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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우리 놀이의 문화사 : 날카롭게 비상하는 세계문화유산, 매사냥

날카롭게 비상하는 세계문화유산, 매사냥

 

 

글 유승훈

 

 

 

 

 

⊙ 매사냥,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지난 2010년 11월 16일은 인류 역사에서 주춤했던 매사냥이 다시 전기(轉機)를 맞이한 날이다. 한국의 매사냥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이번 매사냥의 등재는  더욱 뜻 깊은 의미를 가진다. 한국뿐만 아니라 벨기에, 프랑스, 몽골 등 11개국의 매사냥이 공동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건은 국제적 협력이 돋보이는 사례로서 매사냥은 진정 세계를 아우르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11개국의 지정에서 알 수 있듯이, 매사냥은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냥술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사냥은 일반 사냥과는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매사냥은 야생의 맹금류를 이용하여 날짐승과 길짐승을 잡는 방법이다. 짐승을 바로 잡는 ‘직접 사냥’이 아닌 매를 이용하여 짐승을 잡는 ‘간접 사냥’인 것이다. 매의 조련술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요, 사냥꾼들이 유별난 재미와 유혹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지역에서 매사냥은 남자들의 으뜸가는 놀이였다. 매사냥은 도박처럼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놀이였다. 민간에서는 매사냥에 빠지면 ‘삼뜯기’가 된다는 말이 있다. ‘삼뜯기’는 매사냥의 중독성을 풍자한 말이다. 하나는 매가 꿩을 뜯는 것이요, 둘째는 남편이 나무를 해오지 않아서 부인이 울타리를 뜯는다는 것이요, 셋째는 매사냥을 나간 남자가 수풀을 헤치며 다니다가 가시나무에 옷을 뜯긴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의 제 26대 진평왕과 고려의 제25대 왕인 충렬왕은 매사냥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한 인물로 잘 알려졌다.


 

 

▲ 맹응도 <사진제공: 경기대학교 박물관 소장>

 

 

⊙ 떴다 봐라 해동청 보라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매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사냥꾼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중국의 황제들이 자꾸 매를 요구하여 이를 두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세종 10년(1428) 강직한 심성을 가진 정흠지(鄭欽之)가 참지 못하고 세종에게 아뢰었다. ‘해청(海靑)은 포획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백성들의 소요(騷擾)가 더할 나위 없이 심합니다. 3마리를 이미 바쳤사오니 2마리는 바치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나 세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미 황제를 위하여 잡았으니 즉시 바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미안하다. 또한 황제가 전일에 말한 해청을 어찌하여 바치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무슨 말로 대비할 것인가’(『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명나라의 선종(宣宗)은 집요하게 우리나라의 매를 요구했다. 세종은 매로 인하여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의 큰 틀이 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해청은 무엇일까? 해청은 우리나라 사냥매인 해동청(海東靑)을 일컫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민요인 ‘남한산성’에서도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라는 가사가 있다. 우리나라의 매가 워낙 유명하고, 매사냥이 유행한 탓에 매를 부르는 용어도 다양해진 것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는 우리나라 매의 종류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저서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는 지방 풍속에서 부르는 매의 뜻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당년(當年)에 깬 매로 길들인 것을 ‘보라매(甫羅鷹)’라 한다. 보라(甫羅)라는 것은 방언(方言)으로 담홍색(淡紅色)을 말하는 것인데 매의 깃털 빛깔이 엷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산에서 여러 해를 산 것은 ‘산진(山陳)’이라 하고 집에서 여러 해 기른 것은 ‘수진(手陳)’이라 한다. 그리고 매 중에 가장 뛰어나고 털빛이 흰 것을 ‘송골(松骨)’이라 하고 털빛이 푸른 것을 ‘해동청(海東靑)’이라 한다.” 
  보라매는 알에서 깬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매이며, 수진이는 집에서 여러 해를 기른 매이다. 해동청은 푸른빛이 나는 털을 가진 매이다. 이덕무는 털빛이 흰 송골이 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사냥매로서는 이 송골을 따라잡을 매가 없었다. 실학의 토대를 마련한 성호 이익(李瀷)은 마을 사람들이 송골매 한 마리를 길렀는데 이 놈이 꿩사냥을 나가면 백발백중으로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았으며, 빠르기가 큰 매보다 갑절이나 나았다고 하였다. 이 송골매를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뛰어난 사냥매를 통틀어 ‘해동청’이라 부를 때도 있다.

 

 

⊙ 응방을 설립한 충렬왕
  해동청의 명성이 자자한 탓에 고려 시대에는 매를 다루는 관청까지 설치되었다. 바로 응방(鷹坊)이다. 응방은 매를 잡아서 기르고 훈련시키는 관청이었다. 응방은 수도인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의 역(驛)를 비롯하여 외군(外郡)에도 설치되었다. 응방은 전국적인 하부 기관을 둔 거대한 조직이었던 것이다. 응방 설립의 가장 큰 목적은 중국에 매를 바치는 일이었다. 고려가 원나라에 무릎을 꿇은 이후로 원 황제는 고려에 매를 진상할 것을 요구하였다.
  응방은 충렬왕 원년(1275)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충렬왕은 처음으로 원나라의 사위가 된 왕이다. 이때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하였으며, 원 황제의 입김으로 고려의 조정이 좌우되었다. 왕권의 기반이 약했던 충렬왕은 원 황제인 세조의 지지가 필요하였기에 원나라의 요구를 거의 들어줘야 했다. 공녀(貢女), 환관(宦官), 해동청 등 사람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원나라에 끌려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충렬왕(忠烈王)은 스스로 매사냥을 즐겼던 인물이었다. 충렬왕은 수시로 마제산이나 도라산으로 사냥을 떠났다. 사냥을 할 때에는 매와 개가 동원되었고, 밭과 산에 불을 지르는 일도 있었다. 임금의 사냥은 대규모의 인력과 경비가 드는 국가 행사였다. 이러한 경제적 손실을 백성들이 져야 했으니 이들의 원성은 말도 못하였다. 그래서 충렬왕의 아들이었던 충선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부친의 사냥 중독을 막으려 했지만 ‘저 애가 왜 그러느냐?’는 싸늘한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고려의 응방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응방의 폐단은 많았지만 중국의 요청은 계속되었고, 조선의 왕들도 매사냥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응방은 뼈아픈 조공과 패권의 역사를 반영하지만 한편으로는 매사냥이 우리나라의 곳곳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매를 사육시키고 사냥하는 기술이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으로 발전한 것도 바로 이 응방 때문이었다.


 

⊙ 잠 안 재우기의 비밀은
  그렇다면 사납고 날쌔기로 유명한 야생 매를 어떻게 잡아서 조련시키는가? 오희문(吳希文)이 쓴 『쇄미록』이란 일기를 보면 재미있는 매사냥 기사가 많이 적혀 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로 피난을 갔는데 그 곳에서 접한 매사냥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그 예를 하나 살펴보자. “김업산이 큰 매를 길들이다가 도로 가져왔다.… 김업산이란 자가 밤에 길들이지 못하고 다만 등유만을 허비하고 스스로 매를 가져왔으니 매우 원통스럽다.” 오희문은 매사냥꾼인 김업산에게 등유, 먹이를 비롯하여 떡과 술까지 제공하였으나 매 조련에 실패한 것이다.
  등유를 준 이유는 밤새 매 옆에 불을 켜두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어린 매를 잡아서 잠 고문을 하는 까닭은 사람 얼굴을 빨리 익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환히 불을 밝혀두고 사람들이 교대로 매에게 얼굴을 보여준다. 그래야지 야생의 본색을 점차 털어버리고 집짐승의 성격을 갖는다. 이를 위해 오희문이 귀한 등유를 밤새 소진하였으나 매를 길들이지 못하였으니 원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김업산은 큰 매를 상하게까지 하여 옥에 갇히고 곤장까지 맞는 처지가 되었다.
  매가 어느 정도 사람에게 익숙해지면 본격적인 사냥 훈련에 들어간다. 매의 다리를 가죽끈으로 붙들어 맨 뒤에 꿩을 날려 쫓아가게 해보는 것이다. 이를 ‘줄밥을 먹인다’라고 표현한다. 이 훈련을 반복하다 매가 꿩을 낚아챌 줄을 알게 되면 방울을 달고 실전에 나서게 된다. 사냥에 나서기 전에는 혹독하게 매의 위를 청소한다. 배가 고파야 꿩을 사냥하기 때문이다. 꿩고기에 목화씨를 섞어서 먹이면 음식물을 토하면서 위 속 기름기가 전부 사라진다. 비로소 굶주린 매는 꿩에게 달려들 전의로 불타오르게 된다.

 

 

 

⊙ 매사냥을 나가자

  매사냥은 겨울에 시작해서 음력 2월까지 주로 한다. 매사냥을 나갈 때는 봉꾼, 보꾼, 털이꾼이 한 조가 되어 같이 한다. 봉꾼은 매를 들고 있는 사람, 보꾼은 망을 보는 사람, 털이꾼은 몰이하는 사람이다. 봉꾼은 매를 데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 본다. 털이꾼은 개를 데리고 사방을 두드리고 다니면서 꿩이 날아오르게 한다. 꿩이 날아오르는 동시에 매의 추격전이 시작된다. 보꾼들은 매가 꿩을 채서 떨어지는 장소를 유심히 살핀다. 빨리 달려가서 매를 떼어놓지 않으면 포식한 매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매는 꿩을 잡은 뒤에 눈을 공격하고, 다시 골을 쫀다. 이때 성급히 꿩을 뺏어버리면 매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골을 파먹을 수 있게 한 뒤에 조심스럽게 꿩을 떼어내야 한다. 이렇게 꿩 골을 먹이는 것을 ‘골 단장시킨다’라고 한다.
  매사냥은 남성들의 놀이임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고 금기가 까다롭다. 매를 ‘영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물을 놓아 매를 포획할 때도 ‘잡는다’가 아닌 ‘받는다’라고 한다. 매사냥을 나갈 때는 초상집에도 가지 않아야 한다. 매가 꿩을 사냥한 뒤에는 꿩의 꼬리를 묻고 간단히 고사를 지낸다. 혹 매가 죽으면 삼베로 잘 싼 뒤에 땅에 고이 묻어준다.
  매는 짐승을 사냥할 뿐만 아니라 재앙도 잡아서 물리쳤다. 예로부터 삼재가 들어왔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은 삼두일족(三頭一足)의 매 부적을 부치는 일이었다. 매의 그림은 산 여우를 도망가게 할 정도로 효과 있는 액막이용이었다. 이처럼 우리 문화 상징으로 굳게 자리 잡은 매가 이제는 세계문화유산 ‘매사냥’을 통하여 세계로 널리 그리고 높게 비상하기를 기대해본다.

 

 

 


*  필자소개
유승훈 : 경희대,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고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청 문화재과 학예연구사를 지냈고, 현재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역사 민속학의 관점에서 한국인의 민중 생활사와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우리나라 제염업과 소금 민속』(학술원 선정 우수학술도서),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우리 놀이의 문화사) 등 여러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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