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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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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남거 : 종교의 이상, 그리고 현실로서의 공공윤리

종교의 이상, 그리고 현실로서의 공공윤리
 
 
연구위원 류병무
 
 
 
  종교는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해 왔다. 인류 문명의 발생이 대부분 종교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어쩌면 인간 문명 자체가 종교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교와 도교, 불교 등의 수많은 종교가 일정한 지역에서 발생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갔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종교는 그 사회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발전하며 변화를 거듭하였고, 사회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서구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발전한 것이나, 이슬람교가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것이나, 유교가 동양의 커다란 사상으로 발전한 것이 그러한 실례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종교는 윤리를 이끌어 왔으며, 종교적인 윤리 규범이 그 지역 사회 윤리규범의 원천이 되었다. 이처럼 초기의 윤리 규범은 주로 종교에 의해 주어졌다. 고대 사회는 먼저 종교의 영향 하에서 살다가 그 종교의 교리가 점점 사회의 윤리로 발전한 것이다. 아직도 기독교의 십계명이나 이슬람의 『코란』은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강력한 규범적인 윤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데서 그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서구사회는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와 철학이 서로의 구역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교류하고 있었다. 종교는 자신의 교리를 강화하기 위하여 철학 사상을 받아들였고 많은 철학자들 또한 종교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철학 사상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종교와 철학은 서로를 위해서 공생하고 있었다. 물론 윤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의 분과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지만,01 궁극적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 위에서 인간의 도덕 근거에 대한 질문을 다루었다. 따라서 철학이 종교에 독립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유일신관 위에서 종교적인 윤리 규범의 근거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을 종교, 즉 신의 명령과 동일시하였다.02
  윤리 규범(도덕)은 종교로부터 기원하는가? 윤리 규범은 본질적으로 종교에 묶여 있는가? 윤리 규범은 종교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러한 많은 고뇌들은 종교와 철학의 관계 속에서 지속되어 왔다. 물론 종교적인 윤리 규범이 많은 부분 세속화되었고 하나의 문화로 투영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선도(仙道), 불도(佛道), 유도(儒道), 서도(西道)가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으며,03 세계의 각 족속이 자기들의 생활 경험의 전승에 따라 특수한 사상을 토대로 색다른 문화를 이룩하였고 그것을 발휘하게 되자 마침내 큰 시비가 일어났다04는 상제님의 말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종교의 상반된 윤리가 사회적으로 충돌하면서 종교 간의 갈등이나 전쟁의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종교가 가지고 있던 윤리에서의 지위를 빼앗아 갔다. 그리하여 윤리 규범의 원천을 종교 대신, 보다 이성적인 철학적 사고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에게 보여준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많은 문제들이 과학의 이름으로 해결되었다. 이제 인간에게 과학은 종교 이상의 힘을 제공해 주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과학이 하나의 종교로 숭배받게 된 것이다. 과학의 발달에 도취되어, 종교는 이제 미개한 사회의 산물로 곧 없어질 것이며, 그 자리를 과학이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20세기에 윤리의 종교적 역할에 대해 가장 큰 비판을 가한 사람은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다. 그는 전체적으로 종교는 문명화에 쓸모 있는 공헌을 실제로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05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종교를 찾고 있으며,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넘기 힘든 문제에 봉착하면 자연스럽게 신을 찾는다. 이는 과거의 낡은 사고의 잔존일 뿐인가?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사고가 넓어져도 아직 풀리지 않는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이것은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의 삶, 죽음, 사랑, 마음 등 생명 현상이나 영혼, 정신 같은 영적인 부분의 본질까지도 밝혀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과학적 신념은 오늘날 점점 딜레마에 직면하고 있다. 인간에게서 신의 자리를 없애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종교적인 윤리 규범은 유효함을 가지고 있으며, 철학적 사조에서도 여전히 종교적인 윤리가 힘을 발휘하는 이유일 것이다. 즉 아직도 종교사적인 측면은 윤리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는 도덕을 종교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꽃의 뿌리를 자른 채 땅에 옮겨 심으려는 것과 같다고 선언했다.06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한 인물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라고 선언하였다.07 이것은 신명론(神命論: Divine Command Theory)처럼 윤리적 원리들을 모두 신의 명령으로 보거나, 윤리적 타당성을 신이 그것을 명령한 것에서 도출하여 신이 없다면 보편적으로 타당한 도덕은 존재하지 않을 것08처럼 보라는 뜻은 아니다. 신명론은 신의 전능으로 행해졌을 법한 악한 행위조차 신의 이름으로 선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많은 불의한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보호할 수는 없다. 이처럼 신명론에 대한 반론들은 많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 윤리학의 한 축으로 자리 잡은 칸트조차 도덕법을 강제하는 누군가가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신도 필연적으로 요청되며,09 도덕법의 강제자로서나 재판관으로서 신이 존재해야만 도덕법이 정당화 된다10고 본 것은 눈여겨 볼만한 사실이다. 
  앞으로도 종교와 철학 간의 윤리 규범의 원천에 대한 논의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두 논의가 서로의 합의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윤리학이 ‘신명론’으로 치우치지만 않는다면 종교적 윤리학이 도덕적 동기 부여의 이유를 제공함으로써 도덕적 삶을 고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철학에게 맡겨진 윤리 규범은 많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윤리적인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산업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자본주의가 가져온 소유로 물질적인 부(富)는 축적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정신적인 소외는 더욱 커져가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돈을 위하여 도덕을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제 종교는 철학과의 적이 아닌 인류의 윤리 규범을 이끌기 위한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이 철학적 윤리학에게 2,000년간 지배적 역할을 해 왔던 자리를 내주고 있던 ‘덕(德)이론’11이 다시 대두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땅을 딛지 않고 하늘을 볼 수는 없다. 여기서 하늘은 이상이고 땅은 현실이다. 현실이 없는 이상은 헛된 무지개와 같다. 또 하늘이 목적지라면 땅은 과정이다. 과정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이 올바르게 설정 되어야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순사상에서는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고자 한다. 이것은 인간이 현실의 상황을 극복하면서 이루어 나가는 지상천국인 것이다. 결국 이상인 하늘을 튼튼하게 받쳐 주는 현실인 땅이 존재의 근거이므로, 이 논의는 공공윤리(公共倫理)12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현실의 준거가 바로 공공윤리에 있기 때문에 이제 종교는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의 목적은 부의 축적과 분쟁의 유발이 아닌 화합과 상생에 있다. 한스큉 목사의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가 없고,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가 없다.”는 선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지구촌이라는 범세계적 시대에 살고 있다. 이는 세계적 평화를 위해 종교적 책임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종교가 걸어왔던 길은 어떠한가? 전쟁의 많은 부분이 역설적이게도 평화를 가장 많이 주장한 종교의 미명 아래 일어났다. 이제 종교에도 ‘공공성’이라는 잣대가 필요하다. 종교가 세상과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한,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은 환영받을 수 없다.
  대순진리회의 훈회·수칙은 이와 같은 사회의 공공성과 소통한다. 국법을 준수하며 사회도덕을 준행해야 하는 것이다. 준수해야 하는 국법이 ‘공윤리(公倫理)’13라면, 준행해야 하는 사회도덕은 ‘공윤리(共倫理)’14이다. 이제 종교는 자신의 내면을 공공윤리로 살펴야 하고, 다른 종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공공성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종교가 윤리 규범을 이끌기 위해서는 공공윤리가 필요하며, 공공성이야말로 종교가 사회 속에서 계속 생존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의 수도인도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한 이러한 잣대에서 예외일 수 없다. 도전님께서 가정화목, 이웃화합, 세계평화를 말씀하신 것은 사회와의 공공윤리 속에서의 수도를 통해 자신의 완성을 이루어나갈 것을 당부하신 것이리라!
 
 

01 프레도 릭켄,  『일반윤리학』, 김용해 역 (경기 파주: 서광사, 2008), pp.28~29 참조.
02 루이스 포이만, 제임스 피저, 『윤리학, 옳고 그름의 발견』, 박찬규 외 옮김 (서울: 울력, 2015), p.328.
03 교운 1장 65절 참조.
04 교법 3장 23절 참조.
05 루이스 포이만, 앞의 책, p.340 참조.
06 같은 책, p.328.
07 같은 책, p.328.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허용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악행도 결국은 통제할 수 없는 정당성이 부여된다는 의미이다.
08 같은 책, pp.329~330 참조.
09 칸트는 신의 존재 여부의 증명보다는 선험(先驗)적으로 신이 있어야만 할 것 같다는 요청적 신론을 폈다.
10 루이스 포이만, 앞의 책, p.338.
11 윤리적 가치, 곧 선(善: 착함)의 의미와 원천을 밝히고, 선이 표현된 윤리적 규범들, 곧 도덕 법칙들을 찾아내고, 그것들 위에 서 있는 ‘도덕의 나라’를 추구하고자 하는 철학의 한 분야다. 그 바탕에는 윤리란 실천하는 힘(virtus), 곧 실천하는 덕(德)으로 인해 현실 세계에서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이해가 놓여 있다. 대표적인 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BCE 322)다.(백종현, 『철학의 주요개념』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내용 요약)
12 공공윤리는 국가적인 윤리를 포함하면서도 개인적인 윤리를 침해하지 않는 공공의 윤리를 말한다. 즉 국가 중심의 공(公)윤리나 개인중심의 공(共)윤리는 서로가 상극적인 관계에서 접근한다. 이에 비하여 대순사상이 가지고 있는 공공윤리는 국가적인 공윤리와 개인적인 공윤리를 서로 존중하면서 상생하는 공공윤리인 것이다.
13 전통적인 국가 중심의 윤리관을 말한다. 이것은 국가가 절대 군주나 왕 중심으로 통치되는 시대에 설정된 윤리관이다. 이러한 윤리관에서는 개인에게 국가를 위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
14 국가보다는 공동체적이고 공화적인 윤리관을 말한다. 이는 서양에서 발달한 개인주의로 인하여 형성된 윤리관으로, 산업혁명 이후 점차 자본력을 가진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가 국가로부터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공동체적인 힘을 가지고자 한 돼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바탕에는 개인적인 이익을 중시하는 윤리관에서 출발하였지만, 현대에는 사회적이고 시민적인 모든 공동체 윤리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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