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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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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수도를 잘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이유

수도를 잘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이유
 
- 선각을 그리며 -
 
 

상주1 방면 선사 강지묵

 
 
 
  고등학교 3학년에 도를 만나 수도한 지 어느덧 30년. 부끄럽게도 저는 그동안 수도를 잘하지 못했을뿐더러 선각들 속도 어지간히 태웠습니다. 다행히 상제님의 덕화와 조상 공덕 그리고 노심초사하시는 선각들의 노고 덕분에 여태껏 떨어지지 않고 수도함에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대순문예 공모전을 보고 어떤 주제로 글을 쓰면 좋을까 고민하다 결국 저의 수도 수기가 마음에 와 닿아 부끄럽지만, 조심스레 적어 봅니다. 이는 스스로의 부족한 수도생활을 반성하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수도에 매진해보려는 마음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수도의 목적은 수도인 개인에게는 도통이고, 대순진리회 전체적으로는 지상천국 건설입니다. 저의 수도 목표는 오로지 선각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작으나마 운수를 받는 것입니다. 후천선경 건설에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제가 입도한 해는 1980년대 후반으로 당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도를 만나기 이전에도 저는 종교 경험이 다른 또래 학생들보다 많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입도하기 전부터 도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예정된 길이었던 듯합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저는 종교 동아리에 들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동아리 활동 계기는 친구로부터 사찰과 관음사 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궁금증이 일어 우연히 들게 되었지만, 불교 동아리 활동은 누구보다 애착을 갖고 열심히 하였습니다. 사소한 인연이 닿아 알게 된 것이 점차 깊어져 학생 신분이었지만, 당시 저에게는 불교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학교에서 매년 10월에 정기적으로 갖는 3일간의 예술제 때에는 교내 각종 동아리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저마다의 장기와 특색을 홍보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이때 저는 행사 기간 동안 방문객들에게 불교 교리 및 전반적인 내용을 안내하고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학생이 불교 교리를 깊이 있게 알지 못해 부족한 부분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많은 학생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전달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하여 불교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요량으로 틈틈이 불교 서적을 탐독하여 불교의 전반적인 교리와 불교에서 사용되는 주문과 다양한 진언(眞言)을 깊이 있게 공부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당시 저에게 와 닿는 주문(呪文) 한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구축병마주 다른 말로 태을주(太乙呪)라는 주문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구축병마주로 불리는 불교의 태을주는 조선 선조 때 충청도 비인(庇仁)에 살았던 도인(道人) 김경흔(金京訢)이 50년간의 도통공부를 마치고 지은 것입니다. 그는 모든 주문을 사용하여 보았지만, 효험을 얻지 못하다가 마지막으로 불교에서 쓰는 「구축병마주(驅逐病魔呪)」(질병과 잡귀를 몰아내는 주문)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하(吽哩哆耶都來 吽哩喊哩 娑婆訶)”를 읽어 비로소 개안(開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신명의 계시가 있어 이 주문의 머리에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을 붙여 읽게 되었으나, 이 주문으로도 완전한 도통을 하지 못하고 다만 『태을경(太乙經)』이라는 책에 이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글을 접하고 저는 도통과 태을주라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고등학교 3학년 3월에 운명의 선각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제 앞에 앉은 친구를 포덕하러 온 것인데 그 친구는 완강히 거절하고 오히려 뒤에서 듣고 있던 저랑 제 짝꿍이 같이 입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에게 저는 꽤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속 시원히 답을 해주지 못해서 답답한 마음에 거기가 어디냐 했더니 중곡동이라고 하더군요. 옆에 있던 짝꿍은 사실 별 관심도 없었는데 제가 너도 토요일 날 다른 약속이 없으면 나랑 같이 가자고 친구와 함께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그분이 일러준 연락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연락소에 가기 전에 먼저 도장에 가서 인사드리고 가자 해서 순순히 따라서 향전읍도 하였습니다. 그때 느낌은 좀 친근하면서도 세련된 절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이야 중곡도장 출입을 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중곡도장이 본부도장이었고 1층 대순성전을 개방해서 대순성적도를 관람하고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후에 어머니를 입도시킬 때도 연락소 가기 전에 중곡도장 참배부터 하는 순서를 밟게 되더군요. 입도식 할 때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면서 굉장히 즐거운 마음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어릴 때 시골에서 제사를 빼먹으면 그렇게 서운했습니다. 제가 여섯 살 즈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집안에 제사가 있는 당일 초저녁에 제가 잠이 들어 어머니께서는 저를 집에 두고 제사를 지내고 온 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그 일이 어찌나 서운하던지 다음 날 온종일 “깨워서 데리고 가야지 왜 안 데리고 갔느냐고” 쌩떼를 부린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입도식을 마치고 법주와 법수를 비롯한 음복을 맛있게 먹고 주문을 받아서 빨리 외워야 한다고 해서 집에서 혼자 3일 동안 주문을 외웠던 것 같습니다. 워낙에 다른 불가의 주문에 익숙해 있던 터라 주문 봉송하는 게 꼭 불경 읽는 것 같다고 지적을 몇 번 당했습니다.
  그런데 입도한 후 신기한 기적 같은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먼저 저는 희한하게 손바닥에 티눈이 엄청나게 많이 나서 아무리 약을 쓰고 파내고 해도 재발을 해서 물건을 잡거나 땅을 짚거나 할 때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아파 고생했습니다. 게다가 주부습진이 있어서 봄가을만 되면 손바닥이 허물을 벗듯이 벗겨지곤 해서 손바닥 피부가 워낙 얇아지고 갈라져서 피가 나고 아프고 했는데 입도한 후 언제 그랬냐 싶게 나아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형제는 3남 1녀로 4남매인데, 그중 둘째 동생이 정신지체를 가진 장애아였습니다. 동생은 어릴 때부터 경기를 자주 하곤 해서 동네에서 침을 놓으시는 침 할아버지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동생이 경기를 일으키면 쉽게 가라앉지 않았는데 침을 맞으면 신기하게도 회복되곤 했습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동생이 녹용이 들어간 한약을 잘못 먹어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녹용은 양기가 강한 약재인데 아마도 어린 나이인지라 부작용이 생긴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동생은 낮은 지능 탓에 또래 아이들로부터 자주 놀림을 당하곤 했습니다. 주위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초등학교 졸업은 했지만 사실 제 이름 석 자와 숫자 10까지밖에 모릅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호떡 노점상을 하셨는데, 초등학교 졸업 후 하릴없이 놀고 있는 동생에게 뭐라도 배워보라고 만두를 대주던 만두집에 일하러 보냈습니다. 우리 집이 서초동이었고 동생이 일하러 간 곳은 신당동 중앙시장 인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는 일하러 간 동생이 갑자기 없어졌다고 연락이 온 겁니다. 그때가 제가 입도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부모님은 동생을 찾기 위해 경찰서에 행방불명 신고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전단까지 돌렸습니다. 동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봐도 길 잃은 동생을 찾을 길은 없었습니다. 정상인도 아니고 글도 모르는 겁 많은 동생이 집을 찾아올 가능성은 희박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시면서도 꿋꿋이 호떡 장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입도 후 의통과 도통에 대한 교화를 들은 이후였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돌아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마음이 아팠지만, 한줄기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번 생은 이렇게 인연이 끝나더라도 제가 수도를 잘해서 운수를 받으면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고 살릴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가슴 한구석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저려오는 먹먹한 마음 탓에 매번 울컥하여 어떠한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기에 마음가짐을 긍정적으로 돌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선각도 이런저런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저의 이 같은 생각에 힘을 실어주시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늘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한 가닥의 희미한 희망이라도 놓지 않고 마음속에 동생을 아로새기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하루는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길 잃어 행방을 알 수 없던 동생이 두 달 만에 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제가 입도한 다음 날 우리 집이 이사를 하였는데, 동생은 그 전에 만두집으로 보내진 상황이었고, 동생이 그 전 집으로 찾아온 겁니다. 고생 고생해서 찾아왔더니 이사 간 뒤라 가족을 만나지 못해 절망하던 동생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도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예전 집에서 멀지 않은 인근 지인의 집 앞에서 배회하고 있었나 봅니다. 마침 그분이 집에서 나오시면서 동생을 발견하고는 한달음에 우리 집으로 달려오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떻게 집을 찾아왔는지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해서 물어보니 우리 집 앞에 지나다니던 버스를 보고서는 타고 왔다고 하는 얘기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인지 지금도 신기합니다. 이 모든 것이 동생을 찾기 위해 마음을 같이 해주시고 함께 기도해주신 선각분과 이런 저의 마음을 아시고 동생을 찾아주신 상제님의 덕화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편, 고등학생 시절 당시 우리 학교에는 저를 포함해 10여 명의 학생 수도인이 있었습니다. 수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학생 신분에서는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공부와 수도를 병행하며 매사에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대학에 입학할 시기가 되었고 저는 선각자와 상의하여 연락소에서 가장 가까운 건국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썼습니다. 사실 인근에 있다는 이유 이외에도 건국대학교의 상징물이 ‘황소’라는 사실과 당시 학교 정원이 1만 2천 명이라는 것에 개인적인 의미부여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에 선각분도 제 의사를 존중해 주시며 저에게 응원의 말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그리던 대학교에 합격하였습니다. 하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기에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도를 향한 마음이 작용한 것인지 입대 후 자대배치를 받은 곳도 지금 금강산 토성수련도장이 자리한 강원도 고성군이었습니다. 도장 근처는 군 생활 중에도 행군 길에 두어 번 지나친 적이 있고, 잼버리대회 당시에는 근처 산에서 보름 정도 경계근무를 서기도 했습니다. 제대 후 토성도장을 가서 보니 제가 도장 정문 앞쪽 도로 건너편으로 행군해서 지나갔던 길인 것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렇게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대학에 복학해서 3학년 가을 즈음에 포천도장에 수강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봉심전에서 막 인사를 드리고 내려오는 길에 방면 선감을 뵈었는데 선감께서는 저에게 “강외수. 놀라지 말고 들어요.” 하시면서 제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저를 살펴주시고 매사에 마음을 함께 해주신 선각분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불과 3일 전에도 만났었는데 말입니다. 당시 그 선각은 갓 결혼해서 아이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이었는데 가시면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어찌 떼어놓으셨을까요? 세월은 무심히 흘러 그 아이가 교무 임명을 모셨고 지금은 군대에 가 있습니다. 선각을 다시 뵙는 그날까지 두 손 맞잡고 꼭 같이 가야겠습니다. 선각께서 가신지도 벌서 20여 년이 다 되어 갑니다. 다시 만날 머지않은 그날에 선각 앞에 부끄럽지 않은 도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도통이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설사 도통이 제 생애에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한이나 원망은 없습니다. 다만 상제님의 도를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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