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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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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울지마 톤즈”를 보고

 

 

금릉3-2 방면 교감 문정철


  화려한 볼거리와 웅장한 스케일, 그리고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로 가득 찬 오락 상업적인 영화가 판치고 있는 요즘,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놀라운 가상 세계를 만들거나 상상의 세계를 그리지도 않고 멋지고 아름다운 유명배우들이 나오지도 않지만 진한 감동을 전하는 영화가 있다.
  메마른 땅을 울린 故 이태석 신부의 기적 같은 사랑을 담은 “울지마 톤즈”. 이 영화는 지난 2010년 4월 방송된 “KBS스페셜 - 수단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 울지마 톤즈”를 영화로 재편집한 것으로, 2010년 1월 암으로 별세한 故 이태석 신부의 수단에서 봉사활동 등을 다룬 영화다.
  2010년 9월 개봉한 이래 40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이 영화가 선사하는 진심에 감명 받은 관객들의 눈물을 훔치는 동시에 진정한 봉사와 사랑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종교 다큐멘터리 사상 최고의 관객 스코어를 기록하게 되었다.
  “울지마 톤즈”는 개봉 초에는 이 신부를 기억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주 관객층이었으나 점차 관객들의 입소문이 이어져 일반 관객들까지도 스크린 앞으로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단체 관람도 줄을 이어 정부와 지자체 및 기업들도 교육의 목적으로 단체로 관람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도 개신교와 천도교인 등 이웃 종교인들과 함께 이 영화를 관람하였는데, “불교에서 지향하는 이타행(利他行)과 하화중생(下化衆生: 아래로 중생을 제도한다)을 천주교 신부님께서 구현했습니다. 종무원 스님 몇 명이 개종하더라도 이런 스님과 불자들이 나온다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성불하십시오.”라는 스님의 말과 같이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영화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교육계 및 의료계에서도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2010년 12월 서울 시내 중학교 교장·교감 등 교직원 240여 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고, 학교별로 단체 관람이 계속 늘고 있다. 또한, 직장교육 목적으로 정부중앙청사 별관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교육과학기술부 직원들의 눈물샘을 터트려 마르지 않게 했다.
  “복지부 공무원들이 반드시 봐야 할 영화예요. 상영하는 곳이 많지 않아 아예 필름을 빌려서 단체로 관람할 방법을 찾아보도록 지시했어요.” 최근 영화를 보고 감동한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은 전 직원이 영화를 관람할 계획을 세웠다.
  의료계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의료가 복지보다는 산업 측면이 드러나면서 의사도 수익을 올리는 경제인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의 봉사와 헌신을 보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의사 본연의 임무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원장은 “의대에 입학할 때 가졌던 사명감을 세월이 흐르면서 잊고들 살았다.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고 또 각성도 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영화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이 신부는 1962년 부산광역시의 산동네에서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어머니가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해서 아이들을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성당에서 다미앵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그런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또한, 성당에서 배운 음악적 재능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한 가닥 희망이었고, 훗날 톤즈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힘이 되었다.
  198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장래가 보장된 의사의 길을 버리고 사제가 되기로 한다. 군 복무를 마친 뒤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했다. 1992년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이때 한 케냐 신부의 권유로 아프리카로 자원봉사를 떠나게 된다. 이때 처음 배정받은 곳인 케냐가 마음에 안 들었던 이태석은 수단 남부에 있는 톤즈로 재 배정받는다. 이곳에서 그는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처음 만나게 된다. 2001년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파견을 자청하여 그에게 봉사를 권유했던 신부마저 놀라게 한다.
  수단은 북부와 남부로 갈라져 있는데 북부에는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계의 부족이 살고 있으며, 남부에는 각각 독특한 언어와 신앙을 가진 다양한 인종과 아프리카 토착 부족이 살고 있어 남북 간에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또 북부에서는 농업이 비교적 발달해 있고 남부는 미개발 상태인데, 이 때문에 남북 주민 간의 대립은 심각한 문제로 되어 있다. 톤즈는 남부 수단 와랍주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도시였지만, 전쟁으로 인구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북부 수단과 남부 수단 사이의 오랜 내전으로 도시는 폐허가 되고 주민은 주변 각지로 흩어졌다.
  톤즈에서 이 신부의 희생과 봉사는 현지인들로부터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할 정도다. 그는 먼저 가난과 질병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와 현지인들 상대로 의료봉사를 펼쳤다. 매년 결핵과 말라리아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데 80여 개 마을을 돌며 예방접종을 한 이 신부의 끈기는 환자 600~700명을 구했다.
  초기에는 움막 같은 진료소에서 환자들을 돌보았으나 환자가 늘어나서 12개의 병실을 갖는 병원을 짓는다.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톤즈강에서 모래를 날라다 병원을 짓는 데 1년이 걸렸다. 의사는 이 신부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혹은 며칠을 걸어서 온 환자가 하루에 보통 200~300명이었다. 그는 또한 버려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신체 일부가 훼손된 발을 그린 뒤 환자 개개인을 위한 ‘맞춤 신발’을 제작해 신겨주기도 한다. 손과 다리에 상처가 났지만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도 고름을 짜고 붕대를 감고 정성을 다해 치료해 준다. 현지인들은 그를 John Lee(졸리) 신부라고 부르며 따랐다. 전기가 없는 곳이라 백신을 지원받아도 보관할 냉장고가 없어 예방접종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신부는 태양열로 가동되는 냉장고를 설치해 많은 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한센인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라고 한센인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나타낸다.
  이것은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후천에서는 약한 자가 도움을 얻으며 병든 자가 일어나며 천한 자가 높아지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얻을 것이요 강하고 부하고 귀하고 지혜로운 자는 다 스스로 깎일지라”(교법 2장 11절)고 이르신 말씀처럼 병들고 천한 사람을 먼저 구하시려는 상제님의 뜻과도 일치한다 하겠다.
  그는 또한 교육에도 힘을 써 학교를 지어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 사랑을 가르치는 거룩한 학교, 내 집처럼 느껴지는 정이 넘치는 그런 학교 말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건물을 보수하고 지붕을 올려 교실을 만들어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진 아이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가르친다. 톤즈에서는 처음으로 12년 과정의 정규학교가 세워진다. 기숙사도 지었는데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이다. 아이들이 학교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2005년 드디어 수단 남북 간의 내전이 평화협정으로 끝나자 이태석 신부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학교에서 35인조 밴드인 ‘브라스 밴드’를 만든 것이다. 트롬본과 트럼펫 등 악기 하나하나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풍금을 혼자 깨칠 만큼 음악적 재능이 높았던 이 신부는 악기를 혼자 배우고 잠자는 시간을 아껴 악보를 썼다. 단복도 한국에서 가져왔다. 남수단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브라스 밴드의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수십 년의 내전으로 얼룩진 총성 대신 클라리넷과 플루트 그리고 트럼펫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처음으로 울려 퍼진 것이다. 음악은 신부가 아이들에게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음악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총’과 ‘칼’을 녹여서 ‘악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브라스 밴드는 그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악기를 빨리 배우고 싶은 아이에게 착한 마음부터 배우라고 했다.
  이는 “너희들이 항상 도술을 배우기를 원하나 지금 가르쳐 주어도 그것은 바위에 물주기와 같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흘러가니라. 필요할 때가 되면 열어주리니 마음을 부지런히 하여 힘쓸지니라.”(교법 2장 12절)라는 상제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음악을 가르치면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씨앗을 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톤즈의 주민과 아이들은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들으며 갈등과 혼란을 뒤로하고 새로운 희망에 더욱 부풀어 오른다. 한 사람의 헌신이 기적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톤즈의 성자 이태석 신부는 2008년 휴가차 들른 한국에서 지인들의 권유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말기 암 선고를 받았다.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로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고쳤던 졸리 신부는 정작 자신의 몸속에 퍼진 암 덩어리는 알지 못했다. 그는 암 선고를 받고 일주일 뒤에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수단어린이 작은 음악회’를 열어 교실을 늘릴 후원금을 모은다. 또한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도 톤즈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책 “친구가 되어주실래요”도 집필한다. 그러나 2010년 1월 14일 끝내 그는 생을 마감한다. 그토록 가 보고 싶었던 톤즈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브라스밴드가 장식한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이 신부를 떠나보낸 톤즈의 아이들이 서툰 한국말로 흐느끼며 부르던 대중가요의 노랫가락이 엄숙한 진혼곡(鎭魂曲)처럼 흐른다.
  그는 재리(財利)에 빠진 사람들의 욕망을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주인이 되기만을 원할 뿐 행동의 주인이기를 꺼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우리 행동의 참주인이 된다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지 않을까 싶다. 재물을 조금만 덜 챙기고 이웃을 조금만 더 챙겨주려고 노력하다 보면 행동의 참 주인이 되지 않을까?”
  비록 그가 갔던 길이 천주교 사제로서 우리 수도인들의 길과는 차이가 있더라도 그의 희생과 봉사의 정신은 본보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성경 구절처럼, 그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하며 섬기라는 예수의 박애 정신을 그대로 실천해 나간 것이다.
  도전님께서 “훈회와 수칙을 생활화하라”는 말씀으로 수도인들의 수도자세를 가르치셨다. 특히 “남을 잘되게 하라.”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남을 잘 되게 함은 상생대도(相生大道)의 기본원리요 구제창생(救濟蒼生)의 근본이념(根本理念)이라. 남을 위해서는 수고를 아끼지 말고, 성사(成事)에는 타인과의 힘을 합하여야 된다는 정신을 가져 협동생활에 일치(一致) 협력이 되게하라.”
  이 신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향기가 진한 여운을 남기며 내 가슴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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