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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 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

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



교무부 김주우



천지 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 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하나니
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교법 3장 29절)


들어가는 글


  『전경』에는 상제님께서 옛사람들의 일로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신 교훈의 내용들이 있다. 이 글의 주제인 ‘공명지 정대와 자방지 종용’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위 성구에서 상제님께서는 “천지 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 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하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가르침은 ‘천지가 종용한 일도 나로부터 비롯되고 천지가 분란한 일도 나로부터 비롯된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종용한 일과 분란한 일이 모두 나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명지 정대와 자방지 종용”, 즉 역사적 인물이었던 ‘제갈공명(諸葛孔明, 181~234)의 정대함’과 ‘장자방(張子房, ?~기원전 186)의 종용함’을 모범 삼아 본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제갈공명과 장자방은 동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군웅들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투었던 분란의 시대에 자신만의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겨 후대로부터 많은 존경과 평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은 그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와 모습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글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교훈의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정사(正史)에 나타난 제갈공명과 장자방의 행적을 통해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을 살펴볼 것이다.

 


제갈공명과 장자방의 생애


  제갈공명과 장자방은 중국의 역사에서 사회ㆍ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이다. 제갈량이 활동한 시대는 후한(後漢, 25~220)이 무너지기 직전 십상시의 난과 황건적의 난으로 100여 년에 걸친 전란의 시기였고, 장자방이 활동한 시대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기원전 210)이 통일제국을 이룬 후 20년이 지나지 않아 각처에서 영웅들의 봉기가 난무했던 시기였다. 두 사람은 난세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묘책(妙策)과 지략(智略)을 발휘하여 불세출의 활약상을 남겼다. 제갈공명은 유비(劉備, 161~223)를 도와 삼국[위(魏)ㆍ촉한(蜀漢)ㆍ오(吳)] 정립의 한 축을 형성했고, 자방은 유방(劉邦, 기원전 256~기원전 195)을 도와 한(漢)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므로 제갈공명과 장자방은 후대로부터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군사(君師) 또는 책사(策士)로 칭송받고 있다.




  정사에 실린 제갈공명과 장자방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갈공명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서 처음 시작된다. 『삼국지』 「제갈량전(諸葛亮傳)」에 따르면 후한(後漢)말 낭야(琅邪) 양도현(陽都縣)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량(亮), 자는 공명(孔明), 호는 와룡(臥龍)이다. 207년에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가 제갈량의 명성을 듣고 그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간 일)의 예를 받고 세상에 나섰다. 당시 유비는 “내가 제갈량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01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 후 제갈공명은 유비의 군사가 되어 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훗날 촉을 건국하여 위ㆍ오와 함께 중국을 삼분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 유비 사후에는 유선(劉禪: 유비의 아들)을 보필하여 촉나라의 경영에 힘썼고, ‘북방을 수복하라’는 유비의 유지를 받들어 조조의 위와 결전을 위해 출사표(出師表)를 내고 직접 출병한다. 이때 제갈공명은 유선에게 국가의 장래를 위해 현신(賢臣)을 추천하며 내치를 도모할 것을 담은 출사표와 충의(忠義)로 출정의 각오를 담은 출사표를 두 번에 걸쳐 올렸다. 227년부터 5차에 걸쳐 북벌에 나섰으나 234년에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전투에서 병사했다.


▲ 「삼고초려」, 요사부손(일본), 18세기, 구글 아트 & 컬처



  장자방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86)의 『사기(史記)』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기』 「유후세가(留侯世家)」에 따르면 자는 자방이고 이름은 량(良)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한(韓)나라의 귀족 자제였던 장량은 진(秦)나라의 공격으로 나라와 부모를 모두 잃게 되자 복수를 다짐한다. 장량은 박랑사(博浪沙)02를 지나던 진시황을 저격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후 은신하며 지내다가 우연히 황석공을 만나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해 받고 열심히 병법을 공부하게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유방을 만나 책사가 되어 한신(韓信)과 소하(蕭何) 등과 함께 한(漢)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업을 이룬 한고조(漢高祖) 유방은 “장막 속에서 전략을 세워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자방보다 못하였다.”03라고 회고하였다. 기원전 201년, 한나라 개국과 함께 행해진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라 한고조가 장량에게 부유한 제(齊) 지방의 3만 호 봉지(封地)를 주었으나 사양했다. 1만 호의 유후(留侯)에 봉해진 장량은 부귀영화가 예약되었지만, 세속의 일을 떨치고 전설의 신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르고자 했다.




  장자방과 제갈공명이 이루었던 혁혁한 공헌은 그들의 사후에 더욱 조명을 받게 된다. 이들의 뛰어난 활약이 있었기에 유방은 항우를 이기고 한을 건국할 수 있었고, 유비는 강대한 조조(曹操 155~220)의 위와 손권(孫權, 182~252)의 오를 상대로 촉한을 건국할 수 있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영웅들의 관계에 주목하여 유비와 제갈공명, 유방과 장자방을 모범적인 군신 관계의 전형으로 설정하였다. 특히 제왕의 책사였던 장자방과 제갈공명은 군주들이 바라던 신하의 이상적인 모습이며 신하들 또한 흠모해 마지않았던 참모의 상징적인 인물로 거론되었다. 그러므로 제왕들은 자신을 도와서 중요한 공을 세운 참모를 ‘나의 장자방’이라고 불렀고, 참모들은 스스로 자신을 장자방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제갈공명 또한, 유비의 참모로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그의 자인 ‘공명’은 충의(忠義)와 지략(智略)을 겸비한 참모 또는 인물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제갈공명의 정대와 장자방의 종용


  『삼국지』 「제갈량전」과 『사기』 「유후세가」는 후대 사람들의 역사 인식에 따라 통감과 사략 등의 역사서에서 다시 재해석되었다. 송대(宋代) 주자(朱子, 1130~1200)가 촉한(蜀漢)의 정통론을 근거로 저술한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은 후대의 대중문화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는데, 이는 시대의 추이에 따라 유행한 문학작품에도 반영되었다. 이러한 문학사조의 변화를 계기로 제갈공명과 장자방의 활약과 업적은 더욱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 특히 원(元)ㆍ명(明) 시기에 발간된 소설 『서한연의(西漢演義)』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와 관련된 작품들이 조선과 일본 등 인접 국가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조선에서는 16세기에 『서한연의』와 『삼국지연의』가 수입되었고,04 이후 『서한연의』는 『초한연의(楚漢演義)』와 『초한지(楚漢志)』로 『삼국지연의』는 『삼국지(三國志)』로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동아시아의 수많은 독서인이 장자방과 제갈공명의 영웅적인 면모를 소재로 글을 쓰거나 인물평을 남겼다.
  공명과 자방에 대한 역대의 평가는 왕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經筵)과 왕이 과거시험에서 정치의 계책을 묻고 답하는 책문(策問), 문학작품인 한시(漢詩)와 학문을 논하는 사제 간의 편지글 등 여러 방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성리학(性理學)을 집대성한 주자였다. 주자는 그의 스승인 연평(延平) 이통(李侗, 1093~1163)이 말한 내용이라 밝히면서 “공명은 자방의 종용함만 못하고, 자방은 무후의 정대함만 못하다(孔明不若子房之從容, 而子房不若武侯之正大也.)”05라고 하였다. 이를 간명하게 말하면 ‘자방은 종용하고 무후[공명]는 정대하다’라는 것이 평가의 핵심이다. 그러나 주자는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즉 정대와 종용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태도와 모습[또는 활동과 처사]을 지칭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무후의 경우는 명분과 의리가 모두 바르고 숨기는 것이 없다고 밝혔을 뿐이다.06 이후 주자의 성리학을 숭상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제갈공명과 장자방을 평가할 때 주자의 말을 전범으로 추존하였지만, 그가 밝히지 않았던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겼다.
  먼저 정대와 종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대(正大)는 ①아주 바르고 지극히 큼 ②공정하고 사심이 없음 ③언행이 바르고 의젓함 ④ 넓고 크며 규범적임 등의 용례로 쓰인다.07 종용(從容)은 ①거동 ②느긋하고 한가한 모양 ③남의 일을 주선함 또는 교제함 ④서두르지 않음 등의 용례로 쓰인다.08 현재 국어사전에서 정대는 ‘정대하다’의 어근으로 ‘바르고 당당하다’라는 의미로 쓰이고, 종용은 ‘종용하다’의 어근으로 ‘차분하고 들뜨지 않아 찬찬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정대는 일을 처리함에 언행이 바르고 옳아서 사사로움이 없는 광명한 모습을 표현한 말이고, 종용은 일을 처리함에 여유롭고 침착해서 들뜨지 않은 조용한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제자인 송애(松崖) 박여룡(朴汝龍, 1541~1611)과의 문답에서 자방의 종용과 공명의 정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문) 이연평(李延平)이 말하기를, “장량(張良)의 종용함이 제갈무후(諸葛武侯)보다 낫다.”라고 하였는데, 어느 점이 종용한 것입니까?
답) 일에 앞서서 작위(作爲)하지 않고 반드시 일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대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종용한 점이다.
문) 무후(武侯)와 같이 정대(正大)하려면 장량은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답) 한성(韓成: 장량이 모신 한나라 왕)을 보필해서 진(秦)을 멸망시킬 수는 없었고 한성이 항우(項羽)에게 피살되었으니, 항우도 장량(張良)의 원수였다. 그래서 한고조(漢高祖)가 아니면 함께 원수를 갚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한고조를 섬기면서 그가 한(韓)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고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사세(事勢: 일의 형세) 역시 어려웠을 것이다.
09 


  율곡은 장량의 종용을 묻자 일에 앞서 작위하지 않고 일이 오기를 기다린 후에 대응하는 것을 종용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장량이 공명과 같이 정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장량이 한(漢)의 유방을 섬기면서 한(韓)을 위해 원수를 갚는다고 정직하게 말하기는 사세(事勢)에서 어려웠을 것이라 밝혔다. 이러한 율곡의 대답에서 자방의 종용은 일을 처리함에 앞서서 작위하지 않고 오기를 기다린 후에 대응하는 처세를 뜻하고, 공명의 정대는 일을 처리함에 정직하게 말하는 처세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송암(松巖) 이로(李魯, 1544~1598)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1549~1598)에게 올린 계문에서 “궁리하고 계획하는 것은 자방(子房)의 종용함과 같고 군대를 부리는 것은 제갈공명의 정대함과 비슷합니다.”10라고 하였다. 이 글은 이여송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하기 위해 자방의 종용과 공명의 정대를 예로 삼은 내용이다. 여기서 송암의 견해, 즉 이여송이 종용과 정대를 갖춘 인물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종용은 궁리ㆍ계획하는 행위의 내용이고 정대는 군대를 부리는 행위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 1689~1756)은 “연평이 ‘자방은 무후의 정대만 못하고, 무후는 자방의 종용만 못하다’고 말했다.”라는 내용을 밝히면서 “종용하기 때문에 알선하는 것이 수고롭지 않았고, 정대하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광명하였다.”라고 하였다.11 이 말은 결과적으로 자방은 종용하기 때문에 일의 알선을 쉽게 할 수 있었고, 공명은 정대하기 때문에 일의 처리에 밝고 투명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조선 지식인들의 견해를 살펴보았다.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에 대한 이들의 논의는 대체로 일 처리에서 드러나는 제갈공명과 장자방의 모습 또는 태도를 말한다. 제갈공명과 장자방이 역사의 현장에서 가장 영웅적 두각을 나타냈던 시기는 제왕의 책사로서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짜거나 군사로서 군대의 통솔과 전투를 수행하는 임무를 담당할 때였다. 하지만 전쟁은 단순히 전투로만 끝나지 않고 국가의 역량이 총동원되므로 다양한 비군사적인 분야 또한 참모가 담당했던 업무에 해당한다. 따라서 자방의 종용과 공명의 정대는 공적인 업무의 수행, 즉 총괄과 조정의 공무 과정에서 그들이 정치적인 목적의 실현이나 사회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취했던 일련의 정책 기조라 할 수 있다.
  자방의 종용함과 공명의 정대함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를 정사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지』를 통해 우리한테 익히 알려진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유명한 고사성어는 공명의 엄정한 법 집행과 공평무사 정신을 대변한다.12 227년 제갈공명은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北伐: 조조의 위나라를 정벌)을 시작한다. 당시 제갈공명은 부하 마속(馬謖)에게 전력상의 요충지인 가정(街亭)을 지키기 위해 위나라 장합(張郃)과 싸우라는 전술을 내린다. 그러나 마속은 상황판단 착오로 명령을 어기고 산 정상에 진을 쳤다가 위나라 군대에 포위당해 대패했다. 한중으로 후퇴한 제갈공명은 마속을 군령 위반의 책임을 물어 참수형에 처했다.13 읍참마속은 제갈공명이 국가의 법질서와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베었다는 일화이다. 이것은 제갈공명의 공정무사(公正無私: 공평하고 정직하며 사사로움이 없다)한 일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의 정대한 업무처리와 정직한 마음가짐을 가장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진수는 제갈공명에 대해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평하였다.14 제갈공명은 국가의 형법과 정치를 운용할 때 상벌의 기준과 공사의 원칙이 이처럼 분명하였으므로 처사에 사사로움이 없고 광명정대(光明正大)했었다.


▲ 「읍참마속」 중국 섬서성의 한중 무후사(제갈량의 사당) 벽화 중에서



  장자방은 한신, 소하와 함께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한초삼걸(漢初三傑)이라 불린다. 유방에게 있어 한신은 천재적인 무장이고, 소하는 병참과 행정의 달인이고, 장량은 전쟁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작전참모이다. 그러므로 유방이 패공(沛公)이 되고 나서 벌인 모든 일은 장량의 계책을 따른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5 장자방의 계책에서 ‘홍문연(鴻門宴)’은 그의 종용함이 돋보였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기원전 207년 유방은 패권의 경쟁자인 항우가 마련한 홍문(鴻門)16의 연회에 참석하게 된다. 당시 항우의 책사인 범증(范增)은 항장(項莊)에게 검무(劍舞)를 추는 척하면서 유방을 죽이라고 지시한다. 항장이 검무를 추기 시작하자 이들의 계획을 간파한 장량은 연회장 밖에 나가 칼과 방패로 중무장한 번쾌(樊噲)를 불러들였다. 이때 갑자기 뛰어 들어온 번쾌를 보고 놀란 항우에게 장자방은 번쾌를 소개한다. 유방은 그 혼란한 틈을 타서 연회장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장자방은 유방이 자신의 진영에 도착할 즈음하여 항우에게 패공[유방]이 만취해 예를 갖추기 힘들어 자신이 대신 선물과 인사를 올린다고 사과하며 사건을 마무리했다.17


▲ 「鴻門宴(홍문연)」 郭德福繪畵(곽덕복회화), 2003年, 遼寧美術出版社(요녕미술출판사).



  장자방은 홍문연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계책을 세워 당면한 현실의 국면을 조용히 타개해 나갔다. 장자방이 천하통일을 위해 추진했던 크고 작은 일과 계책들은 모두 조용함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므로 그는 ‘장막 안에서 천 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능력을 발휘하여 한의 창업이라는 역사적 공적을 이루어 낸 것이다.
  공명의 정대와 자방의 종용은 그들의 삶에서 겪었던 일상의 평범한 문제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전쟁터의 일까지 전 생애에 걸쳐 나타난다. 제갈공명은 유비를 만나 북벌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한나라 왕실 회복과 천하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장자방 또한 유방을 만나 그의 군사가 되어 원수였던 진나라를 멸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지만, 한나라의 개국 후에도 자신의 공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종용한 처세로 일관했다.



나가는 글


  이상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공명지 정대와 자방지 종용’을 역사적 기록물인 정사(正史)와 후대의 평가를 통해 살펴보았다. 공명지 정대는 제갈공명이 공사(公事)에서 사심이 없이 대응하는 공명정대함을 말하고, 자방지 종용은 장자방이 일에 앞서 서두르기보다 침착하게 대응하는 조용함을 말한다. 상제님께서는 천지 종용지사와 천지 분란지사가 자아유지한다고 말씀하시며 이러한 공명의 정대함과 자방의 종용함을 본받으라고 교훈하셨다. 수도의 주체는 나 자신이다.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단속하고 점검하며 상제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주체가 바로 ‘나’라는 것이다. 내가 매사에 정대와 종용을 정성을 다해 실천한다면 나와 관계한 모든 일이 정대하고 종용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도 생활에서 ‘정대’와 ‘종용’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처사와 처신의 실천 덕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1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02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원양현(原陽縣) 동남쪽.
03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夫運籌策帷帳之中, 決勝於千里之外, 吾不如子房.”
04 『초한연의』와 『삼국지연의』가 국내에 유입된 시기는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강론에서 최초로 언급했다는 사실에 근거하면 선조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선조실록(宣祖實錄)』 권3, 선조(宣祖) 22년 6월, 임진(壬辰).]
05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9, 「답위원리(答魏元履)」2, “頃見李先生亦言孔明不若子房之從容, 而子房不若武侯之正大也.”
06 같은 책, 「답위원리(答魏元履)」2, “若武侯卽名義俱正, 無所隱匿.”
07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권7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2007), p.787.
0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 권5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2007), p.707.
09 『율곡전서(栗谷全書)』 제31권, 「어록(語錄)」, “問. 李延平曰, 張良從容過於武侯, 何處是從容. 曰. 不先事作爲, 而必待事至, 然後應之, 此乃從容也.…問. 欲如武侯之正大, 當何以爲之. 曰. 如韓成者, 不可輔以滅秦, 及成爲羽所殺, 則羽亦仇也. 而非漢祖則無與報仇, 然事漢祖, 而言其爲韓報仇, 其勢亦難也.”
10 『송암집(松巖集』) 권2, 「상천장이도독계(上天將李都督啓)」, “運籌同子房之從容, 行師類孔明之正大.”
11 『입재유고(立齋遺稿)』 권11, 「잡식(雜識)」, “延平謂子房不若武侯之正大, 武侯不若子房之從容, 從容故斡旋不勞, 正大故作事光明.”
12 김지수, 「제갈량의 법치 정신」, 『법학연구』 27(2019), p.133.
13 『삼국지』 「마량전(馬良傳)」, 「제갈량전(諸葛亮傳)」, 「장합전(張郃傳)」. 이 읍참마속은 『전경』에 “마속(馬謖)은 공명(孔明)의 친우로되 처사를 잘못함으로써 공명이 휘루참지(揮淚斬之)하였으니 삼가할지어다”(권지 2장 38절)라고 하신 말씀에도 나온다.
14 『삼국지』 「제갈량전(諸葛亮傳)」.
15 이중톈 저, 『초한지 강의』, 강주형 옮김(서울: 에버리치홀딩스, 2008), p.118.
16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임동(臨潼) 동쪽.
17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 「유후세가(留侯世家)」, 「항우본기(項羽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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