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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9년(2019)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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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 나의 선각,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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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각, 어머니
 
 

중흥1 방면 교무 한상덕

 
 
 
  나는 도인 자녀이다. 열 살이 되던 해 늦은 가을 어느 날, 나는 어머니를 따라 입도식을 했다. 일요일 아침이면 친구와 함께 교회에는 갔었지만, 대순진리회는 들은 적도 없었고 상제님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이었다. 입도식을 하고 나의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도를 전해준 선감과 방면 도인들이 기도를 모시기 위해 집에 찾아오셨다. 나는 기도시간에 어머니의 주문소리가 들려오면 눈을 감고 주문을 따라 했다. 기도가 어떤 의식이며 주문의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는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후 회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회실의 심부름을 도맡았다. 청소년기가 되어 입도치성이 있는 날이면 가끔 입도자에게 한복을 입히고 배례법을 가르치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하지만 치성이 얼마나 중요한 행사인지는 몰랐다. 치성이 끝나고 먹게 될 음복이 기다려질 뿐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수도를 막 시작한 선무들이 나를 앉히고 포덕사업을 위한 교화를 연습했다. 내가 좀 알아듣는 표정이면 통과였고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내용을 수정해서 다시 내게 왔다. 치성이 다가오면 방면 도인들을 따라 도장에도 가고 수임선감께 교화도 들었다. 이러한 간접체험을 통해 대순진리에 대한 외연은 넓어졌지만, 깨달은 진리는 거의 없었다.
  나는 홀연히 회실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스레 먹고 살 미래가 걱정되고 대학이라도 나와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머니께 기숙사에 들어간다고 말씀드렸다. 그 얘기를 들으신 방면 선각은 통학하기를 권했지만, 회실을 떠날 다시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3 기간 기숙사에서 무던히 공부하여 다행히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IMF의 여파로 몸과 마음이 힘들었던 나는 입대를 앞두고 재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방면에서 회관을 짓는데 가서 일해보지 않겠니?”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때는 나도 모르게 순순히 그 말씀에 따라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작업을 시작하면 어느새 밤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바닥기초 작업부터 시작했던 공사는 어느새 조경까지 마무리되어갔다. 당시까지 나는 수도가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어린 나이에 입도해서 생활이 되어버린 익숙해진 일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신명들이 도와주시는 것임을 체험하게 되었다.
 
 

  늦은 가을,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화장실 건물 골조공사를 빨리 마무리해야만 했다.일주일 동안 일과 중에 쉬는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작업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며칠간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힘이 넘쳐나서 모든 작업을 어려움 없이 해내고 있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며 신명이 사람의 몸을 빌려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짐작하였다. 그동안 묵혀뒀던 교화들이 하나씩 떠오르며 나 자신이 수도인임을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이제까지 믿지 않았던 신명을 인정하게 되었고, 나를 힘들게 했던 지난날은 조상 선령신들이 자손을 수도할 수 있도록 이끄는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깨달음도 잠시였다. 군 생활과 복학으로 나의 삶은 다시 평범하게 흘러갔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 한구석은 무언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당시 나는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아 취업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동안 남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멀리 제주도까지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선감께서 네 안부를 물으시더니 중국의 학교에 가서 외국어를 공부해보라고 하셨어.”라고 전화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선감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무게감과 함께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는 짐을 챙겨 중국으로 향했다.
 
 

  중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중국의 교육기관은 학생들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하루 12시간의 수업은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철저한 출입통제가 이뤄지고 있어 성인이 된 나를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로 되돌려놓은 듯 답답함과 억눌림을 느끼게 했다.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시골 마을의 풍경은 몹시도 쓸쓸했고 한참을 걸어가야 나오는 구멍가게와 끝없이 펼쳐진 평야는 고독감과 소외감마저 느끼게 했다. 한마디로 도시의 젊은 청년이 생활하기에는 모든 것이 불편했다. 시간이 흘러 차츰 주위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유학생활도 안정되어 갔다.
  중국유학에서 만난 도인자녀들은 어린 시절 나를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은 집안 형편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힘들어했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유학생활이지만 그들이 꿈꿨던 이상과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열악한 시골의 삶 속에서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아이들의 다짐은 점차 식어갔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이루고 싶은 목표도 모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다만 남은 것이라고는 힘든 현실에 대한 불만뿐이었다. 마치 도안에 있지만, 도를 거부하고 싶어 하는 것이 딱 내 모습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나이 어린 후배들을 달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듣고 수도인의 입장이 되어 교화하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뭔가 해주고 싶은 말은 많은데 교리가 부족한 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이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포덕이 중요하다고 했던 선각들의 교화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교화하면서 자신도 교화된다는 말도 생각났다. ‘이래서 수도는 선각과 후각이 있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과거, 당당하지 못했던 나 자신. 지금까지 채워지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는 어머니의 말이 잔소리가 아닌 선각의 교화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낳아서 길러주신 어머니! 상제님의 진리를 전해주시고 올바른 수도를 위해 세상 그 누구보다 노심초사하시는 나의 선각!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뿐만 아니라 선·후각 간의 인연 또한 있으니 이는 나에게 있어 정말 귀한 인연이다. 세상에 다시없을 이 인연에 대한 깨달음은 나의 과거를 선각과 후각의 입장에서 다시 돌아보게 하였다. 그 옛날 나의 짧은 소견으로 선각을 멀리하고 속이려 했던 많은 행동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부끄러움은 내가 수도인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선·후각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인연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오늘도 수반이자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실 나의 선각 어머니께 보은하는 마음으로 수도에 정진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가슴속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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