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문예 심사평 : 문득, 글로 물어보는 길道
문득, 글로 물어보는 길道 12회 대순문예 공모전 최우수 수상작을 ‘장몽(長夢)’으로 결정하는 데에는 모든 심사위원이 쉽게 찬성했다. 코로나19 시대에 늪 같은 일상 속에서 ‘문득, 글로 물어보는 길’이라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높이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총 평] [운문 심사평] ‘장몽(長夢)’은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간결한 문체의 감응력이 주목된 작품이다. 시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가 기법적이다. 이른바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詩)는 처음부터 머리 길게 늘어진 수도인을 떠올리게 한다. ‘장(長)’이란 ‘머리 긴 나이 많은 노인’을 본뜬 자형(字形)이다. 그 노인이 꾸는 꿈은 말씀이다. 아니 제목 ‘장몽(長夢)’ 글자 자체가 말씀이다. 생각해 봐라. ‘꿈’이라고 하면 춘몽(春夢), 태몽(胎夢)이거나 현시몽(現視夢), 백일몽(白日夢) 정도로 생각한다. 아니면 조선 시대 강항(姜沆,1567~1618)의 ‘청몽(淸夢)’을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냥 ‘긴 꿈’이라 해도 될 것을 굳이 ‘장몽(長夢)’이라 했다. 쓸모없어 보이는 ‘긴 꿈’의 말이 무엇일까? 시인의 귀에는 이미 긴 우주에 다가가 있다. ‘달그림자 나란히 베고서’ 사는 분이지만 때 묻고 병든 세상을 하늘로 끌어들여 빨아내고 싶은 분이 아닐까. 역병이 어리석고 음습한 속내를 타고 급격히 전파되고 병들고 그악스러운 말들의 굿판이 창궐하고 있는 ‘누릿하게 올 풀린 날들’이다. 쉽게 그칠 기미마저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욕망에 눈먼 인간의 말이 아니라 저 ‘고요히 익어가는 품속’, ‘은하수 빛살’, ‘긴 잠에서 깨어난 염원’의 언어일 것이다. ‘상사화’, 뒤척이는 상사화들! 바람은 잔잔한데 도장 앞은 온통 상사화로 분분한 날을 상상한다. 붓을 든 작가의 마음도 질긴 인연(因緣)으로 분분했으리라. 시를 읽고 나면, 내 몸에도 상사화가 핀 듯하다. 몸속에 상사화가 피고 나면 마음이 무장해제 된다. 야무지게 닫아 버린 마음이 스스로 열리게 하는 시이다. ‘햇살’을 사랑하고 살아온 ‘어미의 삶’을 사랑하고 남겨 준 ‘추억과 슬픔’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 앞에 무엇이 그립고 무엇이 한(恨)일까? 어떤 마음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볍다. 한없이 깊은 ‘추억’은 오히려 너그러운 마음의 영토를 가진 느낌을 준다. ‘운동화’는 아주 단순한 모티프를 이용하여 시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이 지닌 로망스적인 사랑 이야기는 낡은 주제이지만 새로운 감동을 던져 준다. 그것은 바로 각자의 ‘운동화’라는 모티프가 갖는 시공을 넘나들며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정치(精緻)함에 의해 가능했다. [산문평] ‘나의 할머니’ 85세 할머니는 단순한 옛 인물의 주석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재창조된 문학의 향기를 지닌 글이다. 주기성과 균질성을 특징으로 하는 양화(量化)된 시간(과거·현재 ·미래로 대변되는 불가역적인 시간) 이전에 시중(時中)이 이미 언제나 있다는 것을 느낀다. 과거· 현재 ·미래를 차별적으로 구성하면서 동시에 통합되는 시간의 형식이다. 글을 읽으면서 ‘운동하고 변화하는 모든 것은 시간 속에 있지만, 시간 자체는 변하지도 운동하지도 않는다. 시간 자체는 변화하고 운동하는 모든 것의 형식이다’라는 들뢰즈의 말을 끊임없이 떠올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소재를 간단하게 삽화로 처리해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주제가 약한 것은 아니다. 수도에 관한 이야기는 꽤 진행되고 있다. 주제로서의 응집력도 단단하다. ‘1시간도 못 돼서 다리가 마비되는’과 같은 체험된 문장이며 남성적인 큰 틀의 글이면서 여성적인 섬세함이 깃들인, 미학적인 안목을 가졌다. ‘행복한 영농작업 중에’는 가시적인 행위나 상황의 묘사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묘사의 대상인 행위나 상황은 까다롭다고 할 정도로 엄격하다. 묘사가 아무리 치밀하다고 하더라도 긴요하지 않은 대상을 잡으면 자연 플롯이 무너지고 애초의 창작 의도와는 다르게 된다. 대상을 엄밀하게 추려내는 태도도 태도려니와 대상에 얽힌 기본지식의 확보도 작가의 특유한 묘사 정신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영농에 필요한 물건인 삽질과 굴렁쇠, 주전자 등에 대한 남다른 경험들은 글 속에 그냥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기능하고 있다. 글의 중심사건의 성격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여러 방면의 전문지식이 증진해 주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나’는 분명 현란하게 구사되는 언어의 끝에서 만나게 된 작품이다. 역병이라는 격리 때문인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자신을 끄집어낸 슬픈 수도 현실 속에서 최선의 도에 대한 제일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마음을 다잡으려는 치기와 현란한 문장의 몸짓 아래 숨어 있는 작가의 정체성 찾기가 치열함이 보인다. 글로 판단하건대 주석과 문장과 마음이, 풍요롭고 깊은 성찰과 자유롭고 날렵한 언어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글에서 그 통속을 가르는 힘으로 마침내 정체성은 확연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글을 읽어 보면 문장 한 줄 한 줄이 촘촘하게 교직되면서 빈틈없는 플롯을 만들어 내고 있다. 글 속의 문장들은 정확성과 정밀성 그리고 간결성을 지켜내고 있다. 글을 쓰면서 작은 것이 탄탄하면 큰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형식이 잘 갖추어지면 의식이 알맞게 형성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얼핏 바람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4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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