 석 자는 『典經』 속에서도 등장한다. 아래의 내용은 『典經』에 소개된 안중근 관련 내용이다.
위에 인용된 『典經』의 내용은 상제님께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없애기 위한 공사(公事)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典經』의 내용만을 보아서는 상제님께서 안중근(安重根)을 공사에 쓰셨다는 점이 직접적으로 표면화(表面化)되지 않아 종교적 신앙심을 배재하고서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위와 같은 내용을 그의 행적이나 관련 사료 등의 역사적 근거를 들어 확연히 밝히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의 내용에 어느 정도 근거가 될만한 흥미로운 자료가 있기에 안중근의 전기를 소개하면서 짧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아래에 소개되어질 글은 그의 자서전에서 안중근이 직접 작성한 글이다.
안중근 자서전에 기록된 위 내용과 앞에서 이미 상술한 바 있는 『典經』의 내용과 그 연관성을 찾는다면, 그의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 중에서 특히 안중근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하는 까닭모를 번민과 생각, 그리고 실천에 옮겨진 그의 행동을 상제께서 처결하신 이등박문(伊藤博文) 공사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위 자서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안중근은 어떤 면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자신에 대한 운명을 감지한 것처럼 보인다.
01 조선 후기에 간행된 교양세계사(敎養世界史). 02 1895년 학부에서 편찬, 간행한 소학교용 한국사 교과서. 03 1896년 조선의 학부 편집국에서 순 한글로 번역하여 인간(印刊)한 서양사 교과서. 04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05 『大韓國人 安重根 學術硏究誌』, 安重根 義士 崇慕會, 2005, p.81, p.485. 참고 06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에 있는 일제 시대의 형무소. 독립운동가 안중근과 신채호가 수감되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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