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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1년(2011)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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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54) : 박공우가 상제님을 따르게 됨

박공우가 상제님을 따르게 됨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4[甲辰]년 진보회(進步會) 발족 이후 속옷을 검은 옷으로, 외의(外衣)를 흰옷으로 입으시고 대삿갓을 쓰고 다니셨던 상제님께서는01 1907[丁未]년 6월 초이틀, 차경석의 간곡한 청에 따라 정읍 대흥리 그의 집으로 떠나시면서부터는 의관을 정제하기 시작하셨다. 가시는 도중에 원평의 한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들을 불러 술을 사 주시며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남조선(南朝鮮)’은 조선후기 민중들이 갈망했던 이상향의 유토피아를 뜻하는 말이었다. 즉 조선의 민중들은 밖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환(外患)을 겪고 안으로는 관리들의 학정에 따른 내우(內憂)에 끊임없이 시달리자,02 괴로운 현실에서 벗어나 지극히 복된 낙원세계에 살기를 갈망하였고, 결국 ‘진인(眞人)이 나타나 고통받는 민중을 이상세계로 인도할 것’이라는 민간신앙이 생겨났는데, 그 이상세계라는 것이 곧 ‘남조선’이었던 것이다.
  상제님께서 행인들에게 술을 사 주시며 ‘이 길이 남조선 뱃길’임을 말씀하신 것은 남조선은 다른 데 가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상제님께서 안배해 놓으신 길을 따라야 만이 갈 수 있는 세상임을 알려주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일심(一心)을 가진 자가 아니면 그 길을 따라 갈 수 없다고 경계하셨다.03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상제님께서는 ‘동서의 각 교파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못났다는 이유로 남아있는 조선사람’을 ‘남조선 사람’이라 하셨다고 한다. 사실 상제님께서는 “후천에서는 약한 자가 도움을 얻으며 병든 자가 일어나며 천한 자가 높아지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얻을 것이요, 강하고 부하고 귀하고 지혜로운 자는 다 스스로 깎일지라.”, “부귀한 자는 자만자족하여 그 명리를 돋우기에 마음을 쏟아 딴 생각을 머금지 아니하나니 어느 겨를에 나에게 생각이 미치리오. 오직 빈궁한 자라야 제 신세를 제가 생각하여 도성덕립(道成德立)을 하루 속히 기다리며 운수가 조아들 때마다 나를 생각하리니 그들이 내 사람이니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으셨다.
  술을 다 드신 상제님께서는 다시 경석의 집으로 길을 재촉하셨다. 대개 상제님께서는 하루에 가시는 길이 30리를 넘지 않으셨는데, 이날도 30리만 가시고는 뒤따르는 차경석에게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고 말씀하셨다. 옛날부터 혼례길 등 즐거운 행차는 하루 50리를 가고, 군대는 하루에 30리를 진군한다는 말이 있어왔는데,04 상제님의 행차가 군대의 진군이라는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차경석은 상제님의 말씀을 듣고 이 근처에서 유숙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상제님을 자신의 친구인 박공우(朴公又, 1876∼1940)에게로 모시고 갔다. 박공우는 고부 송월리(松月里) 최(崔)씨의 재실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그는 49일을 한정하여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던 중이었다.

  원래 차경석과 박공우는 동학의 간부급이었던 터였다. 상제님께서는 그런 차경석과 박공우를 앞에 두시고,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형제일지라도 모르는 일이니라. 나는 서양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동학 신도들 사이에서는 1864년에 참형을 당한 최제우[大先生]가 살아나서 다시 가르침을 펼 것이라는 믿음이 퍼져 있었는데, 상제님께서는 차경석과 박공우에게 그들이 기다리는 선생님은 최제우가 아니라 바로 상제님이심을 알리신 것이다. 사실 최제우에게 제세대도를 내리신 분도 상제님이시고 또 거두신 분도 상제님이셨건만, 동학신도들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상제님의 이 말씀에 마음이 움직인 박공우는 드리던 49일 정성을 그만두고, 정읍으로 가시는 상제님을 따라 나섰다.

 

 

 


01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 101호, 「진보회와 일진회Ⅰ」, pp.10∼15 참고.

02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 79호, 「동학농민운동1」, pp.18∼19 참고.

03 “일심(一心)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예시 50절)

04 김탁, 「한국 종교사에서의 유교와 증산교의 만남」, 『한국 종교사상의 재조명』, 원광대학교출판국, 1993,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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