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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최익현과 고종(高宗) 부자의 천륜

최익현과 고종(高宗) 부자의 천륜



연구위원 김주우


“죄는 남의 천륜을 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나니 최 익현이 고종(高宗) 부자의 천륜을 끊었으므로 죽어서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볼지어다.”(교법 3장 21절)


  『전경』에서 언급한 고종(高宗, 1852~1919)과 그의 친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 이 둘의 천륜(天倫)을 끊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모두 조선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위기의 시대를 함께 살며 각자가 국왕, 국왕의 생부, 신하라는 신분으로 국가 운영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조선은 제왕적 군주국가이지만, 유교를 기반으로 한 군신공치(君臣共治: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림)를 정치의 이상으로 여겼다. 최고 통치권자인 왕은 위민(爲民)과 애인(愛人)의 덕치를 실현하고 신하는 그 덕치를 매개로 간언(諫言)을 통해 왕의 통치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선의 왕권 통치는 항상 신하의 협력과 견제라는 정치적 동반 장치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실권(失權)과 고종의 친정(親政)으로 이어지는 조선말 통치 권력의 이동은 언관(言官)이었던 최익현의 상소(上疏)가 그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따르면 세 사람은 일반적인 신분 관계를 넘어 조정(朝庭)을 중심으로 서로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분명하다.
  최익현은 척양척왜(斥洋斥倭)로 저항운동을 벌인 대표적인 유림이었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가르침에 따라 위정척사(衛正斥邪: 정학을 지키고 이단인 사학을 배척함)사상을 실천하였는데, 40여 년 동안에 직언을 올린 29개의 상소문에서 그의 강직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대원군의 집권기에 그는 자신의 상소로 말미암아 유배와 함께 관직을 떠나게 된다. 그렇다면 최익현은 어떤 문제로 국왕 부자(父子)의 천륜을 끊게 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일까? 또 ‘천륜을 끊었다’라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01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당사자 간의 이해관계를 함께 살펴볼 것이다.



고종의 왕위계승과 흥선대원군의 집권
  1863년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죽자 효명세자(孝明世子: 순조의 아들로 익종에 추존)의 비인 조대비(趙大妃: 신정왕후, 1808~1890)의 지명에 의해 왕실의 방계인 12세의 고종이 군주에 올랐다. 고종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철종의 왕위를 계승하면서도, 왕실의 집안 계통은 익종을 계승했다. 즉 익종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이에 조대비는 국왕의 어머니로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40세의 흥선군은 고종의 즉위와 함께 대원군(大院君)으로 봉작되고, 조대비의 지시로 어린 왕을 위해 ‘보정(輔政)’하는 권력을 갖게 된다.02
  이로써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천륜을 동반한 정치적 여정을 함께 시작한다. 왕의 친부로 ‘살아있는 대원군’이라는 존재는 조선의 정치사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등장 자체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흥선대원군은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직책은 없었으나 왕의 종친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기관인 종친부(宗親府)의 최고 자리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흥선대원군은 조대비의 지지에 힘입어 종친부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고종의 급선무는 성학(聖學: 성인이 되는 학문)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강연(講筵)을 통해 정치적 역량을 키워감과 동시에 대신들과 회합에 참여하여 치국(治國)에 대비하고 있었다. 어린 국왕은 자신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을 대하는 태도가 극진했다. 대궐인 창덕궁과 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의 편리한 왕래를 위해 경근문(敬覲門: 고종의 전용문)과 공근문(恭覲門: 대원군의 전용문)을 만들도록 지시하고,03 조대비를 모시고 운현궁에 행차하여 대대적인 행사를 열고,04 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올 때는 숭례문 밖에 나가 그를 마중하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05 이처럼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신하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866년 고종이 15세가 되자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운현궁에서 민치록의 딸(후에 명성황후)과 혼인을 하였다. 이제 고종은 친부인 대원군에게 정책결정권을 위임한다.06 그러므로 흥선대원군은 국왕처럼 전교(傳敎)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할 때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라는 체제로 광범위하게 조선의 개혁을 추진한다. 그의 개혁 방향은 60년 동안 세도정치로 실추된 왕권의 강화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 전정·군정·환정)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련의 혁신이었다. 가장 먼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景福宮)을 대규모의 예산과 토목공사(1864년 4월~ 1868년 6월)로 중건했다. 1871년에는 백성의 원성이 높던 서원(書院)을 전면적으로 철폐하고, 특권지배층이 전횡하던 면세전(免稅田)의 환수와 토지의 겸병을 금지하는 정책을 단행했다. 또 군포(軍布)인 호포법(戶布法)을 지배층인 양반에게도 적용하여 국가자원을 확충했다.
  흥선대원군의 과감한 개혁정책은 고종의 통치권 위임과 의정부·육조에 친위세력을 배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특히 대원군의 권력 장악과 행사는 고종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권력 구도는 관료집단 내·외부에서 잠재적으로 흥선대원군에게 반대세력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최익현의 상소: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책에 대한 저항은 1866년에 토목공사의 중단을 요구한 이항로의 상소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실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비판한 것은 그의 제자인 최익현의 상소이다. 36세의 면암은 사헌부 장령(掌令)이었던 1868년 고종에게 올린 상소문 때문에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는다.07
  그는 당시의 폐정(弊政)을 비판하고 긴급히 해결할 시무책으로 ‘토목역사(土木役事)의 중지, 취렴정치(聚斂政治)의 혁파, 당백전의 폐지, 사대문세(四大門稅)의 징수금지’를 제시했다. 이 상소는 흥선대원군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모두 경복궁 중건사업을 추진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대원군이 위세를 떨치던 상황에서 면암의 상소는 막혀 있던 언로(言路)를 열었다는 평가08와 더불어 그에게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09도 많았다. 그러나 고종은 최익현이 사직하자, 곧바로 그를 더 높은 품계인 돈령부 도정(都正)에 임명했다. 이 일로 한결 용기를 얻은 최익현은 5년 뒤인 1873년 10월 25일에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사직하면서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10
  최익현의 상소는 정권의 인사문제와 동시에 대신들 전체의 무능함을 에둘러 비판했지만, 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집행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며 정계 개편을 요구한 것이다. 이를 고종은 충심으로 이해하고 최익현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하는 답을 내린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의정부와 삼사 및 승정원의 관리들은 연명(聯名) 상소를 통해 자신들의 사직과 최익현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또 성균관 유생들이 고종의 태도에 불만을 표출하여 모두 관을 나가는 권당(捲堂)이 일어났다. 고종은 이에 대해 파면과 유배라는 중징계로 단호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상소에 사용된 ‘정변구장(政變舊章: 정사에서 옛날 법을 변경함)’과 ‘이륜두상(彝倫斁喪: 떳떳한 의리와 윤리가 파괴됨)’이라는 말은 정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일부 대신들이 ‘이륜두상’은 증거도 없는 모호한 말이라고 날 선 비판을 가하자, 면암은 10여 일 뒤인 11월 3일에 호조참판을 사직하면서 구체적 조목들을 나열한 장문의 상소를 다시 올렸다.11


지난번 상소 가운데 이미 문제를 끌어내고는 말을 자세하게 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의 의논을 보니, 정변구장 이륜두상(政變舊章彝倫斁喪) 여덟 글자를 가지고 신을 규탄하는 칼자루로 삼고 있으니, 신은 거듭 다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것을 보면 황묘(皇廟: 만동묘)의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書院)의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鬼神: 조상)의 후사(後嗣)를 이어나가는 일로 아비와 자식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과 역적의 구분이 섞이게 되었고, 호전(胡錢: 청나라 돈)을 사용하게 되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분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 몇 가지 조목들은 한 조각이 되어 천리와 인륜이 이미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토목공사의 원납전(願納錢) 같은 것이 서로 안팎이 되어 백성들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왕의 옛 전장(典章)을 변경하고 천하의 의리와 윤리가 썩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인 만동묘와 서원의 철폐, 종친 세력의 지위와 역할 강화, 재원 확충정책 등을 열거하고 이를 ‘정변구장’과 ‘이륜두상’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리고 고종이 군주의 통치권을 회복하고 적임자를 등용하여 바른 정치를 펼 것과 ‘친친(親親)’의 반열에 있는 자는 국정에 관여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12 이 말은 사람들에게 흥선대원군의 실정에 대한 비판과 함께 직접 그의 퇴진을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급기야 골육(骨肉)을 이간질했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고, 이에 따라 충효(忠孝)를 윤리의 근간으로 하는 조선 사회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을 논한 상소가 관료를 비롯해 종친에게까지 문제를 일으키자 고종은 파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즉각 최익현의 유배를 결정한다. 그러나 정부 관료들은 고종의 명을 시행하지 않고 국청(鞫廳)을 열어 죄상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고종과 관료들 간에 전례가 없던 충돌로 이어졌다. 대신들의 강경한 태도에 맞서 고종은 급히 친정(親政)을 선언하지만, 최익현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국왕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명에 따른 것이라며 최익현의 제주도 유배형을 관철하였다.13 결국, 이 상소를 도화선으로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상소의 쟁점: 부자(父子)와 군신(君臣), 어느 관계가 우선인가?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두 사람은 사적으로 혈육의 부자 사이이며, 국가 권력에서는 왕과 그 왕을 보정하는 재상과 같은 위치였다. 이를 볼 때 대원군의 특수한 신분상 부자 또는 군신의 문제를 명백히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같다. 따라서 최익현의 상소에서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원군에 대한 언급이었다. 그는 이륜두상을 해명한 상소에서 대원군을 권력을 위임받은 한 명의 신하로 규정한 후, 그 신하가 고종의 총명을 가리고 권세를 남용한 결과 강목(綱目)이 무너지고 지금의 폐해가 초래되었다고 주장한다.14 즉 시폐(時弊)의 원인을 신하가 군주에 대한 충(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에서 찾았다. 훗날 최익현은 이와 관련하여 동문 선배였던 양헌수(梁憲洙, 1833~1907)에게 자기의 생각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최익현은 편지에서 대원군이 주상(主上: 고종)의 친부이지만, 그 의리(義理)는 군신의 관계이기 때문에 직통의 부자 사이와는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정과 대원군이 동등한 신하이기 때문에 조정의 신하가 주상을 섬기는 방법으로 대원군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15 고종에 대해 대원군과 모든 관료가 같은 신하의 입장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고종이 군주가 된 이상, 흥선대원군과의 사적인 사친(事親: 어버이를 섬김) 관계를 끊고 단지 낳아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는 혈연으로 연결되어 해체 불가능한 관계로 받아들인다. 이것을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 천륜이라 말하며 인위적인 당위가 아니라 천연(天然)한 인성(人性)의 발로가 효(孝)이다. 그러므로 천륜인 효가 모든 윤리의 근본이 되어 충과 예로 확장된다고 규정한다. 즉 사람이 지켜야 할 강상(綱常)의 윤리에서 혈연에 기초한 천륜 관계가 인륜의 근본이 되므로 부자 사이의 입장이 우선시 되는 것이다. 따라서 효보다 충을 더 강조한 최익현의 발언은 고종이 친정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줬지만, 궁극에 천륜을 끊게 하는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고종의 처신에 불만을 품은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별장[경기도 양주]에 칩거하게 된다.
  이에 고종의 불효를 비난하는 유생들의 여론이 들끓자 부자 사이에 서운한 감정의 골은 깊어갔다.16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민씨 척족 세력은 대원군의 쇄국(鎖國)정책과 달리 개화(開化)정책을 펼친다. 강화도조약(1876년)을 시작으로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 등 연이어 파생된 국내외의 정치적 사건은 고종 부자의 대립각을 더욱 첨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자신의 서자(庶子)인 이재선 역모 사건[1881년 고종을 폐위하고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미수에 그침]과 며느리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년 일본의 공권력이 경복궁을 습격해 왕비를 참혹하게 시해함]의 누명까지 쓰게 되자 고종의 부자 관계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결국, 1898년에 79세의 흥선대원군이 사망했지만, 고종은 문상조차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17
  최익현의 상소(1873년)로 이루어진 결과는 상제님께서 “최익현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끊었다”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은 역사적 현실로 전개되었다. 그의 상소는 비록 일신(一身)의 안위보다 의리를 실천한 충절이었지만, 결국 남의 천륜을 끊는 양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천륜을 저버린 행위를 패륜(悖倫)이라 하니, “죄는 남의 천륜을 끊은 것보다 큰 것이 없다”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러나 최익현은 자신의 상소는 애군우국(愛君憂國: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함)에서 나온 것뿐이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18 당시에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서 강직한 성품의 선비는 국가의 안녕을 위해 군신의 의리와 명분을 강조했지만, 자신의 의도와 달리 국왕 개인의 부자 관계를 끊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01 《대순회보》에서는 최익현의 생애를 다룰 때, 그의 상소로 대원군의 친정과 고종의 하야가 이루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교법 3장 21절과 연관하여 고종 부자의 천륜이 끊어졌다거나 부자지간을 이간시켰다고 언급할 뿐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대순회보》, 24호 ‘혈성으로 천지신명을 움직인 최익현’, 65호 ‘최익현과 박영효의 원’, 82호 ‘고종(高宗)’, 127호 ‘면암 최익현’].
02 김병우, 「대원군의 정치적 지위와 국정운영」, 『대구사학』 70(2003), pp.35-39.
03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1년 9월 1일.
04 『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1년 9월 24일.
05 같은 책, 고종 2년 8월 30일.
06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3년 3월 17일.
07 『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5년 10월 10일 「장령최익현소략(掌令崔益鉉疏略)」.
08 『기려수필(騎驢隨筆)』, 1906년~1908년, 崔益鉉(一) 丙午淳昌義兵.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09 『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5년 10월 14일 「사간권종록소략(司諫權鍾祿疏略)」.
10 같은 책, 고종 10년 10월 25일 「동부승지최익현소략(同副承旨崔益鉉疏略)」.
11 같은 책, 고종 10년 11월 3일 「호조참판최익현소략(戶曹參判崔益鉉疏略)」.
12 같은 책, 고종 10년 11월 3일 「호조참판최익현소략(戶曹參判崔益鉉疏略)」. “若其不在其位, 而惟在親親之列者, 只當尊其位, 厚其祿, 勿使干預國.” 여기서 친친(親親)이란 ‘부모를 친애한다’는 뜻으로 혈연적 윤리 관계를 가리킨다.
13 김성혜, 「1873년 고종의 통치권 장악 과정에 대한 일고찰」, 『대동문화연구』 72(2010), pp.370-375.
14 『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 10년 11월 3일 「호조참판최익현소략(戶曹參判崔益鉉疏略)」. “特因任事之臣, 壅蔽聰明, 操縱威福, 綱目俱弛, 而致有今日之病弊也.”
15 『면암집(勉菴集)』 제7권, 서(書), 양 판서(梁判書)에게 답함 - 을해년(1875) 5월 13일. [한국고전BD(db.itkc.or.kr)].
16 김병우, 「대원군정권의 권력기반과 개혁정책」 (경북대학교 박사 논문, 2004), pp.274-277.
17 『윤치호일기(尹致昊日記)』 5권, 1898년 2월 26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18 『면암집(勉菴集)』 부록 제1권, 연보, 계유년(1873) 11월 8일. [한국고전BD(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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