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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1년(2011)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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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 정북창(鄭北窓)의 三일 공부(工夫)

정북창(鄭北窓)의 三일 공부(工夫)

 

 

연구위원 이광주

 

 공우가 어느 날 상제를 찾아뵈옵고 도통을 베풀어 주시기를 청하니라. 상제께서 이 청을 꾸짖고 가라사대 “각 성(姓)의 선령신이 한 명씩 천상 공정에 참여하여 기다리고 있는 중이니 이제 만일 한 사람에게 도통을 베풀면 모든 선령신들이 모여 편벽됨을 힐난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사정을 볼 수 없도다. 도통은 이후 각기 닦은 바에 따라 열리리라” 하셨도다. (교운 1장 33절)

 

 

  또 상제께서 말씀을 계속하시기를 “공자(孔子)는 七十二명만 통예시켰고 석가는 五百명을 통케 하였으나 도통을 얻지 못한 자는 다 원을 품었도다. 나는 마음을 닦은 바에 따라 누구에게나 마음을 밝혀 주리니 상재는 七일이요, 중재는 十四일이요, 하재는 二十一일이면 각기 성도하리니 상등은 만사를 임의로 행하게 되고 중등은 용사에 제한이 있고 하등은 알기만 하고 용사를 뜻대로 못하므로 모든 일을 행하지 못하느니라” 하셨도다. (교운 1장 34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공우에게 “천지의 조화로 풍우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북창 같은 재주로도 입산 三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다 하느니라”고 이르셨도다. (교운 1장 35절)

 

 

  위의 『典經』 구절에서 보듯 상제님께서는 도통(道通)을 베풀어 달라는 공우(公又)의 청원에 대해 도통은 어느 개인에게 사사로이 베풀어질 수는 없는 것이며 이후 각기 닦은 바에 따라 열리게 된다고 하셨다. 이 말씀과 더불어 지난날 유교와 불교에서의 도통이 정해진 인원에 한에서만 이루어짐으로써 그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원(怨)을 품었다고 하셨다. 그에 반해 장차 상제님께서 베풀어주실 도통은 상등(上等)과 중등(中等), 하등(下等)의 차이는 있지만 마음을 닦은 바에 따라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임을 천명(闡明)하셨다.
  이와 함께 천지의 조화(造化)로도 풍우(風雨)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功力)이 들듯이, 어떤 일에 대해서도 공부하지 않고 알 수는 없다고 하셨다. 이때 상제님께서 공우의 이해를 돕고자 사례로 드신 인물이 바로 정북창(鄭北窓, 1506~1549)이다. 한국 도교사(道敎史)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었던 그는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토정 이지함(李之)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기인(奇人)으로 꼽힌다. 그의 뛰어난 재주는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기이한 행적과 일화가 많기로 유명하다. 상제님께서는 이런 정북창도 입산(入山)하여 3일 동안 공부를 한 후에야 비로소 천하사(天下事)를 알았다고 하시며 공부(工夫)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정북창의 재주가 어떠했으며, 입산 3일 공부와 천하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그의 행적에 관해서도 일화와 문헌의 기록 등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또한 상제님께서 도통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인에게 강조하신 ‘공부’에 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정북창은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 때의 이인(異人)으로, 이름은 이고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북창(北窓)은 그의 별호이다. 그는 중종(中宗) 원년(1506)에 온양(溫陽) 정씨(鄭氏) 집안에서 6남 5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父親)은 정순붕(鄭順朋)이고 모친(母親)은 태종(太宗)의 첫 왕자인 양녕대군의 증손녀 완산이씨(完山李氏)였다. 조부는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을 지냈고 부친은 한림주서(翰林注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중부(仲父: 둘째아버지) 또한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는 등 전형적으로 문벌이 혁혁한 유교적 가문이었다.
  북창은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으며 신령(神靈)하여 곧바로 말을 할 줄 알았다. 그의 자질은 맑고 빼어난데다 욕심이 적어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맑았으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한두 번 글을 읽으면 모두 외웠다. 자라서는 모든 학문에 통하지 않음이 없어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율려(律呂)ㆍ산수(算數)ㆍ한어(漢語) 및 외국어를 배우지 않고도 능통했는데 이때 그에게는 스승도 제자도 없었다고 한다.01 이처럼 남달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북창은 주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유학자(儒學者)로서의 앞날이 크게 기대되었다. 허목(許穆, 1595~1682)이 저술한 『기언(記言)』과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도교사』에는 정북창의 재주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북창이 14살 때 사신(使臣)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명(明)나라에 들어가는 도중에 압록강을 건너다 중국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중국말을 하였다. 수도인 북경(北京)의 봉천전(奉天殿)02에 갔다가 뜰에서 도사(道士)를 만났는데 그가 “그대의 나라에도 우리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북창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에는 삼신산(三神山)이 있어 대낮에도 신선(神仙)이 승천하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도사가 귀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이에 도사가 몹시 놀라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니 북창이 『황정경』,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 등의 도교 경전을 거론하면서 신선이 되는 법을 상세히 설파하니, 그 도사는 부끄러워하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그때 유구국(琉球國 : 현재의 오키나와) 사신이 중국에 들어와 있었다. 그 또한 이인(異人)이어서 자기 나라에 있을 때 미리 역수(易數)
03를 추산해 보고 중국에 들어가면 반드시 진인(眞人)을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나라 사신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두루 찾아다녔는데 북창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큰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지니고 있던 보따리 속의 작은 책자를 꺼내 보이며 “이 책자에 ‘모년 모월 모일 중국에 들어가 진인을 만나 뵙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진인이 아니면 누가 진인이겠습니까?” 하면서 『주역』에 대해 가르쳐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북창은 즉석에서 유구어로 그를 가르쳤다.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앞을 다투어 북창을 찾으니, 그는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각국의 말로 척척 응대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들만 놀란 것이 아니라 말을 주고받던 당사자들조차도 무척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정북창은 사람이 아니라 ‘천인(天人)’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세상에는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말이란 결국 새나 짐승의 소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알아듣는 것은 혹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이에 북창은 “나는 듣고 나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소.”라고 대답하였다.

 

 

  이처럼 북창은 젊었을 때 신선술(神仙術)과 역리(易理)를 상세히 설하고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천인(天人)’이란 칭호를 들을 만큼 대단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그도 일찍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통하는 석가의 법을 터득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산사(山寺)에 들어가 선가(禪家)의 육통법(六通法)을 시도하기 위해 조용히 관(觀)한지 3일 만에 문득 환하게 돈오(頓悟)하였다. 이후 그는 산 아래 백 리 밖의 일도 능히 환하게 꿰뚫어 알았는데, 부절(符節)을 합한 것처럼 꼭 들어맞아 백의 하나 어긋남이 없었다.04 여기서 육통법은 불교의 ‘육신통(六神通)’05을 이르는 것으로, 정신을 완전히 통일했을 때 얻어지는 여섯 가지 신묘하고 거침없이 발휘되는 능력을 뜻한다. 이로 미루어 정북창이 했다는 ‘입산 3일 공부’는 대체로 불교의 심법(心法)에 의해 신(神)과 통하는 공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북창은 산사(山寺)에서의 공부 후에 신과 통해서 천 리 밖의 일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모르려니와 생각만 하면 바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까이는 마을이나 집안의 작은 일에서부터 멀리는 사해(四海) 모든 나라의 풍속이 다른 것은 물론 새나 짐승의 소리도 신과 같이 알았다.06 정북창이 3일 공부 후 알게 된 천하사(天下事)란 바로 이런 것들이었는데, 문헌과 일화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임방 1640~1724)이 편찬한 『천예록』에는 그의 좌견천리(坐見千里)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북창이 하루는 고모를 찾아뵙고 이런저런 애기를 나누던 중 고모가 북창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지방에 있는 종들에게서 곡물을 거두려고 종놈 하나를 영남으로 보냈단다. 그런데 이놈이 돌아올 때가 지났는데 통 돌아오질 않아 걱정이구나.”
  “그러시면 제가 고모님을 위하여 그 종이 어디쯤에 있는지 쭉 훑어보고 말씀드리지요.”
  그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한 고모는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그런데 북창은 앉은 자리에서 영남지방을 향해 바라보더니 한참 뒤 고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놈이 이제 막 조령(鳥嶺)
07을 넘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어떤 양반에게 두들겨 맞았군요. 하지만 그건 스스로 부른 화(禍)라 불쌍해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고모가 우스워 죽겠다며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 종이 조령을 넘다가 길가에서 점심을 먹던 양반 앞을 말을 탄 채로 지나서 짚신으로 뺨을 네다섯 번 맞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들은 고모는 장난으로 한 소리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북창이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자못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북창이 떠나자 고모는 그 날짜와 시간을 벽에 기록해 두었다. 뒤에 그 종이 집에 도착하여 조령을 넘을 때의 날짜를 물어 벽에 기록한 것과 대조해 보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또 그곳을 넘다가 양반에게 혼난 일이 있었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하인이 깜짝 놀라며 그 사유를 고하니, 북창이 했던 말과 꼭 들어맞았다.

 

 

  또한 북창은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잔칫집에 갔다가 새소리를 듣고 그 집 술이 무덤가에서 거둔 밀로 빚은 것임을 간파한 일이나, 산속에 거쳐할 때 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하는 일을 알고 말하기를 “아무개 집에 잔치가 벌어졌다.”거나 “아무개 집에는 초상이 났다.”고 해서 뒤에 알아보면 틀림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새나 짐승들이 지저귀거나 울부짖으면서 의사 전달하는 것을 환히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북창은 입산하여 마음을 통하는 공부를 한 지 사흘 만에 산속에 가만히 앉아서도 백리 밖의 일을 내다봄은 물론, 새와 짐승의 소리까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타고난 재능이 남달랐던 북창은 이후 성장하여 유불선 삼교(三敎)의 근본 뜻까지 꿰뚫어 오묘한 이치를 터득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미처 논파하지 못한 내용들이었다. 이런 그의 학문에 대해 논한 기록을 살펴보면 대게 그가 유불선 삼교에 두루 능통했으며, 그 밖의 잡학(雜學)에 대해서도 배우지 않고 스스로 터득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공은 충허고명(沖虛高明: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고상하고 현명함)하고 상지(上智)의 자질이 있어, 유석도(儒釋道) 삼교에 박통(온갖 사물에 널리 통하여 앎)하지 않음이 없었고,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ㆍ율려ㆍ한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우지 않고도 잘했는데, 그 도달한 경지는 수리(數理: 역리)에 있어서는 소강절(邵康節)과 같고, 의술(醫術)에서는 고대의 명의인 나 편작(扁鵲)과 같았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성수익(成壽益) 「정렴행실」]

 


  북창은 태어날 때부터 영이(靈異)했던 인물로서 삼교(三敎)에 두루 통달했었다. 그가 수련함에는 도가(道家)와 비슷했고 깨달음에는 선가(禪家)에 치우친 듯하며, 인륜의 상도(常道)와 의리를 행함은 한결같이 우리 유가(儒家)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나아가 방기(方技: 의약)와 각종 기예에 대해서도 두루 오묘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모두가 배워서 터득한 것은 아니었다.


[『계곡집(谿谷集)』 북창고옥양선생시집서(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이와 같이 거의 모든 학문에 통달했던 그가 사마시(司馬試)08에 급제해 진사(進士)가 된 것은 한참 후인 32세(1537년) 때의 일이다. 이것은 그의 부친 정순붕이 기묘사화(1519)에 연루되어 1521년에 면직된 후 등용을 제한받다가 1537년에 복직되면서 비로소 그의 일가(一家)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창은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아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음률에 밝았고 천문과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조정에서는 단계를 뛰어넘어 종6품인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 겸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의 교수를 제수하였다.
  의술이 뛰어나고 약리에 정통했던 북창은 인종(仁宗)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 궁중에 들어가 진찰했으며, 중종(中宗)이 위독했을 때도 내의원(內醫員)과 제조(提調)09들이 북창을 명의(名醫)라고 천거했을 정도로 뛰어난 의술로 명망이 높았다. 이런 그가 항상 했던 말은, “의원이란 의논한다는 것이니, 마땅히 음양(陰陽)과 한열(寒熱)을 살펴 증상에 맞게 약을 투여하면 거의 다 완전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의 의원들은 진부한 서적에 국한되고 한 가지 방술에 집착하여 변통(變通)할 줄을 모르고 증상의 반대로 약을 쓰고 있으니, 어떻게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10라는 것이었다.

  그 후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어서는 문을 닫고 고상하게 누워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임기가 차기 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과천의 청계산(淸溪山)과 양주의 괘라리(掛蘿里)에 주로 은둔하며 지냈다. 애초에 관직에 뜻이 없었던 그가 속세를 등지게 된 것은 부친 정순붕이 을사사화(乙巳士禍)11에 적극 관여해 무고한 사람들을 해하려 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창은 부친께 그 일이 그릇된 것임을 누차 고(告)하고 적극 만류해 보았으나 듣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크게 미움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부친과 넷째 아우 은 일을 그르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를 미리 간파하고 몸을 피한 북창은 이후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채 산속에서 은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창은 산림에서 자연을 벗 삼아 선도(仙道) 수련에 전념하고 의리(義理)를 탐구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만시(自挽詩: 스스로를 애도하는 시) 한 수를 남기고 가만히 앉은 채로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 불과 44세였다.12

 

 

한평생 만 권의 서적을 독파하고(一生讀罷萬卷書)
하루에 천 잔 술을 다 마셨지.(一日飮盡千鍾酒)
고고하여 복희(伏羲) 이전의 일을 말하고(高談伏羲以上事)
속된 말은 애당초 입에 담지 않았네.(俗說從來不掛口)
안회(顔回)는 서른에 아성(亞聖)이라 불렸는데(顔回三十稱亞聖)
선생의 수명은 어찌 그리 길었나.(先生之壽何其久)


 
  그의 시에서 보듯 북창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큰 미련을 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상에서는 그가 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대낮에도 그림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의 풍채는 구름을 탄 학과 같았고 천성적으로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나 술을 좋아하여 서너 말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년(晩年)에는 신병(身病)으로 인해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으며 조심하였다. 그는 의술과 약리에 밝아 궁중에서도 명의라 불렸고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추구하는 선도(仙道)에도 정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도교 수련서인 『용호비결(龍虎泌訣)』13을 저술하였다. 이런 그가 단명(短命)한 사실은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그의 수명과 관계된 일화가 전해오고 있어 간략하게 소개해 보겠다.
  정북창은 스스로 타고난 수명이 팔십여 세에 이를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그의 절친한 친구가 과거에 낙방한 후 찾아와 어려운 형편에 자신의 명(命)도 짧아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함을 한탄하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못 이긴 북창은 어떤 노인(사명성군: 司命星君)을 찾아가 끝까지 매달리라고 일러주었다. 이로 인해 북창은 자신의 수명 중 30년이 그 친구에게 옮겨진다. 또 한번은 친구의 부친이 그를 찾아와 병에 걸려 위독한 자식을 구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북창은 그 친구가 한명(限命)이 되었음을 알았지만, 남산의 두 노인(남두신군, 북두신군)을 찾아가 부탁하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북창의 수명 10년이 다시 친구에게 옮겨졌다고 한다.
  한편 북창은 예언 능력도 뛰어났다. 그는 6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유독 둘째 아우의 부인 구씨(具氏)를 존중함이 남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우리 집안은 모두 제수씨의 자손이 될 것이니 내가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실제로 북창의 손자 대에 이르면 형제들은 모두 자손이 없었는데 셋째 집안에서만 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고 한다. 이처럼 앞일을 예견하고 의술과 수학에 정통했던 북창은 죽은 지 수십 년 후에도 궁중(宮中)에서 거론되었다. 즉 그의 사후 52년이 지난 선조 34년(1601) 8월에 별전(別殿)에서 『주역』을 강론하다가 수학에 정통한 인물에 화제가 미치자, 북창은 서경덕(徐敬德) 못지않게 수학에 뛰어났으며 미래의 일[前頭之事]을 알 수 있는 인물로 거론되었다.14
  이상의 내용처럼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정북창은 어려서부터 신이(神異)하여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자질과 총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ㆍ율려ㆍ한어 및 외국어 등을 스승 없이 자득하였고 유불선 삼교에도 상당히 깊은 조예가 있었다. 이처럼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정북창도 입산(入山)하여 3일 동안 마음을 관(觀)하는 공부를 한 후에야 비로소 심법(心法)을 깨우쳐 천하사(天下事)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그에게 생긴 능력은 남에게 배우거나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들이 아니었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47장에 “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다 안다(不出戶, 知天下).”는 구절처럼, 그는 집에 있으면서도 가까이는 산 아랫마을에서부터 멀리는 외국의 일까지 마음을 통하면 모르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새나 짐승의 소리까지 알아들었다고 한다. 이런 능력은 그가 3일 동안의 공부 과정에 지성(至誠)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어 일심(一心)의 상태에 도달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음이 신(神)과 통하면 신이(神異)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를 동서고금의 고승과 성현(聖賢)들의 사례에서 종종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제님께서 정북창의 공부를 통해 수도인들에게 전하고자 하셨던 말씀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순진리(大巡眞理)를 신봉(信奉)하는 수도인들은 모두 도통(道通)을 목적으로 구천상제님과 도주님, 도전님께서 베풀어 주신 법방(法方)에 맞추어 수도해 나가고 있다.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법(眞法)인 이 법방은 기성 종교들과 달리 인원수에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닦은 바대로 도(道)에 통할 수 있어 원(怨)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 도통은 삼계(三界)를 투명(透明 : 환하게 들여다봄)하고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들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무소불능(無所不能)의 권능을 갖는 것이므로 선천의 도통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공력을 들여 공부를 해나가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에서 말하는 ‘공부(工夫)’가 어떤 것인지 언급하기에 앞서 이 단어의 유래와 의미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부의 자의(字義)를 보면 공(工)은 공(功), 부(夫)는 부(扶)와 그 뜻이 통한다는 점에서 ‘어떤 功이 생기도록 돕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당(唐)나라 때 선승(禪僧)들의 어록에서인데 이때의 공부는 ‘주어진 공안(公案)을 깊게 생각한다’는 참선(參禪)의 뜻이었다. 그러다가 송(宋)나라 때 주자(朱子)가 『근사록』을 편찬하면서 공부란 용어를 유학(儒學)에 도입하였다.15 유학에서의 공부는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의 차원에서 몸의 단련[修身]에 중심을 두고 어떤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었다. 주자학의 영향으로 이 말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상화되었는데, 판소리에서의 소리공부가 ‘소리수련에 들인 시간과 공력’이란 뜻으로 쓰이는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힌다는 의미가 더 보편적이다.16        
  대순진리회의 공부는 도통(道通)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修道)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 종단의 정수(精髓)가 담긴 시학(侍學)ㆍ시법(侍法) 공부를 의미한다.17 이는 도주님께서 구천상제님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오십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로써 짜 놓으신 법방이며, 이를 계승하신 도전님에 의해 지난 1991년부터 현재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여주본부도장에서 시행되고 있다. 일찍이 도전님께서는 이 공부가 후천 오만년의 도수(度數)를 짜는 공부로서 우리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임을 누차 강조하신 바 있으니, 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공부가 시학ㆍ시법 공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즉 대순진리회의 공부는 종단의 3대 기본사업18이자 신앙의 3대 원칙인 포덕ㆍ교화ㆍ수도[수행]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수도생활 전반을 가리키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목적인 도통은 이 모든 공부에 성경신(誠敬信)을 다해 대순진리를 생활화해 나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일찍이 도전님께서 도통은 선후의 차등이 없고 오로지 바르게 닦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신바 있다. 바른 수도를 위해서는 항상 상제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언행과 처사가 일치되게 생활화하고, 무자기(無自欺)를 바탕으로 무욕청정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공부에 관한 상제님의 말씀 중에서 특히 ‘남이 모르는 공부’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19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날 상제님께서는 앞으로 병겁(病劫)이 온 세상을 뒤엎어 누리에게 참상을 입히는데 거기에서 구해낼 유일한 방책인 의통(醫統)에 대해 언급하시며 ‘남이 모르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하라고 당부하셨다.20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말하는 공부는 학문이나 기술, 기능 등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므로 누구나 교육을 받으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공부는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해원상생ㆍ보은상생의 진리를 심수덕행(心修德行)하는 과정에서 신도(神道)와 그 속에 담긴 공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도문(道門)에 들어와 직접 수도하기 전에는 공부에 담긴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 수가 없다. 또한, 우리의 일은 상생대도(相生大道)의 기본원리요 구제창생의 근본이념인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다. 수도생활은 물론 일상생활 속에서도 항상 타인을 위하고 그들이 잘 되게 함으로써 척을 짓지 않고 상생의 이념을 실현해 나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곧 우리 도의 인존(人尊)사상이며 평화사상이니,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타인과의 화합과 단결, 상부상조의 정신이 요구된다 하겠다.
  정북창처럼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인물도 입산 3일 공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천하사를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수도인들이 전무후무한 천지대도(天地大道)에 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재능이나 학식, 혹은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도의 법방에 맞추어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광제창생(匡濟蒼生)의 크나 큰 대의(大義)를 짊어지고 있으므로,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상제님에 대한 심적(心的) 기도와 더불어 ‘남이 모르는 공부’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할 수 있도록  수도ㆍ공부에 만전을 기해야겠다.   

 


 


01 정재서, 『한국도교의 기원과 역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p.263/ 이긍익, 『연려실기술』 「國朝記事」 권11, “公淸虛寡欲無一點査滓 聰明過人 讀書一二遍皆暗誦”/ 『백헌집(白軒集)』 「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生而稟天地自然之氣於衆藝不學而能”

02 중국의 자금성 내에 있는 건물로, 황제의 집무실로 주로 쓰였다. 이때 명(明)의 황제는 가정제(嘉靖帝, 1507~1566)였는데 그는 도교에 심취하여 도사들의 황궁 출입이 잦았다.

03 음양으로써 길흉화복을 미리 알아내는 술법.

04 유몽인, 『어우야담』, 돌베개, 2009, pp.174~175/ 이능화 저, 『조선도교사』, 보성문화사, 2000, p.229.
 『선조실록(宣祖實錄)』 권59. 정월(正月) 8일: 북창이 죽고 46년이 지난 선조 28년(1595) 정월에 선조(宣祖)는 이항복, 한효순, 정경세 등과 별전(別殿)에서 『주역』 건괘(乾卦)를 강론하다가, 그 자리에서 북창은 ‘타심통지술(他心通之術 :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으며 의술과 점복에도 뛰어난 인물로 거론한 바 있다.

05 여기서 신(神)은 신묘하다는 뜻이고 통은 무애(無碍 : 걸림이 없음)란 뜻이다. 줄여서 ‘육통(六通)’이라고도 하는데, 『구사론(俱舍論)』 권27 등에 의하면 어떤 장소에나 임의로 갈 수 있는 능력인 신족통(神足通) 또는 여의통(如意通), 무엇이든 꿰뚫어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모든 소리를 분별해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타인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전생에 생존했던 상태를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누진통(漏盡通)의 여섯 가지이다. (한국불교대사전편찬위원회, 『한국불교대사전』 5, 명문당, 1993. / 네이버 백과사전)

06 『기언(記言)』 제11권 「청사열전(淸士列傳)」 정북창(鄭北窓)/ 『대동야승(大東野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정렴전/ 한국도교사상연구회, 『도교의 한국적 수용과 전이』, 아세아문화사, 1995, p.396./ 강효석 편저,『대동기문(大東奇聞)』, 명문당, 2000, pp.304~305.

07 조선시대에 충청북도 충주 지역과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던 고개.

08 고려와 조선시대 때의 과거 제도의 하나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뽑던 소과(小科)인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로 나눠진다.

09 조선시대에 중앙에서 각 사(司)나 의 우두머리가 아니면서 각 관아의 일을 다스리던 직책.
1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26권,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5, p.292.

11 1545년(명종 즉위) 윤원형 일파 소윤(小尹)이 윤임 일파 대윤(大尹)을 숙청하면서 사림(士林)이 크게 화(禍)를 입
 은 사건이다. 이때 북창의 부친 정순붕은 임백령ㆍ정언각과 함께 흉계를 꾸며 을사사화를 일으킨 공로로 우의정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사후 선조 때 이르면 벼슬이 추탈되고 공훈도 삭제된다.

12 그의 묘소는 생시에 그가 집안의 장지(葬地)로 친히 잡아두었던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산록의 온양 정씨 선영(先塋) 하에 자리하고 있다.

13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도서(道書)이자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창작된 최초의 도서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은 한국 도교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정렴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의 선도 수행자들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용호비결(龍虎泌訣)』의 정기신(精氣神)론은 조선의 의학사상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정재서, 『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p.268)

14 한국도교사상연구회, 『도교사상의 한국적 전개』, 아세아문화사, 1989, p.153.

15 『근사록』 「爲學」 朋友講習 更莫如相觀而善工夫多 (뜻을 같이 하는 벗들과는 강습하는 것보다 서로 좋은 점을 관찰하여 좋은 쪽으로 나아가는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이 더 낫다)

16 「高大新聞」(1983년 5월 10, 17일) - 공부(工夫)의 참뜻 참고.

17 수도(修道)는 공부(工夫)와 수련(修鍊)과 평일기도(平日祈禱)와 주일기도(主日祈禱)로 구분(區分)한다. 공부(工夫) : 일정한 장소에서 지정된 방법(方法)으로 지정된 시간(時間)에 주문(呪文)을 송독한다. (『大巡眞理會要覽』, p.18)

18 우리 종단의 기본사업은 포덕ㆍ교화ㆍ수도 공부로 분류하며, 성ㆍ경ㆍ신을 다하여 목적달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 나가도록 하라.(『大巡指針』, p.97)

19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 (교법 1장 2절)

20 공사 1장 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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