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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9년(2019)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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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공모전 : 대순문예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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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심사평



신유식(문학박사)


[총   평]


  좋은 글을 완성하기 위해 하얀 밤을 지새웠을 전국의 <대순문예> 응모자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대순문예〉에 응모해 입선한 작품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높은 수준으로 늘어났다. 제10회였던 작년에는 그간 입선한 작품을 모아 『도담도담』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많은 부수를 찍어 배포한 책은 아니지만 읽기 편하고 체험된 글들이라 인기가 좋았다. 그만큼 <대순문예>에 응모하고 입선된다는 것은 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한다.
  올해는 <대순문예> 11회로 응모작은 더 치열하고 문예는 높아졌다. 당선작과 선(選)에는 올랐으나 아깝게 탈락한 작품 사이는 종이 한 장 차이 정도였다. 응모한 작품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그 수준이 훨씬 높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말을 다루는 솜씨나 생각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작품들이 많아 당선작 한 편을 결정하는데 꽤 고심해야 했다.



[운   문]


  <대순문예>에 응모한 운문 편수는 50여 편에 이르렀다. 운문의 저조를 우려했던 관계자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증명하듯 응모자들의 운문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다. 50여 편의 작품을 살펴보고 난 뒤 심사위원들의 한결같은 평은 ‘열정’이라는 단어였다. 너무 열기가 가득하여 경전처럼 나열한 시도 있었다. <대순문예>는 신앙시를 원하는 것이지 경전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등 10편이었다. 최종 결선에 오른 작품은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반딧불’, ‘엄마의 가을’ 세 편으로 작품 수준은 기성 시인의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을 만큼 시적 수업의 흔적이 보였다.
  그런 중에도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는 심사위원들의 눈을 끄는 작품이었다. ‘오늘 날씨를 당신에게 물어보는’ 시다. ‘날씨를 물어본다’라는 것은 대단한 통찰이다. ‘날씨’는 누가 주관하는가? ‘당신’이다. 날씨는 천지조화이다. 이를 주관하는 이에게 ‘건강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당신’은 시인이 추구하는 진리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혹은 상제님일 수도 있다. 아니면 한용운이 말하는 ‘님’일 수도 있다. 이 단어는 상징적이다.
  시 전편을 다시 읽는 동안 그 시가 마음에서 길어 올리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순수하고 절실했던 시절을 갈구한다는 메시지였다. 읽는 이로 하여금 신앙심으로 회귀하게 만드는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와 더 가까이 다가앉으면, 이 시는 한 편의 큰 그림이 지나가는 듯하다. 마치 카메라가 풍경을 찍고 있는 듯하다. 보자마자 딱 시선을 고정하고 찍는다. ‘첨성대’를 보여 주었다가 ‘나이테’를 보여 주었다가 ‘계림’으로 넘어간다. 이런 기법을 현대시에서 ‘몽타주’라고 한다. 가장 현대시적인 기법이다.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관계없는 사물들이 부딪친다. 시상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시상이나 시어들이 마주쳐서 조우가 된다. 시인이 바라보는 서로 다른 세계들이 마주하기도 하고 만나기도 한다. 이를 ‘시어의 갈등’이라 한다.
  시어는 또한 날씨와 관련이 깊다. ‘첨성대’는 별을 관찰하는 자리이다. ‘계림’은 새벽의 닭 울음소리와 함께 평생 진리를 닦는 고승이 보이는 시어이다. 또한 ‘월성’은 잔잔한 보름달 비치는 성이다. 그게 우주이고 날씨다. 그 속에 시간을 넣어 두었다. ‘강’이다. 흐름이다. 그 흐름 속에 ‘나무’는 하늘로 성장한다. 천년을 주관한 ‘당신’에게 시인은 그 속에서 오늘의 천지조화를 묻는다. 흥미롭다. 숨은 장치는 그래서 고대 도시 경주를 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세련된 시어의 배치가 두드러진다. 낯익은 시어를 미묘한 갈등으로 자리 잡아 차분히 배열하고 있다. ‘가을이 걷는다’라거나 ‘햇살 한 줌’이라는 표현들이 그렇다.
  ‘계림’이라는 시어도 상징적이다.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진리 세계로 깨달음으로 가는 공간들이다. ‘계림’은 가보면 안다. 진리를 찾아 나섰던 고승 충담사가 ‘찬기파랑가’를 지은 곳이다. 실제로 숲이 울창하다. 유서 깊은 장소에 체험적 현장성이 살아있다. 그리고 종교적 초극(超克)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자기 체험만 기술하면 수필이다. 시는 반드시 그것을 넘어서는, 그리하여 초극한다. 현장성을 살리고 있으면서도 현장성을 넘어서는 시적, 종교적, 정서적, 초극성이 섬광처럼 빛나는 작품으로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
  들꽃도 아니고 ‘풀꽃’이다. ‘나이테’는 성장이다. ‘풀꽃의 노래’를 들으면서 ‘나무가 성장’한다고 작가는 바라보고 있다. 그 ‘나무’가 신성성이 가득한 ‘계림’에 있고, 그 ‘계림’은 종교적 진리로 가득한 공간이며 깨달음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풀꽃의 노래를 들으면서 성장한 나무. 대단한 예지력이고 관찰력이다. 이 시의 ‘당신’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신성을 담보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천년이 되면 소멸한다. 그런데 ‘천년이 오고 가도’ 당신은 소멸하지 않는다. 이걸 기다리는 사람은 신도(信徒)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날씨’는 마치 이 시를 쓴 시인의 ‘영혼의 색깔’이랄까?
  최종심에서 같이 논의된 작품은 ‘반딧불’이었다. 짧고 간결한 ‘반딧불’이 지닌 함축과 언어 구사의 부드러움이 퍽 인상적이었다. ‘반딧불’은 시어의 집중력이 좋다. 시상의 집중이 ‘해원’으로 가서 안정성이 있다. 쉽게 쓴 시이다. 시상의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아주 훌륭한 작품이다. 심사위원들이 내내 고심했던 것도 이 시상의 집중이다. 앞 편의 시가 시상이 몽타주 수법이라면 ‘반딧불’은 ‘해원’이라는 시어에 집중했다. 그래서 시가 단단해 보였다.
  반면에 구체성이 떨어진 것이 아쉽다. 그 한이 무엇인지 너무 추상적이다 보니 집중이 희미해지는 점이 아쉽다. ‘반딧불’은 마지막 연이 절정이다. 빛이 대순 진리가 빛으로 나타낸 것이다. 진리가 ‘반딧불’로 승화된 시이다. 그런데 ‘해원’이 한을 푼다는 것인데 말은 좋긴 한데 진솔성이 떨어지고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한을 푼다는 말은 좋지만 무슨 한인지 모른다. 또한 ‘반딧불’에서는 ‘알아주는 이/찾아오는 이, 돌고 돌아’ 등 중언부언하는 부분이 많아 지루한 느낌을 주었고, 눈에 거슬렸다. 많이 말한다고 해서 설득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또 글을 잘 썼다고 해도 모두 ‘좋은 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황량한 들판에 강이 되어’가 그렇다. 아름답게 말하려는 의욕이 넘쳤다.
  시라는 것은 시상을 집요하게 집중시키는 것이다. 시상의 집중도가 떨어지면 문제가 된다. 시상이 섬광처럼 만나는 미묘한 갈등이 나와야 한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까지 서로 겨루며 보던 ‘반딧불’은 갈등보다 ‘해원’의 시어에 집중되었다. 대신 갈등이 부족하다. 그래서 당선작을 갈릴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시상의 고도의 집중이냐 엉뚱한 시상의 충돌로 오는 섬광 같은 갈등이냐로 본 것이다. 결국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면서 능숙한 시상의 전개를 보이는 시와,  소박하지만 청신한 감각을 보이면서 시상이 집중된 시 중에서 심사위원들은 전자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당선작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를 쓴 작가는 상당히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로 보이는데 앞으로 그 감각에다 힘을 보태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엄마의 가을’은 취할 바가 적지 않았다. 시상이 정형적이고 이미지 역시 친숙하다. 그래서 시가 정겹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정겨움의 깊이는 있지만 소품이다. 엄마가 겨울을 준비하는 정경이 시적이고 그저 정겹다. 엄마의 풍경을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지만, 시선이 따사로워 자꾸 시를 읽게 한다. 그림으로 치면 장면이 아름답고 이쁘다.



[산   문]


  한 사람이 가진 힘을 측정하려면 그 사람이 무엇과 맞서 싸웠는지 살펴보면 된다는 말이 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작품은 무엇을 문제 삼았는가? 그리고 스스로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찾아가고 있는가? 이걸 우리는 ‘주제의식’이라 한다. ‘수도’라는 험난한 길을 설정하고, 그 길을 헤쳐나간 모든 응모자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그 길을 헤쳐나가는 과정을 쓴 산문은 감동을 준다. 감동은 체험에서 나온다. ‘그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리니’는 대단한 체험이다. 체험 없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고 허구는 무수한 장치가 나와야 한다. 이는 고도로 글쓰기 훈련이 된 작품만이 감동을 준다. 응모한 작품 중에 조직성이나 완결성에 부족하지만, 간접체험을 체득화한 작품도 다수였다.
  최우수작 ‘그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리니’는 최초의 착상을 안정된 어조로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돋보인 작품이다. 차분한 문장도 읽는 이로 하여금 몰입하게 한다. 그에 비해 서사적 구성력은 좀 떨어지는 편이었다. 의욕이 넘친 탓이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려다 보니, 어떤 부분은 심한 축약으로 훼손되고 어떤 부분은 장황했다. 작은 제목을 달고 글을 구성하는 방법은 녹록지 않은 문장 수련의 결과로 보였다. 하지만 제목과 구성 방식에 너무 고심한 나머지, 작품이 발휘해야 할 ‘감동적 울림’이 적은 게 흠이었다.
  ‘초보 농사꾼의 소중한 결실’ 약간 작위적인 듯한 구성과 통념적인 감정이 그대로 노출된 단점이 있었다. 다만 이 작품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서사의 진행과 궤를 함께하는 절제된 주제의식으로부터 나오는 힘이다. 큰 논란 없이 우수작에 올렸다.
  ‘생명의 소중함’은 서사의 근원은 인물과 사건의 긴장과 갈등에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해 준 작품이다. 그리고 작가가 아프다고 말하면 독자는 전혀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도 상기시켜주고 싶다.
  글을 쓸 때 원고지 사용법을 지켜 주었으면 한다. 문단을 만드는 방법이 미숙한 작품과 문장의 호응이 떨어져 읽기가 불편한 작품들도 많았다.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은 말과 글이다. 말은 본능적이다. 배우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로 소통할 수 있다. 글은 다르다. 글은 배워야 한다. 글을 남기는 것은 후대를 위해 증명하는 것이다. 현재 나를 증명해 나가면서 그 글이 먼 후대에 현재를 증명해 남긴다. 그래서 글은 위대하다. 글은 그 사람이다. 겉모습은 얼굴에 드러나지만, 그 사람의 내면은 얼굴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글은 그 내면을 드러낸다. 한편의 글은 그 사람을 드러내는 행위다. 글자 한 자 한 자 써나가는 것은 잉크가 아니라, 그 사람의 피다. 온 정신을 다 해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정신적 지문과 같다. 그래서 육체는 사라지지만 글과 정신은 후대까지 남게 된다.
  정신은 사람을 만든다. 수도하고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어렵고 지난하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글로 남긴다는 것은 실로 거대한 일이다.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더 잘 알기 위해 분석하거나 관찰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내공이 필요하다. 어떤 내공인가에 대한 답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대로 받아 주거나 해 주는 것을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라 한다. 그런 느낌이 종교적으로 체득화되어 알려주는 것이 <대순문예>의 시대적 정신이 아닌가 한다.
  지금 도인들이 거닐고 있는 여주본부도장에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가슴을 적시고 있다. 그러한 바람들이 정다운 모국어가 되고 대순 정신으로 피어올라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언제나 따스하게 읽어주길 기원한다.



  이 글이 나오기까지 긴 시간 작품을 같이 읽고 심사해 주신 분당 대진고등학교 김진화 교감 선생님과 대진고등학교 김곤선 선생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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