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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호한신천유불사’ 다시 읽기

호한신천유불사’ 다시 읽기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차선근
 
상제께서 형렬에게 교훈하시기를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 말라. 아직도 남아 있는 복이 많으니 남은 복을 구하는 데에 힘쓸지어다. 호한 신천 유불사(呼寒信天猶不死)이니라.” (교법 3장 9절)
 
  ‘호한신천유불사’는 《대순회보》에 벌써 세 차례(5호, 186호, 207호)01나 소개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거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호한신천’에 대한 해설이 통일되지 못한 문제점이 있다. 교법 3장 9절은 교화의 소재로 종종 활용되는 것이니만큼, 이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그 결과물이다.
 
 
신천(信天)의 해석 문제
  쟁점은 ‘신천(信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대순회보》 5호는 ‘호한신천유불사(呼寒信天猶不死)’를 ‘호한과 신천이란 새도 오히려 죽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호한과 신천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호한(呼寒): 이 새는 몸에 깃털이 하나도 없으면서 특히나 추운 지방의 눈밭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밤이면 추워서 오들오들 떨며 원망하기를 “어둠이여, 어찌 나로 하여금 집을 지을 수 없게 하여 이다지도 추위에 떨게 하는가, 내 맹세하노니 날이 밝아지면 틀림없이 집을 잘 지어서 이 추위를 막으리라.” 하다가 어느덧 날이 새어 따뜻한 햇살이 비치면 양지쪽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밤새도록 얼은 몸을 녹이다가, 몸이 노곤해지면 잠에 빠져버린다. 한잠 자고 나면 어느덧 해는 중천에 올랐는지라,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이리저리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먹고 난 뒤에는 “이와 같이 배부르고 따뜻한데 무엇 때문에 고생해가며 집을 지을까?” 하고 간밤의 맹세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다가 다시 밤이 되면 추위에 떨면서 지난밤과 같은 맹세를 되풀이한다는 새이다.
 
신천(信天): 물가에 사는 물새인데 부리가 새의 머리 위에 달려있어 먹이를 쪼아 먹지 못하고, 제 스스로 고기를 잡아먹지 못한다. 그래서 여울가에 서서 입만 딱 벌리고, 하늘에서 먹이가 떨어져 입안으로 들어오기만 기다리다가 물고기가 뛰어올라 우연히 입으로 들어가면 먹고, 또 하늘을 나는 매가 먹이를 물고 가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 우연히 입으로 들어가면 그것을 먹고 사는 새이다.02
 
  《대순회보》 207호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의 해석을 싣고 있다.03 그런데 《대순회보》의 또 다른 곳에서 머리 위에 부리가 달린 새는 신천이 아니라 호한이라고 하는 해설이 발견된다. 신천은 새가 아니라 ‘하늘을 믿는다’는 뜻이며, ‘호한신천유불사’는 ‘머리 위에 부리가 달린 새인 호한은 하늘을 믿었기에 죽지 않았다’는 의미라는 것이다.04
  ‘신천’은 신화적인 새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을 믿는다는 것인가? 신천이 새라고 하면 그 새는 깃털이 없고 추위에 떠는 새인가? 아니면 머리 위에 부리가 달린 새인가? 『전경』 성구에 대한 다양한 해설은 풍성한 교화를 가능하게 해주기에 좋은 일이지만, 《대순회보》 내의 이런 혼선은 별로 달갑지 않다. 우리는 교화를 위해서 ‘신천’에 대한 두 해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우선, 문헌학적으로 보면 호한과 신천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실상 거의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자료인 《대순회보》 5호의 호한과 신천에 대한 설명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은 《대순회보》 5호 간행 당시의 상황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대순회보》는 1983년부터 출판되기 시작했는데, 처음 3호까지는 1년에 1회씩 간행되었다. 《대순회보》 5호는 4호와 더불어 처음으로 1년에 2회씩 간행되기 시작한 회보다. 그 당시의 회보 발행 책임자는 여주에 계시는 도전님을 찾아 뵙고 회보 원고 검수를 위해 한동안 기다려야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05 여주에 도장이 지어진 시기를 감안하면, 그 증언은 1986년이나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순회보》 5호는 1986년에 간행되었으므로 도전님의 감수를 직접 받은 것임에 틀림없다. 도전님께서 ‘갓 발행되기 시작한 초창기의 《대순회보》’만큼은 직접 다 챙기셨던 상황이기 때문에, 그 시절에 간행된 《대순회보》 5호의 기사 역시 도전님 감수 하에 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뜻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대순회보》 5호에 실린 대로 ‘신천’은 하늘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머리에 부리가 달린 신화적인 새이며, ‘호한’은 깃털이 없이 추운 지방에서 사는 신화적인 새이고, ‘호한신천유불사’는 ‘호한과 신천은 오히려 죽지 않았다’로 해석해야 옳다.
 
 
호한과 한고조(寒苦鳥), 신천과 신천옹(信天翁)
  불교에서는 전설적인 새인 한고조(寒苦鳥)가 전해지고 있다. 이 새는 천축의 설산[히말라야]에 살기에 설산조(雪山鳥)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고조는 한 번도 둥지를 지어본 적이 없어서 밤만 되면 눈 덮인 설산의 추위에 벌벌 떤다. 암컷이 밤새도록 “아이고 추워, 나 죽어, 아이고 추워, 나 죽어.” 하고 울면, 수컷이 또한 밤새도록 “날 새거든 집 지어줄게, 집 지어줄게.”라고 운다. 그러나 날이 새어 아침 해가 따뜻하게 비추면 집 지을 생각은 않고 “무엇 하러 집을 짓나? 이 무상(無常)한 몸이 이렇게 편안해야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무엇 하러 그 고생을 해?” 하면서 논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또 벌벌 떨면서 집 지을 것을 다짐하다가 낮이 되면 또 잊어버리기를 평생 반복한다. 한고조는 “내일이면 반드시 집을 지으리!”라는 말을 매일 반복하기 때문에, ‘내일은 집 지으리’새라고도 불린다.06 『전경』에 등장하는 호한은 한고조와 설명이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호한은 한고조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한의 경우와 달리 신천은 옛 문헌에서 그 근거를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도 상제님 재세 시의 민간에는 머리 위에 부리가 달려있다고 하는 신천이라는 전설적인 새가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과는 상관이 없이, 이름만으로 볼 때 살필 필요가 있는 새는 바닷새의 한 종류인 신천옹(信天翁, albatross)이다. 신천옹은 한국에서는 잘 보기 어려운 새인데, 몸길이가 91cm, 날개를 펼치면 무려 2∼4m나 되는 큰 몸집을 자랑한다. 그렇다 보니 한 번 날면 큰 날개를 이용하여 상승기류를 타고 오랫동안 하늘에 머물 수 있다. 신천옹의 한 종류인 ‘나그네 신천옹(wandering albatross)’은 12일 동안 6,000km를 쉬지 않고 날았다는 기록도 있다. 덩치가 워낙 커서 하늘에 있을 때는 어마어마한 위용을 보이지만, 그 대신 땅에 있을 때는 긴 날개를 질질 끌고 뒤뚱거리며 다녀야 하는 데다가 한 번 날아오르기가 워낙 힘들어 어린아이에게조차 쉽게 잡힌다고 한다. 그래서 신천옹은 ‘바보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이웃 일본에서는 아예 바보새라는 뜻의 ‘아호도리[あほうどり, 阿呆鳥]’로 불린다.
  물론 신천옹은 신천처럼 머리 위에 부리가 달려 있지는 않다. 신천옹이 신천새는 아니라는 말이다. 무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억지로라도 추정을 해보자면, 신천옹은 한국에서 이름만 전해지고 있었을 뿐이고 정작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 땅에 내려앉은 뒤에는 잘 움직이지 못해 가만히 있어야 했다는 점, 또한 별명인 바보새로 주로 불렸다는 점 때문에, 이것이 와전되고 약간의 상상력까지 덧붙여져서 ‘신천’이라는 신화적인 새가 출현했던 것은 아닐까?
 
 
호한에 대한 세간의 평가
  호한은 추운 설산에 살면서도 깃털이 없는 핸디캡을 안은 새다. 생물이라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를 하기 마련인데, 이 새는 그런 과정을 겪지 않는 것 같다. 진화로써 북극곰의 따뜻한 털 같은 깃털을 얻지 못했다면, 자신의 명백한 문제점에 대해서 대응책을 세워 두어야 한다. 그러나 호한은 다짐만 할 뿐 실제론 행동에 옮기지 않는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운 이유다.
  실제로 불교나 심리학은 호한 즉 한고조를 좋게 보지 않는다. 불교는 한고조를 어리석은 중생으로 비유한다. 이 세상은 무상하고 덧이 없기에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어 벗어나야 하는데, 한고조는 밤이면 집을 짓겠노라고 다짐하지만 낮이 되면 노는 데 바빠 그것을 잊어버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한고조 즉 호한을 본받아서는 안 되는 어리석은 존재로 규정한다.
  심리학 역시 마찬가지다. 심리학에 의하면, 자기통제를 잘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이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는 것은 그 사람이 독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이로운 것을 선택하고 실천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자기통제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통제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자기에게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정작 그것을 실천해야 할 상황에서는 머뭇거리거나 심지어 포기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때가 더 많다. 심리학은 이것을 그리스어로 ‘아크라시아(akrasia) 현상’이라고 부른다.07 ‘자기통제력 결핍(lack of self-control)’ 혹은 ‘의지력 나약’이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수천 년 전 그리스 철학자들까지 매달렸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다. 심리학에서 자기통제력은 타고나는 것인지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것인지 하는 문제는 아직 그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자기통제력이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심리학은 호한 즉 한고조 이야기를 통해서 이것을 설명한다. 한고조는 따뜻해지면 추웠을 때를 잊어버리고 노는 데 열중하니, 이것은 곧 환경이 좋아지면 자기통제력을 급격하게 잃게 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당연히 심리학은 자기통제력이 없는 한고조를 닮지 말 것을 권한다. 자기통제력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며, 그것이 결핍되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08

   
신천에 대한 평가
  신천은 호한과 동일한 평가를 받기에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신천도 호한처럼 한심스럽게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부리가 머리 위에 있는 관계로 먹이를 잡아먹을 능력이 부족한 새이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물고기가 자기의 입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입을 하루 종일 벌린 채 기다린다는 것은 상당한 인내가 요구되는 일이다. 상상만 해봐도 쉽지 않은 일임을 느낄 수 있다. 능력이 있음에도 집을 짓지 않고 낮 동안 향락에 빠져 사는 호한새와 달리, 신천새는 그 나름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는 한 셈이다.
  다만 그 방법이 조악한 것이 문제다. 실제로 이런 새가 있다면 영양실조로 굶어 죽기 딱 알맞다. 신천새는 좀 더 효율적인 사냥법을 찾을 수는 없었을까? 머리 위에 부리가 있다는 말은 아마도 눈 밑에 부리가 있는 보통의 새와 달리 눈 위에 부리가 붙은 것을 말하는 듯한데, 비록 이런 경우라도 좀 더 확실한 물고기 사냥법을 개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예를 들면 독수리와 같이 부리가 아니라 발톱을 사용하여 물고기를 잡고 그 연후에 먹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신천새는 호한새에 비해 일말의 동정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작정 입을 벌리고 기다리기만 하는 대단히 비효율적인 방법에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점에서,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새임은 분명하다.
 
 
상제님께서 호한과 신천을 예로 드신 이유
  호한은 능력이 있지만 게으르고 자기통제력이 없는 새이며, 신천은 그 나름 노력은 하지만 대단히 한심스럽고 어리석은 새이다. 그러므로 누가 보더라도 호한과 신천은 본보기로 삼아야 할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호한과 신천은 얼어 죽든 굶어 죽든 죽어야 마땅한데, 상제님께서는 왜 오히려 죽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인가?
  《대순회보》 5호와 207호는 호한과 신천이 죽지 않은 이유를, 비록 그들이 게으르고 못생기고 못나고 못 배운 존재라고 할지라도 상제님의 호생지덕과 덕화를 입은 존재이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09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호한이 오직 하늘을 믿는 까닭에 죽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10 정말로 호한이 ‘오직 하늘만’ 믿은 새라면 호한은 그 나름 정의로운 새이고 본보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 인용문에 소개한 《대순회보》 5호의 호한에 대한 설명을 보면, 호한은 간밤의 맹세를 계속 저버리는 새이지 하늘을 믿었기에 그 믿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긴 새는 아니었다. 따라서 호한은 하늘을 믿은 새라고 교화를 하면 안 될 일이다. 신천도 호한과 마찬가지로 하늘을 믿은 새가 아니다.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없다. 상제님께서 호한과 신천을 말씀하신 것은 그 새들이 하늘을 믿었기에 죽음을 면했으니 그들을 본받으라고 하신 게 아니었다. 《대순회보》 5호와 207호가 밝혔듯이, 게으른 호한과 어리석은 신천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상제님의 호생지덕과 덕화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상제님께서는 왜 호한과 신천을 예로 드신 것인가? 핸디캡을 가지고 있지만 노력도 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새들이고 본보기로 삼아야 할 대상도 아닌데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 답은 상제님의 말씀 전체 문맥 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다시 상제님 말씀을 들여다보자.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부러워 말라. 아직도 남은 복을 구하는 데 힘쓸지어다. 호한신천유불사이니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말씀은 상제님을 따르는 데 열성적이었으나 집안이 가난했던 김형렬11에게 하신 것이었다. ‘부러워하지 말라’는 상제님의 훈계로 미루어보면, 거친 집과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던 김형렬은 아마도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듯하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김형렬에게 외워 주셨던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弊衣多垢勝金甲  
  때 많이 묻은 남루한 옷이 금갑(金甲: 황금 갑옷)보다 낫고
頹屋蕪垣似鐵城  
  담장 없는 허물어진 집이 철성(鐵城: 쇠처럼 튼튼한 성) 같네.12
 
  김형렬이 가난하여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가졌고, 상제님께서 그런 그를 훈계하신 내용이 교법 3장 9절이라면, 거기에 등장하는 호한과 신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가능하다.
  호한과 신천은 가난한 처지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깃털이 없어 추위에 떠는 호한은 제대로 된 집이 없는 처지를 상징하고, 먹을거리를 위해 하루 종일 입을 비효율적으로 벌리고 있어야 하는 신천은 제대로 된 음식이 없는 처지를 상징한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남이 잘 되어 있는 것, 즉 좋은 집과 좋은 음식을 누리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도통을 위해 달려가는 수도인이라면 달라야 한다. 상제님께서 부유한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심은 그들을 신경 쓰지도 말고, 나와 비교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신경을 쓴다면 남들이 누리는 좋은 집과 좋은 음식에 눈길이 가게 될 터이고, 비교를 한다면 문득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 보일 수 있으니, 자칫 마음이 흐려져 수도와 멀어질 위험이 있다. 제각각 자신이 누려야 할 분수에 맞는 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잊고 남을 부러워하면 나의 신명이 그에게 옮겨갈 수도 있다.13 이 세상 그 누군가가 수십억, 수백억짜리 집에 살고, 한 끼에 몇백만 원씩 하는 고급 음식을 먹을지라도, 그들을 신경 쓰거나 비교하거나 함으로써 부러워하고 적대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우리의 일이 남을 잘 되게 만드는 것이며,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고,14 특히 남이 잘 살 때 우리는 장차 그들을 뛰어넘는 영화와 복록을 누리자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이미 주셨다.15
  수도에 열중하다 보면 지금 당장은 좋은 집이나 좋은 음식을 취하기 어렵다. 그러나 칠산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도 먹을 사람을 정하여 놓고 그물에 잡히고, 농번기에 뿌려지는 씨앗도 먹을 사람을 정하여 놓고 열매를 맺는 법이라고 하셨다.16 호한새나 신천새 같이 게으르고 어리석은 미물마저도 예상과 달리[猶] ‘상제님의 덕화를 입는다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지 않는데, 하물며(!) 양위상제님과 도전님의 뜻을 받들고 있는 수도인은 올바르게 수도만 한다면 상제님의 덕화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일은 절대 없다는 것, 수도 과정에서 비록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잘 참고 나아가다 보면 결국 무한한 복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김형렬을 통해 내리신 가르침일 것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교법 3장 9절은 호한과 신천이 하늘을 믿었다는 것도 아니요, 호한과 신천을 본받으라는 말씀도 아니다. 수도인들은 좋은 집과 좋은 음식이 없더라도 호한이나 신천과 마찬가지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것, 상제님께서 천지에 가득 내리신 덕화를 도인은 반드시 입는다는 것, 세상 몇몇 사람들이 좋은 집에 거주하고 좋은 음식을 먹더라도 그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눈길도 주지 말고, 그저 묵묵히 수도에 임한다면, 앞으로 더 큰 영화와 복록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교법 3장 9절을 활용한 교화의 강조점은 남의 처지를 부러워하거나 신경 쓰지 말고 묵묵히 수도에 임해서 세상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복을 장차 구하라는 것에 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속된말이 빈말은 아닌 셈이다.
 
 
 
 
 

01 《대순회보》 149호의 p.27에도 ‘호한신천유불사’가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별도로 나오지 않으므로 제외하였다.
02 정대진, 「호한신천유불사」, 《대순회보》 5 (1986), p.4
03 “‘호한 신천 유불사’란 구절은 타고난 복이 없는 추운 지방의 호한새도, 부리가 머리 위에 있어 떨어지는 먹이에 의존해 살 수밖에 없는 신천새도 상제님의 덕화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김근평, 「호한 신천 유불사(呼寒信天猶不死)」, 《대순회보》 207 (2018), p.75.
04 “‘호한(呼寒)’이라는 새는 부리가 머리에 달리고 발은 맨발이라 추운 겨울에 얼음 위를 걸으면 걸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오직 하늘을 믿는 까닭에 오히려 죽지 않고 ‘호한신천유불사(呼寒信天猶不死)’란 곡조를 노래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하늘을 믿는 군생만물의 신로(信路)입니다.” 교무부, 「우유통에 빠진 개구리 세 마리」, 《대순회보》 186 (2016), p.96.
05 당시 회보 간행 책임자였던 ○○선감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원고를 윗전에 이만큼 올려 드리면, 문장을 하나하나 보시고 이렇게 고쳐라 하시고 내려 주셨어요. … 위에서 그때 여주에 계시는데, 한번은 회보 원고 분량이 많은데, 올려 드렸어요. 결제가 나야지 뭘 하지. 한참 기다리고 기다려도, 임원들은 다 가고 나 혼자 있었거든, 시봉이 원고를 갖다주면서 됐다고 그러더라고 …. 회보 내는 데도 세밀하게 하셨어요.”
06 『한국불교대사전』 7 (서울: 보연각, 1982), p.27;  박경숙, 『문제는 무기력이다』 (서울: 와이즈베리, 2013), p.301.
07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반드시 피해야 할 비도덕적 행위로 세 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악덕, 야만, 자제력 없음(아크라시아)이었다. 심리학의 ‘아크라시아 현상’이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08 정미경 외, 『심리학개론』 (파주: 양서원, 2017), pp.95-96, p.182, p.304.
09 《대순회보》 5호, p.4; 《대순회보》 207호, p.75.
10 《대순회보》 186호, p.96.
11 김형렬이 가난했다는 사실은 교운 1장 1절에 나온다.
12 행록 3장 48절.
13 교법 2장 17절.
14 교법 1장 2절.
15 교법 1장 6절.
16 교법 1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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