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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1년(2011)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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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속 역사인물 : 허미수

허미수

 

 

글 교무부

 

 

 

 

<병중에 짓다>                                      病中作

 

한평생 옛사람의 글 읽으며 살다 보니      說讀古人書
어느새 나이 벌써 여든 살이 넘었구나      行年八十餘
하는 일 무엇 하나 뜻과 같지 않으니        所爲百無如
옹졸하고 편벽됨이 나 같은 이 없으리라   拙黨無如余

느낌이 있을진댄 응함도 있게 마련          有感必有應
이 이치 본래부터 허황되지 않다네          此理本不虛
은나라 사람들은 귀신 엄히 섬겼으니       殷人嚴鬼神
귀신이 어찌 나를 속일 리 있겠는가         鬼神豈欺余

 

 

  위의 글은 미수 허목이 88세(1682)되던 해 4월, 운명하기 며칠 전에 지은 시이다. 이 시에서 허목은 평생 옛사람의 글을 읽었지만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음을 겸허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반대로 옛사람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도 나타내고 있다.

 

 

1. 생애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은 『전경』에서 두 구절에 나타난다. 하나는 평안남도 성천군에 있는 고려시대 누각인 동명관(東明館) 부속 건물이었던 강선루(降仙樓)를 중수한 인물로, 금강산의 겁기를 제거하는 공사에 나온다.[공사 2장 13절] 다른 하나는 상제님께서 동곡 마을에 사는 김사명의 아들 김성옥이 급병으로 죽게 되어 제생(濟生)의 의법(醫法)을 베푸실 때 “ 시켜 우암(尤庵)을 불러라”고 외치는 말씀 속에 등장한다.[제생 9절]
  허목은 선조 28년(1595) 서울 창선방(彰善坊, 현재 종로구)에서 아버지 허교(許喬)와 어머니 나주 임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허목은 자신이 지은 문집인 『기언(記言)』자서(自序)에 ‘文’ 자 무늬가 손바닥에 있으므로 자(字)를 ‘문보(文父)’라 했으며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로 지었다고 한다. 이밖에 대령노인(台嶺老人), 석호노인(石戶老人) 등의 여러 호를 가졌다. 허목의 본관은 양천(陽川, 현재 서울시 강서구)으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비 허황후의 후예가 된다.
  아버지 허교는 경남ㆍ경북ㆍ경기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분으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인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花)의 제자이다. 어머니 임씨는 선조(宣祖) 때의 문신인 ‘백호(白湖) 임제(林悌)’01의 딸이다. 허목은 19세(1613)에 영의정을 지낸 청백리(淸白吏)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와 혼인하게 된다. 허목은 어려서부터 7년 연상의 종형(從兄: 사촌형)인 허후(許厚)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21세(1615)에  정언눌(鄭彦訥)’02로부터 『예기(禮記)』 「단궁(檀弓)」편을 배운다. 23세(1617)에 아버지의 부임지인 경남 거창으로 갔다가, 사촌형 허후(許厚)와 함께 경북 성주의 ‘한강(寒岡) 정구(鄭逑)’03 선생을 찾아가 스승으로 섬긴다. 정구는 그 당시 영남 예학(禮學)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하였는데, 허목은 정구로부터 3년간 가르침을 받고 선생의 고족제자(高足弟子: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제자)가 된다.

 

 


  32세(1626)에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啓運宮)’04의 초상이 나자, 서인(西人)에 속해 있던 박지계(朴知誡)가 계운궁을 왕후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 사후에 존호를 올림)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05 허목은 당시에 ‘동학(東學)의 재임(齋任)’06으로 있었는데, 이러한 추숭 의논은 군주에게 영합하여 예를 어지럽히는 짓이라 하여 박지계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이 사건이 문제가 되어 허목은 과거정지령[停擧]을 받아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그 후 과거정지령이 풀렸지만, 허목은 과거에 대한 뜻을 버리고 경기도 광주의 자봉산(紫峯山)을 중심으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허목이 조선 도교수련 인물들의 도맥(道脈)과 행적을 기록한 『청사열전(淸士列傳)』이란 책을 저술한 것도 이러한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의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정지령이 발생한지 24년 후, 56세(1650)인 효종 1년에 ‘정릉참봉(靖陵參奉)’07을 제수(除授: 천거에 의하지 않고 왕이 직접 벼슬을 내림)받았으나 사직하고, 이듬해 ‘내시교관(內侍敎官)’08으로 처음 관직에 진출한다. 65세(1659)에 효종이 승하하자, 현종 1년(1660)에 인조의 계비(繼妃)이자 효종의 계모(繼母)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의 복상(服喪)문제로 제1차 예송논쟁(禮訟論爭)이 일어난다.09 당시 집권층인 서인(西人) 송시열ㆍ송준길 등은 효종이 차남이었으므로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기년설(朞年說: 1년설)로 주장한 반면, 남인(南人)에 속하였던 허목은 윤휴ㆍ윤선도와 함께 효종이 차남이지만 왕통을 이었으므로 장남의 자격에 해당하는 복상기간인 3년설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서인들에게 패배한 후 삼척부사로 좌천된다. 삼척부사로 2년간 재임하는 동안 향약(鄕約)으로 지방교화에 힘쓰고 「동해송(東海頌)」10과 『척주지(陟州誌)』를 지었으며, 풍랑과 해일이 심한 삼척 지방의 바닷가에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11를 세우면서 조수와 해일이 멈췄다고 한다.

  현종 15년(1674)에 효종비가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거론되면서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송시열 등 서인들의 대공설(大功說: 9개월설)이 채택되지 않고, 남인들의 기년설(朞年說: 1년설)이 받아들여져서 남인이 집권하게 되고 허목은 대사헌(大司憲)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는다. 이해에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81세(1675)에 성균관 좨주(祭酒)ㆍ이조참판ㆍ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숙종으로부터 ‘’12을 하사받고 3년 후에는 ‘은거당(恩居堂)’이라는 사택(賜宅)을 하사받는다. 

 

 


  84세(1678)에 유배 중이던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영의정 허적(許積)과 대립하며, 허목은 서인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자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 청남(淸南)의 영수(領首)가 된다.13 다음해 영의정 허적의 권력 남용과 탐학(貪虐)을 탄핵한 후 고향인 연천(漣川)으로 낙향하였고, 숙종 6년(1680)에 허적 등 남인들이 실각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는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관작을 삭출당하고, 88세(1682)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 14년(1688)에 관작이 복구되고, 숙종 17년(1691) 마전군[현 경기도 연천군]에 사당을 세워 ‘미강서원(嵋江書院)’이라는 사액(賜額: 임금이 사원ㆍ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현판을 내리는 일)을 내리고,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숙종 19년(1693), 나주에 사당을 세워 ‘미천서원(眉泉書院)’이라는 사액을 내린다. 숙종 34년(1708), 창원에 있는 스승 정구(鄭逑)를 모신 ‘회원서원(檜原書院)’에 배향되었다.


 

 

2. 학문과 사상

 

  허목 당시의 조정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계승한 남인과 율곡 이이의 학맥을 계승한 서인의 붕당정치가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대였다. 허목은 젊은 시절에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영남 지방에 거주하면서 퇴계학을 배우게 된다. 영남 지방의 남인들과는 달리 허목의 고향이 경기 지역이므로 서울ㆍ경기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게 되면서, 후대에 와서 근기남인(近畿南人)으로 불리게 된다.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오랜 시간을 보낸 허목의 학문 여정에서는 여러 명의 스승이 있었으며, 학맥은 다소 복합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일반적으로 허목을 퇴계학파로 분류하는데, 그것은 스승인 정구가 퇴계의 제자이고 허목의 성리학도 퇴계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목은 정구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운다. 정구의 예학이 ‘육경(六經)’14에 바탕을 둔 고례(古禮)를 위주로 하였으므로, 허목은 그 영향을 받아 예송논쟁에서 주자의 예학에 기반을 둔 송시열 등 서인에 맞서 남인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구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문인(門人)이기도 하였다. 조식이 강조한 경(敬)과 의(義)는 허목에게서도 강조되고 있으며 허목의 학풍에서 남명학의 영향도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허목의 아버지 허교(許喬)는 화담(花潭)의 문인인 박지화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허목의 사상에는 화담학파에서 강조하는 ‘기철학(氣哲學)’의 요소도 나타나고 있다.
  16세기 후반 조선은 중국 명대(明代)의 학문사조의 영향으로 고학풍(古學風: 秦ㆍ漢代의 문장)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였다. 당시 주자학의 학문 토대인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와 ‘삼경(三經: 『시경』, 『서경』, 『역경』)’ 및 주희(朱熹)가 사서(四書)를 주석한 『사서장구집주 (四書章句集註)』 위주의 학문 분위기가 대세였다. 그 속에서 하ㆍ은ㆍ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유풍(遺風)이 남아 있는 ‘육경(六經)’을 중시한 학풍 및 중국 진한고문(秦漢古文)에 대한 편력과 문장에 관한 허목의 관심 등은 정언눌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서예에서도 허목이 체득한 ‘고전팔분체(古篆八分體)’는 독특한 전서체(篆書體)로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되며, 후대의 추사체(秋史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단군조선을 기술한 자주적인 역사인식이 드러나는 『동사(東事)』라는 역사서를 저술하는데, 여기서 그의 박학(博學)과 고증(考證)을 중시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문집인 『기언(記言)』에 천문ㆍ지리ㆍ자연ㆍ동식물ㆍ산천에 관한 백과사전적인 글에서도 나타나며, 백과사전적인 학문 방식은 이후 실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의 이러한 학문 방향은 양란(兩亂: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급격하게 변화하는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대안적인 사유의 등장을 갈망하는 분위기와 관련성을 가진다.
  허목의 학문을 육경고학(六經古學) 위주의 학풍이라고 한다. 그는 주자(朱子) 주소(註疏)의 번잡함과 성리학 이론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배격하고 성인의 도(道)가 명시된 ‘육경(六經)’의 원시유학으로 회귀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17세기 조선 성리학의 폐쇄성과 독단성에 대한 반성이면서 동시에 성리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그는 탈주자학적 경향성을 가진 유학자이며, 이황에서 정구를 거친 영남성리학의 학통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의 수련과 자득(自得)을 통하여 육경고학(六經古學)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학풍을 전개함으로써 서울ㆍ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성립되는 남인실학파[經世致用學派]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조선시대 유학사상사의 주류를 통치중심의 지치주의 유학(至治主義儒學)ㆍ성리학(性理學)ㆍ예학(禮學)ㆍ실학(實學)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허목은 예학의 단계에서 실학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그 전환점을 이룩하였으며, 성호 이익에서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남인들이 실학적인 사조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전경』.
.『대순회보』 70호.
.『국역 기언』 1-8, 한국고전번역원, 2008.
.『한국문집총간-記言』 98-99, 민족문화추진회, 1992.
. 김당택, 『우리한국사』, 푸른역사, 2006.
. 김준석, 『조선후기 정치사상사 연구』, 지식산업사, 2004.
. 김형찬, 「敬畏에서 感應으로:  許穆의 退溪學 계승에 관한 고찰」 『철학』 제98집, 한국철학회, 2009.
. 박진아, 「미수 허목의 황극설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양태진, 『미수 허목선생 소전』, 미수연구회, 2004.
. 윤사순 외, 『허미수의 學ㆍ禮ㆍ思想 논고』, 미수연구회, 1998.
. 이동인, 「17세기 허목의 古學과 春秋災異論」,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 정옥자, 「미수 허목연구: 그의 문학관을 중심으로」 『한국사론』 제5집, 1979.
. 정호훈, 『조선후기 정치사상 연구』, 혜안, 2004.

 

 

 


01 임제(1549~1587) : 조선 선조 때 시인 겸 문신.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으며 동서분당(東西分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명산을 찾아다니며 여생을 보내다 요절하였다. 

02 정언눌(1549~1627) : 조선시대 과거시험인 생원진사시의 합격자 명부인 『사마방목(司馬榜目)』과 『지봉유설(芝峯類說)』, 『성호사설(星湖僿說)』 등에는 ‘정언눌(鄭彦訥)’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허목이 지은 『기언(記言)』과 그것을 번역한 『국역 기언』에는 ‘눌(訥)’자 대신에 ‘옹(穴+言)’으로 적고 있는데, 이런 글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정언눌’이 옳을 듯하다. (이동린, 「17세기 許穆의 古學과 春秋災異論」,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p.13)

03 정구(1543~1620) : 조선 광해군 때의 성리학자. 이황과 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경학(經學)ㆍ산수(算數)ㆍ의약(醫藥)ㆍ풍수(風水) 등에 능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성리학과 예학은 전통적인 영남학풍을 계승하였다. 그의 사상 가운데 국가나 사회를 올바르게 경영하기 위한 경세론(經世論) 분야는 허목 등 근기남인(近畿南人)에 속한 학자에게 계승되어, 이익(李瀷)ㆍ안정복(安鼎福)ㆍ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서 더욱 발전되었다.

04 계운궁 : 인조(仁祖)의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를 말한다.

05 광해군의 뒤를 이어 반정(反正)으로 왕이 된 인조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의 소생인 정원군(定遠君)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왕위계승에서 선조와 인조를 이어주는 아버지대 자리가 비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인조는 친부모인 정원군을 원종(元宗)에 추숭(追崇)하여 종묘에서 제사지낼 수 있게 함으로써,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혈통보다는 주자학적인 명분론을 앞세운 김장생ㆍ장현광 등은, 인조가 선조의 왕위를 계승한 것이 되니 할아버지인 선조를 아버지로 불러야 하고 아버지인 정원군은 백숙부(伯叔父)로 불러야 한다고 인조와는 반대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왕실 예의 특수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한편 인조와 이귀ㆍ최명길 등 공신들은 친자관계를 그대로 인정하여 정원군을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정공신들은 인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이 반정의 명분을 강화하는 길이었기에 이를 지지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예학적인 이론과 근거는 박지계와 그의 문인들이 제공했다. 여기에 반대한 사림들은 박지계를 왕의 뜻에 영합한 인물로 매도하는 등 완강하게 저항했다. 계운궁의 초상이 난 6년 후, 인조와 공신세력은 정원군을 원종으로, 계운궁을 인헌왕후로 추숭을 단행하였다. (김당택, 『우리한국사』, 푸른역사, 2006, pp.249~250 참조)

06 조선시대 수도 한양의 중등 교육기관은 네 곳이었는데, 중학(中學)ㆍ동학(東學)ㆍ남학(南學)ㆍ서학(西學)이며 사학(四學)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향교가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하였다면, 사학(四學)은 중앙의 관학으로서 중등교육을 담당하였다. 고등교육 기관인 성균관의 전 단계에 해당한다. 재임(齋任)이란 사학(四學)이나 성균관이나 지방 향교 등에서 숙식하는 유생으로서 그 안의 일을 맡아보던 임원을 말한다. (문화원형백과사전 참조)

07 조선시대에 능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9품 벼슬.

08 조선시대에 궁중의 내시를 가르치는 종9품 벼슬.
09 예송논쟁은 표면적으로는 나이 어린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서인과 남인이 가지고 있는 주자학에 대한 학문적 입장 차이, 왕실의 예와 사대부의 예를 같이 적용시킬 것인가 다르게 적용시킬 것인가에 대한 예학의 입장 차이, 서인과 남인의 권력 투쟁의 정치적인 입장 등이 이면에 깔려 있는 복잡한 문제였다. 효종은 차남으로 왕이 되었으므로, 효종 사후 장남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해야 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상례(喪禮)에 대한 해석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 달리 표현하면, 서인들은 왕권견제의 입장이라면 허목 등 남인들은 왕권강화의 입장에 있었다. 그 당시 예(禮)에 대한 논쟁이 이처럼 치열했던 이유는 예란 유학의 이념을 담아 실생활에 적용한 규범과 형식으로, 개인과 사회를 하나로 묶는 중심 사상이며 국가의 통치수단이었으므로 상례(喪禮)에 대한 논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10 『대순회보』 70호, 「허미수와 송우암의 해원에 관하여」, p.94에 「동해송」이 수록되어 있다.

11 일명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하며, 「동해송(東海頌)」이라는 사언(四言) 고시(古詩) 192자가 새겨져 있다. 기이한 전 서체(篆書體)로 육경(六經)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소 주술적이며 도가적 신비감을 띠고 있다.(양태진, 『미수 허목선생 소전』, 미수연구회, 2004, p.59)

12 임금이 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원로대신에게 하사하던  지팡이. 

13 송시열의 처벌문제에 대해 같은 남인들 가운데 허목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여 청남(淸南)으로 분류하고, 허적은 온건한 처벌을 주장하여 탁남(濁南)으로 분류하고 있다.

14 중국 춘추시대 때 만들어진 유교의 여섯 가지 경전인데,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경(樂經)』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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