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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광장 : 400년의 친구(親舊) 이마두(利瑪竇)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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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의 친구(親舊) 이마두(利瑪竇)를 그리며

 

 

연구위원 백경언

 

  사람은 서로 다른 존재이다. 생김새, 말투, 나이, 자라난 환경, 종교와 사상, 시대 등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르다는 것이 좋은 것보다 위화감은 물론 적대감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는 대부분 서로의 차이를 ‘다름’으로 보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조금의 차이를 놓고 논쟁과 싸움으로 등 돌리는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차이나는 모든 것을 논외(論外)로 하고 서로를 이해해줄 수 있는 인간관계가 그립다. ‘친구(親舊)’라는 말이 좋은 것이 그런 이유이다. 그런데 개인의 차원이 아닌, 동서(東西)의 차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되어준 인물이 있다. 바로 마테오 리치이다. 종교인이 아니면 생소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쓰는 ‘천주’, ‘구라파’라는 용어를 루제리01와 더불어 최초로 만들어 쓴 사람이다. 마침 올해 2010년은 이탈리아 출신 마테오 리치가 선종한지 400년 되는 해이다. 교황청은 물론 한국의 서강대학교02에서도 여러 분야에 걸친 그의 업적과 활동에 대한 연구 발표가 있었다.03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게 와 닿은 부분은 서로 다른 동서의 문화를 충돌 없이 소화하여 가교(假橋)역할을 한 것과, 우정(友情)을 통한 평화론으로 다른 문화의 문을 열려했다는 점이었다.

 

 

서양인 이마두

  이마두(利瑪竇)의 본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이다. 중국식으로 음차(音借)하여 마테오를‘마두(瑪竇)’로 성(姓)인 리치(Ricci)를 ‘리(利)’라 한 것이다. 리(利)는 발음은 물론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란 이미지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마체라타라는 작은 도시에서 약국으로 이름난 리치가문에서 태어났다. 고향 마체라타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는 도시로 교황령의 지배를 받아 교황행정의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하였다.

  1561년 9살 나이로 마체라타에 설립된 예수회 학교의 최초의 학생이 된다. 1566년까지 이곳 기숙학교 과정을 마치고, 1568년 예수회의 로마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1571년 심사를 거쳐 19세의 나이로 예수회에 들어갔다. 예수회는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세운 가톨릭 수도회로, 최고의 엘리트이며, 뛰어난 지성, 강건한 육체와 매력적이며 헌신적인 성품을 지닌 인물들만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이마두는 1572년 인문과학 과목을 이수하기 위해 예수회의 피렌체 기숙학교에서 공부했는데 당시 피렌체는 휴머니즘과 르네상스 정신의 메카로 간주되고 있었다. 단테, 보카치오가 이 고장 출신이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활동하고 있었다. 1573년 로마로 돌아와 수사학·철학과 함께 수학과 천문학을 배운다. 이곳에서 이마두는 탁월한 과학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예수회가 신학과 철학 외에 수학이나 자연과학을 교육시킨 것은 세상 만물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므로 이를 탐구하는 일은 하느님의 업적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들 교육을 통해 이마두는 철저한 신앙심은 물론 르네상스인04적 소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회는 교황이 지시하면 무슨 일이든지 실천하며,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적응성을 가져, 준비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을 천명한 단체다. ‘예수회’란 이름에서 ‘회(會: societas)’는 스페인어 ‘꼼빠니아’를 로욜라가 라틴어로 옮긴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 꼼빠니아란 군(軍), 부대(部隊)를 뜻하는 말이다. 소수 정예의 ‘하느님의 군대’를 표방한 이 수도회는 총장마저 장군(General)이라 불렀다. 그는 이곳에서 발리냐노 신부의 영향을 받아 동방선교사의 길을 선택한다. 이 지역의 선교는 중남미 지역과 달리 생명의 위협이 따랐다. 그러나 젊은 이마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사명감과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한마디로 서양인 이마두는 천재적 소양으로 르네상스인(人) 수준의 조예와 가톨릭 교육까지 완비하여 그 당시 서양문명을 한 몸에 익힌 인물이라 할 만하다.

 

 

중국 사람이 된 이마두

  이마두가 중국에 있을 때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고 있었다. 이마두는 조선 원군을 떠나는 명나라 수군(水軍)을 보기도 하였다. 이순신 장군(1545~1598)과 이마두는 아시아를 무대로 동시대에 활약한 셈이다.

  아시아에 임란왜란이 벌어지던 그때 유럽에서는 지리상의 대 발견 이후 식민지 개척의 대정복기였다. 중남미나 필리핀 지역에 서양인들은 군인이자 상인, 선교사이자 정복자로서 발을 디뎠다. 각국은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을 공인받기 위해 교황권의 승인이 필요했고 교황은 선교를 위한 교구설립을 요구했다. 자연 서구 열강은 점령지의 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취급했고, 선교사들은 점령지역의 종교를 말살하고 개조해야 한다는 잘  못된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이러한 식민정책에 부흥한 선교는 당연히 가톨릭 이외의 지역에서 강한 거부감을 일으켰다.

  남쪽의 일본 왜구(倭寇)들로 괴롭던 중국은 서양 무리 역시 도적이라 여겨 외국인 국내거주를 국법으로 금(禁)하고 있었다. 특히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완고한 사고가 있어 배움을 청하러 오는 외국인의 입국은 혹 허가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가르치러 오는 이국인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에 진입하기 위한 이마두의 변모는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마두는 1583년 9월 마카오05를 떠나 중국 자오칭에 도착했을 때, 광둥과 광시를 총괄하는 총독 왕반(王泮)에게 무릎을 꿇고는 “중국의 뛰어난 정치와 큰 명성에 이끌려 천축(인도)에서 3, 4년이나 걸려 이곳에 왔습니다. 마카오 상인들과 세인들의 소란을 피해 중국 내부에 작은 집과 사원을 세우고 평생 그곳에서 살고 싶을 뿐입니다. 먹고사는 것에 폐를 끼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라고 애원하여 입국에 성공한다. 천축을 거론한 것도 서방정토로 이름이 높던 천축에서 온 승려라 하면 중국인들에게 통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1589년 7월 사오조우로 추방되기까지 6년간, 추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하여 선교는 하지 않고 중국의 말과 글 예의범절 등 중국문화 학습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중국 관리들의 변덕으로 이마두 일행은 6년간 공들인 모든 것을 놔둔 채 자오칭에서 추방당하고 만다. 겨우 허가를 받아 정착한 곳이 사오조우이다. 그러나 이곳은 말라리아가 만연해 있었고, 이웃들마저 서양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선교에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세 명의 일행 중 안토니오 알메이다 신부가 중병에 걸려 쓰러졌다. 1592년 7월에는 도적이 침입하여 이마두는 담을 넘어 피하다가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도적들의 도끼에 부상을 당해 고생하던 프란체스코 페트리스 신부도 이듬해 이곳에서 죽고 만다. 2년 동안 동료 신부 둘이 선교지에서 순교했다. 당시 지구상에 존재했던 유럽출신으로 중국말을 하고 중국문화를 아는 전문가는 루제리와 이마두, 그리고 죽어버린 두 신부뿐이었다. 그러나 루제리는 선교일선에서 물러나 이탈리아에 있었다. 만리타향 중국에서 하늘이 맡긴 사명을 위해 홀로 가야 하는 이마두가 된 것이다.

  사명을 가진 자에게 어둠은 새로운 장을 여는 장막일 뿐일까? 사막과 같은 이질적 문화 한 가운데서 슬픔에 싸였던 이마두는 중국인 ‘구태소’라는 지기(知己)를 얻는다. 구태소는 이마두의 인품과 학식에 끌려 여기저기 그를 칭찬하고 다녔다. 이마두는 그를 통해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고 중국인들과의 인맥도 넓힐 수 있었다. 후에 이마두는 구태소에 대해 ‘중국입국 사업 초기의 서양신부들은 모두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그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서양인 마테오는 ‘서양에서 온 선비 이마두(利瑪竇)’로 차차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선비’란 칭호야말로 중국 상층 지식인들의 사회에서 이마두를 중국인으로 인정한 가장 적절한 용어라 하겠다.

 

 

이마두, 선교사가 아닌 친구의 길로 들어서다.

  소금은 형체를 버리나 배추를 변화시킨다. 이마두는 종교의 기본적인 교의(敎義)06로 논쟁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인들이 말하는 상제(上帝)가 자신이 믿는 대상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에 대한 비판이 후에 중국은 물론 교황청에서도 거세었으나, 그는 자신이 믿는 믿음의 외형적인 틀을 벗어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중국 지인(知人)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1608년 『기인10편의』 서문을 쓴 왕가식은 서양과 중국이 통한 것은 이마두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마두의 가르침은 ‘선을 숭상하고 논의에 치우치지 않으며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 했다. 즉 선(善)을 받들고 오륜을 중시하며 하늘을 섬기는 것에 있어 요순과 주공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07 세상에는 두 가지 이치가 있지 않고, 두 가지의 선(善)이 있지 않고, 우러르는 것에는 두 개의 하늘이 없으며,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이마두는 종교적 색채를 없애는 것과 더불어, 자기중심적이고 고자세의 중국인들과도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그 중 서광계(徐光啓, 1562~1633)는 정부 고관직에 있는 자로서 그 권위를 이용해 서양의 종교나 과학 기타 미묘한 사항을 한문으로 구사해 줌으로써 든든한 협력자가 돼 주었다. 이마두와 같이 동서 문화를 연구하여 수학, 수력학, 지리학에 대한 유럽서적들을 번역했는데 그중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이 가장 유명하다. 서광계의 후손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을 도왔다.

과학과 학문이라는 형이상학적 내용을 갖고 인간적으로 친숙한 관계를 모색하여 형이상학적 종교에 접근시키는 선교로 이마두가 중국인들에게서 찾아낸 통로는 ‘우정’이었는지 모른다.

  우정은 사회적 지위나 동질성의 범주를 뛰어넘는 것으로 중국인들이 인륜의 골격으로 여기는 가치 중 하나이다. 사서(四書)에 통했던 이마두가 논어(論語)의 첫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 不亦君子乎”로 인간사 현실을 기쁨(說), 즐거움(樂), 서운해 하지 않음으로 인내한 공자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자신도 학문 탐구의 기쁨을 맛보았고, 중국인들이 내쫓는 속에서도 선교를 위해 천리를 찾아다니고 있으니 철환천하(轍環天下)한 셈이다. 공자와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공자는 자신을 몰라줘도 서운해 하지 않는 것이 군자라 했지만, 고향에 돌아와 집필로 인생을 마감할 때의 심정은 그 반대였을지 모른다. 고전을 통해 이마두가 본 것은 인간 심상(心狀)의 동질성이었다. 심상을 알아주는 친구가 멀리서 나를 찾아 와 준다면 인생 최고의 락(樂)이 됨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이에 착안해 ‘격언과 반성’의 문학적 형태를 빌려 집필한 『교우론(交友論)』(1595)은 동양인들을 놀라게 했고, 짙은 호소력으로 유교문화권을 감동시켰다. 3절에 ‘서로 필요로 하고 서로 도와줌이 교우를 맺는 이유이다.’는 내용을 보면 『교우론(交友論)』을 쓴 내면에 이마두의 심정도 느껴진다.

  이마두는 중국인들 입장에서도 사귀어 득이 되는 친구(益者三友)였다. 후세사람들이 그의 선교를 과학선교, 저술선교라 할 정도로 그는 각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들보다 이마두가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은 우정이었다. 폭넓은 교우관계는 그의 삶에 중요한 요소였으며, 이를 위해 친구를 접대하는 일이 하루 일정의 대부분이었다.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유도 방문객들의 접대에 과로한 탓이라 할 정도였다.

  이마두는 임종의 마지막 순간까지 입가에 참으로 쾌활하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편안히 숨을 거둔다(1610년 5월 11일). 이마두가 죽자 명나라 만력제는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정부가 나서서 외국인에게 묻힐 수 있는 묘지와 사원을 하사하였다. 이 조치는 이마두 사후 오랫동안 예수회 선교사들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마두는 일반인들이 아직도 잘 모르는 역사 속 인물이다. 동양의 문명신을 서양으로 데리고 간 신명이며, 서교의 종장이라는 것은 더욱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면모는 오늘날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편협된 가치관으로 한계가 느껴지는 선교의 현장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상대의 종교를 업신여기고, 정복해 없앨 미개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을 때, 신앙의 기본적인 교리까지 논외로 하며, 겸손을 바탕으로 상대를 존중하며 상호이해를 도모함으로써 지상에 천국을 실현하려고 걸어갔던 이마두가 그립다.

  그가 삶을 마쳤을 때, 명나라 만력제는 ‘중화국의 의(義)를 존경하여 온 서양의 유사(儒士)’라 하였고 장례식에 모였던 중국인들은 ‘성인(聖人), 진정한 성인’이라 외치며 울었다고 한다. 편협된 종교보다 인간존중을 위한 상호이해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이다.

 

 

 

참고문헌

ㆍ히라카와 스케히로, 노영희 역, 『마테오 리치. 동서양교류의 인문학 서사시』,

동아시아, 2002.

ㆍ조너선 D. 스펜스, 주원준 역,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이산, 1999.

ㆍ서강대학교, 『동서양 문명의 만남』,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 서거 400주년

기념 화보집.

 

 


01 Michel Ruggieri(羅見明, 1543~1607)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원. 이마두보다 3년 먼저 1579년 마카오에 도착하여 중국어를 익혔다. 1583년 자오칭에 최초의 성당을 건립했으나 1588년 마카오를 떠나 이듬해 리스본에 도착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다시 중국 땅을 밟지 못하고 1607년 사망했다.

02 서강대학교는 카톨릭 신앙과 예수회 교육이념을 토대로 대한민국의 교육 이념에 따라 예수회가 설립한 학교이다.

03 동서양 문명의 만남, 도전과 기회.-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04 르네상스인(Renaissance man/Universal Man)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만 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개념에서 발전했다. 학문의 모든 영역, 육체의 계발, 사회적 성취, 예술 부문 등 모든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이상적 인간을 말한다.

05 중국 남부 해안지역에 있는 특별행정구.

06 종교의 신앙 내용이 진리로서 공인된, 종교상의 가르침

07 히라카와 스케히로, 노영희 역, 『마테오 리치』, 동아시아, p.916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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