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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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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탑 : 무자기(無自欺)와 경천(敬天)

무자기(無自欺)와 경천(敬天)
 
 

교무부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主)이니 사람의 모든 언어 행동은 마음의 표현이다.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言動)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원은 마음을 속이는 데서 비롯하여 일어나는 것인즉 인성의 본질인 정직과 진실로써 일체의 죄악을 근절하라.” (『대순진리회요람』, pp.18~19)

 
“모든 행동에 조심하여 상제님 받드는 마음을 자나 깨나 잊지 말고 항상 상제께서 가까이 계심을 마음속에 새겨 두고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순진리회요람』, p.15)
 
 
  마음을 속이는 것은 사심(私心)으로 양심(良心)을 가리는 것이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으로 하늘이 명(命)한 그대로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속이는 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이요 상제님을 속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상제님을 자나 깨나 가까이 모시려고 하는 경천(敬天)의 실천은 무자기(無自欺)의 실천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음을 속이면서 경천을 실천하기 어려울 것이요, 경천을 실천하면서 마음을 속이기 어려울 것이다. 양심의 본질은 하늘이 나에게 명한 천성으로 정직과 진실이다. 그러나 물욕에 사로잡혀 정직과 진실을 외면하고 사곡(邪曲)을 행한다면 결국 상제님을 속이고 멀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자기의 실천은 하늘이 나에게 명한 것을 잘 이행하는 것이요 마음을 속이는 것은 하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입도치성을 올리면서 상제님께 도를 끝까지 따라 갈 것을 맹세한다. 흔히 신명(身命)을 바친다는 말을 한다. 상제님께 나의 몸과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귀의(歸依)로서 ‘돌아가 의지한다.’는 의미다. 「포유문」에 보면 “심령(心靈)을 구하여 상제님 임의(任意)에 맡기라.”01고 하였고, 『대순지침』에는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이신 구천상제님의 주재하의 인간임을 알아야 한다.”02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정직과 진실한 천성 그대로의 본성인 양심 가운데 구천상제님의 하감(下鑑)하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제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 마음을 속이는 것은 신을 속이는 것이고 하늘을 속이는 것으로03 결국 상제님께도 귀의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면 구천상제님의 믿음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너희들이 믿음을 나에게 주어야 나의 믿음을 받으리라.”04 또 “장차 어디로 가리니 내가 없다고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05하셨다.
  마음을 속이지 않고 양심을 지키는 것은 복을 구하는 길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 “인간의 복록은 내가 맡았으나 맡겨 줄 곳이 없어 한이로다. 이는 일심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일심을 가진 자에게는 지체 없이 베풀어 주리라.”06 그리고 “진심견수 복선래(眞心堅守福先來)”07라 하심은 상제님께서 인간을 주재하시면서 그 마음을 보시다가 진심이나 일심이 되는 순간 복을 내려주심을 의미한다. 진심이나 일심은 곧 양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에 치우친 문명의 세상에 살면서 복을 바깥에서 찾는 경우가 허다하다. 복을 마음 밖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상제님의 가르치심과 같이 복은 멀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무자기의 실천은 일상(日常)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상제님께서 “사람의 마음은 신의 중요한 용사기관이요, 신이 출입하는 문이며 왕래하는 길이라(心也者 鬼神之樞機也 門戶也 道路也).”(행록 3장 44절)고 하셨다. 여기서 선자사지(善者師之), 악자개지(惡者改之)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순간순간 신은 드나드는 것이기 때문에 빈틈을 보이는 순간 선과 악의 구별이 혼미해지면서 마음을 속이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언제나 정성스럽게 간직하여야 한다. 그것은 마치 태극의 기동작용이 무간(無間) 무식(無息)하게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상은 ‘늘’, ‘항상’, ‘자나 깨나’와 같은 개념이다. 경천이 자나 깨나 잊지 않고 상제님을 받드는 것이므로 반성도 경천과 같이 늘 빈틈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반성은 부족함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상관이 있다. 상제님을 모시려고 하는데 소홀함이 없는지 정성이 부족한 것은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반성을 통해서 부족함이 발견되면 자신의 정성과 공경하는 마음은 점점 깊어지게 된다.
  반성은 돌이켜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 의식은 바깥으로 향한다. 또한 대상 의식으로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로 이원화되어 있다. 그래서 나와 남을 구별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비와 분별도 많이 일어난다. 자신이 잘 안 되는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고 미워한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의 원인을 마음 바깥에 두게 되고 마음은 자아유지(自我由之)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의존적으로 되며 무책임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마음 안으로 돌려 자신을 반성하는 것은 마음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며 자아대성(自我大成)의 길인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바탕 위에서 무자기의 실천은 이루어진다.
  무자기의 실천이 없이 경천하는 것은 경천이 잘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제님을 저 멀리 하늘에 계신 초월적 하느님으로만 신앙하기 쉽다. 급기야 상제님을 멀리 하면서 자신은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다. 무자기의 실천은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것은 집에 손님을 초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방안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과 같다. 마음을 청소하는 것은 무자기이고 사념(邪念)을 없애는 것이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딴생각을 하는 것은 결례인 것이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시천주(侍天主)가 이루어지게 된다. 초월적인 하느님이 내 밖의 멀리 떨어진 하느님이라면, 내 가까이 하느님을 모시는 시천주가 되면 우리의 일상(日常)과 같이 하는 하느님이 된다. 마음에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먹어야 비로소 내 안에 계신 상제님의 현존을 느끼는 것이다. 무자기가 되지 않으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경천은 상제님을 가까이 모시고자 하는 마음으로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마음이다. 경천 실천에는 여러 방법이 있으나 기도를 모시는 것은 경천의 실천에 매우 중요하다. 기도는 상제님 영시(永侍)의 정신을 단전에 연마하여 영통(靈通)의 통일을 목적으로 주문을 봉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의미 속에는 경천이 포함되어 있다. 기도를 모시는 가운데 자신의 내면은 밝아지고, 지난 세월 마음을 속였던 자신의 허물들이 보이면서 반성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현실적인 자신의 마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그대로의 양심으로 회복이 된다면 마침내 현실적인 마음과 자신의 영(靈)은 통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의 경지에서 심령(心靈)을 통일하여 만화도제(萬化度濟)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01 교운 2장 41절 참조.
02 『대순지침』, p.50.
03 『대순지침』, p.42 참조.
04 교법 1장 5절.
05 행록 5장 19절.
06 교법 2장 4절.
07 교법 2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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