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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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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성(星) 별을 관장하는 경순(耿純) 신명

성(星) 별을 관장하는 경순(耿純) 신명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성수(星宿)
  성수는 28수 가운데 스물 다섯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남방(西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가운데서 네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7개로 상징 동물은 말[馬]이다. 성수의 속성(屬性)은 일(日)로 주작의 눈을 상징하는데, 별자리의 배열은 구(鉤, 갈고리) 형상이다.
  성수를 의인화하여 남방성일마성군(南方星日馬星君)이라 하는데 얼굴 생김새가 말과 닮았다고 한다. 그는 활을 들고 말을 타고 있다고 하는데 백보천양(百步穿楊)이라 해서 100보(步) 밖의 버드나무 잎을 명중시킬 정도의 명궁(名弓)이라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경순
  경순(耿純, ?-27)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백산(伯山)으로 거록군(鉅鹿郡) 송자현(宋子縣) 사람이다. 경순의 아버지 경애(耿艾)는 왕망(王莽, BCE 45-CE 23)02이 집권했을 때 제평윤(濟平尹)03을 지냈다. 이 시기에 경순은 장안(長安)에서 공부하고 있는 때였는데 왕망 정권으로부터 납언사(納言士)04를 제수받았다.
  왕망이 몰락하고 경시제(更始帝)05가 집권하면서 무음왕(舞陰王) 이질(李軼, ?-25)06을 시켜 여러 군(郡)들을 순시하며 항복을 받아내었다. 경순의 아버지 경애도 이때 경시제에 투항하여 제남(濟南)태수가 되었다.
이질이 여러 군현을 순시하면서 경시제를 대신하여 항복을 받아낸 것은 그의 형제들이 경시제 치하에서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을 찾아오는 빈객(賓客), 유세객(遊說客)들이 매우 많았다. 경순도 이질과의 만남을 여러 번 청했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이질을 만날 수 있었다. 경순이 이질에게 유세하여 말했다.
  “대왕께서 용과 호랑이의 자태로서 풍운이 일어나는 때를 만나 재빠르게 일어나셨습니다. 그리하여 한 달여 만에 형제가 왕이라 칭할 수 있게 되었으나 덕망과 신의는 백성에게 아직 베풀어지지 않았는데, 총애와 녹봉을 갑자기 받으시었으니 이것은 지혜로운 자들이 꺼려하는 바입니다. 지금은 전전긍긍(戰戰兢兢) 하시면서 스스로 위태로워하고 총애와 녹봉이 종신토록 다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셔야 할 때임에도 오히려 자족(自足)하고 있으시니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보통 권력을 쥔 사람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감언이설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그런데 경순은 오히려 이질에게 조심하고 삼가라고 충고한 것이다. 이질은 경순의 말을 기이하게 생각했고 그가 거록현의 호족이어서 기도위(騎都尉)를 배수하고 부절(符節)을 주어 조(趙), 위(魏) 땅을 평정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이질의 지위가 지역에서는 경시제를 대신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유수가 경시제의 명령으로 황하를 건너 한단(邯鄲)에 이르렀을 때 경순과 유수는 만나게 된다. 유수는 경순을 후대했는데, 경순이 물러 나와 유수와 그의 장졸들을 살펴보니 법도가 있어서 다른 장수들의 진영과는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당시 일어난 많은 세력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도적들과 다름 없었다. 모두가 다 도적인 상황에서 믿을 만한 세력은 어디에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수 휘하의 장졸들은 기강이 바로 서 있었던 것이다. 경순은 유수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고 말과 비단 수백 필을 바쳤다.
  유수가 북쪽으로 중산(中山, 하북성 定縣)에 이르렀고, 경순은 한단에 머물렀다. 그때 한단에서는 왕랑이 군사를 일으켰는데 일시에 세력을 획득하였다. 유수는 오히려 왕랑에게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07 왕랑에게 쫒긴 유수는 계(薊)로부터 동남쪽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경순은 사촌 형제 경흔(耿訢), 경숙(耿宿), 경식(耿植)과 함께 자신의 종족(宗族), 빈객(賓客)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유수를 맞이했는데, 이들 가운데 병들고 늙은이들은 몸소 관(棺)을 지고 따라와서 육현(育縣)에서 유수를 영접했다.
  유수는 경순을 전장군(前將軍)에 임명하고 경향후(耿鄕侯)에 봉하였으며 경흔, 경숙, 경식은 모두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여 경순과 함께 선봉대에 서도록 하니 그들은 송자현(宋子縣)을 항복시키고 유수를 수행하여 하곡양(下曲陽, 하북성 晉陽縣)과 중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정세는 녹록치 않았다. 당시 하북의 대다수 군현들은 한단을 장악한 왕랑에게 항복하였다. 경순은 자신의 종족들과 빈객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까 우려하여 경흔, 경숙에게 고향 집을 불살라버리게 하였다. 유수가 경순에게 그 까닭을 묻자 경순이 대답하였다.
  “제가 생각하기에 명공(明公, 유수)께서 단신으로 하북(河北)으로 오시면서 축적된 재물이 없었습니다. 향기로운 미끼를 쓰면 반드시 물고기가 낚이고 상을 후하게 주면 반드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그런데 명공께서는 도리어 은덕(恩德)을 베푸시고 그들로 하여금 이에 보답하게끔 하시니 이런 까닭에 선비들이 즐거이 따르는 것입니다. 지금 한단(왕랑)이 자립(自立)하여 북주(北州)에는 그에 의혹되는 군현(郡縣)이 많습니다. 제가 비록 온 가족을 데리고 천명(天命)에 따라 귀의했지만 늙고 약한 이들이 행렬에 있어 이들 중에 다른 마음을 품은 이가 적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고향집을 불태워 버려서 그들이 돌아가고 싶다는 바램을 끊어 버린 것입니다.”
  유수는 경순의 말을 듣고 그의 깊은 충성심에 탄복하였다. 이때 유수의 세력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력면에서는 왕랑의 세력이 더 강성한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순은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 친족들까지 유수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스스로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경순은 고향의 집을 불태움으로서 자신의 의지를 보임과 동시에 동요하는 여론을 일시에 진정시킨 것이다.
  경순은 유수야말로 천하대란을 타개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경순의 생각과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유수가 호(鄗) 땅에 이르러 객사(客舍)에 들었을 때의 일이다. 호의 호족(豪族)이었던 소공(蘇公)은 왕랑을 섬기려 했다. 그는 성문을 열어 왕랑의 장수 이운(李惲)을 불러들였다. 경순이 사전에 이를 먼저 간파하고 병사를 이끌고 나가 이온과 맞서 싸워서 그를 대파하여 처단했다. 이 후 경순은 유수를 수행하여 한단을 평정하고 또한 동마적(銅馬賊)를 깨뜨렸다.
  당시에 적미(赤眉), 청독(靑犢), 상강(上江), 대동(大彤), 철경(鐵脛), 오번(五幡)의 도적 10만이 사견(射見)에 있었는데 유수는 그들을 치려고 하였다. 경순의 군대가 선봉에 있어서 다른 군대와 몇 리 떨어져 있었다. 도적들이 이를 눈치채고 밤을 틈타 경순의 부대에 집중 공격을 가했다. 경순 진영에는 도적들이 쏜 화살이 마치 비가 내리는 것과 같아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경순이 부곡(部曲) 사람들을 동원하여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결사대 2천을 선발하여 강노(彊弩)를 지니게 하고 각각 세 개의 화살을 주어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행군하여 도적들의 후방에 도착했다. 경순의 결사대 2천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면서 화살을 쏘아 도적들을 공격했다. 경순군의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도적들이 도주했다. 경순은 도주하는 도적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대파하였다. 경순이 기병을 보내어 승전보를 유수에게 보고했다. 유수는 다음날 아침 여러 장군과 함께 경순의 진영에 이르러 위로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젯밤 곤란하지 않았는가?”
  경순이 대답했다.
  “명공의 크신 은혜 덕분에 다행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유수가 다시 말했다.
  “큰 군대는 밤에 움직일 수 없어서 그대의 군대를 구할 수 없었네. 그리고 군대의 진퇴는 정해진 것이 아니니 경의 가족이 모두 군중에 거하는 것이 옳지 않네.”
  유수는 경순의 친척 경급(耿伋)을 포오(蒲吾)의 현장(縣長)으로 삼아 친족을 거느리고 그 곳에 거주하게 하였다. 경순이 유수를 따를 때 그의 친족 가운데 나이가 많은 이들은 관을 지고서 종군했다. 이로써 경순과 그 일족은 유수에 대해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항상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조처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광무제는 즉위 이후 경순을 고양후(高陽侯)로 봉했다. 경순은 유영(劉永, ?-27)08을 제음(濟陰)에서 공격하고 정도(定陶)를 평정하였다. 이전에 경순은 왕랑을 공격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어깨가 부러졌었는데 이번에 병이 더욱 심해져 돌아와서 회궁(懷宮)의 광무제를 알현하였다. 광무제가 경순에게 물었다.
  “경의 형제 가운데 대신할 만한 사람이 누군가?”
  경순이 사촌 아우 경식을 천거하였다. 광무제는 경식에게 경순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경순은 전장군(前將軍)으로 여전히 따르게 하였다.
  그때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揚, ?-26)09이 참기(讖記)를 조작하였는데 그 내용은 “적구지후 영양위주(赤九之後 癭揚爲主)”라는 말이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한나라는 본래 화덕(火德)을 숭상한 왕조여서 적(赤)은 한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며, 구(九)는 광무제 유수를 뜻하는 말이다. 유수는 고조 유방의 9대손(代孫)이기 때문이다. 즉 광무제 이후에는 영양이 주인 즉, 황제가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영양(癭揚)은 혹이 난 양(揚) 즉 유양을 의미하는 것이니, 광무제 다음은 유양이 황제가 된다는 뜻이다. 유양은 참기를 조작하여 퍼트림과 동시에 세력 확장을 도모하여 면만적(綿曼賊)과 교통하려고 하였다. 이제 막 제위에 오른 광무제로서는 정권의 안정을 위해 어떻게든 유양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26(건무 2)년 봄, 광무제는 기도위(騎都尉) 진부(陳副), 유격(游擊)장군 등륭(鄧隆)을 파견하여 유양을 소환하였는데 유양은 성문을 닫고 응하지 않았다. 광무제가 다시 경순에게 부절을 지니고 가서 유(幽), 기(冀) 지방에 사면령을 내리고 지나는 곳의 왕후(王侯)를 위로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몰래 다음과 같은 칙명을 내렸다.
  “만약 유양을 만나거든 그를 잡아 가두라.”
  경순은 관리 백여 명을 대동하고 진부, 등륭과 원씨현(元氏縣)에서 만나서 함께 진정에 가서 전사(傳舍)에 머물렀다.10 유양은 병을 핑계 대고 알현하러 오지 않았지만 경순과는 친척이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경순이 유양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황제의 사신으로 왕후(王侯)와 목사(牧使), 태수(太守)를 살피는 중으로 먼저 나아갈 수 없으니 만약 만나고 싶거든 전사(傳舍)로 나와 주십시오.”
  그 당시 유양의 아우인 임읍후(臨邑侯) 유양(劉讓)과 그의 사촌형인 유세(劉細)는 각기 만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어서 유양은 자신의 군대가 강함을 자신하고 있었고, 경순이 조용히 만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유양은 관속들만 데리고 경순의 객사로 들어가고 그의 형제들은 민첩한 병사들을 데리고 문밖에 있었다. 유양이 경순을 만나러 들어가니 경순은 공경한 예의로써 그를 맞이하고 이어서 그의 형제들도 불러들일 것을 청했다. 경순의 청으로 유양의 형제들이 모두 들어오자 경순은 문을 닫고 그들을 처단한 다음 병사들을 이끌고 진정 땅을 나와 버렸다. 진정지방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광무제는 유양 형제의 모반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그들을 죽였음을 애석이 여겨 그 아들 유득(劉得)을 진정왕에 봉하고 옛 식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경순은 후한 정권 초기에 큰 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었던 유양을 전격적으로 처단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이렇게 유양을 처단한 경순이 경사(京師, 서울)로 돌아와서 자청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본래 관리(官吏) 집안의 자손으로 다행히 대한(大漢)이 부흥하여 성스러운 폐하께서 천명을 받으시는 때를 만나서 여러 장수직을 거치고 후작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이제 천하가 안정되어 신의 뜻을 쓸데가 없으니 원컨대 어느 한 군(郡)을 다스려 스스로 힘껏 노력하여 효과를 거두도록 하여 주소서.”
  광무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경은 이미 무관을 지냈거늘 또 문관이 되고 싶으시오?”
  광무제는 경순을 동군(東郡)태수에 임명하였다. 그 때에 동군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나 경순이 다스린 지 몇 개월 만에 도적이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28(건무 4)년 광무제는 경순에게 명령을 내려 경시제가 임명한 동평(東平) 태수 범형(范荊)을 치게 하니 범형이 항복했다. 경순은 나아가 태산(太山), 제남(濟南)과 평원(平原)의 도적들을 쳐서 모두 평정시켰다. 그런데 경순이 동군을 다스린지 4년 되던 해에 발간(發干)의 현장(縣長)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개요는 발간 현장에게 죄가 있어서 경순이 광무제에게 상주(上奏)하고 그를 포위하였는데 광무제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현장이 자살하였던 것이다. 경순은 그 일로 면직되고 열후(列侯)로서 봉조청(奉朝請)11으로 조정의 사무에 참석했다. 이후 경순은 광무제를 따라 동헌(董憲)을 공격하였는데 동군을 지날 때 그곳의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수천 명이 광무제의 수레를 따라와 울면서 청원했다.
  “경군(耿君, 경순)을 다시 태수로 복직시켜 주십시오.”
  광무제는 공경들에게 말했다.
  “경순은 젊은 시절부터 무관의 일을 했을 뿐인데 군을 다스림에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는가?”
  30(건무 6)년 광무제는 경순을 동광후(東光侯)에 봉하였다. 이때 경순이 자신에게 주어진 식읍을 사양하자 광무제가 말했다.
  “문제(文帝)께서 주발(周勃)에게 ‘승상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나를 위해 제후를 이끌고 식읍에 나아가시오’라고 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러하오.”
이에 경순이 명령을 받들어 자신의 식읍으로 떠났다. 경순이 업(鄴) 땅에 이르자 광무제는 십만 말의 곡식을 하사하였다. 경순은 자신의 식읍에 이르러서는 죽은 이를 조상하고 병자(病子)를 위문하니 백성들이 그를 경애하였다.
  32(건무 8)년 동군(東郡), 제음(濟陰) 지방에 도적 떼가 일어나니 광무제는 대사공(大司空) 이통(李通), 횡야(橫野)대장군 왕상(王常)을 파견해 그들을 치게 하였다. 광무제는 경순의 위의와 신망이 위(衛) 지방에 현저함을 보고 사신을 파견해 그를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명하고 대병(大兵)을 이끌고 동군에서 모이게 하였다. 동군의 도적들은 경순의 군대가 군(郡)의 경계에 들어섰다는 소식을 듣자 9천이 모두 항복하니 경순군은 싸우지 않고 귀환했다. 광무제가 서찰을 보내 경순을 다시금 동군태수로 삼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기뻐했다.
  37(건무 13)년 경순이 관직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니 시호(諡號)를 성후(成侯)12라 하였다. 아들 경부(耿阜)가 뒤를 이었다. 
                                            
(경순 끝)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49.
02 자(字)는 거군(巨君). 위군(魏郡) 원성(元城, 현재  하북성 大名 東) 사람.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외척으로 전한을 타도하고 신(新, 8-23)을 세웠다. 왕망은 대표적인 외척 가문으로 성제(成帝, BCE 32-7) 때 대사마에 발탁되었고 애제(哀帝, BCE 6-1)가 죽자 고모인 태황태후 왕정군의 지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 BCE 1-CE 5)를 독살시키고 마침내는 전한을 타도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나타내기 위해 부명(符命)을 조작하였다. CE 7년 황제가 된 후, 유교 경전에 의거한 개혁정책과 한나라와 다른 화폐, 관료 제도를 강력하게 시행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맞지 않은 개혁정책과 빈번한 제도 변경으로 국정의 혼선과 오류가 중첩되었고, 기근(饑饉)이 겹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불러왔다. 23년 왕망은 이러한 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믿었던 권력 핵심부마저 해체되면서 장안을 침공한 반군에게 살해됐는데 이때 나이가 68세였다.
03 제평윤은 제평태수를 의미한다. 그 군(郡)을 맡은 사람의 봉작(封爵)에 따라 태수의 명칭이 달라졌는데 공(公)의 경우는 ‘목(牧)’, 후(侯)의 경우는 ‘졸정(卒正)’, 백(伯)의 경우는 ‘연솔(連率)’, 봉작이 없는 사람은 ‘윤(尹)’이라 칭하였다.
04 왕망이 만든 관직. 고대(古代)에 납언(納言)하는 관리가 있었는데 즉 상서(尙書)이다. 상서는 진시황 때 설치된 것으로 천자(天子)와 조신(朝臣) 간에 왕래하는 문서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이었다. 왕망이 모든 관청에 담당관을 두었는데 이를 납언사(納言士)라 했다.
05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6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市) 사람으로 후한의 건국 공신인 이통(李通)의 사촌동생이다. 신나라 말기에 유수, 이통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왕망의 장수 견부(甄阜), 양구사(梁丘賜)를 격파했다. 경시제(更始帝)가 집권한 이후에 경시제에게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을 죽이라고 촉구하여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후 경시제에 의해 무음왕(舞陰王)에 봉해졌다.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한 이후 경시제 정권이 붕괴하자 다시 유수에게 항복하고자 했으나 주유(朱鮪)에게 피살되었다.
07 왕랑의 봉기와 관련한 사항은 「벽(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霸) 신명」, 《대순회보》 173호, 65~68쪽 참조.
08 22년 경시제(更始帝)에 귀순하여 양왕(梁王)에 봉해졌으나 경시제의 정치가 혼란하자 동헌(董憲), 장보(張步) 와 연합하여 성을 공략하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대하여 천자를 자칭했다. 26(건무 2)년 광무제가 합연(蓋延)을 파견하여 정벌에 나섰는데 다음해인 27(건무 3)년 부장 경오(慶吾)에게 피살되었다.  
09 진정공왕(眞定恭王) 유보(劉普)의 아들로 그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신(新)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거병하여 세력을 확산하자 그에게 귀부하였는데 10여 만의 무리를 이끌었다. 광무제 유수의 장수 유식(劉植)의 설득으로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는 그의 조카인 곽후와 혼인하여 이들의 동맹은 더욱 굳건해졌다. 이후 유양은 참언(讖言, 赤九之後 癭揚爲主)을 지어 대중을 선동하고 면만적(綿曼賊)과 통하면서 세력의 확대를 기도했다. 이에 광무제는 경순(耿純)을 파견하여 유양을 처단하였으나 그의 아들 유득(劉得)을 진정왕으로 삼았다.
10 교통의 요지에 마련된 공무 수행자들이 머무는 집.
11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만들어지는 임시관직.
12 시법(諡法)에 서로 도와서 끝을 잘 맺은 경우에 ‘성(成)’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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