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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0년(2010)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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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논단 : 조정산(趙鼎山) 도주님(道主任)의 생애와 종교활동

조정산(趙鼎山) 도주님(道主任)의 생애와 종교활동

 

 

글 연구위원 진정애

 

목 차

 

1. 탄강 및 봉천명

2. 득도와 종통계승

3. 무극도장 건립 및 해산

4. 해방 이후 태극도의 형성 및 종교 활동

5. 도주님의 화천(化天)과 도전님의 종통전수

 

   

1. 탄강 및 봉천명

 

  도주 조정산께서 탄강한 1895년은 구천상제이신 증산께서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셔서 25세가 되시던 해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근대화의 기류로 사회적·정치적으로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서구 제국의 열강들이 각축하고, 이미 서구화의 길에 들어선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던 때였다. 도주님의 탄강과 관련하여 『전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상제의 공사를 뒤 이을 도주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나흘(十二月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창령·남지에 이르러 천계산·안국산·여항산·삼족산·부봉산으로 연맥되고 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01

 

 

  도주님의 성은 조(趙)씨이고, 이름은 철제, 호는 정산(鼎山)이며, 탄강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이다. 회문리라고 지은 유래는 1997년에 발행한 『함안군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회문리는 한 도사가 풍수지리를 본 결과, 동쪽에는 작대산이 마주보이고 마을 앞에는 광려천이 유유히 흘러 앞으로 문인(文人)이나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회문(會文)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곳 회문리에서 탄강하신 도주님은 자라면서 그 음성이 웅장하고 안광이 부시어 범의 눈초리와 같고 목은 학의 목과 같고 등은 거북의 등과 같고 이마가 해나 달과 같이 빛이 나서 관상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다.02

  홍문관 정자03를 지낸 도주님의 조부04는 굴욕적인 을사조약(1905년)이 체결되자 이에 통탄한 나머지 분사(憤死)하셨다. 조부로부터 이어진 배일사상의 가풍은 도주님의 부친05에게도 이어졌으며, 부친께서 반일운동에 활약하면서부터 도주님은 그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되셨다. 한일합방이 결정단계에 있음을 개탄한 도주님은 부친, 삼촌과 함께 만주 봉천06지방으로 망명의 길에 오르시게 된다. 이때 도주님의 나이는 15세이며 1909년(기유년) 음력으로 4월 28일이었다.

 

 

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07

 

 

도주님의 봉천명 과정은 구천상제의 천명(天命)과 종통계승을 위한 첫 단계이며, 50년 공부를 위한 시작점이 된다.

 

 

2. 득도와 종통계승

 

  1909년(기유년) 15세에 만주 지방으로 망명한 도주님은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도력으로 구세제민(救世濟民)할 큰 뜻을 품고 입산수도 공부에 진력하셨다.08 도주님은 천명을 받든 뒤 9년이 되던 1917년(정사년, 23세시) 2월 10일에 드디어 구천상제의 삼계 대순하신 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여,09 구천상제님으로부터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셨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전경』에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도주께서 어느 날 공부실에서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도주께서 어느 날 공부실에서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한 신인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제민(救世濟民) 하리라」고 말씀하시기에 도주께서 예(禮)를 갖추려 하시니 그 신인은 보이지 않았으되, 그 글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至氣今至願爲大降)」이었도다.10

 

 

  윗글에 도주님이 ‘신인’으로부터 받은 구세제민의 주문은 바로 동학을 창도한 최수운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주문이다.11 증산께서는 강세하셔서 금산사 미륵불에 영으로 머물러 있을 때 최수운에게 계시를 내렸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계시가 실현되지 못하고 1864년(갑자년)에 최수운에게 준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서 1871년(신미년)에 직접 강세하셔서 교운을 펼치셨다.12 이때 최수운의 종교체험에 나타난 하느님의 존재가 바로 증산께서 강세 이전의 상제로서의 신격이었으며, 주문 또한 그 신격으로부터 주어진 글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도주님이 받았던 신인으로부터의 글은 최수운의 종교체험과 유사하게 동일한 신격으로부터 주어진 하나의 계시체험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13

  그 후에 도주님은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그 주문을 송독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14 태인은 구천상제이신 증산께서 재세시에 자주 머물고 활동하신 곳으로,15 역사적인 공간이었음을 위의 성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도주님의 종교체험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상제님에 대해서 먼저 그 신격을 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16

  만주로 망명한 지 9년 만에 배일구국(排日救國)과 구제창생(救濟蒼生)의 대지(大志)를 품고 귀국한 도주님은 상제님의 계시에 따라 종교활동의 기반을 닦으셨다. 1919년에는 도주님께서 상제님이 남기신 봉서를 받음으로써 천부의 종통계승이 확실하게 된다.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 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 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이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도다.17

 

 

  도주님이 선돌부인으로부터 상제님의 봉서를 받을 당시 상제님을 신앙하는 수많은 교파가 난립하고 있는 과정이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종도18들은 종교를 펴나가는 과정에 각자 종통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교세를 확장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도주님의 종교체험은 여타 종도들의 종교적 신념에 비추어 볼 때 활동을 독자적으로 이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행해진 백일도수(1921), 납월도수(1922), 북현무도수(1922), 둔도수(1923), 단도수(1924), 폐백도수(1924) 등은 도주님의 종교체험에 입각한 고유한 종교활동을 대변하는 것이다.19

  이상에서 도주님께서 구도과정에서 찾던 그 초월적인 힘의 실체가 현실의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물로 확인됨에 따라 상제님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신앙체계를 세우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는 곧 도주님께서 상제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체계를 지니고 하나의 종단을 창설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3. 무극도장 건립 및 해산

 

  도주님이 하나의 종교형태로서 무극도를 창도한 해는 1925년 을축년이다. 도주님은 무극도를 창도하기 이전인 1923년에 ‘전교(傳敎)’를 발표하셨는데, 4617년을 가리키는 시간의 단위인 원(元)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운이 열린다고 하셨다. 그 상세한 전교의 내용은 전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도주께서 그 후 주선원(周旋元)과 주선원보(周旋元補)란 두 직책을 마련하고 전교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시니라. 이해 유월 치성일 전날에 밀양의 이 우형· 김 용국·최 창근·안 병문 그리고 부산의 박 민곤과 안동의 권 태로와 의성의 조 원규와 예천의 이 종창·신 용흠 그리고 봉화의 박 붕래·김천의 김 규옥과 풍기의 조 진명과 청도의 장 득원 외 여러 사람들이 회문리에 모인 자리에서 도주께서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고 말씀을 마치고 전교를 내리시니라.

 

傳 敎

 

1. 七閏十九歲爲章 二十七章是會當

2. 三會爲統 三統爲元 循環往復互無彊

3. 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軒轅立極肇斯元

4. 萬像萬事皆有是 諸法諸書總此源

5. 初統初會世世聖

6. 日出萬暈同發明 春回品物共華盛 初統之中降中季 聖不承承但一時

7. 禹後有湯湯後文 一會一聖應會期 中統由來世漸降 聖不道行但敎傳

8. 釋後有孔孔後耶 一會一敎各門筵

9. 季統敎亦無肇聖 惟有述聖繼啓來

10. 佛梁儒宋耶羅馬 一敎一昌應會回 (교운 2장 26절)

 

 

  위의 전교 내용은 설명이 되는 안(按) 부분은 생략하고 원문만을 인용한 것이다. 위에서 1과 2는 역수(曆數)에 의한 시간의 단위인 장·회·통·원의 관계를 보인 것으로 1장은 19년이다. 일원은 삼통(1통은 3회이며 1539년)이며, 9회(1회는 27장이며 513년)이고 4617년이다. 그런데 역수의 원리는 시간성으로 드러나는 천의 존재 구조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문물제도까지도 형성시키는 근본20이다. 전교에서는 초통시대의 인물을 성스러운 존재들로 말하고 중통시대의 석가·공자·야소에 대해서는 한 회에 하나의 가르침만을 전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나아가 계통의 시대에는 석가·공자·야소의 가르침만이 전해진 것으로 말하고 있다. 불교는 양나라, 야소교는 로마 법왕이 공인하여 전해지고, 다만 신유학은 염락지방에서 여러 현인들이 한 때 도를 전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전교에서는 4617년 동안 한 원(元)이 마무리되고 1923년에 새로운 원(元)이 시작됨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2년 후에 무극도가 창도(1925년)된 것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다.21 즉 무극도가 창도됨으로써 원(元)을 새롭게 펼쳐나갈 교단이 형성되어 구천상제의 유지를 세상에 천명하고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도주님은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을 건설하고 종단 무극도를 창도하시니 곧 초기 교단의 형태가 이루어지게 된다. 대순신앙의 골격이 형성된 것도 이때이며 오늘날 신앙의 체계를 이해하는 기초가 된 것이라 하겠다.

 

  을축년에 구태인 도창현(舊泰仁道昌峴)에 도장이 이룩되니 이때 도주께서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 응원 뇌성 보화 천존 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고 종지(宗旨) 및 신조(信條)와 목적(目的)을 정하셨도다.

 

 

ㆍ종지(宗旨)

음양합덕·신인조화·해원상생·도통진경

(陰陽合德·神人調化··道通眞境)

 

ㆍ신조(信條)

사강령(四綱領) … 안심(安心)·안신(安身)·경천(敬天)·수도(修道)

삼요체(三要諦) … 성(誠)·경(敬)·신(信)

 

ㆍ목적(目的)

무자기(無自欺)정신 개벽(精神開闢)

지상 신선 실현(地上神仙實現)인간 개조(人間改造)

지상 천국 건설(地上天國建設)세계 개벽(世界開闢)(교운 2장 32절)

 

 

  도주님은 종단의 명칭을 ‘무극도’로 정하고, 신앙의 대상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라고 봉안하셨다. 대순사상의 골격이 되는 그 핵심적인 가르침인 ‘종지(宗旨)’는 바로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행한 그 뜻을 도주님이 총 집결하고 압축하여 나타낸 요지이다. 한편 신조에는 사강령과 삼요체로 나누어 진리를 믿음에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인간뿐만 아니라 이상적 세계를 이룩할 수 있는 궁극적인 목적을 밝힘으로써 교리체계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그런데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 망명(1909년)하신 이후로 1941년(신사년)에 종교해산령이 내릴 때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시대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됨과 동시에 일제는 우리나라에 헌병에 의한 무단통치가 시작되었다. 종교활동도 예외가 되지 못하고, 헌병경찰에 의한 강압책이 적용되어 옥외에서의 설교를 비롯한 각종 집회가 경찰에 의해 규제되었다. 일제는 1915년 「포교규칙」을 제정·공포하였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를 구분하여 법제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포교규칙」 제1조에 의하면 일제가 공인한 종교는 신도(神道), 불교(佛敎), 기독교(基督敎) 만으로 제한하였다.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와 일본의 국체를 숭상하는 신도교는 조선총독부가 정책적으로 확산을 시도한 종교이다. 불교는 일본문화의 중추를 이루는 종교이기 때문에, 조선불교라고 해서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찰령에 의하여 한국의 불교는 이미 구조적으로 통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만 기독교의 경우는 외국 선교사와 그 배후 서양의 국제세력, 그리고 일본이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있던 서양 선진국의 기독교에 대한 우대로 인하여, 일본으로서는 기독교를 종교로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일본은 제국주의의 정치적 목적에 이로운가 해로운가가 종교공인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자질에 대한 합리적, 객관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신도, 불교,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들은 공인종교의 조직체로 인정되지 않고, 유사종교, 사교, 사이비종교의 굴레로 지칭되었다.22

  일본은 1919년 3ㆍ1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저항을 경험하면서 1920년대부터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시행하기에 이른다. 1920년대의 문화정책은 무단정치에 비하면 민족진영의 운동방향을 일제에 덜 위협적인 방향으로 그 색채를 전환시키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민족항일세력을 분열·약화시키는 한층 지능적인 분할통치정책이었다. 이때 실시된 일제의 종교정책은 본격적으로 비공인종교인 유사종교를 표면으로 공개하여 분열, 분리, 분쇄시킨 것이다. 그 예로 동학계열, 증산계열, 단군 또는 유교계열 등을 유사종교로 규정하였다.23 문화정책이 완성되는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대부분의 종교는 종교적 세력과 사회적 영향력이 쇠약해져서 종교단체의 정체성이 흐려지게 되기도 하고, 또한 종교운동을 신비주의 운동으로 전개하여 종교단체를 비밀조직화 함으로써 사회적 역량이 소진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는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를 불문하고 일제의 문화시책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정도로 한국의 종교는 모두 탈진한 상태였다. 더욱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황국신민화정책에 따라 우리의 민족종교는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분열과 쇠퇴의 행로를 거듭하였다.24

  이런 와중에 무극도는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하여 1920년대 말에 들어서는 도인의 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거대한 종단이 되자 당국의 감시와 탄압도 그만큼 거세어졌다.25 결국 무극도가 창도되어 17년이 되는 1941년(신사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의 정황에 대해서 『전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주께서 기유년부터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다하시니 신도의 무리가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니라. 그러나 일본이 이차 대전을 일으키고 종교단체 해산령을 내리니 도주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으고 인덕도수와 잠복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 이 선포후에 도장은 일본 총독부에 기증되니 도주께서는 고향인 회문리로 돌아가셨도다.26

 

 

  도주님은 무극도를 해산한 후 회문리에 마련된 정사 회룡재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 두루 다니면서 수행하신다.27 도주님은 고향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으시면서도 도수에 의한 공부를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하시며 1945년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도주님이 무극도를 창도하고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행하셨던 주요활동 및 도수에 대한 공부는 안면도의 이십 만평의 농지와 원산도 염전 두 섬의 간석지를 개척하여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하셨으며,28 담뱃대 도수를(1926), 주를 놓는 공부(1927)를 하셨다. 그리고 주문 즉, 봉축주(奉祝呪)·진법주(眞法呪)·이십팔수주(二十八宿呪)·이십사절주(二十四節呪)·심경도통주(心經道通呪)·칠성주(七星呪)·원대주(願戴呪)·관음주(觀音呪)·해마주(解魔呪)·복마주(伏魔呪)·음양경(陰陽經)·운합주(運合呪)·개벽주(開闢呪)·옥추통(玉樞統)·태극주(太極呪)·명이주(明耳呪)·오방주(五方呪)·오장주(五臟呪)·구령삼정주(九靈三精呪)·예고주(曳鼓呪) 등이 사용되었다. 또한 각도문과 포유문을 선포하여 도인들을 깨우쳐 주려고 하셨다.

 

 

4. 해방 이후 태극도의 형성 및 종교 활동

 

  무극도의 종교적 활동이 일제의 종교해산령에 의해 잠시 잠복기를 거친 다음 광복과 더불어 6·25사변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을유년) 8월에 조국광복을 맞이하여 도주님은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종교활동을 부활하였다. 1948년 9월에 도본부를 경상남도 부산시에 설치하고 보수동, 감천동을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전개하는 동안에도 도주님은 새로운 도수에 주력하게 된다. 도주님이 종통을 받아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풀어나갔다는 면에서 도주님의 종교적 행적이 상제님의 예정된 도수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도주님께서 동래 마하사에서 공부한 종교적 행적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도주께서 기축년 겨울에 동래 마하사(摩訶寺)의 방 한간에서 정화수 스물네 그릇을 받들고 사십 구일을 한 도수로 정하시고 공부를 하셨도다. 이광석(李光石)이 대웅전에서 도주를 위해 발원 염불을 올리니라. 四十九일이 거의 될 무렵에 도주께서 승녀와 시종자에게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고 물으시므로 그들이 달려가 보니 불상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도다. 도주께서 四十九일을 다 채우신 새벽에 공부실 위에 학이 울며 날아가고 시종자에게 그동안 모아놓은 글씨 종이를 태우고 그 재를 시냇물에 띄우라고 이르시므로 시종자가 그대로 하니 시냇물에 무지개가 서는도다.29

 

  도주께서 마하사에서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시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느니라. 도주께서 그 자리에서

少年才氣拔天摩

手把龍泉幾歲磨

世界有而此山出

紀運金天藏物華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

의 상제의 글귀를 외우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나가노라」고 말씀하셨도다.30

 

 

  마하사에서 49일간의 공부를 하고, 그 일이 마쳐진 후 도주님은 상제님의 한시(漢詩)를 인용해서 자신이 상제님께서 짜놓은 도수를 풀어나가는 위치에 있음을 밝히고 계신다. 마하사에서 공부하실 때 불상이 고개를 숙이는 이적이 일어났는데, 이 면은 도주님에게 불(佛)들이 귀의하여 동참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31 상제님께서 생시에 언급한 한시의 내용에서도 도인들이 불교에 치우치고 도의 시작이 복희씨에 있음을 모른다는 내용에서도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위의 내용은 도주님이 종통계승자로서 상제님의 도수를 풀어가는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이 시기에 도주님께서 행하신 일은 화양동에 있는 만동묘와 관련한 황극신 공사와 대신문공사, 해인사에서의 공부, 동학사에서의 신명해원공사, 쌍계사에서의 7일간의 공부 등이 대표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도주님은 통감(通鑑)· 소학(小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시전(詩傳)·서전(書傳)·중용(中庸)·주역(周易)의 구판을 구하여 도장에 비치하셨다.

  도주님의 생애 말엽에 가장 주목되는 것으로 시학·시법공부에 대한 공부방법과 유의 사항을 공표하여 시행하신 것이다.

 

 

  도주께서 이해 十一월에 도인들의 수도공부의 설석을 명령하고 공부는 시학(侍學) 시법(侍法)으로 구분케 하고 각 공부반은 三十六명으로 하며 시학은 五일마다 초강식(初降式)을 올리고 十五일마다 합강식(合降式)을 올리며 四十五일이 되면 봉강식(奉降式)을 행하게 하고, 시법은 시학공부를 마친 사람으로서 하되 강식을 거행하지 않고 각 공부 인원은 시학원(侍學員) 정급(正級) 진급(進級)의 각 임원과 평신도로서 구성하고, 시학원은 담당한 공부반을 지도 감독하고 정급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울리고 진급은 내빈의 안내와 수도처의 질서 유지를 감시하여 수도의 안정을 기하게 하고, 시학관(侍學官)을 두어 당일 각급 수도의 전반을 감독하도록 하셨도다.32

 

 

  1909년 상제님께서 화천하시면서 남겨진 ‘도통’의 경지가 도주님의 이 공부를 통해서 도인에게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즉 도주님께서 제정한 시학·시법공부는 신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초석을 다진 것이라 하겠다. 상제님의 말씀 가운데 “천지의 조화로 풍우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 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 입산 三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다 하느니라”(교운 1장 35절)고 한 것을 상기해 본다면 도주님께서 마련하신 공부들은 곧 수도인들이 도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5. 도주님의 화천(化天)과 도전님의 종통전수

 

  수도 공부의 모든 법제를 다 갖춘 다음 해인 1958년(무술년)에 도주님은 종교활동을 마감하고 모든 도의 운영을 물려주며 화천하신다. 도주님은 1958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시고,33 도의 체계와 임원을 개편하시게 된다. 그리고 도주님은 화천하시기 전 해인 1957년(정유년) 11월 21일부터 이듬해 1958년(무술년) 3월 3일까지 도장에서 불면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보셨다. 백일도수를 마치신 후 도전님께 종통을 전수하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하신 다음 3월 6일에 화천하시니 그 세수는 64세이시다.

 

 

  도주께서 정유년 十一월 二十一일 자시부터 무술년 三월 三일까지 도장에서 불면 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치시니라. 五일에 심히 괴로워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늦었도다」고 이르시니라. 도주께서 이튿날 미시에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한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고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밖을 향하여 「도적놈」을 세번 부르시더니 화천하시니라. 무술년 三월 六일 미시요. 양력으로 一九五八년 四월 二十四일이요. 수는 六十四세로다.34

 

 

  도주님은 1909년 봉천명으로부터 1958년까지 종교활동을 행하였는데, 그 년수는 총 50년에 이르는 대장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도주님은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라고 하면서 도에 대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이 표현은 『전경』에 상제님께서 어느 날 천지공사를 마치고 나서 한 말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六월 어느날 천지공사를 마치신 후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五十年工夫終畢)」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 사십 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하셨도다.35

 

 

  위의 글은 중국 은(殷)나라 초기의 재상이었던 이윤(伊尹)이 50년이 되어서야 49년 동안의 삶이 헛되었음을 깨닫고, 그동안 실행할 여건이 되지 못해 마음으로만 품고 있었던 뜻을 성탕(成湯)과 함께 펼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윤은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녹으로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고, 수천 필의 말을 준다 하여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이 강직했다. 이윤의 성품을 알아본 탕임금은 정중히 폐백을 갖추어 그를 초빙하려 하였으나 여러번 탕임금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같은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탕임금은 이윤 같은 어진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수차례에 걸쳐 이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이윤이 탕임금을 도와 은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탕임금이 정치·교육·문물을 완비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란 그 같은 이윤의 인품과 더불어 성탕(成湯)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묘사한 고사이다.

  도주님과 상제님의 관계는 이러한 성탕과 이윤의 관계로 대비해 볼 수 있다. 이때 도주님의 업적은 이윤의 경우처럼 성탕을 도와 새 나라를 정비한 것과 같이, 묵은 하늘을 뜯어고쳐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이어서 그것을 제도화·현실화시키는 길을 마련하셨던 것이다.36

 

 

   

참고도서

 

ㆍ『전경』

ㆍ『대순지침』

ㆍ『대순진리회요람』, 대순진리회교무부, 1969.

 

ㆍ고남식, “대순사상에 나타난 동학의 위상과 증산의 참동학 전개”, 대순사상논총 16집,

대순사상학술원, 2003.

______, “증산의 도가적 경향과 《무극도》의 도교적 요소”, 대순사상논총 제17집,

대순사상학술원, 2004.

ㆍ김만산, 「역학의 시간관」, 『주역의 현대적 조명』, 범양사출판부, 1993.

ㆍ대순종학교재연구회, 『대순사상의 이해』, 대진대학교출판부, 2007.

ㆍ윤이흠, 『한국종교연구』 권5, 집문당, 2003.

ㆍ이경원, “대순진리회 연원, 도주 조정산의 종교체험연구”, 대순진리학술논총 제1집,

대진대학교 대진학술원, 2007.

ㆍ이정립, 『대순철학』, 증산교 본부, 1984.

ㆍ최동희·이경원 공저, 『대순진리의 신앙과 목적』, 대순사상학술원, 2000.

ㆍ홍범초, 「일제의 증산종단 탄압과 수난사 개요」, 『일제하 증산종단의 민족운동』,

증산종단연합회, 1997.

 

ㆍ朝鮮總督府警務局, 『最近朝鮮治安現況』, 嚴南堂, 1966.

 

 


 01 교운 2장 1절.

 

02 교운 2장 3절.

 

03 홍문관은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고, 정자는 정9품의 벼슬이다.

 

04 휘는 영규(瑩奎)이며, 배일 사상가로서 민영환(閔泳煥) 등과 교우하며 활약하다가 을사조약에 분개(憤慨)하여 심화(心火)로 토혈 서거하였다. (『대순진리회요람』, p.11 참고)

 

05 휘는 용모(鏞模)이고,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이며, 조부(祖父)의 유의를 승봉(承奉)하여 그 아우(휘 용의(鏞懿)·용서(鏞瑞) 두 사람과 반일운동(反日運動)에 활약하였다.(『전경』 교운 2장 2절, 『대순진리회요람』, p.11 참고)

 

06 현재 지명은 중국의 요령성에 속해 있는 심양이다.

 

07 교운 2장 4절.

 

08 교운 2장 5절.

 

09 교운 2장 6절.

 

10 교운 2장 7절.

 

11 최수운이 받은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로 순서에 차이가 있다.

 

12 교운 1장 9절, ……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

 

13 이경원, 「대순진리회 연원, 도주 조정산의 종교체험연구」, 『대순진리학술논총』제1집, 대진대학교 대진학술원, 2007. p.256.

 

14 교운 2장 8절.

 

15 행록 4장 6절, 상제께서 무신년 초에 본댁에서 태인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자주 태인에 머물고 계신 것은 도창현(道昌峴)이 있기 때문이었나니라. 그곳에 신 경원(辛敬元)·최 내경(崔乃敬)·최 창조(崔昌祚)·김 경학(金京學) 등의 종도들이 살고 있었도다.

 

16 이경원, 위의 책, p.257.

 

17 교운 2장 13절.

 

18 대표적으로 김형렬(太雲 金亨烈, 1862~1931)의 미륵불교, 박공우(仁菴 朴公又, ?~1940)의 태을교, 차경석(月谷 車京石, 1880~1936)의 보천교, 고판례(高判禮, 1880~1935)의 선도교, 문공신(瀛祥 文公信, 1879~1954)의 문영상교단, 안내성(敬萬 安內成, 1867~1949)의 증산대도교 등이 있다.

 

19 대순종학교재연구회, 『대순사상의 이해』, 대진대학교출판부, 2007. pp.107~108.

 

20 김만산, 「역학의 시간관」, 『주역의 현대적 조명』, 범양사출판부, 1993, p.154.

 

21 고남식, 「증산의 도가적 경향과 《무극도》의 도교적 요소」, 『대순사상논총』 제17집, 대순사상학술원, 2004. pp.16~18.

 

22 윤이흠, 『한국종교연구』 권5, 집문당, 2003, pp.247~254.

 

23 朝鮮總督府警務局, 『最近朝鮮治安現況』, 嚴南堂, 1966, p.107.

 

24 윤이흠, 위의 책, p.276.

 

25 홍범초, 「일제의 증산종단 탄압과 수난사 개요」, 『일제하 증산종단의 민족운동』, 증산종단연합회, 1997, p.212.

 

26 교운 2장 43절.

 

27 교운 2장 44절.

 

28 교운 2장 35절.

 

29 교운 2장 47절.

 

30 교운 2장 48절.

 

31 고남식, 「대순사상에 나타난 동학의 위상과 증산의 참동학 전개」, 『대순사상논총』 16집, 대순사상학술원, 2003. p.20.

 

32 교운 2장 62절.

 

33 교운 2장 64절.

 

34 교운 2장 66절.

 

35 공사 3장 37절.

 

36 최동희·이경원 공저, 『대순진리의 신앙과 목적』, 대순사상학술원, 2000,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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