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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1년(2011)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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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의 길 : 중국공사(中國公事) 내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실현성 고찰

중국공사(中國公事)

 

내용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실현성 고찰


 

연구위원 박병만

 

 목차

 Ⅰ. 머리말
 Ⅱ. 중국 역사의 개관
    1. 주(周)에서 명(明)까지
    2. 명ㆍ청(淸) 교체기
    3. 청 말기에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수립까지
 Ⅲ. 중국공사 전ㆍ후 한국과 중국의 관계
    1. 공사 이전의 양국관계
    2. 대중화(大中華)와 소중화(小中華)
    3. 공사 이후의 양국관계
 Ⅳ. 중국공사의 실현과정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오늘날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함에 따라 ‘중국은 과연 성장을 계속할 것인가? 부상한 중국이 동아시아 및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점들은 국제사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장 가까운 나라로 역사적으로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근대사에서 양국은 영욕을 같이 해 왔고 지금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동반 성장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양국의 미래와 앞으로의 양국 관계는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심사에 대한 예측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마도 『전경』에 나와 있는 상제님의 중국 관련 공사일 것이다.    


  
  상제께서 원일과 덕겸에게 “너희 두 사람이 덕겸의 작은 방에서 이레를 한 도수로 삼고 문밖에 나오지 말고 중국 일을 가장 공평하게 재판하라. 너희의 처결로써 중국 일을 결정하리라” 이르시니 두 사람이 명하신 곳에서 성심 성의를 다하여 생각하였도다. 이렛날에 원일이 불려가서 상제께 “청국은 정치를 그릇되게 하므로 열국의 침략을 면치 못하며 백성이 의지할 곳을 잃었나이다. 고서(古書)에 천여불취 반수기앙(天與不取反受其殃)이라 하였으니 상제의 무소불능하신 권능으로 중국의 제위에 오르셔서 백성을 건지소서. 지금이 기회인 줄 아나이다”고 여쭈어도 상제께서 대답이 없으셨도다. 덕겸은 이레 동안 아무런 요령조차 얻지 못하였도다. 상제께서 “너는 어떠하뇨” 하고 물으시는 말씀에 별안간 생각이 떠올라 여쭈는지라.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와 예악문물(禮樂文物)의 대중화(大中華)의 산하(山河)와 백성이 이적(夷狄…오랑캐)의 칭호를 받는 청(淸)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이제 그 국토를 회복하게 하심이 옳으리라 생각하나이다.” 상제께서 무릎을 치시며 칭찬하시기를 “네가 재판을 올바르게 하였도다.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 하시니라. 원일은 중국의 해원 공사에만 치중하시는가 하여 불평을 품기에 상제께서 가라사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이라 하듯이 중국이 편안함으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小中華)가 곧 대중화(大中華)가 되리라” 일러 주셨도다. (공사 3장 18절)

 

 

  이 공사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기 전해인 1908년에 보신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청나라 말기였던 중국은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진하여 그 위상이 심하게 실추되었고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공화혁명이 격화되고 있었다. 한편, 조선은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ㆍ일본ㆍ러시아의 경쟁이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로 종결되면서 사실상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상제님의 이 공사는 암울한 처지에 놓여 있던 중국과 우리나라에 희망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상제님께서 일반적으로 을 위주로 하여 천지공사를 보셨다는 것을 놓고 볼 때,01 이 공사 내용도 해원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 중심의 농업사회와 북방 이민족 유목사회와의 끝없는 대립과 공존의 역사였다. 중국에서 이민족을 빼놓고는 역사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괄적이나마 중국의 역사를 이민족과의 관계를 위주로 살펴보는 것이 이 공사 내용 중 해원과 관련한 부분02을 이해하는 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나아가 전통적으로 양국관계의 근간이 되었던 조공책봉관계를 중심으로 공사 이전의 양국관계를 알아보고 대중화ㆍ소중화의 개념을 살펴 공사 내용의 이해를 돕고, 또한 공사 이후의 양국관계를 고찰하여 위 공사 내용의 실현성을 조망해보고자 한다.


 

 

Ⅱ. 중국 역사의 개관

 

  중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은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가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중국(中國)’이란 말은 중국의 오랜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발전해 왔다. 서주(西周)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중국’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에는 황하유역 일대’03의 지역으로 주나라 왕이 직접 통치하는 영역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초기에 예제(禮制) 문화적 질서와 범주라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중국’은 이후 오랜 역사 속에서 공통의 문화와 지리적 조건,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역사공동체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중화민족의 징표이자 상징이 되었다.
  중국사는 시대상황에 따라 하나의 통일제국이 수립되기도 하고, 분열하기도 하며 여러 국가가 상호 대립하면서 경쟁한 시대도 있었다. 전 시대를 통해 민족 간의 긴장이 끊이지 않았으며 요(遼)ㆍ금(金)ㆍ원(元)ㆍ청(淸)의 정복왕조가 700여 년 동안 중원을 지배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역사상 ‘중국’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주(周)나라로부터 중국 역사의 흐름을 이민족의 침략과 정복을 중심으로 개괄하여 살펴보되, 공사 내용에 언급된 ‘청의 명(明)나라 정복’과 ‘한족(漢族)에 의한 중국의 회복’, ‘청에 대한 서양열강의 침략’ 부분에 대한 이해를  고려하여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 주(周)에서 명(明)까지 


  주나라는 문왕(文王) 서백(西伯)이 기초를 닦았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강태공의 도움을 받아 기원전 1122년(또는 1126) 상[商, 은(殷)이라고도 부름]의 주왕(紂王)을 멸망시켰다. 이후 800여 년을 지속하는 동안 전반기를 서주(西周), 후반기를 동주(東周)라 한다. 동주도 전기는 춘추(春秋)시대라 하고 후기는 전국(戰國)시대라 한다. 이 춘추전국시대에는 주나라를 유지하던 봉건제 질서가 붕괴되었고 유가ㆍ묵가ㆍ법가ㆍ도가 등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풍성한 사상의 꽃을 피웠으며 오늘날 중국 문화와 사상의 기초를 완성하였다.
  대혼란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수립한 이가 진시황(秦始皇)이다. 그는 법가(法家)사상을 통해 사상을 일원화하고 전국적으로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통치체제를 일원화한 중앙집권형의 새 질서를 구축했으나,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다. 진 이후에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에 의해 한나라가 들어섰고, 이후 400여 년 동안 번영을 구가하며 중국을 대표하는 왕조로 성장했다. 후대 사람들이 중국인을 ‘한인(漢人)’이라 부르고 중국의 문자를 ‘한자(漢字)’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한무제(武帝)는 유가(儒家)사상을 통치원리로 삼았으며 유가가 이때부터 사실상 중국의 통치원리로 등장하게 된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三國)으로 분열되었는데 소설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인 위(魏)ㆍ촉(蜀)ㆍ오(吳) 삼국(三國)이다. 이들은 사마염(司馬炎)의 진(晋)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그동안 한에 의해 그 세력이 억압되어 있던 북방의 흉노ㆍ선비ㆍㆍ저ㆍ강(羌) 등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이 다섯 이민족이 130년 동안 열여섯 나라를 번갈아 가며 세웠는데 이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진나라는 남쪽으로 쫓겨가게 되며 처음에 낙양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때를 서진(西晋),
후에 동남쪽으로 쫓겨가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있던 때를 동진(東晋)이라 한다. 그리고 북쪽에는 이민족에 의한 여러 왕조가 대치하고 있었고 남쪽에는 한족에 의한 단명 정권들이 약 160여 년간 대치하였는데, 이때를 남북조(南北朝)라 하며 오호십육국시대까지 소급하여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는 수(隋)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중국에서 300여 년간 혼란과 분열의 암흑기였다. 이 암흑기는 중국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세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한족의 대거 남하로 경제ㆍ문화의 중심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이전하게 된 것이고, 둘째는 북방의 이민족이 혼란의 과정에서 한족에게 동화되어 새로운 한족이 형성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혼란기를 통해 외래사상인 불교사상과 토착종교인 도교사상이 일반 민중에게 전파, 확산되었다.04
  혼란한 중국을 통일하고 등장한 수는 단명하여 37년 만에 멸망하였고, 그 뒤를 이은 왕조가 당(唐)이다. 당은 한나라에 이은 또 하나의 강성한 제국이었다.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등 세계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의 멸망 후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는 분단시대를 거쳐 성립한 송(宋)은 북방의 거란족[遼]ㆍ여진족[金]ㆍ몽골족[元]에 의한 침략으로 남쪽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그 이전을 북송(北宋), 그 이후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남송의 주자(朱子)는 남북조와 수ㆍ당에 걸쳐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불교를 비판하며 성리학을 정립하였고, 이후 성리학은 중국사회에 국가 통치이념으로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서북방의 서하(西夏)와 요ㆍ금ㆍ원은 이민족왕조로 송과 화의와 전쟁을 반복하며 송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생활방식의 전환을 이루며 왕조체제를 갖추고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고유한 체제와 한인체제를 겸용하였다. 특히 한인 왕조의 문화와 정치체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이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원(元)은 결국 송을 멸망시키고 중국뿐만 아니라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통치 집단의 분열과 부패, 정치적 문란으로 사회질서가 무너지며 농민반란이 일어나 원은 멸망하고 한족에 의해 명나라가 세워졌다. 명은 전통문화의 부흥과 함께 원의 통치하에서 나타났던 분권적인 특성이 있는 정치체제를 일소하고 황제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하여 황제 일원적 지배체제를 형성했다. 이처럼 한인왕조가 다시 부흥함으로써 중화제국 질서가 재차 구축되었다.

 

 

2. 명ㆍ청(淸) 교체기


  명 초기 황제의 권력을 보좌하는 명대의 특유한 존재로서 내각05과 환관이 있었다. 내각과 환관은 영락제 이후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서로 각축을 벌이며 국정을 좌우하게 된다. 차츰 황제집권체제가 쇠약해지기 시작하며 내각과 환관은 서로 권력투쟁을 일삼고 국정을 전횡하였다. 명대는 중국 역사상 환관의 폐단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의 하나였다. 명 중기 이후에는 황제의 무능과 환관의 폐단이 정치적 모순을 격화시켜 황실과 훈척(勳戚), 관신(官臣), 지방 관리들에 의한 토지 강점이 날로 심각해지게 되었다. 토지강점에 의한 대토지 소유현상이 심화하여 소농경제체제는 파괴되고 생계수단을 잃은 농민들은 소작인이나 노복, 유민이 되기도 해 명 말의 계급모순은 급속히 심화하였다. 토지겸병(兼倂)이 중국 역사상 가장 심했던 시기로 심각한 경제사회적 격차가 발생했다.
  이러한 정치적 부패와 폭정을 비롯하여 가혹한 조세수탈 등은 국가 경제의 근간이었던 농민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었고, 장기간에 걸친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기근과 기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농민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여러 반란군 세력을 모아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이자성(李自成)은 주력군이 북방의 청군(淸軍)과 대치하고 있어 방어가 허술했던 명의 수도 북경을 점령하였고, 이때 숭정제(崇禎帝)가 궁성 뒷산에서 자살하며 명조는 실질적으로 멸망했다(1644). 중국 연안에 대한 왜구의 약탈로 말미암은 피해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원조하면서 발생한 국력의 손실도 또한 명이 몰락하는 중요 원인 중 하나였다.  
  명 말 농민반란과 사회혼란을 계기로 명조의 만주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하자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1586년 여진족의 세 부족을 통합했다. 연합된 부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고 그는 1616년 금(金)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다. 그의 아들 숭덕제(崇德帝)는 1636년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하고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한인 관료들에 대한 회유책과 우대정책 등을 통해 배타적이고 국수적인 만주의 성격에서 탈피해 한인과 몽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다민족의 국가로서 관료국가체제를 이루었다. 숭덕제의 뒤를 이은 순치제(順治帝)는 1644년 북경을 함락하고 화북지역을 점령하였다. 이후 강희제(康熙帝)는 대만에서 청에 대항하고 있던 명의 정   성공(鄭成功) 세력을 정벌해 진정한 중국지배를 이룩했다(1683). 청은 한인에 대해 명대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한인 지식인계층을 통치권으로 흡수하는 등의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행하며 통치했다. 또한, 명 말 농민봉기를 거치면서 심각하게 파괴된 농촌경제의 활성화를 통해 농업생산력의 회복과 사회 안정 그리고 재정의 건전화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가혹한 조세제도에 대한 개혁 등을 통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해 나갔다.

 

 

3. 청 말기에서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수립까지


  청은 건륭제(乾隆帝) 중기 이후 태평성세의 한계를 드러냈다.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다 보니 관료의 창의성이 억제되고 그 역할이 약화되면서 행정 능률의 침체현상이 심화되었다. 게다가 사치풍조와 부패가 만연해 관리의 수탈이 극에 달했으며, 한정된 토지에 비해 기하급수적인 인구의 증가06 등은 백성의 궁핍을 더욱 가중시켰다. 결국, 이렇듯 정치를 그릇되게 함으로써 비롯한 사회적 모순으로 빈번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국고의 손실을 가져와 19세기 초 이후로 청조는 쇠퇴하여 사회적 안정을 잃어갔다.
  국력이 약화되어가고 있을 때 영국을 필두로 서구세력이 중국시장에서 자국 상품의 판로를 찾고자 밀려왔다. 이 과정에서 아편전쟁으로 불리는 1차 중영전쟁(1839~ 1842)의 패배로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하고 홍콩을 할양하였으며, 2차 중영전쟁(1856 ~1860) 때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수도 북경이 함락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강(自强)을 추구하였지만 청불전쟁(1883~1885)에서도 패배하여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잃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계속하여 청일전쟁(1894~1895)에서 역시 패배,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고 대만을 일본에 할양했으며 일본의 요동반도 할양요구를 저지시킨 러시아ㆍ프랑스ㆍ독일 3국에 조차지를 내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중화제국적인 질서는 붕괴하고 청은 일개 약소국으로 전락했으며 백성은 의지할 곳을 잃게 되었다.
  중영전쟁 후 새롭고 부강한 중국을 모색하고자 하는 여러 시도 중의 하나였던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851~1864)07 이후 지배층은 개혁을 통해 부강한 근대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와 수구세력의 반발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강요된 개항 후에 기독교 포교가 이루어져 각지에서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났고, 의화단(義和團)08에 이르러서는 반기독교에서 반외세운동으로 발전했다. 의화단사건은 청조와 열강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청조를 타도해야 한다는 혁명론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의화단사건 이후 반청 혁명운동이 확산하고 1911년 10월 10일 호북성 무창(武昌)에서 신식군대가 일으킨 혁명[신해(辛亥)혁명]은 청조의 운명에 결정타가 되었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공화정이 탄생, 손문(孫文)이 임시총통에 선출되었다. 청조의 고위관리인 한족출신 원세개(袁世凱)는 혁명군과 타협해 선통제(宣統帝: 부의)를 퇴위시키고 손문의 사임 후 총통이 되었다. 의회가 구성되어 헌법을 준비하고 변발과 같은 악습이 타파되는 등 새로운 기운이 태동했으나 원세개의 독재와 황제가 되어 복고적인 형태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제제(帝制)운동 등으로 민국 초기의 정세는 불안정했다. 이 시기에 1차 세계대전(1914)의 발발로 서양열강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멀어졌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신장하였다.
  제제운동 와중에 원세개가 병사하고(1916) 군벌시대가 시작되었다. 군벌을 타도하고 반제국주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손문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공산당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국민당 조직을 강화했다[제1차 국공(國共)합작]. 국민당은 군벌타도를 위한 북벌전쟁을 일으켰다. 도중에 대중운동이 과격해지자 국민당은 그 배후에 있던 공산당을 축출했다. 합작이 결렬된 상태에서 북벌이 완성되어 군벌시대가 종식되고 장개석(蔣介石)은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웠다(1927). 남경정부는 국공양당이 손잡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항일전쟁 기간 국민정부군 산하로 들어간 공산당의 군대는 지배영역을 넓혀갔고, 전쟁의 피해는 참혹했지만 항일전쟁에서 승리 후 1946년 후반부터 전면적인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의 결과 초기에 열세였던 공산당이 승리했고 1949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중국(한족)은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청에 의해 정복되었던 산하를 다시 회복한 이후 일본의 침략과 내전의 아픔을 극복하고 비로소 온전한 국가기반을 확립하게 되었다. 한편, 장개석의 국민정부는 대만으로 피난해 중화민국정부를 유지했으며 이로부터 2개의 중국이 계속되었다. 
   
                                 

 

Ⅲ. 중국공사 전ㆍ후 한국과 중국의 관계

 

 

1. 공사 이전의 양국관계


  청조 말 중영전쟁 이전에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중국과 타국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조공책봉제도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역시 고구려 이후 전통적으로 중국과 이 제도 아래에서 상호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따라서 여기서는 조공책봉제도에 대해 알아보고 조공책봉관계를 중심으로 양국 간의 관계를 한국역사의 시대구분에 기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조공책봉(朝貢冊封)제도
  이 제도는 주나라 이후 제후국들 사이에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사랑해 주는 사대자소(事大慈小)의 예(禮)에서 비롯되었다. 한나라 때 유가(儒家)의 사상이 통치이념으로 채택된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는 기본적으로 이민족에 대한 덕치와 교화를 주장한 유교적 사상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중국은 스스로 ‘천조상국(天朝上國)ㆍ만방종주(萬邦宗主)’라고 자부하면서 기본적으로 자국의 천자(황제)가 조공국의 지배자를 왕으로 책봉09하고, 중국의 역(歷: 연호)을 사용케 했다. 또한, 조공국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에는 군대를 동원해 조공관계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조공과 책봉을 교환하지 않는 주변국에 대해서는 무력을 동원해 회유하거나 정복ㆍ복속 등의 수단을 썼다. 따라서 주변의 이민족이나 국가는 의례적ㆍ형식적으로라도 중국의 번신(藩臣: 속국의 신하)임을 자처하고, 정기적으로 조공사절의 파견을 통해 조공을 바치고 중국의 문물제도를 흠모하며 공경의 뜻을 나타내야 한다고 여겼다.
  조공국들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참여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실정에서 조공책봉관계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거나 당연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조공국들은 형식적이지만 종번(宗藩)관계10로 이념화된 조공질서에 참여하면, 실질적으로는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대국인 중국과의 평화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공국의 왕들은 조공에 상응해 책봉됨으로써 이를 국내에서의 권위와 국제관계에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활용했다.
  경제적으로는 조공무역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공물보다 많은 물건을 회사(回賜) 받음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조공제도는 부유한 중국을 중심으로 물류와 교역이라는 경제행위가 이루어지는 무역통로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도 사행(使行)을 통해 중국에 가는 사람들은 중국문물을 접하고, 중국을 통해 서양의 학술과 문물도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명분에 치우친 형식적이고 폐쇄적인 조공책봉관계는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중국과 한국의 쇄국정책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중국의 명과 청, 한국의 조선은 결국 서구와 일본의 개방과 발전에 뒤처짐으로써 외세의 침탈을 당하게 된다. 덕치와 예를 강조한 유교적 세계질서는 법과 힘을 중요시한 서구의 세계질서와의 충돌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11


 
2) 한국과 중국과의 조공책봉관계
  한중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황제 또는 왕이 한국의 국왕을 책봉하고 한국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형식의 조공책봉관계였다. 조공책봉관계에서도 특별한 시기[원(元)] 이외에는 내정간섭을 받지 않았다. 책봉이란 것도 대부분 한국에서 국왕이 즉위한 뒤 중국이 추인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사대가 불가피했던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한국은 자주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싸우고,12 때로는 타협하면서 국제적인 위상을 인정받고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는 등의 실리를 추구했다. 
  양국 간 조공책봉관계의 큰 흐름을 살펴보면, 삼국시대 후반기(343~668)에 조공관계가 성립되고 당나라와 통일신라는 조공책봉관계를 시종 원만하게 운영했다. 그러나 고려와 정복왕조인 요ㆍ금ㆍ원과의 관계(918~1368)에서 조공관계의 변질이 있었다. 고려ㆍ조선과 명ㆍ청과의 관계(1368~1894)에서는 전형적인 조공책봉관계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13

 

 

① 삼국·통일신라시대
  최초의 관계는 343년 고구려가 전연(前燕)에 대해 칭신(稱臣)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14 고구려는 약 700년간 존속하면서 한나라 시기 이래 중국의 많은 왕조(한ㆍ위ㆍ동진ㆍ남북조ㆍ수ㆍ당 등)와 접촉했다. 그 형식은 대체로 조공과 책봉의 교환에 의한 것이었으나 전쟁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중국 제(諸) 왕조의 고구려왕에 대한 책봉은 사서(史書)에서 확인된 것만 해도 34회에 이른다. 중국에 대한 조공은 고구려 전기에는 요동을 둘러싼 잦은 전쟁과 극심한 분열 및 왕조교체 등으로 17회의 조공이 있을 뿐이었다. 고구려 후기(423~666)에는 남북조 및 이후 수ㆍ당과 조공책봉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이 기간에는 총 188회의 조공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 고구려와의 관계는 조공과 책봉의 본질인 종속관계는 아니었고, 시종 대등한 관계에서 독립성을 유지한 사실상의 화친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양국 간의 역학관계에 기인한 것으로 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매우 강성했음을 말해준다.15
  한편,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더불어 중국 남북조의 여러 나라들과 경쟁적으로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 수나라 건국 초기인 581년부터 백제와 고구려는 수나라와 일시적으로나마 조공책봉관계를 가졌고, 신라 역시 594년에 수에 조공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하여 삼국을 통일한 직후, 당이 한반도 전체를 속국화(屬國化) 하려는 데 맞서 8년간의 전쟁을 통해 당을 한반도에서 축출했다. 이후 옛 고구려 지역에 발해가 등장하면서 통일신라와 당은 전략적 이해가 일치하면서 신라는 당에 왕실의 자제를 숙위(宿衛)16시키는 한편, 많은 사절과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위계적인 평화관계가 200년 동안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한반도 국가는 한국의 힘을 하나로 통합했다는 위안에도 불구하고 이후 다시는 요동을 넘볼 수 없게 되었다. 요동이라는 완충지대가 없어짐으로써 한국은 중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이후 중국에 대한 기대나 의존성이 더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 통일 이후 중국과의 조공책봉관계는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졌고, 통일신라의 중국에 대한 사대와 인접국에 대한 교린정책은 이후 한중관계의 기본 틀로 유지되었다.17

 

 

② 고려시대
  문화적ㆍ경제적으로 강국인 송을 고려는 문치(文治)를 내세워 존중하면서 송 과의 교류를 통해 과거제를 실시하고 송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10세기 초, 송의 군사적 약세를 틈타 거란은 요동을 석권한 뒤 중국을 침입해 요동과 중국 일부를 아우르는 대요국(大遼國)을 건립하였다. 고려와 송과의 조공책봉관계를 고려와 거란의 조공책봉관계로 전환하고 고려와 송과의 반거란 연합전선의 형성을 저지하고자 993년 80만 대군을 동원한 1차 침략을 시작으로 1018년까지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그러나 서희의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 고려의 균형외교와 끈질긴 저항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고려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고려는 송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고, 요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은 하지 않았다.
  이후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 1029년 개경에 나성을, 1033~1044년간에는 전 접경지역에 걸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12세기에 들어 거란이 중국지역에서 활동한 틈을 타 요동에서 세력을 키운 여진족들은 요동지역의 모든 세력의 통일을 이루고 금나라를 세웠다. 금은 고려에 형제관계를 강요해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금이 북송을 멸하고 북중국의 패자로 군림하고 나서는 고려에 신하관계를 요구했다. 고려는 요와의 관계에서 얻은 교훈18을 바탕으로 금과의 군사적 대결을 피하는 대신 사대해 평화를 지켰다.19
  13세기 초에 들어 몽골은 금과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함으로써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몽골은 한때 고려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와 합세하여 거란을 소탕하기도 했지만, 몽골은 고려왕의 친조(親朝) 등을 요구하며 28년간 7차례에 걸쳐 침략하였다. 고려는 왕의 친조를 약속하고 굴복(1259)하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가 항복해 원과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전통적으로 한국 국가와 중국 국가 사이에 교환된 그것과는 다르게 매우 강제적이고 일방적이며, 불평등하고 종속적이었다. 원에 바치는 공물은 과도하고 비인간적인 경우가 많았다. 

 

 

③ 조선시대
  조선 초기 명과의 관계는 조선의 왕조교체에 대한 명의 소극적 태도와 북방 여진족에 대한 두 나라의 세력관계에 따라 원만하지 않았다.20 15세기에 접어들어 두 나라 사이의 문물교류가 활성화되면서 관계가 원만해지고,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 사이에는 점차 사대ㆍ숭명(崇明)의 경향이 나타난다. 양국 사이에는 형식상 군신ㆍ상하관계가 성립되었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불평등한 국가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조선에는 명 황제에 의한 책봉의 수용, 연호의 사용, 관례적인 조공21 등 제후국으로서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임진왜란(1592) 당시 명군의 참전22과 장기간에 걸친 주둔은 조선의 주권을 훼손하고 민폐를 일으키는 등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 그러나 위기에 몰린 조선의 지배층에 의해 명군의 지원은 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再造之恩)로 인식되고 유교적 중화주의와 숭명(崇明)의식은 심화되었다.
  임진왜란 전후 만주에 대한 명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웠다. 조선은 친명배금(親明背金)정책을 보였고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시급했던 후금은 조선을 침략[정묘호란]하였다. 결국, 조선은 명과의 기존관계를 유지하는 바탕 위에서 후금에 매년 목면 1만 5천 필, 명주 2백 필을 세폐(歲幣)로 제공하고 형제관계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강화를 맺었다. 이때 명은 국력이 약화하여 이렇다 할 원조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국으로 고칠 것과 황금ㆍ백금 1만 냥, 전마 3천 필 등의 세폐와 정병 3만을 요구했다.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청의 요구를 계속 무시했고, 청의 숭덕제는 1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병자호란, 1636). 조선의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어 결국 항복하기에 이른다.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숭덕제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명과의 관계를 끊고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사대의 관계를 맺어 신하국이 되었다.
  세자가 청의 인질로 가는 등 복속이 심해졌고, 막대한 양의 세공도 바쳤다. 50여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감으로써 사회ㆍ경제적인 난관이 있었고 ‘오랑캐’를 섬겨야 하는 정신적 충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명이 멸망하자 당시 조선의 유교적 지배층들은 중화문명의 맥이 끊긴 것으로 보고, 문화적 자긍심에서 비롯한 소중화사상과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갚고자 북벌론(北伐論)을 주장하였다. 이후 청에 대해 형식상으로는 사대ㆍ조공을 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청에 대한 반감이나 멸시감이 여전히 지속되었다.
  청은 조선의 내외정세에 일일이 간섭하기보다는 조공질서를 매개로 자국의 위상과 변방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면서도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들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부상으로 청의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는 더는 유효할 수 없게 되었다. 청은 마지막 조공국이었던 조선의 속국화를 통해 일본과 러시아 등의 중국 진출을 한반도에서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청일전쟁(1894)으로 조선을 장악한 일본에 의해 청과의 조공책봉관계는 청산되었고, 이로써 2천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중국과 한국의 조공책봉관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2. 대중화(大中華)와 소중화(小中華)

 

1) 대중화
  황하 중하류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은ㆍ주대에는 세계 최고의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창달하였고 선진적 농경에 기반을 둔 경제 대국이었으며 정치ㆍ군사적 대국이었다. 동아시아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서적과 필사도구를 발명하여 문화가 항구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윤리ㆍ도덕에 기반을 둔 예제(禮制)문화를 창조하였다. 이 같은 중국문화는 당시 동아시아 유일의 최고 선진문화였다. 그들은 자신이야말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천하의 중심을 이룬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부터 ‘대중화 사상’이 발생하여 중국인들의 대외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중국 고전문화의 창달시기에 중국을 지칭하는 의미로 중하(中夏)ㆍ중화(中華)ㆍ중국(中國)이란 명칭이 등장한다. 먼저 ‘중’의 의미를 살펴보면 지리적ㆍ문화적으로 중앙을 의미하고 있다. ‘하’는 전설상의 최초 왕조였던 하왕조의 명칭이기도 하였으나 그 뜻은 ‘대(大)’의 의미였으며, ‘화(華)’는 찬란한 문화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명칭은 대체로 ‘문화가 찬란한 중앙의 큰 나라’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23 전국시대에 이르면 ‘중국’의 개념은 제하(諸夏)세계[과거의 주나라 제후국의 영역] 전체를 의미하게 되고, 사방의 이민족들을 동이ㆍ서융ㆍ남만ㆍ북적이라는 고정적인 명칭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24
  따라서 중화ㆍ중국의 개념은 문화수준이 낮고 수렵ㆍ목축 등의 원시적인 생활을 하던 사방 이민족들의 존재를 상대적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물중지대(物衆地大)란 표현에서 보이듯이 광대한 땅과 수만 가지의 물산(物産), 자급자족적인 경제 그리고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명ㆍ문화[예악문물(禮樂文物)] 등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경쟁대상을 찾기 어려웠으며,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변 민족국가들에 대하여 일종의 우월감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중국은 지리적으로 여타 고대 문명의 중심지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거나 격리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지리적ㆍ문화적 중심이라는 인식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25
  중화주의는 ‘중국의 천자(황제)가 중국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중국 밖 세계의 인민들을 어루만져 편안케 한다[혜차중국, 이수사방(惠此中國, 以綏四方)].’라는 유교의 왕도정치이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를 세계의 ‘유일ㆍ보편’으로 절대화했으며, 압도적인 정치권력과 군사력ㆍ경제력을 갖춘 세계에서 유일한 권력이라고 자부했다. 이 독특하고 독선적인 세계관은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의 세계 또는 국제관계를 관념하는 틀로서 강한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이에 따라서 중국은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에 대해 반드시 그들의 전통적 세계관 및 유가의 사상ㆍ문화를 따를 것과 조공책봉관계의 수립을 요구했다. 주변의 이민족들은 중국의 요구에 순응해 당시에는 매우 선진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중국문화를 전수받고, 중국과 평화관계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대부분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요ㆍ금ㆍ원ㆍ청 등 이민족에 의한 중국의 통치는 중화사상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26 은덕을 베풀어야 할 주체가 오랑캐에게 정복되어 통치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오랑캐라고 여겨졌던 서구열강의 침략과 이에 맞선 중국의 저항구도 속에서 기존의 한족 대 이민족의 대립이 중국민족 대 서구열강의 대결구도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화이론(華夷論)의 이론적 기반이 무너지고, 중화주의 형성의 또 다른 이론적 근거인 조공책봉체제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중화주의는 근대 이후 서구열강과의 대결에서 거듭 패배하고 문화적 열등감마저 자각하게 되면서 중국사회 속에 잠복해 버렸다. 게다가 5ㆍ4운동 이래의 반전통적인 사회 조류와 사회주의 혁명 등을 거치면서 그 존재의 의의가 상실되었다.27

 

 

2) 소중화
  주자는 중국과 이적(夷狄)의 상하 질서는 힘의 강약에 관계없는 영원불변의 질서로 보았다. 이러한 주자의 중화적 세계질서관은 우암(尤庵: 송시열)의 학문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우암은 명ㆍ청 교체기에 국제관계를 힘의 강약에 의하여 변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중화사상에 근거하여 국제관계를 도덕이나 윤리와 같은 문화의 상하관계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는 임진왜란ㆍ병자호란을 통해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진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고 국가를 보위할 사상으로 중화사상에 근거한 주자학을 보급하고자 했다. 이로써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고 대외위기를 극복하는 정신적 기풍을 진작시키는 데 혼신의 열정을 쏟았다.
  그는 주자학 전래 이후 정몽주 같은 이가 나와 도학(道學)이 급속히 보급되고, 회제(晦齊: 이언적)ㆍ퇴계ㆍ율곡ㆍ우계(牛溪: 성혼)에 이르러 도학 전성기를 맞게 되어 이제 조선을 동이(東夷)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조선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명조의 뒤를 이어 조선조가 중화문화의 정통적 계승국이 될 수 있는 논리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적 바탕에서 조선은 중화문화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로서, 세계문화의 중심을 이룬다는 소위 ‘소중화’의 세계관이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28
  이 시기에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에 기초를 두고 우암에 의해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한  소중화적 세계관은 그 후 우암을 지지하는 노론파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ㆍ사대부 계층의 세계관으로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들의 정치적 부상과 더불어 소중화적 세계관은 주자학과 더불어 조선 중기 이후 국가체제 이념으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서양의 군사적ㆍ경제적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나타난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29도 우암의 소중화 사상을 계승한 것이었다.30 또한, 수운(水雲: 최제우)의 동학(東學)에도 일정한 수준에서 이러한 소중화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어 있다.31
  소중화 사상은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의 중화에 대한 사대적 모화(慕華)의식이자 유교문화를 존중하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 문화적 자긍심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대중화 세계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러한 소중화 사상은 국가적 자기발견의 한계로 작용했다.32 특히 소중화 사상에 의한 조선말의 쇄국주의 정책은 주변정세의 급변상황에서도 현실적인 인식과 대응을 어렵게 함으로써 외세의 침략과 끝없는 정체 및 퇴보를 가져왔다.33

 

 

3. 공사 이후의 양국관계


  한일합방(1910) 이후 대한제국의 애국지사들은 중국본토와 만주 등지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운동(1919)의 소산으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중국 측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후 한국 임시정부와 국민당 정부는 서로 연계하여 만주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유엔군이 38도 선 이북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중국정부는 모택동의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미국에 반대하고 조선을 지원하며,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의 전략에 따라 참전하게 된다. 중국은 한국전쟁 기간에 약 75~81개 사단의 병력을 투입했고 가장 많을 때는 130여 만 명까지 참전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전후 냉전체제는 한국과 중국 간의 공식적인 관계를 40여 년간이나 단절시켰다. 중국은 1978년 말 실용주의 노선과 대외개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자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과 기술ㆍ자본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도 한반도의 안정과 중국시장 진출을 위해 중국과의 교역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양국은 1983년 5월 발생한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34을 해결하기 위한 비공식 접촉 과정에서 공식적인 접촉과 상호관계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정부는 중국정부의 희망을 적극 반영해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지원했다. 이때 중국 측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했고, 이 사건은 한중관계 발전과정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에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 간의 교류와 협력은 다방면으로 확대되었다. 중국 내에서는 1992년 1월 개혁개방 정책의 큰 전환점이 된 등소평의 ‘남순강화(南巡講話)’가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개혁개방의 성과를 평가하고, “당의 기본노선(개혁개방)은 앞으로 100년 동안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한다.”라고 역설했다.35 이는 한중수교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36 
  마침내 1992년 8월 24일, 한국은 대만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를 통해 1949년 신중국 성립 이후 40년 이상 지속해왔던 적대관계를 공식 청산했다. 한중수교는 탈냉전의 도래를 실감케하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수교 이후 양국 간에는 외교ㆍ안보ㆍ경제ㆍ통상 등 모든 분야에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급속하고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다.

 

 

1) 정치ㆍ외교ㆍ안보 분야
  수교 초기 한중관계의 발전은 주로 경제적 동기에 의해 비롯되었고 양국 간의 경제협력 확대와 국제환경 및 중국의 대외전략 변화에 따라 정치ㆍ외교ㆍ안보 분야에서도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수교 이후 양국의 최고지도자가 서로 방문하였고 국제회의 등에서의 회담을 비롯하여 모두 25회(2009년 7월까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은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관계를 단계적으로 발전시켜왔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협력 동반자관계’를 구축했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전면적 협력 동반자관계’,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구축했다.
  양국이 상호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구축한 것은 동북아 및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제고시키고 한반도에서 전쟁가능성을 제약하며 동북아 경제협력체 형성에 이바지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한편, 중국에게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경제적 협력 및 북한문제의 협력 차원을 넘어서 역내안정 유지와 통일 한반도에 이르는 과정 및 한반도 통일 이후 동북아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국 변수가 중요하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 역시 중국의 협력과 도움 없이는 안보적 도전은 물론 환경ㆍ식량ㆍ에너지 등 새로운 안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중 양국은 비핵화와 북한의 개혁개방,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관해 인식을 같이하고 있음에도 아직 상호 의사소통과 신뢰의 수준이 제한적이고 초보적인 것이 사실이다. 또한, 급속한 발전의 이면에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과 분쟁이 내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은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놓여있고 외교적으로도 중미(中美)간의 경쟁구도 속에서 미묘한 처지에 있다.37

 

 

2) 경제ㆍ통상 분야
  지난 18년 동안 경제ㆍ통상 분야에서의 교류와 협력은 가장 괄목할만한 것이었고, 이 분야는 다른 분야에서의 협력과 발전을 유도하는 중요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다. 중국은 지난 2003년 말(교역 570억 달러)을 기점으로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부상하였다. 그 이후로 중국은 현재까지 한국에게 제1의 수출대상국이자 교역국38이며, 제1의 흑자대상국이 되었다. 특히 2005년부터는 대중 무역흑자가 한국의 전체 무역적자를 웃도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39 또한, 중국은 지리적 인접성과 저렴한 인건비 및 광대한 시장 등에 대한 투자요인에 따라 이미 한국의 최대 투자대상국이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은 한국이 경제성장을 지속시키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상대라고 할 수 있다. 중국으로서도 한국은 대단히 소중한 나라이다. 2008년 말 한국은 중국의 6대 교역대상국이었으며,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수는 4만 여개였다. 또한, 중국에 2,226건 31억 4천만 달러를 투자해 한국은 싱가포르ㆍ일본에 이어 3번째로 많이 투자한 나라였다(2008). 그러나 중국경제의 경쟁력이 증대하여 우리의 최대 무역수지 흑자 지역인 중남미 지역과 아시아에
서 시장점유 경쟁이 불가피하게 되는 등 한국경제에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3) 사회ㆍ문화ㆍ인적교류 분야 40
  한중 간의 인적왕래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1992년 당시 13만 명에 불과했던 양국 국민 간의 상호 방문자 수는 2008년 515만 명에 달해 무려 39배에 가까운 성장을 보였다. 하루 평균 1만 4,000여 명 이상의 한국인이 중국을 방문하는 셈이다. 중국은 한국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국가로 2009년 중국에는 한국인 70~80만 명이 체류했다. 한국에 체류 중인 중국인 숫자도 가파르게 증가하여 2009년 한국에 체류 중인 1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가운데 50만 명이 중국인이었다.
  인적교류가 늘어나면서 중국에는 ‘한류(韓流)’가 퍼져 나가고 한국에는 ‘한풍(漢風)’이 거세게 불고 있다. 중국에서는 매일 1억 명 이상의 시청자들이 한국드라마를 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현재 130여 개 대학이 중문과를 개설하고 있으며, 중문과 졸업생이 매년 약 3천 명씩 쏟아져 나오고 있다. 2007년 중국에 온 외국유학생 16만 명 가운데 한국인 유학생은 5만 7,000명으로 유학생 3명중 1명은 한국 유학생인 셈이다.
  양국은 1992년 수교 이후 다방면에 걸친 급속한 발전은 양국 국민의 의식 속에 역사적ㆍ문화적인 공감대가 바탕에 내재해 있는 상황에서 양국의 경제적 필요성, 즉 상호보완성과 호혜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떻든 한중관계의 발전은양국에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세계평화와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특히 탈냉전 이후 동북아시아 전략 환경의 변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Ⅳ. 중국공사의 실현과정

 

  중국은 세계에 비할 수 없는 물중지대(物衆地大)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ㆍ군사적ㆍ경제적 우월41감과 풍부하고 앞선 예악문물(禮樂文物)을 토대로 중화사상을 형성했다. 중화사상을 이론적 토대로 하여 중국은 일찍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명대에 이르러 그들이 오랑캐라 불렀던 만주족에 정복됨으로써 중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42 청은 한족의 정치이념과 제도,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의 회유책과 강경책을 병용하여 3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하지만, 황제 전제체제의 모순과 한계가 노출되고 서구열강의 침략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19세기에 들어 영국ㆍ프랑스ㆍ일본과의 전쟁에서 잇달아 패배하는 등 그 통치력이 쇠약해졌다.
  통치력이 약화하자 반외세운동인 의화단 사건 이후 한족들은 청조 타도를 목표로 반청혁명운동을 전개하여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대세를 장악했다. 이후 1912년 1월 1일 손문에 의해 남경에서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2월 12일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써 한족에 의한 공화정부가 탄생하게 된다. 중국은 ‘이 처결로써 중국이 회복하리라’라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오랑캐라 여겼던 만주족 청의 지배를 마감하고 다시 한족에 의해 그 영토와 주권이 회복되었다. 이로써 대중화의 산하와 백성이 오랑캐인 청에 정복되면서 생긴 대중화의 원한이 풀리게 된 것이다.
  그 후 중국은 내전을 거쳐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피난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계획경제체제를 도입했다. 몇 십 년간의 실행에도 자본주의를 능가하는 생산효율을 달성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총생산이 저하되어 국민 생활이 곤궁해졌다. 이리하여 계획경제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결국 1979년부터 개혁개방정책을 시작하였다. 이 정책은 2000년까지 21년 동안 1인당 국민소득 7배 증가43와 연평균 10% 내외의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고도의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일본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GDP(국내총생산)가 세계 2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공산당이 행정ㆍ입법ㆍ사법ㆍ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일원적인 통치체제를 확립하여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30년간의 성장ㆍ발전기를 거쳐, 이제 급속한 발전에 따른 성장통과 후유증을 치유하며 부흥을 향한 안정ㆍ도약기로 진입하고 있다. 청의 영토 확장에 힘입어 오늘날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44를 가지게 된 중국은 부강하고 민주적인 문명을 가진, 조화로운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를 실현한다는 국가 비전을 가지고 강대국을 향한 행보를 여러 방면에서 주도면밀하게 내딛고 있다. 이제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인류 최초의 실험을 하면서 21세기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은 1992년 정식수교 이후 그동안 단절되었던 역사적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협력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우리의 제1의 수출대상국이자 교역국, 그리고 제1의 흑자대상국이 되어 한국의 경제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국제정치적인 측면에서도 한반도의 정치적 안정에 크게 이바지해왔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북한의 핵 위협 과정에서 중국은 6자 회담의 성사를 통해 남북한과 북미 간의 대립구도를 완화하고 지난 몇 년간 남북대립 상황을 상당히 유연하게 호전시키는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국이 편안함으로써 우리는 부흥하리라.’, ‘우리의 조공을 받아 왔으므로 이제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라고 하신 상제님의 공사대로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안정을 이루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한국의 경제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공사 이전에는 우리나라가 오랫동안 수없이 많은 조공을 바치고 정치적으로 종속되는 등의 관계였다. 하지만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구축하여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 협력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특히 중국과의 교역에서 한중수교 첫해를 제외하고는 계속 엄청난 흑자를 내고 있다.
  그리고 ‘보은신은 우리에게 쫓아와서 영원한 복록을 주리니 소중화가 대중화가 되리라’라는 말씀은 소중화국이라고 자칭하던 무명(無名)의 약소국 조선이 이제는 세계를 이끌어가는 대중화국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과거의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대중화를 실현한 것이라면, 우리나라는 ‘좌상(座上)에서 득천하 하리라’45라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전 세계에 대중화를 실현할 것이다.
  물론 이 공사 내용은 아직 진행형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완전히 실현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은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되며 자국의 경제 발전 등 국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한국의 경제력, 기술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양국관계는 더욱 발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은 “영원한 복록을 주리라”라는 말씀처럼 우리나라가 대중화를 이루는 데 지금까지 정치ㆍ경제적으로 기여한 그 이상의 엄청난 기여를 하리라 예상된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공사의 내용은 상제님께서 한족의 주권회복에 의한 중국의 해원과 조공을 받아왔던 중국이 이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복록을 주어 우리나라가 대중화가 된다는 것이다. 대중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넘쳐 있던 중국인들이 오랑캐라 경멸하던 청에 정복되어 300여 년간 통치를 받았던 상황에서의 원한은, 우리가 일제 36년간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으리라. 중국의 해원은 이러한 대중화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며, 나아가 중국과 우리나라를 순치(脣齒)의 관계로 보고 중국을 편안케 하여 우리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하신 것으로 해석된다. 청의 지속된 중국 통치로는 중국을 편안하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족에 의한 회복 후 중국은 내전이나 문화대혁명, 천안문 사태 등의 혼란도 있었지만 공사 내용처럼 오늘날 정치ㆍ경제ㆍ사회적 안정을 이루며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와 수교를 통해 그동안의 단절을 극복하고 아주 밀접한 관계로 발전하였으며, 우리와 역사ㆍ민족ㆍ해양경계선 등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모순과 문제도 남아 있지만 우리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기여는 예로부터 조공을 받아왔던 중국(보은신)이 우리에게 영원한 복록을 준다는 내용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긍정적 기여는 계속될 것이며, 물샐틈없이 짜 놓으신 공사의 내용처럼 가까운 장래에 우리는 세계의 중심국(中心國)이요 예악문물이 빛나는 진정한 대중화(大中華)가 될 것이다.

 

 

 

참고자료

. 대순진리회교무부, 『典經』, 대순진리회출판부, 2010.
. 대순진리회교무부, 『대순진리회요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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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禮記)』.
.『명 태조실록』권26.
.『용담유사』 「용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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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출판사, 2009.
. 김한규, 『한중관계사 ⅠㆍⅡ』, 아르케, 1999.
. 이춘식, 『중화사상의 이해』, 신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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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근호, 『조선조 대외사상의 흐름 -중화적 세계관의 형성과 붕괴-』, 성신여대출판부, 2004.
. 김지하, 『생명ㆍ평화ㆍ통일』,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소 ‘통일평화 학술회의’,
 평화의 시각에서 보는 분단과 통일’ 발표자료, 2008. 10. 9.
. 조병한, 「동북아 국제질서 속의 한국사」, 역사학회,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일조각, 2006.
. 박래영, 『초기동학사유체계의 구조적 이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 김하중, 『떠오르는 용, 중국』, 비전과 리더십, 2003.

 

 

 

 


01 …해원을 위주로 하여 천지공사를 보은으로 종결하시니…, 『대순진리회요람』, p.8.

02 특히 “…청에게 정복되었으니 대중화에 어찌 원한이 없겠나이까.…”, “…중국의 해원공사에만…” 등의 내용.

03 황하유역 일대(中原)는 화하족(漢族)이 최초로 흥기한 지역으로 역사상 동아시아 세계에서 ‘중국’이란 공간 개념이 발생하기에 가장 적절한 지리적 조건을 가진 곳이었다.

04 강준영ㆍ전병곤 공저, 『한권으로 이해하는 중국』, 지영사, 2008, pp.43~44.

05 명대에 출현하여 청대까지 지속된 정치기관이다. 홍무제(명태조 주원장)가 중서성을 폐지한 뒤 황제를 보좌할 기관으로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두었고, 이어 영락제가 한림원에서 몇 명의 관리를 뽑아 문연각에 입직시켜 주요 정무에 참여시킨 것이 내각제도의 기원이다. 황제의 자문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데 불과하던 내각이 점차 권한이 커져 육부(六部)를 능가하게 되었다.

06 청나라 건국(1644) 이후 200년간의 장기적인 안정으로 1741년 1억 4,000만 명이었던 인구가 1850년에는 4억 1,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07 홍수전(洪秀全)을 중심으로 한 농민반란군이 기독교 신정 국가인 태평천국을 건설하고자 일으킨 난. 이들은 청 말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세력이 확대되었고 청조 멸망과 그리스도교와 유교사상을 혼합한 이상국가 건설을 지향했다. 토지의 균등분배, 남녀평등, 악습철폐, 조세경감 등을 주장해 농민들의 큰 호응을 얻어 중국 남부에서 화북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태평천국 지도층의 내분과 서양열강의 청조 지원, 그리고 전통체제의 옹호자인 지식인층의 적대적인 태도 등으로 몰락하였다. 태평천국운동은 근대 중국에 있어서 농민혁명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손문(孫文) 등 동맹회의 혁명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08 백련교 계통의 비밀결사 조직으로 외세 배척을 목표로 무장봉기를 일으킴. 북경에서 교회를 습격하고 외국인을 박해하는 등의 일을 함. 청 정부가 의화단을 지원하자 1900년 8월 미국을 비롯한 8개국의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고 진압했다.

09 책봉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국왕ㆍ왕비ㆍ세자ㆍ세자빈이었다.

10 종주국과 번속국과의 관계로 조공책봉관계의 일환이나 종주국인 중국의 법에 의해 규율되는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문헌들에서는 한중관계를 대부분 종번관계로 표현하고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종번관계로 파악, 고구려가 자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한다.

11 문대근, 『한반도 통일과 중국』, 늘품플러스, 2009, pp.64~73.

12 중국의 왕조교체 또는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제3세력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상호관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전쟁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내부에서도 요동국가(고구려, 요, 금, 후금 등)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는 물론 내부세력과 연대(나제동맹 등)해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는 지정학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역사상 중국, 요동세력ㆍ국가, 일본 등으로부터 총 912회에 걸쳐 침략을 당하거나 전쟁을 치렀다. (김지하, 『생명ㆍ평화ㆍ통일』,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소 ‘통일평화 학술회의’, ‘평화의 시각에서 보는 분단과 통일’ 발표자료, 2008.10.9.) 

13 권선홍,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4, p.113.

14 전해종, 『한중관계사 연구』, 일조각, 1970, pp.35~43.

15 문대근, 앞의 책, pp.75~76.

16 원래 숙위란 궁궐에서 군주를 호위하는 것을 가리킨다. 당나라에는 주변 국가들의 왕자나 귀족 자제들이 외교관계 유지의 한 형식으로 당의 수도에 와서 친위(親衛)하는 경우가 많았다.

17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출판사, 2009, p.304.

18 이는 외교적 의례로 중화주의 관점에 집착한 결과 장기간의 전쟁 참화를 초래한 점이다.

19 문대근, 앞의 책, p.99.

20 당시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함께 후금에 대한 ‘교린(交隣)’을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해 양국으로 부터 의심을 사는 형국이었다.

21 조선이 명에 보낸 조공사절은 동지사ㆍ성절사(聖節使) 등의 정기적 사절과 사은(謝恩)과 주청(奏請)사절 등 비정기적인 사절이 있었다. 1392년부터 1591까지 사절은 모두 454회에 달했다. 조공품은 명의 요구에 따라  정한 것으로 황금(150냥)ㆍ백은(700냥)의 정기적 공납은 조선의 재정에 큰 부담을 안겨 주었고, 세종 11년(1429)에는 금ㆍ은의 조달에 어려움을 들어 마필(馬匹)과 포자(布子)로 대체하였다. 금ㆍ은 외에도 인삼, 수정, 만화석, 꿀, 해표피(海豹皮) 등의 특산품 수십 가지와 화자(火者, 환관으로 16차례에 걸쳐 198명), 처녀(12차례에 걸쳐 98명)도 공납하였다. 많은 횟수의 사절단 파송은 당연히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 손실을 가져왔다. 명 황제도 일정한 물품을 회사(回賜)하였지만 그 양과 값은 조선이 보낸 공물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김한규, 『한중관계사 Ⅱ』, 아르케, 1999, pp.581~585.)

22 우방인 조선의 변란을 수수방관할 수 없었고 일본을 조선반도에서 제압하는 것이 자국의 안위에 이롭다는 인식 하에 5천 명을 선발대로 평양성전투에 참가했고 이여송을 제독으로 4만 3,000명을 증파했다. 정유재란(1597) 이후 5만 5,000명의 원군을 더 보내는 등 조선을 지원하였지만 소극적으로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23 이춘식, 『중화사상의 이해』, 신서원, 2002, pp.121~122.

24 『예기』 왕제(王制)편 : “中國戎夷, 五方之民…, 東方曰夷…, 南方曰蠻…, 西方曰戎…, 北方曰狄….”

25 권선홍, 앞의 책, p.21.

26 실례로 명 태조 주원장이 원을 토벌하는 격문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제왕이 천하에 임어함에 중국은 안에 거하면서 이적을 제어하고, 이적은 밖에 거하면서 중국을 받들었다. 이적이 중국에 거하면서 천하를 다스린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호로(胡虜 : 북방 이민족을 얕잡아 이르는 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한다.”는 구호를 내세웠다. (『명 태조실록』 권26 吳 원년 10월 병인, 원문 한자 생략.)

27 문대근, 앞의 책, pp.16~18.

28 유근호, 『조선조 대외사상의 흐름 - 중화적 세계관의 형성과 붕괴 -』, 성신여대출판부, 2004, pp.92~102.

29 조선왕조체제의 봉건적 질서 유지를 위한 이념이었던 공(孔)ㆍ맹(孟)ㆍ정(程)ㆍ주(朱)의 학통을 유일한 정학(正學)으로 보고 양명학(陽明學)을 비롯한 불교(佛敎)ㆍ도교(道敎)ㆍ서학(西學) 등 모든 다른 사상과 학문을 이단적인 사학(邪學)이라 규정하여, 정통적인 정학은 지키고 외래적인 사학은 물리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말 서학의 전래를 계기로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반외세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위정척사를 주장한 이항로(李恒老)ㆍ기정진(奇正鎭)ㆍ김평묵(金平默)ㆍ최익현(崔益鉉)ㆍ유인석(柳麟錫) 등의 유학자들을 위정척사파라 칭했다.

30 유근호, 앞의 책, pp.104~122.

31 곤륜산(崑崙山) 일지맥(一枝脈)은 중화(中華)로 벌려있고 아동방(我東方) 구미산(龜尾山)은 소중화(小中華) 생겼구나 어화 세상 사람들아 나도 또한 출세(出世) 후에 고도강산(古都江山=慶州) 지켜내어 세세유전(世世遺傳) 아닐런가 (『용담유사』 「용담가」) 조선 성리학자들의 소중화 의식은 유교문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수운의 소중화는 유교가 아닌 자신의 도(동학)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박래영, 『초기동학사유체계의 구조적 이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p.68~69.

32 조병한, 「동북아 국제질서 속의 한국사」, 역사학회,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 일조각, 2006, p.34.

33 문대근, 앞의 책, p.84.

34 이 사건은 중국 심양에서 출발한 여객기가 목적지인 상해에 도착하기 전에 중국 국적의 납치범들에 의해 수교관계가 없던 한국의 춘천 군사기지에 피랍되었던 사건이다.

35 1979~1991년 동안 개방개혁이 지지부진하게 추진되고, 1989년 천안문 사태 등으로 정국이 다소 어수선한 상황에서 등소평이 남쪽 개방구를 시찰하는 과정에서 개혁개방을 강조한 연설.

36 김하중, 『떠오르는 용, 중국』, 비전과 리더십, 2003, p.287.

37 문대근, 앞의 책, pp.172~174,

38 1992년 수교 당시 64억$이던 양국의 교역액이 2008년 말에는 약 1,683억$가 되었는데, 이는 한미ㆍ한일간의 교역액을 합한 것보다 많은 것이다.

39 예를 들면, 2008년도 한국의 전체 무역수지는 -133억$, 대중국 무역수지는 +145억$이다.

40 문대근, 앞의 책, pp.178~180 참조.

41 한 통계에 의하면 산업혁명 이전인 1500년대부터 1820년까지 중국은 세계최대의 인구를 가진 세계최대의 경제(농업) 강국이었다. 한ㆍ당ㆍ청나라 때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전 세계의 40% 수준이었고, 인구는 35%(현재는 21%) 정도 차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원나라 때 중국에서 생활했던 마르코 폴로의 글에서도 확인되는바, 당시 유럽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도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유력하고도 안정된 나라이며, 매우 능률적으로 통치되고 있던 나라였다. 문대근, 앞의 책, p.27.

42 실례로, 한족은 이민족왕조인 청조를 반대하면서 만주족을 노로(奴虜)ㆍ호추(胡酋)ㆍ 등으로 부르며 경멸하였다. 당시 삼대가(三大家)로 불렸던 고염무ㆍ황종희ㆍ왕부지 모두 ‘이하지변(夷夏之辨: 오랑캐와 중국을 구별)’을 고양시켰다. 특히, 왕부지는 ‘이하지변’을 ‘인금지대변(人禽之大辨: 사람과 금수만큼의 큰 구별)’이라 하며 한족의 우월과 이적의 야만ㆍ낙후를 대비시키면서 이적의 중원 입주(入主)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권선홍, 앞의 책, p.43.)

43 참고로, 19세기 영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2.5배 증가하는데 거의 100년이 걸렸고, 미국은 1870년부터 1930년까지 60년 동안 3.5배, 일본은 1950년부터 1975년 사이에 1인당 국민소득 6배를 달성했다.

44 청은 17ㆍ18세기에 신장ㆍ티베트ㆍ몽골ㆍ만주 등의 변강지역을 편입해 명나라의 2배에 달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청제국은 현재의 중국이라는 국가의 공간과 민족적 구성[한족(92%) + 55개의 소수민족]을 새로 정립했다.

45 『전경』 예시 29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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