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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0년(2010)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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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巡文藝입상작 : 등고(登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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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登高)

 

 

연산 방면 선사 탁지현

 

속담에 “무척 잘 산다” 이르나니 이는 척이 없어야 잘 된다는 말이라. … (교법 2장 44절)

 

 

  언젠가 경남 김해(金海)를 우연히 지나던 중, 내 두 동공(瞳孔)을 유난히 커지게 하는 한 이정표를 발견했다. ‘무척산(無隻山) 2km’ 생전 처음 눈에 들어오는 무척산(無隻山)이라는 산지명과 그 존재 사실에 반갑고도 신기했고 『전경』 속 무척의 의미와 그 자의(字意)가 같을까하는 궁금증으로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것 같다. 언젠가는 꼭 한번 저 산을 올라가 봐야겠다는 그때의 막연한 다짐이 인연이 되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실제로 무척산 정상을 힘겹게 오르는 나 자신과 조우(遭遇)하게 된다.

 

 

  가을이 깊어만 가던 2007년 10월. 중양절 세시풍속에 관한 신문 칼럼을 읽고 난 후, 나는 돌아오는 음력 9월 9일에 내 마음에 담아둔 그 산을 오르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은 양수(陽數)인 9수가 겹치는 날로, 1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한다. 이날 자줏빛 수유 나뭇가지를 머리에 꽂거나 팔에 두르고 높은 곳에 오르는 등고(登高) 풍습이 있는데 중국 후한 때 비장방(費長房)이라는 유명한 은사(隱士)가 문도인 환경(桓景)에게 알려준 액막이 술법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대에 이르러 문사(文士)들의 시회(詩會)로 발전하였고, 우리의 옛 선비들도 이날 높은 산에 올라 도포를 벗고 상투를 풀어 가을바람에 습기를 말리는 풍욕(風浴)으로써 음기를 몸 밖으로 내보내고 국화주(菊花酒)와 더불어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 한다.

  뜻하지 않게 도(道)를 떠나, 직장 생활을 하던 3년 전 그때의 나는 그 무엇에도 진정으로 즐겁지 않았고, 진정으로 기쁘지 않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수도가 중단된 초유의 사태에 대한 충격과 그에 따른 우울증으로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깊은 슬픔에 잠겨 절망했다. 도를 떠난 그 어떤 것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고 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일상은 나에게 더욱 모질게 다가왔고, 쓸개를 머금은 듯한 현실 속에서 쓰디쓴 눈물을 오롯이 삼켜야 했다. 언제나 도를 향할 수밖에 없는 먹먹한 가슴에는 태산 같은 무게의 그리움만이 켜켜이 쌓여 갔다. 음력 9월 9일. 오래도록 그늘졌던 내 마음 속 차갑고도 눅눅한 음기를 내몰고, 양지바른 볕이 들도록, 왕성한 양기(陽氣) 가득한 하늘 아래 높은 곳으로 등고(登高)하여 묵은 응어리 풀어내고 허공으로 날려 보내리라 다짐하며, 나는 옛 선조들의 지혜를 좇아 국화주(酒)와 과(果), 포(脯)를 배낭에 챙겨 담고, 중양절 오후 낙동강 건너 그렇게 김해 무척산(無隻山)을 찾았다. 오후 늦게 도착하여 이미 하산(下山)하는 이가 더 많은 비교적 한산한 등산로를 따라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왜’라는 절규 섞인 질문들이 쉼 없이 이어지자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안으로 태을주를 묵송하며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무척산(無隻山)의 품으로 들어갔다.

  김해 김씨의 시조이자 가야국을 세운 김수로왕의 설화가 깃든 무척산은 높이 702.5m로 북쪽으로 낙동강과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김해시를 향해 길게 뻗어 주변 산들과 연계되지 않은 독립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무척산을 식산(食山)이라고도 하는데 산세가 밥상을 차려 놓은 듯한 형국으로 이는 낙동강가의 넓은 김해평야를 거느리고 있어 만백성을 먹여 살리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무척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입구에서 30분 남짓 산을 오르다 보면 수로왕이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모은암(母恩庵)’이 있는데, 이곳은 삼랑진의 부은암(父恩庵), 진영읍의 자암(子庵)과 더불어 가락국의 세 원찰[願刹: 죽은 망자(왕족)의 위패를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이었다 한다. 모은암에서 1시간가량 올라가니 산 중턱에 ‘천지(天池)’라는 넓은 연못이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천지(天池)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산 위에 있는 인공 연못으로서 설화에 따르면 김수로왕이 1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지금의 김해시 서상동 왕릉 자리에 묘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던 중 물이 솟아 나와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때 늙은 도사가 나타나 무척산 꼭대기에 연못을 파면 물줄기가 끊어질 것이라 하였다. 신하와 백성들이 이 말을 따라 연못을 파니 과연 물이 솟지 않아 무사히 장례를 마칠 수 있었다 전한다.

  천지(天池)로 향한 물길과 연관하여, 가시는 길 그 이름과 절묘하게 걸맞은 설화를 남기시니, 그야말로 ‘수로왕이시다’며 홀로 싱거운 웃음을 짓다가 문득 재미있는 연결성을 발견했는데, 흥미롭게도 상당수의 지명들이 물을 상징하고 있었다. 구지봉(龜旨峰) 아래에서 수로왕을 맞이하며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에서도 북방 1·6(水)을 상징하는 거북이 등장하며 수로왕릉에서 발견되는 쌍어(雙魚) 문양과 그 맥락을 같이하는 신어산(神魚山), 가야(伽倻: 드라비다어로 물 또는 물고기), 가락(駕洛)이라는 국호 또한 물을 뜻하며, 신라합병 이후부터 불리어지기 시작한 ‘금 바다’라는 뜻의 ‘김해(金海)’라는 지명도 이곳이 삼한 시대 이전 바다였음을 곳곳에서 발굴되는 패총(貝塚: 조개 무덤)을 통해서 알 수 있듯 상징하는 바가 모두 ‘물’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에 의하면 수로왕은 AD 42년 3월, 구지(龜旨: 현 김해 구산동)에서 발견된 6개의 황금알 중 가장 먼저 나왔다 하여 ‘수로(首露)’라 이름하였고,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6가야로 구성된 연맹국가 형태의 가락(가야)국을 세우고 156년간 다스렸다. 기록에 의하면 수로왕에 대해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 하며, 특히 왕비인 허황옥과 금실이 좋아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았다.’라 할 만큼 수로왕과 허황후는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어진 임금과 왕비로 묘사된다. 그러한 수로왕의 덕은 가야가 신라에 귀속되기까지 500여 년을 흘러 낙동강가의 비옥한 토지를 기반으로 항상 풍요로웠고 수준 높은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가야의 백성들은 오래도록 태평성대를 누려왔다. AD 562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김유신 장군의 증조부)도 백성을 아끼는 수로왕의 어짐을 이어받았을까? 그는 싸우지 않고 가야국을 신라에 통째로 내어주었고 이후 금관가야의 김해 김씨들은 무혈로 신라로 대거 흡수되는데 대표적으로 삼국 통일의 주역인 가야계 출신의 김유신 장군이 그러하다. 무척산 인공의 천지(天池)를 바라보며 ‘세상에 우연은 없다’라는 필연을 전제로 생각해본다. 왜 하필이면 수로왕릉에서 물이 나오고, 그 물줄기를 끊기 위해 무척산 꼭대기에 연못을 파야 했을까?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했던 어진 수로왕은 하늘로 돌아가시는 길 ‘무척’이라는 산꼭대기 ‘천지(天池)’라는 그릇에 청수(淸水) 가득 담아 올리고서 하늘 향해 무엇을 빌며 승천(昇天)하였을까? 가을볕 아래 수면 위를 나는 밀잠자리 떼, 파르르 떨어내는 은빛 날개의 반짝임과 언젠가 본 듯한 꿈결 같은 고요한 천지(天池)의 풍경에서 나는 낯설지 않은 묘한 기시감(旣視感)을 느낀다.

  신(申)시를 절반이나 넘어서도 산행은 계속 이어졌다. 모두들 산을 내려가는 시간에 나는 유일하게 산을 오르고 있다. 숲이 우거질수록 유난히 크게 들리는 낙엽 밟는 소리와 가끔씩 짖어대는 산 까치 소리가 고즈넉함을 더하다 못해 서글픔으로 밀려든다. 또다시 나에게 질문한다. ‘나의 수도가 중단된 것은 척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슨 척을 그리도 지어왔단 말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통 땀에 젖은 무거운 몸을 쉬지 않고 산을 오른다. 드디어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유(酉)시를 막 넘어서는 인기척 없는 무척산의 정상에 서서 조용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지평선 저만치 뿌연 은빛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아래로 온통 황금빛 들판이 치마를 두른 듯 무척산은 너른 김해평야 한가운데 마치 큰 밥상을 떡하니 차려 놓은 듯 했고, 과연 식산(食山)이라 일컬을 만도 했다. 서쪽 끝 잠시 머문 막바지 햇살들이 기다렸다는 듯 강렬한 기세로 내 머리 위에 눈부시게 내리 꽂는다. 이제 중양절 옛 선조들의 풍습을 재현할 때다. 나는 점퍼와 모자, 양말까지 벗어두고 두 팔 하늘로 뻗어 가을 금풍(金風)에 땀을 말렸다. 어느새 파장(罷場)을 앞둔 중양절(重陽節). 큰 숨 들이 쉬며, 나는 대기 중에 남은 양기(陽氣)를 떨이로 양껏 들이켰다. 준비해온 국화주와 과(果), 포(脯)를 꺼내어 차리고 ‘늦깎이 등고생(登高生)이 왔노라’ 신고하며 무척산 신명(神明) 대접으로 간단히 예를 표했다. 술을 사방으로 흩뿌리니, 국화주 향이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가고, 어느덧 서쪽 땅 끝으로 주저앉은 태양(太陽)은 흐물흐물 홍시 빛 석양(夕陽)으로 번져만 간다. 내심 그 이름마저 부러웠던지…. 국화주 한잔에 나도 모르는 읊조림, 입속에서 가늘게 맴돌더니, 기어이 속내를 드러내어 산에게 묻는다.

 

 

감히, 예서 솟았던 옛적을 묻소.

그대는 언제부터 무척이라 불리었소?

장구한 시간토록 묵묵부답 예있는 그대….

어찌 견뎌온 그대이기에 무척이라 이름하오?

일찍이 허울뿐인 국적일랑 초월한 게요?

아련한 가야금 소리는 우주를 떠돌고,

수천만 말발굽 소리마저 땅속 깊게 묻어두고,

무고한 혈흔의 빛바랜 왕조들….

덧없는 흥망성쇠 아래로 굽어보며,

무편무사(無偏無私) 고른 덕망(德罔), 금 바다로나 펼친 게요?

유구한 세월 어쩐 인망으로 그대 무척이라 이름하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통심정(通心情), 무척산은 호기심 많고 당돌한 이 객(客)을 맞아 참으로 적의 없이 푸근하게 포용해주었고, 무언(無言)의 가르침을 내어주었다. 언젠가 지켜질 ‘무척’과 ‘나’ 둘만 아는 약조는 산중에 꼭꼭 묻어두고, 노을 지는 들판, 아쉬운 일몰을 뒤로 하고, 나는 어둠을 앞서려는 듯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하산(下山)하는 길… 인공의 천지를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상극의 시대… 수로왕은 먼 미래 상생의 시대가 도래 할 것임을 마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무척’이라야 잘 사는 해원 상생의 법리를 이미 알고 오늘날을 준비했던 것일까? 혹자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워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가야를 두고 굴욕적인 비운의 역사라 평할지도 모른다. 그토록 치열한 패권 다툼에 힘 겨루던 삼국도, 전승자(戰勝者)의 기쁨으로 화려했던 그 숱한 왕조들도, 지금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비록 수로왕의 나라 가야는 500여 년 천명(天命)을 다하고 일찌감치 자취를 감추었지만, 인고의 시간 속에 후대를 이어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우리나라 최다 성씨인 500만 김씨 중 400만 가량의 김해김씨 일족을 이루었으니, 그 연원인 김수로왕의 덕망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후손들이 무척 잘 살기를 빌며 무한한 공덕을 쌓아 오신 각 성씨의 조상님들이 모두 그러하셨듯 천지(天池)가 흡사, 하늘에 바치는 수로왕의 거대한 정한수처럼 느껴지는 것은 한낱 상상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터무니없는 비약일지언정 무척산 천지가 마르지 않는 한, 4·9(金) 김해(金海), 후천 금 바다의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수로왕의 발원은 끊임없이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둑어둑해지는 산자락을 조심스레 내려가며 지난날의 나를 되짚어 본다. 수도가 중단되어 ‘무척’ 잘 살고 있지 못한 지금의 현실은 수도를 잘못해 온 결과임이 분명했다. 무척산 등고로 어떤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믿음과 기대가, 중양절 날 이곳까지 나를 이끌었기에 ‘무척(無隻)’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었다. 무척(無隻)의 척(隻)은 한자의 단편적인 뜻으로는 ‘외짝, 단 하나, 유일한’이라는 뜻이나, 조선시대 민사(民事)와 관련한 소송(訴訟)이 벌어질 때 지금의 피고에 해당하는 사람을 척(隻)이라 하고 다른 사람을 고소하여 피고로 만드는 것을 ‘척진다’고 했다한다. 즉, 서로 원망하는 사이 또는 원수지간이 된다 하여 생긴 말이다. 또한 우리말로 무척이란 ‘둘도 없이 매우’ ‘다른 것과 견줄 것이 없다’는 뜻으로 정리하자면 비교할 대상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견주고, 비교한다는 것은 결국, ‘겨룬다’는 뜻과 통하는데, 이는 선천의 모든 사물이 자신 외의 대상과 상대적으로 비교되어져 그 우열이 가려지는 상극적인 경쟁 구조를 생각해 볼 때 ‘척’과 ‘무척’의 의미가 더불어 도출되면서 그 해석이 확대된다.

  척은 ‘나’와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원인으로 인해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 발생한다. 그 원인이라 함은 대소(大小), 다소(多少), 고저(高低), 장단(長短)의 불평등한 차이에 의해 우열이 가려짐에서 기인한다. 그 부정적인 감정은 억울함, 분노, 슬픔 등의 원과 한(恨)으로 점철되고 그 상대와 척의 관계로 맺어진다. 겨루어 이김으로써 상대적인 우월감에 통쾌한 이와 상대적인 열등감에 원울을 품은 이가 서로 척을 맺는 이것이 상극의 원리로 지배되어 온 선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고르게 잘 사는 상생(相生)의 시대는 해원으로써 무척(無隻)이 된 상태라야 가능한데, 양쪽 모두 이기려고 해서는 무척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어렸을 적 누군가와 다툴 때 어른들이 말리시며 늘 하시던 말씀은 “… 져줘라… 지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이다!”였다. 지는 자가 상등인이라는 전경 말씀을 따라 수도를 하면서도 머리로 하는 생각은 그러해도, 마음 속 한편으로는 분한 감정을 제대로 삭이지 못했던 것 같다. 이기는 것보다 지는 것이 더 쉬운 일이지만, 좀처럼 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마(魔), 그것은 자존(自尊)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으로 인해 부족한 것만큼 있는 척, 아는 척, 센 척을 한다. 모자라는 만큼 열등감을 감추려 잘난 척을 한다. 여기서 ‘척한다’ 의미는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런 것처럼 꾸민다, 위장한다, 속인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기만(欺瞞)에 앞서 자신을 속이는 행위가 먼저 일어나는데, 훈회 중에서 가장 먼저 ‘마음을 속이지 말라’ 하신 뜻도 자신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쌓은 욕망의 ‘산(山)’에 막혀 나와 남에게 짓게 되는 죄를 경계하심이 아닐까? 무자기(無自欺)가 되려면 무자기(無自己)가 되어야 하고, 무자기(無自己)가 되면 무자기(無自欺)가 성립되는 참으로 절묘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동안 이기려는 마음과 날카로운 말로써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척을 지었을까를 깊이 반성하며, ‘무척’ 잘 사는 방법으로 내놓으신 온공(溫恭), 양순(良順), 겸손(謙遜), 사양(辭讓)의 덕(德)을 마음에 새겨본다.

 

 

  지금 나는, 도에 돌아왔다. 지난날에도 그랬듯, 물론 지금도 나는 지는 것이 쉽지 않은 많이 덜된 수도인이다. 비록 더디더라도 그 무엇에서라도 끊임없이 배우고 깨우쳐서 고쳐나가는 용기와 유연성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수년 전 중양절(重陽節), 다소 특별했던 무척산(無隻山) 등고(登高)의 기억을 글로써 풀어낼 수 있는 이 순간을 상제님께 감사드린다. 등고(登高)한 후에야 하산(下山)하는 법을 알 수 있듯 어둠을 살피며 고개 숙여 산을 내려가던 중양절 그날 저녁의 나의 자세를 잊지 않도록 애써 노력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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