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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 도주님의 숨결이 어려 있는안면도를 다녀와서
도주님의 숨결이 어려 있는안면도를 다녀와서
며칠 전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나의 옷차림을 두껍게 했지만 도주님께서 거(居)하셨던 안면도(安眠島)를 답사한다는 기대감은 날씨보다도 훨씬 강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이른 아침 서둘러 준비를 하고 차에 몸을 실었다. 3시간의 시간은 나를 안면도로 안내했고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서해바다의 비릿한 짠내음이 나를 반겼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겨우내 움츠려 있던 묵은 숨들을 몸 밖으로 토해내자, 가슴까지 펑 뚫리는 상쾌함이 발걸음조차 가볍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도주께서 정사년 四월에 친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를 떠나 뱃길로 태인으로 향하셨던바 도중에 폭풍을 맞아 배는 서산 태안에 닿으니라. 이곳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으되 상제께서 가르치신 곳이 아닌 듯하여 안면도(安眠島)에 옮기셨도다. 도주님을 반가이 맞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이곳 창기리(倉基里)의 이 정률(李正律)이었도다. 도주께서 이 섬의 정당리(正當里) 느락골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섬사람 三十여 명이 도주를 좇으니 그중에서 이 정률(李正律)이 지극히 따랐도다. (교운 2장 9절)
도주께서 무오년 가을에 재실에서 공부하실 때 상제께 치성을 올리신 다음에 이 정률외 두 사람을 앞세우고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에 이르셨도다. 이 길은 상제께서 九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좇은 것이라 하시도다. (교운 2장 10절)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 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三百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 그러나 두 섬의 네 곳에서 뜻을 이룩하고자 하셨으되 심한 풍랑으로 두 곳은 뜻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 후 일본(日本) 마상 회사(馬上會社)가 성과를 거두게 되었도다. 안면도의 二十만 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鹽田)은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도다. 도주께서 제민 사업을 돕는 한편 안면도 창기리에 있는 재실 홍일우(洪一宇)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이때에 서산읍의 사람 이 동만(李東萬)이 도주를 가까이 모셨도다. (교운 2장 35절)
이와 같이 대순진리회에서 도주님과 관련된 곳으로 안면도의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설레는 마음으로 도주님의 발자취를 상상하며 한발 한발 내디뎌 보았다.
맨 처음 향한 곳은 도주님께서 무극도 당시에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을 통하여 뜻을 이루신 참새골 방조제01이다. 참새골 방조제가 있는 이곳 창기리는 본래 서산군 안면소 지역으로서 조선 시대에 조창(漕倉, 조세창고)이 있어 창터 또는 창기(倉基)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포리를 병합하여 창기리라 해서 서산군 안면읍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0년에 안면면이 안면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에 안면읍이 태안군의 관할지역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전경은 십여 채의 집이 조그마한 산자락 사이로 형성되어 조용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사람의 방문에 놀란 개와 거위만이 반갑게 맞았다. 논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10여 분 정도 가다 보면 방조제를 통해서 형성된 논을 볼 수 있다. 멀리 보이는 방조제가 나의 발걸음을 재촉했고 서둘러 도착한 참새골 방조제가 늠름하게 바다를 가로막고 있었다.
『전경』 교운 2장 35절의 내용에 보면,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이곳을 개척하신 것으로 나온다. 쓸모가 적었던 간사지를 막아 농토로 개간함으로써 토지를 해원함과 동시에 그 땅을 이용하여 제민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 뜻을 이루고자 크레인과 같은 중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맨몸으로 돌을 날라 400m 길이의 바다를 막았다는 것에 무극도 당시 수도인들의 성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지 주민의 말에 따르면 당시 외지인들(무극도인)에 의하여 진행되었는데 지게로 돌과 흙을 날랐다고 한다. 또한, 용변을 본 것이 우마(牛馬)의 변처럼 바람이 불면 날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사력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분들의 노력의 결과로 안면도 여러 마을 사람들이 구제될 수 있었고 현재도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가 형성되어 그 혜택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는 기존의 방죽 앞으로 새롭게 석축을 쌓아놓았다. 원래 이곳은 갯벌 지역으로 윗 골짜기에서 찬 샘물이 많이 흘러나와 벼농사를 짓기에는 물의 온도가 너무 낮아 ‘찬샘골’이라 불렀고, 세월이 흐르면서 찬샘골의 발음이 변하여 ‘참새골’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에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아직도 ‘찬샘골’로 부르고 계셨다. 방조제를 막아 간사지를 개간해도 물이 없다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을 텐데 이곳의 특성을 잘 아신 도주님의 혜안에 고개가 숙여질 뿐이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이 김제 방조제03이다. 김제마을에 도착하여 봄철 밭이랑을 일구고 계시는 분들의 바쁜 손길을 뒤로하고 10여 분을 걸어갔다. 작은 능선을 넘자 눈앞에 넓게 펼쳐진 농지가 보였다. 이곳은 창기리의 창기저수지 옆 간척지로 약 400m의 길이로 돌을 쌓아 방죽을 만들어서 약 십삼만 평(43정보)을 간척하신 곳이다. 물론 참새골 방조제와 같은 길이의 방조제이지만 훨씬 너른 땅의 농지를 간척하는 만큼 물살이 거세어서 지연되던 중 일본 마상 회사가 강탈하여 성과를 거둔 곳이기도 하다. 당시 무극도 수도인들이 흘린 땀이 직접적인 성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결국 마상 회사를 통해서 성과를 거두었으니 이곳 김제 방조제의 곳곳에는 그들의 노력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 농지를 통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고 있으니 그들이 이러한 노력을 모르고 있어도 거친 파도와 풍랑을 맞으면서 방조제를 세우고자 했던 그 당시 수도인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고 본다.
다음 목적지인 쇠섬04을 향했다. 쇠섬은 다른 말로 철도(鐵島)라고 부르는 안면도의 작은 섬이다. 일제시대에 채석장으로 안면도 간척사업 시 제방을 쌓을 돌은 이곳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가 개통되고 섬 전체가 휴양지로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약 500m의 거리를 배로 돌을 실어 날랐다고 했다. 채석 당시 청석 같은 단단한 돌이 많이 나왔으며 지금도 채석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잠시 쇠섬의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당시 도주님과 많은 수도인들이 흘렸을 노력을 생각해 보니 현재 내 자신 수도의 부족이 부끄러웠다.
01 소재지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1440∼1448번지’이다. 02 『전경』 교운 2장 35절에 나오는 마상 회사(馬上會社)는 마생상점(麻生商店)을 말하는 것으로 아소타로(麻生太郞, 자민당 2008∼2009) 수상의 증조부인 ‘아소타키치(麻生太吉)’가 탄광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기업체이다. ( http://www16.ocn.ne.jp/~pacohama/kyosei/2asou.html 참조) 03 소재지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1507∼1532번지(김제마을 창기저수지 앞 방조제)’이다. 04 현재는 ‘나문재 펜션’이 들어서 있다. 05 소재지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창기리 ○○’이다. 06 소재지는 ‘충남 태안군 안면읍 정당리 184번지’(안면암 입구 좌측 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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