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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기차 기운을 돌리신 공사

기차 기운을 돌리신 공사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차선근
 
  어느 날 상제께서 몇 종도들과 함께 기차 기운을 돌리는 공사를 보셨도다. 상제께서는 약방에서 백지 한 권을 가늘게 잘라서 이은 후 한 끝을 집 앞에 서 있는 감나무의 높이에 맞춰서 자르고 그 끝을 약방의 문구멍에 끼워놓고 종이를 방 안에서 말아 감으시고 또 한편 원일은 푸른 소나무 가지를 태우고 부채로 부쳤도다. 이때 집이 몹시 흔들리니 종도들은 모두 놀라서 문밖으로 뛰어 나가니라. 상제께서는 종이를 다 감으신 후에 경학을 시켜 그것을 뒷간 보꾹에 달아매고 그 종이에 불을 지피게 하고 빗자루로 부치게 하시니 뒷간이 다 타 버리니라. 경학은 상제의 말씀에 따라 다 탔는가를 살피다가 한 조각이 뒷간 옆의 대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보고 그것마저 태웠도다. 이때 상제께서 하늘을 바라보시고 “속하도다.”고 말씀하시기에 종도들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도다. 햇무리가 서다가 한 쪽이 터지더니 남은 종이쪽지가 타는 데 따라 완전히 서는도다.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기차 기운을 돌리는 공사라.”고 말씀하셨도다. (공사 3장 27절)
 
 
위 「전경」 구절은 상제님께서 기차 기운을 돌리는 공사를 기술한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상제님께서는 기차 기운을 돌린다고 하셨으니, 아마도 이 공사를 통해서 기차라고 하는 거대한 철마(鐵馬)가 우리나라 곳곳 더 나아가 전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게 만드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공사에 참여한 종도들 가운데 한 사람인 김경학(金京學, 1862∼1947)이 1908년부터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했기 때문에01 이 공사가 시행된 시기는 1908년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그때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한반도의 철도 길이는 여섯 배가 늘어났으며(1,043㎞→6,362km), 그에 따라 기차는 더 활발하게 전국 곳곳을 누비게 되었다. 오늘날 철도의 광범위한 보급은 상제님의 이 공사 결과라는 해석이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1923년 3월 6일에 발행된 ≪동아일보≫ 1면의 기사를 읽어보자.
 
 
일한병합(日韓倂合) 후 불과 십 년에 도로가 여차히 개척되고 교통이 여차히 발달되고 도시가 여차히 확장되고 … 우리 조선 사람은 조선의 교통이 발달된 것을 목전에 보노라. 조선의 도로가 개척된 것을 목전에 보노라. 도시가 확장된 것을 목전에 보노라. 그러나 그 확장된 도시는 뉘 도시며, 그 발달된 교통은 뉘 교통이며, 그 개척된 도로는 뉘 도로인 것을 잘 아노라. 그 도시는 조선사람이 집을 직히고 살림하는 도시가 아니라 조선사람이 집을 팔고 도망하는 도시가 아니며, 그 교통기관은 조선사람이 의지하야 수입의 원천을 짓는 교통기관이 아니라 다소의 편리를 이용하야 조선사람의 피를 빠라먹고 주머니를 빼아서가는 교통기관이 아니며, 도로의 개척, 아 이것은 그겻헤섯는 조선사람 농부와 상고(商賈: 장사꾼)의 입지(立地)를 파서 장지(葬地)를 맨드는 그 도로의 개척이 아닌가. 교통기관의 발달과 도로의 개척을 따라 일본인의 상인 농부는 조선의 산산곡곡(山山谷谷)에 차게되며, 도시의 확장 부력(富力)의 증진을 인하여서는 조선사람이 배곱흐게되고 집을 팔아먹게 되는도다. 
 
    
  기차가 문명화를 선도하는 주역이라고는 하지만, 그 시절 한국인들에게 기차는 다수의 편리를 가져다줄지언정 실제로는 한국인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수탈의 도구라는 인식이 더 강했다는 뜻이다. 상제님의 기차 공사 이후 기차가 전국 곳곳에 더 많이 누비게 되었음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그 시절의 한국인들에게 문명의 수혜보다는 수탈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면, 또 실제로 그런 일이 자행되고 있었다면, 상제님의 기차 공사를 단순히 철도나 기차 운행의 증대라는 물량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동아일보≫ 기사 외에도 상제님의 기차 공사를 단순히 운행기관의 증설을 위한 것이라고 한정시켜 보기에는 미심쩍은 사실이 더 있다.  
  첫째, 1908년 이후로 추정되는 상제님의 기차 공사 이전에, 이미 한국은 경인선(1899년 개통), 경부선⋅마산선(1905년 개통), 경의선(1906년 개통)을 갖고 있었다. 남북으로 길쭉하게 생긴 한반도에서 기차는 종(縱)으로 1,043㎞의 구간을 활기차게 달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계 어느 곳이든 간에 기차는 출현한 이후 줄곧 그 운행이 증가되어왔던 것이 관례였으므로, 한국에서도 향후 기차 운행은 더 증설될 것으로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을 텐데, 상제님께서는 기차를 더 많이 다니게끔 하기 위한 공사를 굳이 보셔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둘째, 한반도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려보자. 기차가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유럽이다. 16세기에 말이 기차를 끄는 원시적인 형태에서부터 출발하여 18세기에는 증기기관차가 개발되었고, 1825년 영국에서 조지 스티븐슨이 제작한 증기기관차 로코모션(Locomotion)호가 요금을 받고 본격적인 운행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운송과 교통수단의 대혁명이 일어났다. 기차는 마차나 선박이 운송과 교통을 담당했을 때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손쉽게 대량의 물자와 사람의 이동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인간 삶의 질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기차가 근대화를 선도하는 주역으로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자, 이에 놀란 다른 나라들도 앞다투어 기차와 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828년에는 프랑스, 1830년에는 미국, 1835년에는 벨기에와 독일, 1837년에는 러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1839년에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등에서 차례로 기차 운행이 개시되었는데, 이 국가들에서의 철도 성장은 놀라웠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의 경우 1830년에 27㎞였던 철도 길이가 1860년이 되면 48,000㎞ 이상으로, 프랑스의 경우 1840년에 579㎞였던 철도 길이가 1870년이 되면 15,778㎞로 팽창했을 정도였다. 유럽과 미국은 1840년부터 1880년 사이에 철도 네트워크의 핵심 기반이 되는 그들의 간선 철도망을 완성시켰다. 이런 강대국들 외에도, 인도(1853년), 미얀마(1855년), 이집트(1856년), 남아프리카공화국(1860년), 인도네시아(1868년), 일본(1872년), 중국(1878년), 베트남(1885년), 말레이시아(1885년) 같은 나라들에도 차례로 기차가 개통되었다. 급기야 상제님께서 기차 공사를 보시기 직전에 철도 네트워크는 전 지구로 확산되어 80만km에 달하기에 이른다.02 실로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폭발적인 성장이라 할 만하다.
  정리해보면, 상제님께서 기차 공사를 보시던 1908년 이전에 기차는 전 세계적으로 여객과 화물을 운송함으로써 문명화를 주도하는 이기(利器)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었다는 사실, 세계의 철도망은 이미 세계 곳곳에 뻗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제님께서 기차 운행의 양적인 팽창만을 위한 공사를 굳이 보셔야 했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 기차 공사를 보신 이유나 의미를 운송기관의 물량적인 측면 이외에,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논의를 시작하려면 상제님의 기차 공사를 전후로 하여 한국에 기차가 건설되어 나간 정황부터 읽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 철도와 기차를 건설한 주역은 한국이 아니라 대륙 진출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이었다. 그들은 19세기 후반부터 해방직전까지 한반도에 5천여 ㎞에 달하는 국유 철도와 1400여 ㎞의 사설철도를 건설했다. 그런데 일제가 이 거대한 규모의 철도⋅기차들을 건설하고 제작한 목적은 오로지 한국을 침략하고 지배하기 위함이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하게 된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국가체제를 다진 뒤 자신들도 해외에 식민지를 건설하겠다는 야욕을 품고 한반도와 대륙을 침탈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먼저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청일전쟁으로써 중국(청)을 꺾었고, 다음으로 남하해오는 러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러일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전쟁 준비 목적으로 전 국력을 한 곳에 모으던 일제는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여 물자를 수송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경부선 및 경의선 건설을 착수하게 된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는 그 철도 건설에 소요되는 자금의 상당 부분을 자국 국민들로부터 거두면서 이렇게 말했다. “비록 지금 우리(일본)의 경제가 힘들더라도 한반도를 관통하는 철도가 놓인다면 대륙을 향한 우리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서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당시 일제가 기차 및 철도 건설을 한국과 대륙 정복의 교두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경부선은 전쟁을 위한 물자 수송에 초점을 두고 설계되었지만, 거기에 국한되지 않고 경기⋅충청⋅경상⋅호남⋅영서지방의 모든 물산을 수집하도록 노선이 더 확장되었다. 즉, 일제는 철도 건설의 목적을 한국 내의 물자 유통이나 지역의 균형 있는 개발이 아니라 대륙의 침탈과 한국 경제 장악에 두었던 것이다.03
  더구나 일제는 경부선 공사를 시행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경부선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를 한국인들로부터 매입하면서, 공사 완공 후에 매입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대신 군표(軍票)04를 발행해 주었다. 하지만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한낱 종이 조각으로 전락한 군표만을 손에 쥔 한국인들은 토지만 뺏긴 꼴이 되었다. 게다가 공사를 하면서 선조의 묘소를 마구 훼손했기에 조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인들의 분노는 더욱 높았다. 일제는 보수도 주지 않은 채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공사장에 끌고 나와 채찍질을 하며 혹사시켰는데, 경의선과 경부선 건설 과정에 강제로 동원된 한국인들의 숫자가 연 1억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은 철도 공사장 인근의 마을을 다니며 약탈과 폭행, 살육까지 일삼았으며, 심지어 7살밖에 안 된 어린 아이가 갖고 놀던 작은 나뭇가지를 철도 위에 올려두었다는 이유로 붙잡아 총살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의 주민들 가운데는 이들의 행패를 견디다 못해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열 집에 아홉 집은 텅 비고 인근의 닭과 돼지가 멸종될 지경이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농부가 삽을 메고 원한을 품는 게 현재의 시국이라. 군용철도에 부역하고 땅도 바치고 종노릇도 해야 하는구나. 1년 농사조차 짓지 못하게 되니 유리걸식하게 되어 눈물만 나는구나’라는 「화구곡가(和九曲歌)」05는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일제의 만행에 분노한 한국인들은 철도에 돌무더기들을 올려놓았고 심지어 철도를 절단하거나 화약을 설치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즉각 일본 헌병들이 출동하여 인근 사람들을 무차별 살해했다06. 잔혹하고도 급속한 공사의 결과, 1905년에는 서울과 부산 사이의 445.6㎞ 경부선 구간이, 1906년에는 서울과 신의주 사이의 499.3㎞ 경의선 구간이 완공되어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기차가 다니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에서 기차와 철도는 근대화를 위한 문명의 이기라는 것보다 폭력과 수탈을 위한 도구이자 일제의 한국 침략을 상징하는 도구로 생각되었다.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통되기 전후부터 기차와 철도가 의병들의 습격을 종종 받았던 것도 이러한 인식 때문이었다. 그 중 굵직한 것만 열거해보면, 1904년부터 꾸준히 이어진 영등포, 양주, 고양, 경산, 민촌, 신동, 대구, 평산 지역의 기차역이나 철도 공격, 1907년 9월의 오산역과 진위역 습격, 그 해 11월의 벽제역 습격 사건, 1908년 2월의 남천역 공격, 1908년 4월 영동 지역의 철도 공격, 1909년 3월과 10월 계정∼영성 구간 철도와 이원역 공격 사건들이 있다.07
  이와 같이 한국에서 기차는 폭력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상제님의 기차 공사에 대한 이해에 앞서, 그러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무시되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상제님께서 기차 공사를 보신 1909년 이후에는, 한국에서 철도가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더 살펴보도록 하자.
  1910년 10월 일제는 한반도를 동북에서 서남으로 관통하는 호남선(대전∼목포 구간)과 경원선(용산∼원산 구간) 건설에 착수하여 1914년 1월과 8월에 이들을 각각 완공시켰다. 물론 그 두 철도의 목적도 경제 수탈과 군사 지배에 있었다. 일제는 연이어 1914년에 원산∼종성 구간인 함경선 건설을 착수하여 1928년에 개통시켰다. 이로써 한국에는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함경선이라는 5대 간선철도가 완성되었다. 이 다섯 개의 간선철도는 역시 같은 시기에 대대적으로 확장된 인천, 군산, 목포, 마산, 부산, 원산 등의 여러 항구들을 통해 일본과 연결되었고, 이로써 일제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국 구석구석을 지배하며 물자들을 빼내올 수 있게 되었다.(<그림 1> 참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일제는 1927년부터 1938년까지 2,800㎞였던 철도 길이를 그 두 배인 5,600㎞로 늘인다는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12년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다. 단적인 예로 1931년 한 해의 조선총독부 회계를 보면 그 해 총예산의 1/3인 7,377만 원이 철도 건설과 수리에 들어갈 정도였으니, 일제가 그 기간 동안 한반도의 철도 확충과 운영에 얼마나 몰입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08
일제는 이 사업의 목적을 한국의 산업 개발과 생활 향상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는 많은 일본인들을 한국 곳곳에 이주⋅정착시키고 한국의 식량과 자원, 연료를 일본으로 빼내가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 철도는 쌀과 목재, 석탄, 금 등이 풍부하게 산출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는 ‘조선철도 12년 계획’을 마무리한 후, 193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를 다시 종으로 관통하는 조선중앙철도 건설에 들어갔다. 이 중앙선은 영천∼의성∼안동∼영주∼단양∼제천∼원주∼양평∼청량리를 경유하는 노선으로서, 이 지역들은 금, 동, 아연, 흑연, 석탄, 목재, 쌀, 땔감 등이 풍부한 곳들이었다.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면서 자원 수탈과 전략물자를 확보해야 했기에 중앙선 건설을 서둘렀고, 1936년에 착공하여 1942년에 383km 길이의 중앙선을 완공시켰다. 이로써 일제는 한반도를 더욱 용이하게 수탈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해방 직전에 한반도에 놓인 철도의 총 길이는 6,362km에 이르렀다고 한다.(<그림 2> 참조)
  이상과 같이 일제는 한국 강점 기간 동안 국내 각 지역의 여객과 물자 운송, 지역의 균형 있는 개발을 도모함이 아니라, 대륙 침략을 위한 운송 수단의 구축, 쌀과 지하자원, 연료의 수탈을 위해서 기찻길을 대대적으로 늘려나갔다. 일제가 한국에서 건설한 철도의 80% 이상이 이러한 목적 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상제님께서 기차 공사를 보시던 그 시절의 기차는 문명의 도구만이 아니었다. 유럽과 미국에 놓인 기차와 철도가 그 나라들의 문명화를 크게 선도한 것은 사실이나,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던 약육강식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 동안에 식민지에서 개통된 기차와 철도들은 사정이 좀 달랐다. 그들은 식민지의 자원들을 항구까지 끌어오기 위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서, 유럽이나 미국 혹은 일본과 같은 선진국들에서 기차는 문명의 선도자로 인식되었지만, 식민지에서 기차는 수탈의 도구로서 ‘침략⋅지배⋅억압’이라는 상극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부에 걸쳐, 기차가 문명화를 선도하는 도구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것의 확산 이면에는 상극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는 뜻이다. 한국인들 역시 기차를 문명의 도구가 아니라 수탈의 도구로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상제님의 기차 공사에는 기차와 철도의 양적인 팽창을 넘어선 그 무엇이 숨어있다고 보는 게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상제님의 기차 공사가 시대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만 몰아간다면, 그것은 억측과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상제님의 공사에 그러한 내용이 들어있어야만 그러한 추정이 힘을 받게 될 것이다.
  공사 3장 27절을 다시 꼼꼼히 읽어보자. 여기에는 ‘종이를 말아 감음’, ‘푸른 소나무 가지를 태움’, ‘집이 흔들림’, ‘종이를 뒷간 보꾹12에 달아 맴’, ‘불을 붙여 빗자루로 부침’, ‘뒷간이 탐’, ‘햇무리가 섬’ 등과 같이, 공사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존재한다. 길게 이어진 종이나 연기가 나는 모습, 집이 흔들린다든지 햇무리가 선다는 것 등은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므로 기차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런데 ‘뒷간’과 ‘빗자루’는 기차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필자는 바로 여기에 숨은 열쇠가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상제님께서는 길게 말은 종이로 기차를 형상화시키면서도 하필이면 그것을 다른 곳도 아닌 뒷간의 보꾹에 달아매도록 시키셨다는 점, 또 그 종이(기차)에 불을 붙이고 부채로는 적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빗자루로 부치게 하셨다는 점, 더구나 그 결과로서 뒷간이 다 타게 되었다는 점은 단순히 기차가 더 많이 운행되도록 만드신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도록 만든다.
  필자가 보기에는, 먹은 만큼 배설하는 곳이 뒷간이니 그것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먹었으나 나중에 다시 내어놓아야 하는 상황을 상징하는 것 같고, 뒷간에 종이(기차)가 매달림은 그러한 시국 속에서의 기차 운행을 말하는 듯하며, 빗자루는 깨끗하게 쓸어내는 청소 도구이니 잘못된 것을 일소한다는 의미, 또 뒷간이 탄다는 것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집어삼키고 내어놓고 하는 잘못된 관행이 사라진다는 것, 그 후 햇무리가 둥글게 완전히 선다는 것은 원만함이 새롭게 잉태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이 의미 부여는 지극히 자의적인 가정이다. 상제님의 기차 공사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 공사에 등장하는 몇몇 구성요소에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붙여줄 수 있다고 한다면, 기차 공사는 폭력에 이용되고 있었던 당시의 기차에 ‘새로운’ 기운을 붙여주심으로 해서 삐뚤어져 가고 있었던 기차의 운명을 ‘장차’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돌이켜보면 상제님께서는 이마두가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운(文運)을 열었으며 지하신은 천상의 묘법을 본받아 인세(人世)에 천국의 모형을 본뜬 문물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친 끝에 창생의 편의가 되지 못하고 교만과 침탈, 죄악으로 이어져 삼계를 진멸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고, 이에 신성⋅불⋅보살은 구천에 계신 상제님께 하소연을 하게 되었으며, 상제님께서는 그 청원을 받아들이시어 삼계를 대순하신 끝에 이 땅에 직접 강세하시고 삼계 개벽공사를 처결하시던 중이셨다.13 그리고 그때 상제님께서는 서양 사람들이 천국의 그것을 본 따 만든 문명이기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어 창생에게 편의가 되도록 하리라고 하셨다.14
  바로 이 입장에서 당시의 기차를 바라보자. 기차가 처음 세상에 선보였을 때는 문명을 선도하는 이기였건만, 일제와 같은 제국주의 강대국들에 의해 식민지 침탈의 도구로 쓰이면서부터는 폭력과 수탈의 도구로 전락했다. 그러나 상제님의 말씀에 따르면, 천국의 그것을 본 뜬 모형들 중의 하나인 기차는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창생의 편의가 되도록 만들어질 운명이었다. 만약 기차가 억압과 수탈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없애 버린다면, 식민지 입장에서는 한때 피해만 입는 것으로 끝날 뿐 기차를 통한 그 어떤 문명화의 혜택도 입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상제님의 기차 공사 이후 기차는 양적인 팽창을 거듭했고 해방 전까지의 기간 동안은 억압과 수탈에 이용되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까지도 기차가 침략과 수탈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일만 실컷 하고 일본이 물러간15 이후로 기차는 한국인들에게 편리함과 발전을 가져다주는 훌륭한 역할을 잘 수행해왔다. 그러므로 기차에는 과거와 달리 새로운 기운이 붙어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상제님께서 기차 기운을 돌리신 공사는 기차가 그 원래의 지위와 가치를 회복하도록 다시 조정하신 것, 즉 상극이라는 잘못된 길로 가도록 강요받았던 기차가 향후에는 문명의 선도라는 본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그 운명을 바꾸어주신 것이라는 해석도 타당하다고 본다.
 
 
 

01 《대순회보》 126호(2011), p.14.
02 철도건설국 편찬, 『철도건설사』 (서울: 교진사, 1969), p.38; 손길신, 『철도 이야기』 (서울: 정문사문화, 2008), p.6; 일본 (사)해외철도기술협력협회, 『세계의 철도』, 최경수 옮김 (서울: 매경출판, 2011), pp.10-11; 미야자키 마사카츠, 『하룻밤에 읽는 물건사』, 오근영 옮김 (서울: 중앙M&B, 2003), pp.178-180; 박천홍,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 (서울: 도서출판 산처럼, 2004), pp.65-66.
03 정재정, 『일제침략과 한국철도(1892∼1945)』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9), pp.56-57, pp,73-74, p.118.
04 외국에서 전쟁을 하는 경우 또는 군대가 점령지에 주둔한 경우, 군대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정부 또는 교전단체가 발행하는 특수한 화폐.
05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7일자, 2면 7단에 실린 노랫말 기사.
06 김윤희·이욱·홍준화, 『조선의 최후』 (서울: 다른세상, 2004), pp.245-248; 박천홍, 앞의 책, pp.87-92.
07 정재정, 앞의 책, pp.346-351.
08 『철도건설사』, pp.36-37; 손길신, 앞의 책, p.41; 박천홍, 앞의 책, p.7; 철도청, 『한국철도 100년사』 (서울: 홍진프로세스, 1999), pp.993-1047.
09 정재정, 앞의 책, pp.346-351.
10 정재정, 앞의 책, p.146.
11 정재정, 앞의 책, p.156.
12 뒷간 보꾹이란, 옛날 변소 지붕 안쪽의 기둥들을 말한다.
13 교운 1장 9절.
14 공사 1장 35절.
15 공사 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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