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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역사코너 : 도전님의 수리사(修理寺) 49일 공부

도전님의 수리사(修理寺) 49일 공부
 
 
연구원 송하명
 
  도전님께서는 1968년 10월 중순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속달리에 있는 수리사에 들어가셔서 수리사 주지로부터 공부할 수 있는 방(요사채)을 얻으셨다. 이때의 공부는 이곳과 서울 종로구 부암동을 오고 가면서 하셨고, 기한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니었다.01 그런데 1969년 1월 21일(음력 1968년 12월 4일) 부암동 김원섭02의 집을 나오신 도전님께서는 얼마 후 수리사에서 49일 공부를 하신다. 이 공부는 1969년 1월 말~2월 초쯤 시작하여 49일 후인 3월 중순쯤 마치셨다. 그리고 그해 5월(음력 4월) 서울 중곡동에 도장 터를 마련하신다. 따라서 수리사의 49일 공부는 이곳 요사채에서 행하신 공부와 분명히 구분하여야 한다.
  상제님과 도주님께서 49일을 기한으로 하신 공부는 대순진리회의 연원(淵源)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상제님께서는 1901(辛丑)년 5월,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서 불음불식으로 49일 공부를 하셨다. 그리고 이 공부를 통하여 천지신명을 심판하고 천지대도를 열으셨다. 천부적 종통계승자이신 도주님께서는 1949(己丑)년 겨울, 동래 마하사에서 49일을 한 도수로 정하고 공부를 하신 후 도장에 돌아오셔서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 나가노라”(교운 2장 48절)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도주님의 유명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께서 1969년 행하신 ‘수리사 49일 공부’는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도전님께서 수리사에서 49일 공부하시게 된 전후(前後)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다.
 
 
 
수리사와 청운 스님(심주지)과의 인연
  도전님께서는 감천도장에서 1968년 7월 19일(음 6월 24일) 상제님 화천치성을 마치고 이궁하시어 약 3개월 만에 서울 부암동 김원섭의 집에 이르셨다. 부암동에 도착하시자마자 도전님께서는 조용한 공부처를 찾으셨다. 그때 최봉근 포정(선사)이 자신의 고모가 안양에 사는데 수리사가 한적하고 공부하기에 좋다는 말씀을 올린다. 도전님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시봉과 함께 안양 수리사로 향하셨는데, 그때가 10월 말에서 11월 초로 추정된다.03
  버스를 타고 안양에 도착하여 도보로 수리사에 도착하신 도전님께서는 절의 주지에게 방을 하나 얻어 기거하면서 공부하신다. 이때부터 부암동을 오고 가면서 수리사에서 하신 공부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행하신 공부였다. 당시 절의 주지는 청운 스님이었는데, 성(性)이 심(沈) 씨여서 심주지라 불렀다. 도전님께서는 이 절의 요사채에서 공부하셨다. 그 때 1·21사태(1968년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 침투사건)로 시절이 어수선하여 청운 스님은 도전님을 수상히 여겨 의심하였다.
 
▲ 수리사 사적비
 

  처음에 청운 스님은 도전님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도전님의 짐 보따리를 풀어보았는데, 거기서 염주를 발견하고 어느 정도 안심했다. 하지만 도전님께서 수리사에 계시다 보니 도인들이 수시로 찾아오므로, 청운 스님은 혹시 수상한 사람이면 나중에 화를 입을까 봐 몹시 불안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전님께서는 청운 스님의 고민을 아시고 도전님의 신분증, 곧 당시 도민증04을 보여주니 그때야 의심을 그쳤다고 한다. 당시에는 시민증과 도민증을 사용했고 아직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지 않았다. 정부는 1·21사태가 나자 서둘러 주민등록법에 따라 1968년 11월 21일 군인을 제외한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증을 의무적으로 지니도록 하였다.
  당시 청운 스님은 대처승으로 수리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처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수리사가 6·25사변으로 잿더미로 변했으므로 절을 중흥시키면서 공부하고 있었다. 청운 스님은 당시 공부를 많이 하여 동네 앉은뱅이도 고쳐주어서 생불(生佛)로 불리고 있었다. 그가 도전님께서 공부하실 때 밖에서 주문 소리를 들으니 큰 기운이 도전님 공부처로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청운 스님도 도전님처럼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공부 중 보살이 나타나 “너는 공부하지 말고 저기서 공부하시는 분을 도와드리는 것이 이번 생에서 너의 할 일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후 스님은 도전님을 정성껏 모셨으며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 청운 스님 어머니는 수리사 경내의 감나무에 감이 무성하게 열렸을 때, 그 감이 홍시가 되면 도전님께 먼저 올리고 그다음 대웅전에 올렸다 한다.
  수리사는 청운 스님이 개인 사찰로 지키고 있을 때까지는 태고종이었지만 1988년 조계종 전통사찰이 되었다. 그래서 1988년쯤 청운 스님은 수리사를 나오기 위해 군포에 포교당(50평 규모)을 지었는데 도전님께서 목수를 보내 도와주셨다. 그후 도시개발로 인해 안산으로 옮겨 160평 규모의 구룡산 천수사를 새로 세웠다. 청운 스님은 30년 동안 수리사를 중창하고 수행하다가 1990년 천수사에 모든 것을 회향하고 열반하였다. 현재는 청운 스님의 아들인 지허(智虛) 스님이 천수사의 주지로 있다. 지허 스님은 수리사 진입로 공사 때에 도전님께서 사람을 보내어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포천 대진대학교 공사 때 건물 30개 동이 한꺼번에 올라가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기억하였다.05
 
 
부암동 여관에서의 수리사 공부 준비
  도전님께서는 1968년 10월 중순부터 1969년 1월 21일까지 약 3개월간 수리사에 오고 가면서 부암동에 머무셨다. 당시는 부암동을 중심으로 성(誠)과 치성을 모셨다. 그 기간 내에 도전님께서는 감천도장부터 분부를 모셔온 윤목수(윤영준 보정)를 불러 김원섭의 집 2층을 설계하여 상제님 진영을 모셨다. 그런데 1969년 1월 21일(음력 1968년 12월 4일) 도주님 탄강치성을 마치고 집주인이었던 김원섭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망하자, 도전님께서는 “상제님께서 원하신 곳이 아닌가 보다”라고 하시며 바로 나오셨다.06
 
 

  부암동 김원섭의 집을 나오신 도전님께서는 잠시 부암동에 있는 여관에 머무셨다. 도전님께서는 부암동 김원섭의 집이 상제님께서 원하시던 도장이 아님을 아시고 새로운 도장 터를 찾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다.
  어느 날, 도전님께서는 조영철 선감에게 종로에 가서 종이를 구입해 지시한 치수대로 잘라오라고 명하셨다. 또 며칠 후에는 도장 새길 것을 종이 봉지에 넣어 묶어 주시면서 며칠까지 파오라고 분부하시고 수리사로 들어가셨다. 그때 조선감의 수반인 임중균 선감(1942~ )이 도전님을 모셨는데, 나중에 도전님의 명으로 조선감이 준비해 놓은 것을 가져다가 수리사에 계신 도전님께 올렸다. 조선감과 임선감이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심부름했던 것이 도전님의 수리사 49일 공부를 위한 납폐지 도장이었다고 한다.
  도전님께서 수리사에서 49일 공부하실 때도 부암동에서처럼 김영진 선감의 서울 방면07 일꾼들이 도전님을 모셨다. 특히 조영철 선감 외에 임중균 선감, 김용수 선사가 도전님을 가까이서 보필했다. 조선감이 도전님의 심부름으로 수리사에 못 들어갈 때는 임중균 선감이 도전님의 심부름을 몇 번 모셨다. 도전님께서 공부를 하실 때는 임원들뿐만 아니라 누구도 요사채에 들어가지 못했다.
 
 
수리사가 위치한 지명08
  1969년 1월 21일, 부암동 김원섭의 집을 나오신 도전님께서는 부암동 여관에서 며칠을 머무시면서 수리사 49일 공부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1월 말쯤 버스를 타고 안양에 내려 도보로 눈 덮인 수리산 고개를 넘어서 수리사로 들어가셨다. 이 고개는 도전님께서 처음 수리사에 도착한 1968년 10월부터 1974년 자가용을 이용하기 전까지 도보로 넘으신 길이다. 이 길은 현재 수리산을 사이에 두고 대야동과 산본 신도시를 잇는 임도(林道)오거리 고개와 통한다. 임도오거리 고개는 예전에 쑥 고갯길이라고 부르며 대야동 사람들이 안양장에 가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였다고 한다. 당시 산본동에서 안산이나 수원으로 가는 가장 빠른 고갯길이었을 것이고, 특히 걸어서 수리사로 들어가는 길은 이보다 빠른 길은 없었던 것 같다.
  현재 수리사의 주소는 군포시 속달로이지만, 당시에는 화성군 반월면(半月面) 속달리(速達理)였다. 이곳에서 49일 공부를 마치시고 1969년 5월(음력 4월)에 서울 중곡동에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다. 도전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수리사를 자주 왕래하셨는데, 그때 하신 말씀이 “공부할 때는 몰랐는데 공부 마치고 나중에 보니 여기가 반월면 속달리 수리사이더라”고 하셨다.
  반월(半月)은 ‘반달’로서 『채지가』의 「달노래」에 “보름달은 온달이요, 나흘 달은 반달일세. 섣달이라 초나흗날 반달보고 절을 하세”처럼 12월 4일 탄강하신 도주님과 연관된다. 속달리(速達里) 수리사(修理寺)는 ‘이치를 닦아서 빨리 이룬다’는 뜻으로 당시 태극도에서 이궁하신 도전님께서 서울에 새로운 도수를 펼치고자 하시는 애타는 심중을 헤아리게 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 아래서 하느님의 계시와 지시로 인도됨을 알면 되는 것이다”09라는 도전님의 훈시를 기억하게 한다.

 
수리사 공부처
  1968년 11~12월쯤, 도전님의 비범하심을 알아본 청운 스님은 절의 우측 편에 자리 잡은 빈터를 도전님의 공부처로 제공한다. 당시 그곳은 수리사 최고의 명당자리였다고 한다. 당시 돈 많은 사람이 이 터를 구입하려고 하였지만 청운 스님은 팔지 않고 있었다. 그는 도전님께서 요사채에서 주문하면서 공부하시는 것을 보고 보통 분이 아님을 직감하고 도전님께 공부 장소로 사용하시라고 자청해서 그 터를 내어 주었다고 한다. 이때 도전님께서는 도인들을 시켜서 이곳에 흙벽돌을 찍어서 방 2칸에 부엌이 하나인 초가삼간을 짓게 하셨다. 이 초가삼간은 추운 초겨울인 1968년 12월쯤 지어졌고 1969년 1월 도전님께서 부암동을 나오시기 이전에 공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이 터는 수리가 머리를 내리꽂으면서 먹이를 낚아채는 형국의 명당으로 건물을 개량하여 지금까지도 스님들의 공부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 1980년 수리사 49일 공부처(김옥자 교감 소장)
 

  1969년 1월 말, 도전님께서 49일 공부를 위해 수리사에 들어가셨을 때, 초가삼간의 건물은 처마 없이 지붕만 덮어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도전님께서는 윤목수를 수리사로 부르셨다. 그리고 “공부방에 챙(처마)이 없어 허전하니 챙을 달아라”고 분부하셨다. 윤보정은 분부를 모시고 마당을 덮도록 챙을 달았다. 그리고 함께 온 안준순 교감10과 공부방을 도배했다고 한다. 공사를 마치자, 도전님께서는 윤보정에게 부산에 내려가 있으라고 하셨다. 그때 윤보정이 내심 서운해하니 도전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좀 있다 부를 게 내려가 있어”라고 분부하셔서 부산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도전님께서는 수리사 49일 공부를 시작하셨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초가삼간은 수리사 49일 공부 때부터 사용하신 것으로 보인다.
 
 
수리사 49일 공부와 중곡도장 터
  도전님께서는 1969년 추운 겨울, 방 한 칸에 화로 하나를 놓고 문을 걸어 잠그신 채 밤낮으로 공부하셨다. 납폐지를 화로에 계속 소지(燒紙)하시며 49일 동안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방 안의 연기 속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때 얼마나 힘드셨으면 공부를 마치신 후 “나도 책임 때문에 하는 거지, 나를 위한 일이라면 못했을 것이다”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셨다고 전한다. 당시 청운 스님도 저녁에 잠을 안 자고 도전님 공부를 밖에서 지켜드렸다 고 한다. 그리고 도전님께서 공부를 마치시고 “내가 그때 6개월 동안 잠을 안 잤다. 한참 잠을 안 자다가 자려니까 이상하다”고 임선감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 중곡도장 공사 현장 (1969년)
 

  도전님께서 수리사에서 49일 공부를 마치고 나오시는 날, 조선감은 도전님을 편안하게 모실 생각으로 택시를 대기시켜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도전님께서 “네 마음대로 택시를 불러왔느냐?”고 호통을 치시며 택시를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조선감은 기사에게 기다리라고 했는데 그냥 보낼 수가 없어, 기사에게 약속한 운임의 반 정도를 주고 사정을 설명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도전님께서는 당신이 걸어가겠다고 말씀하시고 20리 길을 걸어서 내려오셨으며, 중간중간 쉬면서 자상하게 도담을 해주셨다고 한다. 훗날 생각해 보니 도전님께서 49일을 쉬지 않고 공부하신 후라 몸을 서서히 풀어야 하는데, 자신이 그것도 모르고 택시를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하며 조선감은 그날의 일들을 회상하였다.
  1969년 3월 중순쯤, 수리사 49일 공부를 마치신 도전님께서는 1969년 5월에 중곡도장 자리를 잡으시고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다. 당시 임원들은 도전님의 분부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장 터를 찾아다녔다. 도전님께서는 풍수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서대원 선감11, 전승천 교감(전흥수 대목장 아버지)12, 안준순 교감을 서울에 보내 도장 터를 알아보라고 분부를 내리셨다. 세 사람은 서울에서 명성이 자자한 곳을 다니면서 보고를 드렸지만, 도전님께서는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그러다 중곡동으로 가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곳에 당도해 주변 경관을 살펴본 전승천 교감은 과연 도장이 들어서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그 길로 돌아와 보고를 드렸다. 도전님께서는 보고를 들으신 후, “맞다! 그 자리다. 그곳을 빠른 시일 내로 구입하도록 하여라”고 하셨다.
 
  수리사는 도전님께서 1968년 10월 중순부터 부암동을 중심으로 자주 오고 가며 공부하신 의미가 깊은 곳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69년 1월 말, 부암동을 나와서 수리사에서 행하셨던 49일 공부 때문이다. 도전님께서는 부암동이 상제님께서 원하신 곳이 아님을 확인하고 곧바로 ‘수리사 49일 공부’를 행하셨다. 그리고 1969년 5월 서울 중곡동에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다. 따라서 수리사 49일 공부는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께서 양위 상제님의 유지·유법에 따라 하루속히 포덕천하할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01 당시 수리사에는 대웅전도 없었고 삼성각과 요사채만 있었으며 도전님의 49일 공부처는 빈터로 있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오신 도전님께서는 조용한 곳을 원하셨고 그곳이 수리사였다.
02 김원섭은 당시 서울 방면 김영진 선감의 수반으로 서울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다가 도문에 들어왔다. 그는 입도 후 부암동 집을 팔지 않은 채 1968년 3월에 부산으로 내려와 감천도장에서 운영하는 감천의료원의 전문 양의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종단역사연구팀, 「지명답사기: 서울 부암동」, 《대순회보》 194호, 참조)
03 종단역사연구팀, 「지명답사기: 서울 부암동」, 《대순회보》 194호, pp.32~41 참조.
04 각 도의 규칙에 따라 도민에게 발급되었던 신분증명서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시민증과 도민증이 있었고 이후 1962년 5월 주민등록법이 공포되었으나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05 인터뷰, 지허 스님(청운 스님 아들, 現 안산 천수사 주지), 2011년 07월 29일.
06 당시 치성에 참석했던 한성 방면 조영철 선감(1935~2017)과 연천 방면 윤영준 보정(1924~ )은 그 사건을 기억하였다. 김원섭은 부산 감천에서 올라와 도주님 탄강치성을 함께 모셨다. 그런데 김원섭은 치성 후 음복주를 많이 마시고 자기 맘대로 2층 상제님 진영에 올라갔다 내려와 자기 방에서 쓰러졌다. 도전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1시간 동안 심고(心告)를 하였지만, 살아나지 않았다. 그러자 도전님께서는 “안됐다. 장사나 잘 지내 주어라”고 하시고 2층 진영 모신 구조물을 다 뜯어 소각시키게 하신 다음 부암동을 나오셨다. 김원섭의 사망원인은 심장마비였다. 그래서 조영철 선감은 그의 친구들인 병원 원장이나 박사들과 함께 망우리 공동묘지에 장례를 지내 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도인들은 김원섭이 2층 상제님 진영을 범해서 사망했다고 생각하였다. (2003년 조영철 선감 인터뷰; 2003년 윤영준 보정 인터뷰)
07 지금의 서울 방면과는 다름. 당시 조영철 선감, 임중균 선감은 서울 방면 소속 도인이었음.
08 종단역사연구팀, 「전경 지명답사기: 도전님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군포 수리사」, 《대순회보》182호, pp.26~37. 참조.
09 「도전님 훈시」 (1989. 06. 25)
10 연천 방면 안준순(安俊淳) 교감은 정유(丁酉)년인 1957년에 도전님께서 영도하시던 태극도에 입도하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젊어서는 풍수지리와 복술(卜術), 의술(醫術) 등에 심취했다가 당시 선각자로부터 태극도 통감의 취지문의 한 구절에 감동하여 입도치성을 모셨다 한다. (《대순회보》 28호, 「도인탐방- 연천 방면 안준순 교감」 참조)
11 부산 방면 서대원(徐大源) 선감은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에서 태어나 34세에 입도하였다. 입도하기 전에 서대원 선감은 불구의 몸으로 생활하면서 일찍이 익혔던 의약과 풍수에 관한 지식을 활용하여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대순회보》 25호, 「도인탐방-부산 방면 선감 서대원」 참조)
12 청주 방면 전승천 교감은 전노인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전노인은 수덕사에서 처사로 있다가 1963년쯤 입도하였다. 도전님께서 감천 도장에서 이궁하여 서울로 올라오시자 따라 올라와 도전님을 보필하였다. 전노인은 도전님의 도장 공사에서 항상 최종 인망 공사를 보았고 그 후 도전님께서 결정하셨다고 한다. 그의 아들 전흥수 대목장은 한옥 건축 전문가로서 도전님 분부를 모시고 1981년 중곡도장 공사부터 모든 도장 공사를 맡아 마무리하였다. (인터뷰, 성기석 교감 (2017.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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